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혼자였고, 성인이 된 후에 '길을 잃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이리저리 발이 닿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네온사인, 기분 좋아보이는 취객들의 비틀거림, 젊은이들의 말소리, 한편에 공사중인 우중충한 철근 콘크리트, 낡은 공중전화박스. 도시의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그 도시의 밤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어지러웠다. 하늘에 걸린 달이 유독 커보였다. 비틀대며 걸었다. 도시의 낯선 면모들, 수많은 형형색색의 가면들. 황홀했다. 길을 다시 찾으려는, 어디론가 가야겠다는 생각을 접고, 도시에 취했다.

나희덕의 아래 시를 읽으며, 다시 밤도시의 낯선 풍경, 그 매혹에 취해본다.

 

 

 




육교 위의 허공    -나희덕

좁고 가파란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빛나는 마천루가 있었지
육지와 육지를 잇는 다리 위로
밤길을 건너는 밤길,
허공을 건너는 허공,
신호등이나 건널목이 없이도
그 길을 따라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었지
지상에서는 잡을 수 없는 두 손이
때로 어두운 허공 위에서 놀란 듯 만났지
새로운 지평선이 펼쳐지고
6차선 도로가 오선지처럼 출렁거리고
두근거리는 도시의 동맥 속으로
차들은 피톨처럼 점점이 빛을 뿌리며 흘러갔지
그러나 경적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어
두 손에 든 허공을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
다만 숨죽이고 있었으니까, 심해의 물고기처럼,
시냇가의 반딧불이처럼, 거기가
도심의 누추한 육교라는 것도 잊은 채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공중그네를 타고 있었지
육지와 육지를 잇는 다리 위로
밤길을 건너는 밤길,
허공을 건너는 허공,
지상에서는 잡을 수 없는 두 손이
어두운 허공 위에 또하나의 길을 내고 있었지



서울에는 야경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값비싼 식당(아니 '레스토랑')이 몇군데 존재한다. 와인이나 샴페인을 기울이며, 높다란 '스카이라운지'에서 야경을 즐길수도 있겠다. 유리로 가로막혀 밤의 찬공기와는 무관하게 적정하게 관리된 온도와 습기에 둘러쌓여서, 풍경을 타자화하는 높이와 편안한 의자와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어두운 야경에 유리창은 밝은 레스토랑 안을 반쯤은 투과하고, 반쯤은 밖이 보일터이다.

철저히 격리되어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적당한 거리로 인해 낭만적이지만, 때문에 그렇게 매력적이거나 어지럽고 환상적이지는 않다. 나희덕은 육교 위에서 바라본다. 높이, 소음, 추위... 모두 야경 속에 있으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과 단절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바라볼 수 있는 자리. 그 곳에서 시인은 취한다.

'신호등이나 건널목'없이도 '다른 세계'로 가게 하는 다리. '밤길을 건너는 밤길/허공을 건너는 허공'
그 곳에서의 '새로운 지평성', 그 아래로 지나는 '6차선 도로'는 '오선지'처럼 출렁이고, 나를 향해 다가오다가 멀어지는 차들은 '피톨처럼 빛을 뿌리고' '두근거리는 도시의 동맥'으로 사라진다.
시인은 심해의 물고기, 시냇가의 반딧불이 되어 '공중그네'를 타는 기분으로 육교 위에 서 있다. 도시에 취해, 시인도 빛을 내며.

밤이란 검다. 검기 때문에 작은 빛들이 환하다. 밤에 도시는 심해의 물고기떼, 시냇가의 반딧불 무리들로 살아난다. 차들은 빛을 내며 사라진다. 공중그네를 타는 것 같다. 어지럽다. 기분 좋은 나른한 어지러움. 취한다.

육교. 밤길을 건너는 밤길, 허공을 건너는 허공, 마주 잡은 두 손, 허공 위의 길, 여기서 밤에, 도시에, 밤 도시에, 낯선 밤 도시에 취한다.

(somun.info에 원래 올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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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나름(?) 고생해서 쓴 문제집 나왔다;; 역시 나오고 보니, 더 열심히 해서 뭔가 특수하고 특별하고 특이한(?) 문제를 낼 껄 하는 생각이 든다.

뭐 과외하는 애들한테 '강매'를 시키려다가 그냥 사주려고 알라딘에서 주문했다. 쩝;;;

ㅎㅎ 요즘 최고로 주목받는다는 젊은 평론가 형철이형과 박사논문 쓰시고 계신 래섭이 형과 함께 쓰게 되서 영광이다. 이 중 역시 연륜있으신 래섭형의 문제들이 가장 깔끔하고, 형철이형의 문제들은 심오하고, 내가 낸 문제들이 제일 구리다. ㅜㅠ 진짜 솔직히;;;

내년에는 쫌 더 세련된(?) 문제를 내봐야지. 그 때는 너무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처음 문제를 만드는 것이라서 너무 힘들었다. 풀때는 모른다, 문제 만드는 이의 고충을 ㅜㅠ

'적당히' 어렵게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왜 내가 만든 문제들은 그리 쉬웠나;;; 담에는 이제 쫌 요령을 알았으니 참신하고도 '적당히' 어려운 문제를 내야지, 하고 위로해 본다.

막상 그 때 되면 안 그럴 것도 같지만;;; 그 때는 정말 연구 많이 해서 낼거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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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2-1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기인 2006-12-15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당~
이 문제집이 많이 팔려야, 저도 안 굶어가며 책도 사볼텐데요 ㅎㅎ

werpoll 2006-12-1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즐겨찾기네요. 축하드려요 나중에 한번 풀어볼게요 ㅎㅎ

건우와 연우 2006-12-15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마늘빵 2006-12-1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축하해요!

가넷 2006-12-15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축하드립니다.ㅎㅎ

LAYLA 2006-12-15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축하드려요

기인 2006-12-1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ㅎㅎ
뭐 사실; 많이 팔리면 축하해주세요 ㅜㅠ
토탐정님/ ㅋ 풀어봐주세요. 고등학생 이신가요? 모르거나 구린 문제;; 있으면 질문해주세용~ ^^*

기인 2007-01-04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l님/ ㅋ 친하다기 보다는 어려운 선배죠 ㅎ 문자보낼께요 ^^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연 1행의 신새벽 뒷골목은 2연을 참고하면 민주주의가 탄압을 받는 공간이라는 의미와 곧 ‘아침’ 즉 민주주의가 도래할 시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화자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이름’을 쓴다는 의미는 이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의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화자는 머리로도 발길로도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되었다. 다만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그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화자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남 몰래’ 쓰게하는 힘이 된다. 민주주의라는 사상을 ‘남 몰래’ 써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1연의 ‘신새벽 뒷골목’은 2연의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이다. 여기서는 쫓고 쫓기는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곧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가 난다.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긴박한 상황이 ‘소리’들의 점층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소리들 속에 그리고 화자의 가슴팍 속에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깊이 새겨져 있다. 이는 지금의 상황이 비민주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비명소리’는 민주주의가 가슴팍에 깊이깊이 새겨지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외로운 눈부심’으로 표현된다. 고통에 빠진 모든 이들이 바라는 이름임으로 ‘눈부심’에 가득차 있지만, 누구도 진정 이와 함께하지 못하고 있기에 이는 ‘외로운 눈부심’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외로운 눈부심’은 삶의 아픔, 추억으로만 남은 푸르른 자유,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을 화자에게 떠올리게 한다. 이에 분노하는 화자는 떨리는 손과 가슴으로 백묵으로 나무판자에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너무도 강하기에, 민주주의를 배반하고 사람들을 탄압하는 현 상황, 죽어간 벗들에 대한 기억들이 그를 분노하게 하면서도, 너무도 슬프게 하기에, 또 ‘남 몰래’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쓰는 상황 자체가 비참하기에 그는 ‘숨즉여 흐느끼며’ ‘남 몰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적는다.

 

*배고파서 글도 대충 썼다~~~ ㅜㅠ 오늘 분량 2개 더 써야하는데 힘이 없다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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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와 연우 2006-08-1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골목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로 조용조용 따라부르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김지하라는 이름이 아득합니다. 좀 난감하기도 하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저 시를 가르쳐야 할 입장이라면 뭐라고 설명할까, 하고...^^

기인 2006-08-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쩝. 글이 아니라 '말'로 한다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인데요. 분량 제한과 배고픔(?) 때문에 그냥저냥 '정답' 비스무리한 이야기만 쓰고 말았습니다 ^^;
 

 

 

 

 

봄은 간다


                                       김억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라는 영화가 있었다. 행복한 시간은, 청춘은, 사랑은, 지나간다는 의미이다. 김억의 이 시 또한 비슷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각운을 비롯하여 동일한 음절, 음운을 반복함으로써 독특한 운율적 효과를 얻고 있다. 이는 김억이 각운이 구현된 많은 수의 프랑스 시들을 번역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어로 근대적인 자유시를 쓰는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던 김억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한국어로 시를 쓸 수 있는지, 시란 무엇인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험해보는 방법 중 하나는, 당대 외국시들을 한국어로 번역해보는 일이었다. 즉 보고 배울 ‘선생님’이나 ‘선배’가 없었던 그는 외국 작품에 구현된 운율과 이를 이루는 각운이야말로 시를 결정짓는 요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어떻게 시 속에 구현되었는지 살펴보자.

 

1연부터 ‘밤이도다/봄이다’라는 대구를 보여주고 있다. ‘밤’과 ‘봄’은 초성을 둘 다 ‘ㅂ’으로 시작하고 종성을 둘 다 ‘ㅁ’으로 끝내며 이 둘이 각각 양성모음 ‘ㅏ’와 ‘ㅗ’로 연결되어 있다. 이 짧은 1연은 시적 상황을 나타내며 동시에 시적 정조를 보여주고 있다. 밤이라는 시간은 일상의 낮과는 다른 시간이며 낭만적인 시공간이다. 봄 또한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이며 낭만적인 사랑의 시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봄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서가 어울릴 수 있지만, 시인은 곧 이어 ‘밤만도 애달픈데/봄만도 생각인데’라고 하여 애달픈 밤과 생각이 많아진 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왜 일까? 2연은 ‘~인데’로 끝나고 다음연에서 ‘~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밤만도 애달픈데/봄만도 생각인데//날은 빠르다/봄은 간다’라는 것이다. 밤이라는 시간 자체도 애달프고, 봄이라는 시간 자체도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데, 이 봄밤은 빠르게 지나가니, 더욱 애달프고 생각이 많아진다.

 

이렇게 깊은 생각에 ‘아득이는’ 화자에게 슬피우는 새 소리와 종소리가 들리고, 검은 안개도 보인다. 그 외에는 조용하고 고요한 봄 밤. 화자에게 밤은 서러운 시간이지만 말이 없고 고요하다. 말이 없고 고요하니 더욱 서럽다. 이 때 꽃이 떨어진다. 꽃은 봄의 상징이자, 봄을 대표할 수 있는 대유이기도 하다. 이는 ‘봄은 간다’라는 내용과 같은 의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지막에 ‘님은 탄식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마지막은 일종의 반전과 같다. 지금껏 우리는 화자가 홀로 있는 줄만 알았고, 그저 봄밤에 취해 우울해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화자의 곁에는 ‘님’이 있었고, 그는 탄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화자가 그렇게 ‘봄밤’에 우울해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봄’이라는 청춘, 사랑의 상징적 계절 속에서 그리고 ‘밤’이라는 연인들의 시간 속에 함께 있는 ‘화자’와 ‘님’이지만 ‘님’은 꽃이 지는 것을 보고 고요히 말없이 탄식만 하고 있다. 이별을 짐작할 수 있다. ‘봄은 간다’라고 시인은 제목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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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8-15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별을 예감하는... ^^

기인 2006-08-15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꼼꼼히 읽어보니, 슬퍼요 ㅜㅠ

기인 2006-08-15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다시 댓글 보니, '이별을 짐작하는' 을 '이별을 예감하는'으로 바꾸는게 좋지 않겠냐는 말씀이시지요? ㅎㅎ 으음. 저는 (독자가)그들이 이별한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라는 뜻으로 쓴 건데요. 이별을 예감할 수 있다, 라고 하면 쫌 상투적 표현 같아서 ^^a '이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로 썼는데.. 어색한가요?
호옴..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

프레이야 2006-08-15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랄까. 직감은 관념적, 이성적인 느낌이지만 예감은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예감'이란 말에는 녹아있는 것 같구요.^^

기인 2006-08-1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별을 직감할 수 있다'라는 화자=긴의 말은 이성적으로 시를 본 느낌이 들지 않나용? 쿄쿄

프레이야 2006-08-1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위의 댓글에 '짐작'을 직감으로 잘못 쳤네요, 제가요.. 님의 글 마지막 줄 중 '이별을 짐작할 수 있다'에서요.. 짐작... 확실히 이성적인 느낌~~ㅎㅎ 기인님 글 아무튼 좋아요.. 책 나오면 꼭 소개해주세요^^

기인 2006-08-1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ㅋㅋ 부끄러워요 *^_^*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

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이 시는 보통 안분지족의 삶의 태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보다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화자의 어조이다. 화자는 독백이 아니라 청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겠소’ ‘~지오’ ‘~있오’라는 표현을 살펴보면 지금 화자가 남으로 창을 낸 작은 초가집에서 살면서 안분지족한 삶을 살면서 자연에 동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것이라는 소망을 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화자는 갑자기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고 자신의 소망을 표출하게 된 것일까. 화자는 계속 자신의 상상을 이어가면서, “밭은 조그마한 ‘한참갈이(새참 한 번 먹을 동안이면 갈아 버릴 수 있는 작은 밭)’이면 되겠고, 구름이 꼬이든 말든 새 노래를 들으면서 살거야. 강냉이가 익었을 때 자네가 놀러오면 함께 먹자고. 그런데 이런 내 삶에 어떤 목적이 있냐고? 왜 사냐고? 왜 사냐고 물으면 난 웃겠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상상 속에서의 삶은 안분지족한 삶이며 자연친화적인 삶이다. 그리고 이것을 꿈꾸며 상상하고 있는 화자는 지금 그렇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상상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서 꼭 이에 대한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 속에서 화자가 상상하는 내용을 ‘안분지족, 자연친화’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왜 이 화자, 또는 왜 이 시인이 이런 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보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시인 김상용은 이 시가 발표된 당시 33살의 나이로 이화여전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때는 1934년. 당시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신간회가 해소되고, 만주사변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죽은지도 2년여가 흘렀다. 점차 식민지 시기 지식인들은 해방에 대한 전망과 자신감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일본을 파시즘 국가로 만드려는 쿠데타도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화자는 갑갑한 현실에서부터 벗어나서 ‘남으로 창을’ 내고 밭으로 ‘한참갈이’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이상향은 단지 시속에서만 가능한 상상이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화자는 ‘남으로 창을 내고’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남으로 창을 내겠소’하는 소망만을 시로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암담한 상황 속에서 쓰인 시였기에 이처럼 담담하고 소박한 화자의 소망이 더 진솔하게 표현되어 70년 후의 우리가 공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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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1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참 좋아하는 십니다. 퍼가요^^

기인 2006-08-14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