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회의 이미지.
이 부분은 감동적이었다. 윌리엄스의 스케일이나 혼자서 사유하고(는 듯 하고), 홀로 서술하는 것의 거대함이 1부 마지막에 와서, 종합된다.
사회적 이미지, 즉 '조직을 설명하고 관계를 상상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탐구'라고 하기도 흥미로운데, 윌리엄스 1부의 서술은 이론적(추상적)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료분석도 아닌 그 중간에 낑겨있는 듯한 느낌이다. 4장에서야 동의가 되기 시작하는 것도, 4장에서는 경제 결정론이나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왜 '전체'의 시야를 가져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이것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기나긴 혁명"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시야"이다.
윌리엄스는 이 장에서는 '역사에서 중요했던 사회의 일반적인 이미지들 몇 가지를 점검하고, 그것이 우리가 현재 관계들에 대해 갖는 생각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며, 사회 변화의 실제 과정에서 그들이 지니는 의미'를 따져보기로 한다.
4.1
'우리가 물려받은 지배적인 사회 이미지'로 윌리엄스는 '절대적 질서, 조직된 시장, 엘리트와 대중, 권력 투쟁에서 표현되는 형제애'를 거론한다. 기존 개념으로 환원해보면, '왕정' '자본주의' '대중사회'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선 '절대적 질서'에 관해서는 이 사회의 목적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며, 여기서 사회 이미지는 개개인이 모두 해야 할 역할이 있는 단일한 유기체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특히 영국에서 보존되었는데 (프랑스나 한국과 비교해볼만하다. 영국은 '무혈'인 '명예혁명'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수립이 시작되었다) , 국민국가(영국)은 사회에 대하여, 현존하는 질서에서 출발하여 실제 개개인의 요구를 이에 종속시키는 방식의 사고방식을 강력하게 존속시켰다. (갑자기 케네디가 떠오른다.)
이에 대해 두가지 방향의 도전이 있었는데 "규정된 질서가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활동들을 추구할 권리에 의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또 경제적 개인주의의 발흥으로 더욱 결정적인 사회적 이미지가 나왔다.
이 경제적 개인주의에서는 사회를 확립된 질서로 생각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시장'으로 생각한다. 이제는 왕이나 기존의 사회질서에서 출발하지 않고 생산과 교역활동에서 출발하게 되며, 점점 더 이러한 활동들이 다른 활동들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사회의 본질적인 목적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사회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했다. (174~175)
후에 자본주의가 법인 조직의 자본주의 단계로 발달함에 따라 사회는 시장을 제공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조직 자체가 본질적으로 시장 조직이 되었다. 기존질서에서 출발했던 개인이라는 관념은 본질적으로 '내 위치와 그 의무'로 구성되었으나, 시장사회에서 개인이라는 관념은 우선 책임 있는 자유로운 동인으로서, 그리고 후에는 무엇인가 팔 것을 가진 사람으로 되었다. (175)
물론 이러한 이미지는 실제 역사에서는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상호작용하기도 했다. 조직된 시장이 절대적인 질서가 되면서 시장과 절대적 질서가 실질적으로 융합할 수도 있다.
또 사회주의에서는 '인류의 형제애' 이미지가 실제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근본적으로 혼란스럽게 되었다.
한편 개인의 권리의 주장에서 출발했던 개인주의는 개인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둘 권리를 더 강조했다. 모든 좋은 일은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모든 나쁜 일은 사회가 저지른다는 공식이 합리화되면서 사회적 사고에서 큰 폭으로 후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회의 이미지는 이제 내재적으로 악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대중'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절대적 질서의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풀이한 것이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중들'로서 엘리트들에 의해서 통치되고 조직되고 가르쳐며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시장의 개념을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구와 선호도의 패턴을 표현함으로써-이는 새로운 시장 법치기앋-사회의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엘리트들에게는 이것이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대중사회는 본질적으로 몰개성적이다. 필연적으로 엘리트는 개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고, 대중적 패턴의 평균적 수치와 일반화된 풍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나와 내 가족은 현실적이고 나머지는 그냥 시스템이다. 이는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이 강화된다. 이러한 사회이미지는 사회와 인간을 분리해버렸다.
4.2
'우리가 물려받은 지배적인 사회 이미지'인 '절대적 질서, 조직된 시장, 엘리트와 대중, 권력 투쟁에서 표현되는 형제애'는 모두 사회를 정치(결정의 체제)와 경제(유지의 체제)라는 두 영역의 이해관계, 두 종류의 사고, 두 가지 해석의 사회관계로 환원시킨다. 지배 집단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권력과 대체로 가까이 연관되어 있는 이 범주를 통해서 삶의 나머지 부분들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83-184)
윌리엄스는 이어 사회주의의 가장 큰 오류를 '스스로를 자신이 반대하는 편의 용어로 한정한다는 것, 즉 인간적 질서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제안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이 통찰에 동의한다.
"대안적인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에너지를 충분히 생성하기 위해서는 좀더 넓은 견지에서 제안해야 한다. 이러한 연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면서도 인간적인 질서는 거의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좋은 예는 노동의 정의라는 문제이다. (...) 일과 노력의 관계는 특정한 사회 형태에 의해서 흐려지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한 일 혹은 '자발적인 사회적 목적'을 위해 한 일과 돈을 위해서 한 일을 구분한다. 이것이 단순히 임금노동을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의 반영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이와 다른 사회관계라면 이에 근본적으로 도전해야 할 것이다. (...) 일과 삶의 통합,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인 사회 조직에서 문화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을 포함하는 것은 대안적인 사회 형태의 기본 조건이다. (...) '공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적인' 것, '일'뿐만 아니라 '여가'까지 실질적인 이해관계의 실체가 사회적 목적이 된다. (...) 사회사상이란 일과 정치와 재산을 그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필요성에 의해 판단하는 인간적인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도덕적 몰락은 바로 이렇듯 사회에 대한 낡은 이미지들과 타협했던 것, 대안적인 인간적 질서의 개념을 유지하고 규명하지 못했던 것과 정확히 비례한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네그리, 하트의 "디오니소스의 노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 형태 비판과 연결될 수 있다.
윌리엄스는 결정의 체계(정치)와 유지의 체계(경제)에 뒤이어 두가지 관계를 덧붙인다.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체계. 그리고 삶의 생성과 육성이 기초한 관계들의 복합체로서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특수한 체계로 표현된다.
기존에 예술은 단지 경제적, 정치적 과정의 반영으로 격하되어 기생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미학이라는 분리된 영역으로 이상화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요소는 그의 인성은 물론 사회의 뿌리이다. 그것은 예술에 한정되어서도 안 되고, 결정과 유지의 시스템에서 배제되어서도 안된다.
결국 윌리엄스의 목표는 "사회에 관한 진실은 늘 예외적으로 복잡한 결정 체계, 의사소통과 학습체계, 그리고 유지의 체계와 생성, 양육 체계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현실적으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 체계들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을 지어주며, 각 체계의 역사적 가변성을 보여주고, 그들이 작동하고 경험되는 현실적인 조직의 역사적 가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기존의 '경제결정론'등은 '경제'라는 체계 또는 '정치'라는 체계가 다른 체계를 규정하거나,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해왔다면, 윌리엄스는 이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대안 세계를 '상상'하고 건설하는데 오류에 빠지게 했다는 것.
감동적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역시, 그 '보여줌'을 제시해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사회를 분석하는 이러한 설명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바로 그것들이 성장의 용어이고, 전에도 그러했다는 사실이다. 정치, 경제, 미학, 심리학은 늘 부분적으로는 한때 경험된 상황에서 학습된 규칙의 체계이며, 그것이 단지 수정되지 않고 영속화된 상태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제각각 새로운 상황을 탐색하고 반응하며 그것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려는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는 창조적인 노력이다. 우리가 인간의 조직을 연구하는 데 연관성뿐만 아니라 가변성도 강조해왔다면, 바로 변화의 본질과 근원이라는 이 중대한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191)
4.3
윌리엄스는 역사는 대부분 정복에 의한 변화이지만, 이것이 결국 정치, 즉 결정의 체계가 다른 체계들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가지 다양한 결과를 낯는다고 한다. 결정의 체계는 현실 속의 물질적, 관습적 환경 속에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변화는 일반적 변화의 전체적인 복합체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
이러한 주장은 옳은 주장이며, 전 '사회'변화를 어떤 체계(정치나 경제)가 아닌 여러가지 체계들의 상호작용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의 발달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때, 그렇다면 증기기관을 가능케한 경제적 조건이나, 정치적 조건만을 따지고 여기서부터 다른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증기기관이 가능케 한 창조적 학습의 배경 등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지적에도 유의미하다.
"자본주의사회들도 비교할 만한 각각의 발전 단계들에 따라 여러 측면에서 서로 매우 다른 사회들이며, 이 차이들에 대해서 가장 세련된 정치 경제학적 분석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른 체계인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체계. 그리고 삶의 생성과 육성이 기초한 관계들의 복합체로서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특수한 체계"를 특권화시키지도 않는데,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현실을 결정하고 유지하는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더러는 결정되기도 한다"는 정도의 주장이다. 또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관습적인 의미와 가치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창조자를 변화의 열쇠로 분리해내는 것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그들을 간과하느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이제 '전체'를 연구하는 것의 범위나 의의가 어느정도 잡히는 것 같다. 각 체계들의 상호작용과, 그 각 체계들을 특권화하여 다른 체계의 중요성을 억압하지 않는 것. 이를 통해 각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그런데 앞서 인용했던 부분에서 '자본주의사회들'도 각기 다르다는 것도, 윌리엄스식으로 반박해보자면, 결국 이는 세계체제 속에서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하나의 '국민국가사회'라는 것도 다른 '국민국가사회'와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교류하며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즉 전체라면, 윌러스틴 같은 시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은 아닌가. (*이 할아버지는 정말 짱이기는 한데, 언제 완결지으시려나... "제국"출간 이후로 또 이와 싸우시느라고 못 쓰고 계신 것인지... 역시 근대로 올수록 어렵기는 할터이지만, 이제는 완전 맑스다. 당신도 이제 80이라.. 이거 결국 내가 읽고 싶은 것은 20세기나 21세기인데;; ) 뒤에 목차를 보면 일국 영국을 대상으로 논의를 펴는데, 이 또한 '전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다시 전체로서의 조직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조직은 존재하기도 하고 갱신되기도 한다는 뜻에서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체제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학습이 바꾸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바꾸고 바뀔 뿐이다." (195)
이러한 언명은 bold하다. 이 또한 논증되어야 하는 부분인데, (그 후의 수많은 이데올로기론이나 특히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이나 '구조'등을 생각해보자. 이제 레비스트로스는 안 읽는다지만, 문화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보고 논의한 대표적인 논자가 아닌가. 얼마전에 레비스트로스 100세 생일이라고 해서 깜짝놀랐다. 생일축하!) 그냥 막 쓴다. 이 또한 윌리엄스 식으로 논의할 때, '사람'도 '요소'의 일부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왜 '사람'이라는 것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해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 이런 전제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정치적 변화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개방적인 사회와, 실제의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에서 변화의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자유롭게 협조하는 개인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이 전제부터 출발한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현실적인 변화란 실제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점점 더 확대되고 강력해지는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들을 건설하는 변화였다. (...) 우리는 점점 더 새로운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는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라는 단순한 사실과 그에 따른 확장된 문화 경험에 의한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1부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