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의 글을 다시 훑어보고, 이 글이 실린 New Left Review에 바디우가 영어로 썼다는 것을 상기하고 나니, 텍스트에 내재된 욕망이 읽힌다. 

우선 French라는 국적/언어로 철학을 한정해서, 이를 네가지 기준으로 간명하게 설명한 것이 함의하는 것. 이것의 효과는, '프랑스 철학'을 하나의 system이나 champ으로 파악/규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독일 철학'의 전유나 '프로이트'와의 대화같은 부분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들을 타자로 삼아 '프랑스 철학'이라는 것을 규정-설명 하고 싶어한다. 

이를 자신의 사유언어인 불어로 쓴 이후에 번역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영어로 썼다는 것(바디우의 '직접적' 소통의 열망?/영어라는 국제어에 '프랑스 철학'을 기입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이 글이 실린 공간이 New Left Review(좌파 비교적 대중지)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gender/class/등으로 철학을 나누지 않고,(예를 들면 여성철학자들의 사유 체계나 중산층 지식인들의 사유체계의 흐름 등) nationality나 language로 현대철학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는 또 어떤 전제하에서 작동되고 어떠한 신비화에 기여하는가.  

New Left Review가 바디우에게 최근 'French Philosophy'의 동향에 대해 써주세요 라고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이 French라는 것을 사유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 않을까. 폴드만(폴드만은 '미국'철학인가?)이나 푸코나 알튀세나 사이드라면 어떻게 썼을까. (New Left Review는 말그대로 '좌파'잡지이지만 맑스주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좌파와 국적이라...)

글을 읽으면서 이것이 못내 걸리고 또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사실 푸코보다는 이에 대한 본격적인 글을 써보고도 싶다.)  

 사르트르에서 들뢰즈까지(바슐라르, 메를리 퐁띠, 레비스트로스, 알튀세, 푸코, 데리다, 라깡, 그리고 바디우 자신까지)의 사상적 지형도, 그 풍성함.  

'우리'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 그리고 이를 '한국현대철학의 지형'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언제나 민족(주의)를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지만, 언어나 나를 둘러싼 제반환경은 언제나 나를 민족(주의)적 주체로 호명하고는 한다. 이번에는 바디우의 '프랑스 철학'이라는 것이 나를 '한국인'으로 호명했다.  

영문과 수업과 영문과 친구들이 나를 다른 방식으로 호명되게 하는데 도움되기를 :) 

푸코의 What is an Author을 읽기 전에,  

What is an French Philosophy?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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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Badiou, 'The Adventure of French Philosophy', New Left Review 35, Sept Oct 2005. 

요즘 번역이나, 관련 서론 때문에 논의가 많이 되고 있는 New Left Review지에 실린 (이 글은 번역되지 않았다) 글이다. 매우 평이하고 간결하게 20세기 프랑스철학의 흐름들을 정리해 놓았다. 폴드만을 읽고 읽어서 그런지, 바디우 완전 친절하다. 물론 대상 독자도, New Left Review를 읽는 일반독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 같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에서 들뢰즈까지(바슐라르, 메를리 퐁띠, 레비스트로스, 알튀세, 푸코, 데리다, 라깡, 자신)이라는 풍성한 20세기 프랑스철학의 역사적, 지성사적 통일적 배경을  

1. 기원/ 2. 철학적 작업의 원칙/ 3. 문학과의 관계/ 4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끊임없는 논의 

라는 네가지 부분으로 살펴본다. 사실 이렇게 네가지를 나열하고 난 직후에, 20세기 프랑스철학의 지도를 바디우가 어떻게 그려내려고 하는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기원은 인간 주체에 관련된 문제들을, 삶과 개념과의 관계에서 논한 것이며(베르그송과 Brunschvicg) 

두번째 철학적 작업의 원칙은 개념과 그 외부적 환경을 논한 것(존재, 사상, 행동, 형식의 움직임) 

세번째 문학과의 관계는, 철학이 형식에 물음을 던지면서 자신의 언어 또한 새로운 형식으로 제출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네번째 주체를 중심 문제로 삼으면서 정신분석학과 대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이 책이 떠오른다. 홍준기 선생님 잘 계시는지..) 

 

 

이처럼 간명한 지도는, 나에게 다시 '주체'라는 문제 그리고 지젝이라는 '작가'와 만나게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역시 나는 남들보다는 항상 5~6년 정도는 느린 것 같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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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번역에 관심이 많다. 여러 번역관련 책들이나 학회의 풍문도 듣고 있고, 나름 -_-; 번역한 소설책도 5권이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시론도 하나 번역했으니, 남들이 들으면 진짜 '번역가'인 줄 알겠다. 휴우... 

게다가 6월에는 캐나다의 한국문학 작품 번역워크숍에도 참가해야 되서 이래저래, '번역'에 대한 나름의 입장이나 심미안(?)을 갖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폴드만의 '이론에 대한 저항'의 독중감에 쓰는 이유는, 역시 '좋은 번역'이란, 읽는사람의 목적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원래 폴드만은 알아먹을 수 없기로 유명한데 (글의 구조와 문장 자체 때문인 것 같다), 그의 글을 번역한다는 것은 번역하는 글의 대상독자를 명확히 설정하고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번역은 나에게는 꽤나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 '좋은 번역'이었다. 장경렬 선생의 의역과 대비되는 황성필 선생의 직역투와 많은 역주들은 영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본을 대비하면서 읽는 독자에게는 도움이 되는 번역이다. 이 책만을 가지고 폴드만의 '이론에 대한 저항'을 읽어내려고 시도하는 독자라면, 두 팔을 걷고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까... 물론 원문만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해독이 참 힘들다. 80년대 당대의 이론적 문맥을 어느정도 짚어내지 않고서는 따라가기도 힘들다.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2차문헌들로는 직접적으로는  

가 있겠고, 번역하는 와중에 황성필 선생이 참고한 책으로는 

가 있다. 

 

 

 내가 관련 문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됬던 글은 

 

에서 Patricia Waugh의 "Introduction: criticism, theory, and anti-theory"이다. 특히 이 글에서 약술하고 있는 (문학) 이론에 대한 서구 지성계의 담론사를 토대로 해서만이 폴드만의 불친절한 글들의 맥락이 이해된다. 이 글에서 폴드만의 위 글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A homeopatich art: 'theory' as the resistance to theory) 그 부분 번역을 게재해본다. 



그럼에도 로티의 논의는‘이론’과‘문학 비평’의 관계사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이를 정의하는 것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유용하다. 현재 간단히‘이론’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문학 이론’은 미학, 철학, 지성사, 인류학, 언어학 및 정신분석학이 신기하게 혼종되고 불안정하게 섞여서 발전되었으며,‘큰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문학 비평가들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담론에 그 연원을 두기는 하지만,‘이론’은 형이상학적인 견해나 과학적인 적절함에 대한 추구와 이러한 장엄함을 자칭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저항도 동시에 표출하였다. 로티의 논의보다 10여 년 앞서서 1982년 폴드만은‘이론에 대한 저항Resistance to Theory’라는 제목의 중요한 에세이를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이 긴장을 인식하고 이론의 주요 목적은 이론을 정의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밝히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에세이가 본래 현대 인문학에 관한 책에서 이론에 대한 정의의 장으로 현대 언어 학회에서 위촉받은 것이었다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이론을 정의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을 투고하자 편집진은 이 에세이를 거부하였으며, 드만의 개념으로는‘문학 학자’대표자로서의 그들의 욕망은 이론 그 자체보다도 더‘이론적’임을 증명했다. 당연히,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출간된 에세이가 자신의 게재 거부로 시작하여, 수사적인 격자구조(mise-en-abyme) 효과를 부여했다. 이는 이론의 정의불가능성에 대한 정의라는 에세이의 주제의 전조로서 기능한다. 크게 보아 이론은 개념적인 보편성의 체계에서 문학을 주해하고 평가하는 것에 대한 질문의 기초를 쌓기 위한 시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논의가 시작되기 이전에 언제나 문학에 대한 선험적인 정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론을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언제나 (논리적으로) 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고, 괴델 투로 말하자면 항상 일반화된 체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가정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심지어 신비평가들도 분명히 그들은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론가라고 평가한다. 드만은 기본적으로 이론 없이는 어떠한 비평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나, 이론은 철학과 융합되는 것에 저항하며 이는 이론의 핵심에는 필수적인 실용적인 순간에 대한 aporetic한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론은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실천의 양식이다. 문학 이론은 철학보다 더, 메타언어 즉 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으로서의 불가능성을 자각했다. 왜냐하면 문법이나 논리보다 수사를 전경에 그려서, 결국 철학적 텍스트와 문학을 구분하는 말의 아이스테시스(aesthesis)적 조건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드만의 에세이는 로티의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문학 이론은 시작부터 자신에 대한 저항을, 철학적으로 변해서 큰 그림과 서사시를 그리려는 것에 대해 스스로의 방어를 길러왔다. 드만이 이론에 대한 방어를 소쉬르 언어학적 설명을 토대로 여과하고 있지만, 또 그래서 탈구조주의자의 언어학적 전도의 억양을 주고 있지만, 이미 1962년에 앨리스데어 매킨타이어(Alisdair Macintyre)는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이론과 인문학에 있어서의 이론의 중요한 차이를 지적하였다. 그 차이는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사고하는 방법 자체가, 우리가 사고하려고 노력하는 것의 일부라는 점이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파악하려고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부분이 된다. 인간은 개념을 사용해서 우리가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왜냐하면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이론’은 존재하고‘기술’할 행동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여기에는 탈출할 수 없는 순환성과 미결정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문학 이론을 포함하는 인문학에서의 이론화의 끝없는 자기-검증의 가능성이 있다. 비록 우리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주장이‘덩어리’가 아니라‘텍스트’로 이루어졌다는 리차드 로티와 같은 신실용주의 철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과학적 이론과 문학 및 문화 이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인간 본성이나 인공물에 관한 이론은 자기반영적으로 인간 본성과 그 인공물을 형상을 만든다. 예를들어 후기 프로이드적인 세계에서‘무의식’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 우리의 정신적 삶을 이해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비록 우리가 그러한 전제를 명료히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사고하는 상태의 가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아에 대한 이론은 미래의 이론화의 형태를 제약하는 자아에 대한 실천으로 된다. 이는 문학을 쓰는 행위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 실천에 적용된다.

하지만 이는 또한 분명히‘이론’이 그렇게 많은 적대적 반응을 유발한 이유가 되고 있다. 이론은 진정한‘존재’, 향자존성(being-for-oneself)에 관한 인간 욕망을 좌절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데, 이는 우리가 항상 이미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사용하는 이론의 산물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문학도 자신의 개념으로서 이해될 수 없고, 정신분석학, 철학, 언어학 등의 외부의 담론들의 개념으로 이미 구성되고 조직된다. 이론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외부적인 것을 간섭시켜 미학을 독특하게 구체화된 지식의 대안적 양식으로 개념적으로 재현불가능한 것을‘드러내는 것(showing forth)'으로 파악하는 낭만적 휴머니즘의 유산을 위협한다. 하지만 드만이 보여주듯이 간섭되는 외부적인 것 또한 미학적 개념들에 거스르고 동화된다. 문학 이론은 자신을 지나치고 과학 이론의 명확한 상태를 열망할 때 텍스트의 세부적인 구체성과의 모든 접촉을 잃고, 리처드 로티가 비난한 진정성이 없는 이론이 된다. 이론은 단순한 견해나 가설에 지나는 것이 아니고, 종종 분석적이지만 과학 이론에서는 필수적이라고 가정되는 것과 같은 층위의 정당화, 증명, 반박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법칙의 정식화나 추론이나 시험의 대상도 될 수 없다. 로티의 나쁘거나 진정성이 없는 이론의 개념은 자립적 도그마로 퇴화하거나 칼 포퍼가‘유사과학적 주장’이라고 기술했던 것을 만드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근거 없고 세계화된 선언으로 시험되고 반박될 수 없고 단지 종합하는 도구로 취급되는 것. 문학 이론 내부에서 마주치는 문제 중의 하나는 탈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교과서적 버전의 교육학적 지름길이 체계적이거나 명확한 진실의 개념과 혼동되는 경향이었다. 이론은 도그마가 되고 공들이고 격렬한 논쟁이 아니라 단지 권위에 대한 복종이 되고 만다. 경직되고 선험적이며 설명적인 골격이 본래의 텍스트에 강요된다. 독서는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과학적 과정이 된다. 이론에 대한 저항 없이는,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이론화에 대항하는 꼼꼼하고 조심스러운 독서가 없이는, 텍스트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전에 알게되는 지루한 느낌이 생긴다. 그리고 이 결과 독서 대신에 이미 쓰인 주장과 해석에 들어맞는 예증을 찾는 것으로 참여가 이루어진다. 이론의 방어자들은 이러한 실천이 이론을 대중화하는 과정이라고 혹평했고, 데리다, 푸코, 라깡 등등의‘대가’의 말들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대가들이 기원이나 권위로 돌아가는 것의 개념을 이미 추방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또 다른 모순이 드러난다. 이론의 방어자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개별 이론과 문학 텍스트의 엄밀한 독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충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관련 이야기는 이 정도 하기로 하고, 이 폴드만이 하고 싶은 말은, 문학이론에 대한 저항은 문학의 수사적 읽기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며, 문학텍스트를 포함 텍스트의 '텍스트적 읽기'는 반드시 문법적 읽기에 국한될 수 없는 잉여내지는 애매함이 있다는 것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론 자체 내에 이론에 대한 균열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읽어내기 힘든 글이다. 폴드만 영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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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 영국사회/문화에 대한 논의인 2부를 읽기 시작했다. 2부는 칼럼같이 읽혀지는데, 흥미로운 논의들이 보인다.  

1장 '교육과 영국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논의는 지금 한국교육을 되돌아보는데도 도움이 된다.  

영국 교육의 역사를 중세시기부터 당대(1960)에 이르기까지 되짚으면서 19세기에 드러 교육제도/내용이 변화한 것은 '교육을 요구하는 조직된 노동계급의 발흥과 경제에 대한 확장되고 변화된 요구'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착이 되면서, '주권'을 가진 시민들의 교육의 필요성이 요청되고, 산업혁명 이래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미래의 성인이 되었을 때의 일'을 위한 직업학교식의 요청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 사회적 성격인 '규칙적인 습관, '자기절제', 복종 훈련받은 노력'을 가르치게 되었다. 

최근에 '대학나와서 뭐해, 취직도 안 되는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딱히 반론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왠지 반발심이 드는 이야기였는데, 대학=취직을 위한 직업학교라는 전제가 그러했다. 위 글을 읽다보면, '대학'이라는 교육이 적어도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 양성 교육의 일환으로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서 올바른 정치적 판단과 대중 문화/예술의 비평적 안목을 길러주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나중에 윌리엄스가 더 논의하겠지만, 이것이 중고등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쨌든 이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엘리트주의'대 '대중교육'이 나뉘어졌는데, '모든 인간은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고, 그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의 여부는 이러한 원칙을 정부가 스스로의 의무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민주주의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적 건강은 전문화된 일을 훈련받는 것 이상의 교육, '교양의' '인문적인' 혹은 '문화적인'이라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교육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스가 주장하는 교육의 원칙은 '교육받고 참여하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기준'이다. 이에 맞추어 실질적인 커리큘럼도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동의한다. '보통선거권에 기초한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은 '중요한 사회정책을 결정하는 책임이 국민 전체로 옮겨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교육에서 중심적이고 불가피한 중요성을 지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지적도 새겨둘만하다. 

'기존의 시스템으로는 현재 작동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대중문화 속에서 이 분야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단지 다양한 등급의 직업을 준비하는 교육을 유지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며 의도적으로 표현한 가치관이고, 도전하고 변화하는 주체의 표현이다." (237)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교육 시스템이 대다수 사람들을 참여 민주주의와 대중의 지지에 기초한 예술에 필요한 일반적인 지식과 교양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결코 적절한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없다." (238)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교육을 받는 모든 정상적인 아동의 최소한의 목표'를 제시한다. 

(a) 영어와 수학의 기본 언어에 대한 광범위한 연습 

(b) 우리와 환경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이는 별개의 과목으로 중등 단계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고등 단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분야에서 이끌어온 일반적인 지식으로서 가르쳐야 한다. 그 분야는 다음과 같다.   

    (i) 생물학, 심리학 

    (ii) 사회사, 법과 정치 제도, 사회학, 경제학, 실제의 산업과 교육을 포함한 지리학 

    (iii) 물리학과 화학 

(c) 역사, 문학, 시각예술, 음악, 연극, 조경과 건축에 대한 비평 

(d) 회의와 협상, 민주적 조직에서 리더를 선출하고 운용하는 일을 포함한 민주적 과정에 대한 폭넓은 실습. 도서관,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 및 다른 정보, 의견, 영향력의 원천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폭넓은 실습 

(e) 부분적으로는 방문과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주어지는 언어와 역사, 지리, 제도와 예술을 포함하여 최소한 한 가지 다른 문화에 대한 입문 (239) 

학교 선생님들의 제도적 업무를 줄이고, 방학 중에 선생님들의 자기계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한 학급당 아이들 수, 선생님들의 투자할 수 있는 시간/역량 때문에, 10여년전의 한국의 중등/고등학교 수업은 정말 유의미한 감동이나 지식을 전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윌리엄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가 교육에 바탕을 둔 참여 민주주의,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을 동반한 산업과 서비스의 미덕을 설파하기만 하고 기존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놓아두기만 해도 그것들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토피아적인 생각이다. 위에서 내가 제안한 내용들을 유토피아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본성을 파악하느냐, 혹은 도전받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을 힘들에 의해 고착된 소수의 지배계급과 중간의 전문가계급, 그리고 다수의 노동계급에 기초한 사회적, 교육적 패턴을 계속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세습되는 형태의 특권과 장벽은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시장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대체할 것이냐, 아니면 교육받은 민주주의 공통의 문화 가치를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공교육으로 대체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241) 

'교육받은 민주주의 공통의 문화 가치를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공교육'이라는 표어가 좋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육을 되돌아보면,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겠다고 하는 것만 떠오르지, 우리가 어떻게 '민주주의 시민'이 되는 자질을 기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전자는 '국가와 민족'을 '천황'이나 '왕'으로 바꾸면, 딱 '신민됨의 자세'를 외우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개혁이든, 힘들고 저항도 만만치 않다. '교육의 교과과정이란 선택되어 계승된 이해관계와 새로운 이해관계의 강조 사이의 타협을 나타낸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이는 개혁될 수 있을까. 아니면 '혁명'만이 유일한 길일까. 

윌리엄스의 논의는, 매우 긴 칼럼같은데, 칼럼 대로의 맛이 있다. 논의의 한계라면, 역시 담론 내부에 한정되지 않은 현실의 역학적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어떻게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내지는 현실화하기 위한 돌파구나 전선은 어디인가라는 부분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논의와 대비하며 읽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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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2 0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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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2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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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0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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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1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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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고 있다. 3번째 읽는 것 같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 무언가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이다. 여하튼, 예전 읽었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읽었던 상황만 기억이 난다. 서재에 예전 글이라도 있나 찾아봐야겠다. 이전보다는 물러서서 읽는 것 같다. 

개념을 운동하는 것으로 쓰고 있는 것이 흥미로운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한 국민 내부에서의 분업은 우선 산업 노동 및 상업 노동의 농업 노동으로부터의 분리를 가져오고, 그와 함께 도시와 농촌의 부리 및 양자의 이해 대립을 가져온다." (198) 

영어본을 찾아보면 "The division of labour inside a nation leads at first to the separation of industrial and commercial from agricultural labour, and hence to the separation of town and country and to the conflict of their interests." (43) C.J. Arthur Ed., Karl Marx and Frederick Engles, The German Ideology Part One,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revised edition 1970) 

어찌보면, "한 국민 내부에서의 분업은 산업 노동 및 상업 노동의 농업 노동으로부터의 분리이다"라는 규정식으로 쓰일 수 있는데, 이를 'leads at'이라고 쓴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 것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사적 유물론' 자체의 패턴이다. '지금-여기'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사고방식. 이의 전제는 A -> B로 변화했을 때, B를 이해하기 위해서 A를 해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A와 B가 질적으로 다를때, A를 보는 시각 속에 이미 연구자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어, 여기서 A를 해부한 것의 '도구'가 다시 B를 선규정할 수 있다. 

즉, 맑스, 엥겔스가 원시사회부터 추론해 낸 핵심적인 사적 유물론의 전제인 "도덕, 종교, 형이상학 및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성의 가상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자립적] 발전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 현실적인, 살아 있는 개인들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며, 의식을 단지 그러한 개인들의 의식으로서만 간주한다." (202)를 논의했을때, 이는 원시사회에서, 또 어쩌면 고대사회까지 타당할지 모르지만, 분업과 '지식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발생하고 그들 사이의 네트워킹과 담론의 '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담론들은 담론 내부의 질서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운동하기 시작한다. 처음의 관계가, 이제는 질적으로 다른 관계들과 배치들로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A -> B로 변화하였다고 해서, A가 B의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논의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윌리엄스는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식의 논법이 아니라 '전체'에 대한 욕망을 들어내고, '이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윌리엄스를 더 읽어나가면서 비교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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