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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의 이미지. 

이 부분은 감동적이었다. 윌리엄스의 스케일이나 혼자서 사유하고(는 듯 하고), 홀로 서술하는 것의 거대함이 1부 마지막에 와서, 종합된다. 

사회적 이미지, 즉 '조직을 설명하고 관계를 상상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탐구'라고 하기도 흥미로운데, 윌리엄스 1부의 서술은 이론적(추상적)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료분석도 아닌 그 중간에 낑겨있는 듯한 느낌이다. 4장에서야 동의가 되기 시작하는 것도, 4장에서는 경제 결정론이나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왜 '전체'의 시야를 가져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이것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기나긴 혁명"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시야"이다. 

윌리엄스는 이 장에서는 '역사에서 중요했던 사회의 일반적인 이미지들 몇 가지를 점검하고, 그것이 우리가 현재 관계들에 대해 갖는 생각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며, 사회 변화의 실제 과정에서 그들이 지니는 의미'를 따져보기로 한다. 

4.1  

'우리가 물려받은 지배적인 사회 이미지'로 윌리엄스는 '절대적 질서, 조직된 시장, 엘리트와 대중, 권력 투쟁에서 표현되는 형제애'를 거론한다. 기존 개념으로 환원해보면, '왕정' '자본주의' '대중사회'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선 '절대적 질서'에 관해서는 이 사회의 목적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며, 여기서 사회 이미지는 개개인이 모두 해야 할 역할이 있는 단일한 유기체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특히 영국에서 보존되었는데 (프랑스나 한국과 비교해볼만하다. 영국은 '무혈'인 '명예혁명'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수립이 시작되었다) , 국민국가(영국)은 사회에 대하여, 현존하는 질서에서 출발하여 실제 개개인의 요구를 이에 종속시키는 방식의 사고방식을 강력하게 존속시켰다. (갑자기 케네디가 떠오른다.) 

이에 대해 두가지 방향의 도전이 있었는데 "규정된 질서가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활동들을 추구할 권리에 의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또 경제적 개인주의의 발흥으로 더욱 결정적인 사회적 이미지가 나왔다.  

이 경제적 개인주의에서는 사회를 확립된 질서로 생각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시장'으로 생각한다. 이제는 왕이나 기존의 사회질서에서 출발하지 않고 생산과 교역활동에서 출발하게 되며, 점점 더 이러한 활동들이 다른 활동들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사회의 본질적인 목적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사회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했다. (174~175) 

후에 자본주의가 법인 조직의 자본주의 단계로 발달함에 따라 사회는 시장을 제공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조직 자체가 본질적으로 시장 조직이 되었다. 기존질서에서 출발했던 개인이라는 관념은 본질적으로 '내 위치와 그 의무'로 구성되었으나, 시장사회에서 개인이라는 관념은 우선 책임 있는 자유로운 동인으로서, 그리고 후에는 무엇인가 팔 것을 가진 사람으로 되었다. (175) 

물론 이러한 이미지는 실제 역사에서는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상호작용하기도 했다. 조직된 시장이 절대적인 질서가 되면서 시장과 절대적 질서가 실질적으로 융합할 수도 있다. 

또 사회주의에서는 '인류의 형제애' 이미지가 실제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근본적으로 혼란스럽게 되었다. 

한편 개인의 권리의 주장에서 출발했던 개인주의는 개인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둘 권리를 더 강조했다. 모든 좋은 일은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모든 나쁜 일은 사회가 저지른다는 공식이 합리화되면서 사회적 사고에서 큰 폭으로 후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회의 이미지는 이제 내재적으로 악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대중'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절대적 질서의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풀이한 것이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중들'로서 엘리트들에 의해서 통치되고 조직되고 가르쳐며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시장의 개념을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구와 선호도의 패턴을 표현함으로써-이는 새로운 시장 법치기앋-사회의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엘리트들에게는 이것이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대중사회는 본질적으로 몰개성적이다. 필연적으로 엘리트는 개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고, 대중적 패턴의 평균적 수치와 일반화된 풍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나와 내 가족은 현실적이고 나머지는 그냥 시스템이다. 이는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이 강화된다. 이러한 사회이미지는 사회와 인간을 분리해버렸다.  

 

4.2 

'우리가 물려받은 지배적인 사회 이미지'인 '절대적 질서, 조직된 시장, 엘리트와 대중, 권력 투쟁에서 표현되는 형제애'는 모두 사회를 정치(결정의 체제)와 경제(유지의 체제)라는 두 영역의 이해관계, 두 종류의 사고, 두 가지 해석의 사회관계로 환원시킨다. 지배 집단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권력과 대체로 가까이 연관되어 있는 이 범주를 통해서 삶의 나머지 부분들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83-184) 

윌리엄스는 이어 사회주의의 가장 큰 오류를 '스스로를 자신이 반대하는 편의 용어로 한정한다는 것, 즉 인간적 질서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제안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이 통찰에 동의한다.  

"대안적인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에너지를 충분히 생성하기 위해서는 좀더 넓은 견지에서 제안해야 한다. 이러한 연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면서도 인간적인 질서는 거의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좋은 예는 노동의 정의라는 문제이다. (...) 일과 노력의 관계는 특정한 사회 형태에 의해서 흐려지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한 일 혹은 '자발적인 사회적 목적'을 위해 한 일과 돈을 위해서 한 일을 구분한다. 이것이 단순히 임금노동을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의 반영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이와 다른 사회관계라면 이에 근본적으로 도전해야 할 것이다. (...) 일과 삶의 통합,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인 사회 조직에서 문화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을 포함하는 것은 대안적인 사회 형태의 기본 조건이다. (...) '공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적인' 것, '일'뿐만 아니라 '여가'까지 실질적인 이해관계의 실체가 사회적 목적이 된다. (...) 사회사상이란 일과 정치와 재산을 그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필요성에 의해 판단하는 인간적인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도덕적 몰락은 바로 이렇듯 사회에 대한 낡은 이미지들과 타협했던 것, 대안적인 인간적 질서의 개념을 유지하고 규명하지 못했던 것과 정확히 비례한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네그리, 하트의 "디오니소스의 노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 형태 비판과 연결될 수 있다. 

 

 

윌리엄스는 결정의 체계(정치)와 유지의 체계(경제)에 뒤이어 두가지 관계를 덧붙인다.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체계. 그리고 삶의 생성과 육성이 기초한 관계들의 복합체로서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특수한 체계로 표현된다.  

기존에 예술은 단지 경제적, 정치적 과정의 반영으로 격하되어 기생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미학이라는 분리된 영역으로 이상화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요소는 그의 인성은 물론 사회의 뿌리이다. 그것은 예술에 한정되어서도 안 되고, 결정과 유지의 시스템에서 배제되어서도 안된다. 

결국 윌리엄스의 목표는 "사회에 관한 진실은 늘 예외적으로 복잡한 결정 체계, 의사소통과 학습체계, 그리고 유지의 체계와 생성, 양육 체계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현실적으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 체계들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을 지어주며, 각 체계의 역사적 가변성을 보여주고, 그들이 작동하고 경험되는 현실적인 조직의 역사적 가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기존의 '경제결정론'등은 '경제'라는 체계 또는 '정치'라는 체계가 다른 체계를 규정하거나,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해왔다면, 윌리엄스는 이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대안 세계를 '상상'하고 건설하는데 오류에 빠지게 했다는 것. 

감동적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역시, 그 '보여줌'을 제시해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사회를 분석하는 이러한 설명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바로 그것들이 성장의 용어이고, 전에도 그러했다는 사실이다. 정치, 경제, 미학, 심리학은 늘 부분적으로는 한때 경험된 상황에서 학습된 규칙의 체계이며, 그것이 단지 수정되지 않고 영속화된 상태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제각각 새로운 상황을 탐색하고 반응하며 그것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려는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는 창조적인 노력이다. 우리가 인간의 조직을 연구하는 데 연관성뿐만 아니라 가변성도 강조해왔다면, 바로 변화의 본질과 근원이라는 이 중대한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191) 

4.3 

윌리엄스는 역사는 대부분 정복에 의한 변화이지만, 이것이 결국 정치, 즉 결정의 체계가 다른 체계들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가지 다양한 결과를 낯는다고 한다. 결정의 체계는 현실 속의 물질적, 관습적 환경 속에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변화는 일반적 변화의 전체적인 복합체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 

이러한 주장은 옳은 주장이며, 전 '사회'변화를 어떤 체계(정치나 경제)가 아닌 여러가지 체계들의 상호작용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의 발달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때, 그렇다면 증기기관을 가능케한 경제적 조건이나, 정치적 조건만을 따지고 여기서부터 다른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증기기관이 가능케 한 창조적 학습의 배경 등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지적에도 유의미하다. 

"자본주의사회들도 비교할 만한 각각의 발전 단계들에 따라 여러 측면에서 서로 매우 다른 사회들이며, 이 차이들에 대해서 가장 세련된 정치 경제학적 분석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른 체계인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체계. 그리고 삶의 생성과 육성이 기초한 관계들의 복합체로서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특수한 체계"를 특권화시키지도 않는데,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현실을 결정하고 유지하는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더러는 결정되기도 한다"는 정도의 주장이다. 또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관습적인 의미와 가치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창조자를 변화의 열쇠로 분리해내는 것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그들을 간과하느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이제 '전체'를 연구하는 것의 범위나 의의가 어느정도 잡히는 것 같다. 각 체계들의 상호작용과, 그 각 체계들을 특권화하여 다른 체계의 중요성을 억압하지 않는 것. 이를 통해 각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그런데 앞서 인용했던 부분에서 '자본주의사회들'도 각기 다르다는 것도, 윌리엄스식으로 반박해보자면, 결국 이는 세계체제 속에서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하나의 '국민국가사회'라는 것도 다른 '국민국가사회'와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교류하며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즉 전체라면, 윌러스틴 같은 시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은 아닌가. (*이 할아버지는 정말 짱이기는 한데, 언제 완결지으시려나... "제국"출간 이후로 또 이와 싸우시느라고 못 쓰고 계신 것인지... 역시 근대로 올수록 어렵기는 할터이지만, 이제는 완전 맑스다. 당신도 이제 80이라.. 이거 결국 내가 읽고 싶은 것은 20세기나 21세기인데;; ) 뒤에 목차를 보면 일국 영국을 대상으로 논의를 펴는데, 이 또한 '전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다시 전체로서의 조직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조직은 존재하기도 하고 갱신되기도 한다는 뜻에서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체제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학습이 바꾸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바꾸고 바뀔 뿐이다." (195) 

이러한 언명은 bold하다. 이 또한 논증되어야 하는 부분인데, (그 후의 수많은 이데올로기론이나 특히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이나 '구조'등을 생각해보자. 이제 레비스트로스는 안 읽는다지만, 문화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보고 논의한 대표적인 논자가 아닌가. 얼마전에 레비스트로스 100세 생일이라고 해서 깜짝놀랐다. 생일축하!) 그냥 막 쓴다. 이 또한 윌리엄스 식으로 논의할 때, '사람'도 '요소'의 일부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왜 '사람'이라는 것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해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 이런 전제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정치적 변화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개방적인 사회와, 실제의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에서 변화의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자유롭게 협조하는 개인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이 전제부터 출발한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현실적인 변화란 실제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점점 더 확대되고 강력해지는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들을 건설하는 변화였다. (...) 우리는 점점 더 새로운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는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라는 단순한 사실과 그에 따른 확장된 문화 경험에 의한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1부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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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3장 개인과 사회'를 요약하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이를 '살아 있는 과정의 복합체'로 여겨야하며, '인간 조직의 연속적인 과정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연속적인 행위와 적응이며, 이러한 행위와 적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계속되는 변이와 그 변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학습과 의사소통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선험적으로 파악되는 내용을 길게 써 놓았지만, 이러한 결론 즉 생성하는 주체, 또는 들뢰즈적 의미로 '욕망기계'와 같은 개념을 선취하고 있다고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의가 너무 풀어해쳐있어서, 왜 이런 식으로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1961년이라는 시간은, 이미 라캉이 활동한지 오래인 때이고, 르페브르가 '일상생활 비판'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들과 비교해보면, 이 논의의 나이브함이랄까, 지적 협소함을 느낄 수 있는데, 뭐 물론 중요한 것은 아직 본론도 읽기 전이라는 것 -_-; 아니면 프랑스 사람들이 항상 주장하는 '영국 사상계의 독자성' 나쁘게 말하면 '폐쇄성/느림'을 보여주는 사례일까. 

 

그러니까, 윌리엄스를 읽는다는 것은, 비슷한 시기 대륙에서 진행되는 논의들과 영국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지체(?)내지는 따로 독특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3.1 

논의를 순서대로 조금 따라가보면, 우선 '정신 속에서 학습되고 창조된 패턴과, 관계, 관습, 제도들 속에서 소통되고 작용하게 된 패턴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 진정한 상호 작용의 원칙'으로서 '문화'를 규정한다.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 논의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개인'이란 어떤 의미였는지,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를 중세사상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살펴본다. 

중세에는 '한 인간이 그 사회적 질서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방식에 중점'을 둔다면, 이제 개신교로 넘어가면서, '전체적 질서에서 관계들의 복잡한 구조'를 통해 이해되던 운명이 '개인과 그의 신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된다. 

즉 '인간-교회-신에서 인간-신으로의 변화는 '개인'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새로운 의미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다. 또 자본주의 성장에 따라 이동성이 증가하고, 최소한 일부의사람들이 자기 지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개인의 사회적 역할과 분리할 수 있는 의미의 개인이 된다는 생각도 힘을 얻는다. 이제 고정된 질서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활동을 시작하고 특정한 방향을 택하는가가 문제이다. 이 때문에 '나는 무엇인가'는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내 노력으로 무엇이 되었는가'하는 정도까지 확장해서 다시 정의된다. "즉 본질적으로 개인의 개념은 그가 이제까지 통상적으로 규정된 관계들의 복합체에서 추상해낸 개념이다."(133) 

사회도 마찬가지로, 홉스에서 공리주의자들에 이르는 체계에서는 발가벗은 존재로서의 인간을 출발로 사회는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파악했다. 대안적인 정통(루소, 헤겔)은 사회를 이상화하였다.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매개적인 용어로서 '공동체'나 '연관'등의 용어를 덧붙여, '개인'과 '사회'라는 거대한 추상적 개념들이 세부적으로 작용하는 개인 대 개인의 국지적인 관계들을 묘사한다. 이 중 특수한 용어로 '계급'이 있다.  

3.2

이러한 논의 후에 프로이트와 에릭 프롬을 논의하면서, 프로이트는 '발가벗은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로서 '개인'과 '사회'를 이론적으로 분리하여 한계를 보였다고 하고 프롬은 '내밀한 개인적 관계들과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전체'를 연결시킬 가능성을 탐구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결국 개인의 '잠재력'과 역사가 상호작용하면서 자의식이 성장한다고 결론짓는다. 즉 

"자율적인' 자아는 그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과정에서 성장하지만, 획득된 자율성의 정도에 따라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다음 단계, 즉 개인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고 현재도 주고 있는 사회적 과정을 변화시키거나 수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단계가 가능해진다." (143) 

이를 통해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분석이, '개인'은 추상적 설명을 실질적인 성장과정으로 되돌려놓는다면,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하나의 추상을 현실적인 관계들의 실제 복합체로 돌려놓는다. (143) 

사실, 맨 처음부터 지적했던, '문화', '개인', '사회'라는 개념들의 추상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전장에서 윌리엄스는 고군분투한다. 윌리엄스도 언급한 바 '계급'이나 (당시에 이미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도 출간된지 오래인데, 왜 루카치와 직접적으로 대결하려 하지 않는가. 계급의식과 현실의 상호관계, 그 관계의 변증법적 발전으로서의 의식의 발전과 현실의 지양 등등의 논의와 대결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윌리엄스는 선행 논의와는 무엇과도 대결하려고 하지 않는듯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 윌리엄스가 튀어나온 것인지 알기 어렵다. 윌리엄스가 말하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만큼, 헤겔이나 루카치가 골몰한 주제도 없을 터인데... ) 여타 선재한 개념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 아쉽다. 흥미로운 것은 각주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가끔 폴드만 같은 논의를 읽어보면,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왜 비판만 하다 끝나는 건지, 자기 이야기가 있기는 한건지 골똘히 들여다보고 생각해봐야 알겠지만, 이 윌리엄스는 모두 다 자기 이야기다. 플라톤도 아니고, 이건 뭐;; (플라톤도 읽다보면 간혹은 당대 논의들을 끌어온 다음에 매우 심하게 난도질하고 깐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당연한 논의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개념은 없다. 

"한 사회 내에서 '집단들'을 의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물론 단지 추상의 근거를 이동하여 이번에는 집단을 단일한 절대자로 만들어버릴 가능성도 있다. 가장 단순한 집단에서도 마치 '사회'에서처럼 협동관계뿐만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관계가 존재한다. (...) 어떤 집단은 척도의 편리한 표식이 될수도 있으나 그것은 표식일 뿐이며, 전체 척도의 연속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근본을 이룬다." (144) 

그렇다면 논의의 단위(계급과도 같은)를 설정하거나, 아니면 접속의 필수 또는 관계맺음 즉 운동하는 과정을 내포하는 개념도구(들뢰즈의 '기계'와도 같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논의 후에 그 개념으로 돌아오는 것은 참 가혹하다. 그렇다면 독자는 윌리엄스를 읽으면서, '개인', '사회', '문화'라는 말이 나올 때, 이것이 단어로서 존재하지만, 추상일 뿐이며, 그 안의 다층적인 관계망을 갖고 있는 '생성하는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3
이러한 논의 후, 윌리엄스는 '개인과 사회'에 대해 생각할 때 단순히 동조-비동조가 아니라 여러가지 어휘를 늘려보자고 하면서 구성원(member), 신민, 하인과 같은 것을 동조의 양식으로, 반역자, 망명자, 부랑자를 비동조의 양식으로 명명하고 각각을 논의한다. 하지만 이는 어휘만 늘리고 '개인과 사회'를 묘사하는 몇가지 방식만을 추가했을 뿐이지, '동조-비동조'라는 단순성을 질적으로는 극복한게 아니지 않을까. 여하튼 분류방식을 보면 이렇다. 

구성원 -자신을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한 개인으로서 의식하고 있고, 개인의 입장에서 사회를 자신과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자연스러운 수단으로 본다는 것이 구성원 자격의 본질 

신민과 하인 -개인적으로는 수용하지 않는 권위에 복종하고, 개인적 의미가 전혀 없는 사회적 기능들을 수행하며, 그의 실질적인 욕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 중 신민은 -자신을 아무리 어기더라도 속한 사회의 삶의 방식과 그 안에서 자신에게 지정된 위치를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자신을 유지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즉 생존하기 위해서 사회에 동조해야 한다. 

하인- 압력이 신민보다는 덜 가혹하지만, 압력에는 저항할 수 없다. 신민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나 하인에게는 선택의 환상이 주어지며, 자신을 규정한 그 위치의 삶의 방식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도록 유도된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환각일 뿐인데, 그것은 신민과 마찬가지로 거절할 경우 삶을 유지할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환상으로 인해 선택권이 실질적인 것이라는 듯, 자신과 사회를 동일시 할 수 있다. 

반역자 -어떤 사회적 목적에 대해 아주 강렬하게 개인적 헌신을 하고, 그의 개인적인 존재와 특정한 사회적 노력의 패턴을 적극적으로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구성원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가 속한 사회의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형식에 반발함으로써 또다른 사회적 형식을 확립하려고 한다. 

망명자 -그가 속한 사회의 생활 방식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반역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싸우는 대신 떠난다. 

부랑자 - 자신의 사회의 목적들이 무의미하며 가치관도 부적절하다고 여기지만, 망명자의 자존심, 원칙을 고수하는 면이 결여되어 있다. 딱히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기를 원한다. 

이러한 분류 후에 윌리엄스는 "우리가 단지 동조냐 비동조냐 하는 난국에서 벗어나려면 구성원, 신민, 하인, 혹은 반역자, 망명자, 부랑자 같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설명들과 같이 이들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설명들은 단지 특정한 관계의 형식들을 분석할 뿐이다. 이러한 것들이 다양한 적응의 형식이 되는 단일한 '사회'는 없다. 실로 '사회' 자체도 그에 구현된 특정한 관계에 따라 마찬가지의 다양성을 띈다. (...) 구성원과 공동체, 하인과 기존 제도, 신민과 강요된 체제, 반역자와 독재, 망명자와 잃어버린 사회, 부랑자와 무의미한 사회 등은 모두 활동적인 조직과 작용과 상호작용의 형식들이다. 더욱이 실제 사회에서는 여기 설명된 관계들이 거의 항상 다른 집단과 척도들의 존재 때문에 복잡해진다." (156)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조직의 한 형식이지 단일한 실체가 아니기 떄문에 이 조직의 형식들 내에서 앞서 설명한 형식들이 더 결정적일 수는 있어도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좀더 넓은 영역의 현실적 관계들의 복잡한 구현체가 될 것이다." (157)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왜 윌리엄스가 맑스나 루카치 등의 개념과 싸우지 않는가이다. 그는 정말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관계를 매개하는 '문화'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를 부분에서부터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봐야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소크라테스 처럼 혼자 비상하여 내려다보려는 자세는 무얼까. 그러면서도 이 개념들이 추상적이고 "실제로는 좀더 넓은 영역의 현실적 관계들의 복잡한 구현체가 될 것이다"로 계속 돌아오고 있다. 멀리 위로 올라가서 전체를 보면, 전체를 볼 수 있지만, 거무죽죽하게 불빛들만 보이는 것은 아닌가. 전체를 보려고 하면서 세부도 그리려고 하면 이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전체를 보려고 하면, 그리는 것은 전체의 모양새일 뿐이다. 본론에서, 윌리엄스는 뭘 하려고 이런 1부를 쓰고 있는 것일까...  (같은 영국지성으로 뉴튼이 떠오른다. "내가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선 난장이였기 때문"인가 뭐란가... ) 

3.4

"경험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용어들은 본질적으로 활동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새로운 설명은 다소 신속하게 하나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경험을 분명하게 하기도, 경험에 충실하기도 매우 어려워진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설명, 제공된 모든 해석들이 성장하는 용어라는 점이다." (157) 

3.5 

이제 맨처음 요약했듯이,'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이를 '살아 있는 과정의 복합체'로 여겨야하며, '인간 조직의 연속적인 과정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연속적인 행위와 적응이며, 이러한 행위와 적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계속되는 변이와 그 변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학습과 의사소통의 과정'이라는 논의가 나온다. 

'개인'을 연구하든, '사회'를 연구하든, 결국은 '이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개인을 '육체, 정신, 영혼으로 분리하고 감정, 의지, 사고,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초자아 이드로 분리하고 사회를 집단, 계급, 협회 등등으로 분리하지만, 이들 중 어떤 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역시 그들 간의 관계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실체를 따로 떼어서 서술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이를 규정하고 나면 그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실체는 그 조직이 내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분리해낼 수 없는 관계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164)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인데.. 근대적 기계주의적 세계관에 반해서, 유기체적 세계관의 내용이다. 그래도 끝내, 윌리엄스는 아직도 자신의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체에 대한 욕망은 선적 직관말고, 어떻게 논의할 것인가. 가령 이것이 한 조직과 한 조직의 '관계'라고 할지라도, 그 '조직'이라는 것 또한 분류되고 그 '조직 내'의 관계가 또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알고 싶은데, 계속 윌리엄스는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당연시된 이야기를 계속 서술한다. 

"인간 조직의 연속적인 과정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연속적인 행위와 적응이며, 이러한 행위와 적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계속되는 변이와 그 변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학습과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우리는 특이한 개인에게 작용하는 사회나 집단에 대해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특이한 개인들이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 자신을 형성해나갈 조직을 창조하고 필요한 경우 확대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개인이 되지만, 개인은 특수한 역사로 표현되는 특수한 유전을 통해서 이루어진 독특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옳다." (165) 

이러한 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로 나아가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학습하고 창조하며 소통하는 존재라면,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유일한 사회 조직은 참여 민주주의다. 참여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 모두는 독특한 개인으로서 학습하고 소통하며 통제한다."
  
"우리가 삶의 과정 전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조직들 사이의 연속성을 인식해야 한다. 어떤 고정된 상태들을 추상해내고 거기에서 논의를 하는 것이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다. 새로운 개념들은 늘 어려운 것이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거기에서부터 적절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세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듯 하다. (..) 그러한 접근법은 전체적인 과정의 패턴과 관계의 연구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문화의 분석이라고 규정했던 것이기도 하다. 바로 창조와 소통과 제도를 만드는 실제의 작업 속에 개인적-사회적 성장의 공통된 과정이 있는 것이다." (167)
 

마지막으로 이렇게 끝낸다. 그러니까 새로운 개념을 만들라니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전체적인 과정의 패턴과 관계의 연구'라는 의미에서 '문화의 분석'이라고 하면, 결국 1장에서 규정한 것과 별반 다를바 없이 되돌아오게 되었다.... 맨 마지막 줄만 음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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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론을 전체적인 삶의 방식에 존재하는 요소들의 관계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하고 싶다. 문화의 분석은 이러한 관계들의 복합체인 사회 조직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특정한 작품이나 제도에 대한 분석은 그 조직의 본질적인 종류, 즉 작품이나 제도들이 전체 조직의 일부로서 구현하고 있는 관계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서 키워드는 패턴이다. 모든 유용한 문화분석은 특징적인 종류의 패턴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일반적인 문화 분석이 염두에 두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별개로 고찰되던 활동들 사이에 예기치 않았던 동질성이나 상응관계를 드러내주거나, 때로는 예기치 않았던 단절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다소 에세이 같다. 어떠한 키워드, 예를 들면 '권력'이나, '계급투쟁'같은 개념들이 없고, '패턴'이라니.. 그렇다면 이제 의문은 그 '패턴'의 작위성이다. 연구자의 '선택'에의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윌리엄스는 또, '또다른 공통 요소, 그러니까 성격도 패턴도 아닌,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이 체험된 실제적 경험에 대한 감각까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실제적 경험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사시 ㄹ우리는 어떤 시대의 예술에서 그러한 접촉을 가장 많이 의식하고 있다. 그 예술을 그 시대의 외면적인 성격과 대비해보고 개별적인 변종들을 감안하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가 쉽게 자리를 정할 수 없는 중요한 공통의 요소가 있다. (...) 그것을 묘사할 때 내가 제시하는 용어는 감정의 구조이다. 그것은 '구조'라는 말이 암시하는 바대로 견고하고 분명하지만, 우리 활동 가운데서 가장 섬세하고 파악하기 힘든 부분에서 작동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감정의 구조는 한 시대의 문화이다. 그것은 전반적인 사회 조직 내의 모든 요소들이 특수하게 살아 있는 결과이다. 그리고 한 시대의 예술이 (...)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이다. 왜냐하면 다름아닌 바로 여기서 이러한 특성은 표현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종종 의식하진 못하지만, 실제적인 생활 감각, 즉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심층적인 공동체는 그것의 보유자보다 오래 살아남은 기록된 커뮤니케이션 가운데 독보적인 사례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그러하다. 그 감정의 구조를 (...) 공동체의 개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실제의 공동체에서 그것은 매우 심층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소유되고 있는데, 그것은 의사소통이 의존하는 기반이 바로 감정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설득되기 어렵다. 이는 분명 변증법적으로 쓰였을 터인데, 왜 글은 이리도 '전제'-'확인'식으로 쓰여지는 것일까. 사실 영문학이나, 1840년대 영국에 대해서 아는 것은 '풍문' 뿐이라서 더욱 이런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모든 독자는 모든 논자에 비해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 그럼 조금더, 친절하게 혹은 조금더 선포가 아닌 '설득'적으로 쓰여져야 하지 않을까. 각주가 하나도 없는 에세이다. 하지만 점점 기대는 되는데, 진짜 분석은 어떠할까, 어떤 시야를 보여줄까 하는 것이다. 그래도, 레이몬드 윌리엄스잖아, 라고. 

"한 사회에 속한 어떤 개인도 그 사회에 대한 사실들 중 선택된 부분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말했듯이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음 세대의 어떤 사람도 결코 복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소설들이 씌어진, 그리고 우리가 선택을 통해서 그에 접근해보고 있는 삶에 대한 감각이다." (96)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며 사회 성격을 경험 속에서 현실감 있게 전개시킨다. 그러나 예술은 새로운 지각과 반응들을 통해서 사회가 그 자체로서는 깨달을 수 없는 요소들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예술과 예술을 낳은 사회를 비교해보면 예술과 나머지 생활 전반 사이의 심오하고도 중심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현실적인 관계들을 발견할 수 있다. (...) 또한 예술에는 특징적인 형식과 장치들을 통해 그 사회의 막다른 골목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의 증거 -종종 이런 식으로는 처음으로 의식 속에 인정되는-가 있다." (122) 

흠.. 같은 해 세상에 던져진 푸코의 박사논문과 비교해봐도 흥미로울 듯 하다. 

 

푸코가 바라본 역사, 푸코는 말하고 싶은 주제 "어떻게 광기는 이성에 의해 괄호쳐지고 규정되고 또 감금되었는가?"를 통해 '역사'라는 것을 바라보는데, 또 이를 통해 '심리학'이라는 것을 탈신비화하는데, 윌리엄스의 질문은 아직까지 잘 보이지 않는다. '문화사 연구를 위한 시론' 정도의 문제의식 정도인데, 각 영역들을 아우르는 '전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의한다. 사실 이는 푸코와는 정반대의 방향성으로, '문화연구'의 확립을 위해, '문화'라는 것의 신비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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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혁명 - 독중감 1 생물학적 의미의 인식과 예술 창조과정의 인식의 차이 

 1961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작품이, 한국에서 2007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45여년의 길이.   

 우선 첫번째 장인 '창조적 정신'을 읽는데, 윌리엄스는 예술의 '창조'와 '모방'에 관한 대립적인 견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를 소개하다가 '우리 각자의 두뇌는 문자 그대로 그 나름의 세계를 창조해낸다'라는 영(J. Z. Young)이라는 생물학자의 견해를 소개한다.   

 

 

 

물론 우리는 그 이후 마투라나 같은 급진적 구성주의적 생물학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의 급진적이고 보다 '실험'에 의해 뒷받침된 논의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은, 생물학적 인지와 예술/인간의 '창조'라는 것을 일차원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인간의 인지 행위 자체가 '창조적'이라고 규정한다.  

"인간 두뇌의 진화와 특정한 문화에 의해 이루어지는 특정한 해석들은 우리에게 일정한 '규칙' 혹은 '모델'을 제공하는데, 그것이 없으면 어떤 인간도 일상적인 의미에서 '볼 수'가 없다. 개개인이 계승과 문화에 의해 이러한 규칙들을 배우는 것은 일종의 창조 행위이다. (...) 특정한 문화는 현실에 대한 특정한 견해들을 지니는데, 사로 다른 규칙을 지닌(비록 진화한 인간의 두뇌를 기반으로 하는 점에서는 같더라도) 문화는 그 담지자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그들만의 세계를 각기 창조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대한 견해들은 그들이 창조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나아가 보면 문화들 사이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규칙을 지닌 개인들도 그 규칙들을 수정하고 화장하여 새롭게 수정된 규칙을 도입함으로써 확대되거나 남다른 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의 새로운 영역은 '드러나'거나 '창조될'수 있으며,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라 어떤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달되어 특정한 문화가 지닌 규칙의 집합에 추가된다." (49~50면) 

이러한 논의를 생물학적 논의의 원용으로 전개한 것이 흥미롭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형이상학을 토대로 시인추방론을 펼친 것과, 이에 비해 20세기 중반에 '생물학적' 논의를 원용하여 인간 인식 일반의 '창조성'을 논하는 것을 대비해보면 흥미롭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결국 예술이라는 것을 커뮤니케이션 일반의 한 특수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예술을 창조적 발견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일반적인 인간적 과정 중의 특수한 한 과정으로 보는 것은 동시에 예술의 지위를 재정립하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적 사회생활과 연관지을 수단을 찾는 것이다.(...) 예술은 결국 우리 모든 삶의 창조성이라는 사실에 의해 비준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고 하는 모든 일, 우리의 관계와 제도의 전체 구조는 결국 학습과 묘사와 커뮤니케이션의 노력에 달려 있다. 예술의 창작과정을 생각하듯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인간세계를 창조한다. (...) 커뮤니케이션은 독특한 경험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권리이다. (...) 우리는 경험을 묘사함으로써 관게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예술을 포하한 모든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말 그대로 우리 사회 조직의 일부분이 된다. 우리의 묘사와 연관된 선택과 해석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밝혀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태도와 필요, 이해관계 등을 구현한다. 동시에 우리가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의 묘사는 그들의 태도와 필요, 이해관계등을 구현하며, 비교와 상호작용의 기나긴 과정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공동의 삶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 말 그대로 삶의 방식이므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은 사실상 공동체의 과정-공동의 의미를 공유하고, 그리하여 공동의 활동과 목적을 지니며, 새로운 수단의 제시와 수용과 비교를 통해 성장과 변화의 긴장과 성취를 이루는 일-이다." 

이러한 논의는 감동적이나, 이를 부르디외의 논의와 연관시켜 보아야 한다. 

과연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문학이라는 '장'이, 나름의 규칙을 지니고, 또 점점 더 폐쇄적이며 그 내부에서도 소통을 할 수 없다고 규탄을 하고 있는 현재에, '예술'을 전체 '공동체의 과정'으로 규정짓는 것은 당위론적으로 느껴지며, 실재적 분석없이는 공허하다. 윌리엄스 책의 본론을 이제 읽어볼 차례이다. 

이 책은 과연 '긴 혁명'이라는 '긴 호흡'으로 영국의 예술과 '공동체의 과정'을 보여줄 것인가. 서론의 당위론적인 이야기는 '긴 호흡'을 통해서는 입증되는가. 혹은 '긴 호흡'이라는 수많은 자료를 통해서만이 입증(즉, '합리화')될 수 있는것인가. 이러한 '합리화'는 당연히, '선택'을 의미하고, 선택당하지 않은 자료들은 무의미한 자료들로 취급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논의 "예술은 묘사하고 소통하는 다른 방식들과 마찬가지로 학습된 인간적 기능이며, 한 공동체 안에서 알려지고 실천되어야만 비로소 경험을 전달하는 엄청난 힘을 사용하고 개발할 수 있다. 인간 공동체는 공동의 의미와 커뮤니케이션의 공동 수단을 발견함으로써 성장한다. 활동의 영역 전반에 걸쳐 두뇌가 창조해낸 패턴과 공동체가 실현한 패턴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한다. 개인의 창조적 묘사는 관례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전반적인 과정의 일부이며, 이를 통해서 공동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수단들을 공유하고 활성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배반당한 걸작' 같은 것은 어떻게 가치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나중에 배반당한 '걸작'이라는 점에서 다시 승인받았기 때문에?  '전체'에 대한 강조는 결국 '긴 호흡'을 전제한다. 이 '전체'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접합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각각의 논리와 운동과 권력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전체를 바라보려는 시야는 유의미하지만, 이 안에 개입하여 발언하려는 문학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장 안에서 시작해서, 이를 벗어나고자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윌리엄스같은 시야가 결국 필요하겠다. 

"정치와 예술은 과학, 종교, 가정생활 혹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기타 범주들과 함께 작용하고, 상호작용하는 관계들의 전체적인 세계에 속해 있으며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연합된 삶이다." 

더 나아가 윌리엄스는 '예술'이라고 우리가 상정하는 것을 전복한다. 

"실제로 예술은 결코 특수한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사실은 매일 하는 가장 일상적인 활동에서 예외적인 위기와 강렬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걸쳐 있으며, 길거리의 언어와 흔한 통속소설의 언어부터 공동의 자산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는 기이한 체계와 이미지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단을 사용해왔다. 창조적 활동을 이렇게 해설하는 목적은 예술의 진정한 역사이면서도 해석의 역사적 단계들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정의와 공식으로 인해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창조적 행위의 이러한 의미가 갖는 결과는 창조적 행위가 커뮤니케이션과 공동체에 대해 보여주는 바에 의해 우리의 공동체적 삶 전체의 본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창조적 해석과 묘사에 의해 도달한 의미들과, 관습과 제도에 의해 구현된 의미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를 파악했을 때, 우리는 '창조적 행위'와 '삶의 전체적인 방식'이라는 문화의 두 가지 의미를 화해시킬 수 있는 위치에 선다. 그리고 이러한 화해야말로 우리가 자신과 사회를 이해하는 힘을 진정으로 확대하는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공연은 누가 보았는가. 다빈치의 작품은 누가 감상했는가. 모짜르트는 누가 들었는가. 이러한 '예술'이 과연 '공동체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런 것은 '예술'이 아닌가. 예술이란, 박상륭의 소설보다는, 귀여니의 소설인 것일까. '긴 호흡'이란 어느정도인 것인가. 그렇다면 문학 연구자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위에서 암시된 것처럼,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예술'이란, '잘 빚은 항아리'나 '낯설게 하기' 따위의 개념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사회'에서 유통되는 창작물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들면서, 기대되는 것을 보니, 잘 쓴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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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새롭게 알게된 점도 있지만, 아쉽기도 하다.

우선 이 책의 동기인 정당정치적 이유에서 시작된 68혁명운동 관련 논쟁이라는 것이 내 흥미나 관심의 깊이를 지나친다. 내 관심은 68혁명운동의 '이해' 후 '평가'인데, 책은 전유럽적인 68혁명운동을 다루고 있고, 여러 저자들의 소논문을 모아둔 것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드는 의문은, 이 전유럽적 68혁명운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동력이 있는가, 또는 왜 이는 모두 68년도에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68이라고 했을때는, 담배냄새 자욱한 프랑스 대학들에서 쓰레기통을 뒤집어쓴 리쾨르와 담배를 꼬나문 알튀세를 그룹의 '맑스 읽기'가 떠오른다. 그 전경이나 후경 어디쯤에 미국의 히피들의 문화(존 레논)와 반베트남 전쟁, 그리고 지금까지는 연결시켜보려고도 못 했던 체코의 벨벳 혁명이 존재한다. 이는 왜 68년도 였는가. 운동들간의 연관성은 있는가?

 
 

 

 

 

 

 

 


"1968이 하나의 명확한 영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과 미국 및 유럽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일어난 시위들, 마틴 루터 킹의 암살, 멕시코에서 자행된 학생 2000명 학살, 파리의 총파업, 시카고의 '분노의 날들', '프라하의 봄'과 그 진압, 베트남의 구정공세 드으이 몽타주 같은 것을 상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 (30면)

이 첫번째 글 "미국적 관점의 후퇴: 1968년과 이후 30년" - 슈티븐 에릭 브로너

번역 수준도 그렇고, 글의 소략함도 어이상실 수준이다. 첫번째 장 "급진 민주주의와 자유지상적 사회주의"의 서론격인듯 한데, 왜 서론에 집어넣었는지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기 때문.

그러나 번역의 질이 다음 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1968년 '프라하의 봄' 혹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헬레나 캐냐-베커

 

 

 

 

 

 

 

로 오면 괜찮다. 어쨌든 체코를 둘러볼 때, 혹은 유럽 역사서들을 읽다보면, 그리고 쿤데라 소설들의 단골 혹은 유일한 레파토리로 항상 언급되는 '벨벳 혁명'의 과정을 소략하게나마 언급된 것이 흥미롭고, 다음과 같은 벨벳혁명의 평가는 재미있다.

"프라하의 봄은 ... 공산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사회주의체제를 평화적으로 전환하려는 최초의 시도이자 유일한 시도였다. 프라하의 구조개혁은 소련 페레스트로이카(1995)의 모델이었다. 소련 체제를 개혁하려는 고르바초프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프라하의 봄은 그와 반대로 폭력을 잠들게 했다. ... 프라하의 봄은 훌륭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의 점령은 소비에트 체제의 종말을 20~30년 앞당겼다. 1968년의 봄이 없었다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가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밖에 서구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구성우너들에게도 프라하의 봄은 유익한 충격이었다. 사회주의는 개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1989년의 변동 이후에는 1968년의 혁신 시도가 지향했던 제3의 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누구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개혁 실험에 신물이 났다. 1968년의 실망은 너무나 컸다. 20년 후 모든 것은 달라졌다." (66~67면)

2.8, 3.1, 4.19, 광주, 한국 80년대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보다 보니 이해영 엮음 "1980년대 혁명의 시대"라는 책이 눈에 띈다. '한국 80년대 세대의 초상화: 독일 68세대와의 비교'라는 글이 있는데, 이것을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하지만 할 일이 많다...

 
 

 


또 드는 생각, 아날학파의 '장기 지속의 역사'와 대비되게, '광대 넓이의 역사'라는 개념 같은 것은 없나? 뭐 68을 보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데. 세계사라는 게 뭐, '장기 지속의 역사' + '광대 넓이의 역사'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서두. 피곤하고 심심하다.
 

 

 

 

 

 

 

어쨌든 68을 정리는 한번 해야 할터인데, 복학과 결혼준비가 동시라서 참 지친다. 영어와 일어 번역과 중국어 공부를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중국어 공부하고, 나서는 영어 책 번역하고 있다가 저녁에는 일어책 번역을 하는 식. 피곤하다 참. 중간중간에 시를 읽고 세미나 준비를 하다가 사람들 만나서 술도 마시고, 결혼준비도 하고, 일요일에는 돈도 벌고 하는 것이다.  주변국 한국에서 국문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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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1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고 있는 그 기인님이 맞는지요..^^

기인 2009-01-1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ㅜㅠ 오랜만이에요~메피님 ㅎㅎ 그동안 공익 다녀오느냐고 뜸했습니다 ㅎㅎ
자주 찾아뵐께요 :)

Mephistopheles 2009-01-1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세월이 이리 빠르게..벌써 결혼준비라니..^^ 조만간 유부남되시겠군요..^^

가넷 2009-01-20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준비도 힘드시겠어요. 2004년에 큰 누나가 결혼을 한다고 야단법석이였던 것 같은데..

그것보고 이것도 참 어렵네.... 난 결혼 같은거 안해! 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기인 2009-01-2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제 유부남 이네요 ㅎㅎ 결혼은 좋은데, 아이 길러야되는 것은 참 힘들 것 같아요 ㅜㅠ 심적,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어서;; 그래도 메피님 보면, 그런 이쁜 아이 저도 갖고(?) 싶은데 ㅎㅎ
Garnet님 안녕하세요 ^^ 처음 뵙는듯 하네요 ㅎㅎ 네 ㅎㅎ 피곤하기는 한데, 여러가지가 겹쳐서 더 그런것 같습니다 ㅎㅎ

마늘빵 2009-01-2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헛, 기인님 아니 결혼을! ^^ 중국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까지. -_- 하나만 하기도 힘든데 그걸 하루에 동시에 다 작업하시다니. 번역을 많이 하시나봅니다. ^^

기인 2009-01-27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오랜만 반가워요 :)

네 먹고 사는게 점점 더 힘들어지네요. 언제 국문학 공부 할지.. 쩝;;;
결혼도 해야하니 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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