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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안 하고 보기 시작하던 스타트랙 DS9 시리즈는 의외로 재미있다. '우리'의 해방공간을 보는 듯. 이번화에는 극우 민족주의 테러리스트 집단이 등장한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이라고 할까. 사실 이러한 의열단식의 테러리즘은 1920년대 중반에 이미 비판받는다. 상해에서 '상해청년동맹'은 도산식 점진주의, 이승만식 외교노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의열단식 테러리즘을 비판한다. '폭력'은 꼭 필요하지만 그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제도여야 한다는 것. 그러나 '어떻게'에 대한 대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제도를 파괴할 것인가.


해방공간 상에 연방정부(즉 미국)와 임시정부 사이를 매개하는 위치에 있는 타나(여주인공)은 노선은 조금 달랐지만 옛 동료였던 테러리스트를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기존 테러리즘 조직에서 탈퇴하겠다고 하며 임시정부 쪽에 가담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 속임수였고, 그는 베이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연방정부에 가담했다고 타나를 비난하는 그와, 여기서 갈등하는 타나.

일제 강점기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언제나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떠한 판단을 하고 어떠한 집단에 들어가서 활동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1920년, 1930년, 일제 말기 파시즘기, 그리고 '도둑과 같이' 찾아온 '해방공간'. 미국이 남한을 신탁통치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떠한 판단을 했어야 할까.

김구처럼, 분할통치 반대. 이것이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아니면 남로당계 박헌영? 혹은 몽양 여운형?

최근 새로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으로 여러 말이 많은데, 좌파 대 우파라는 대결구도로 가져가는 것은 너무 섵부른 것은 아닌지 생각이 된다. 재인식을 전체적으로 읽어본 것이 아니고, 몇몇 논문들만 들춰봤는데 그렇게 '반동'이라고 읽히지는 않았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문학 파트를 담당했던 김윤식 선생은 최근 한 강연에서, 시기가 달라졌으니 나올만한 책이라고 한 것이 인상깊었다.

어쨌든 이 '공간'은 다시금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백범 김구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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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ㅎㅎ 저는 석사논문을 쓰고 있는 -_-; '기인'이라고 합니다. 석사논문을 쓰면 본격적으로 저도 '알라디너'가 되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도 참여해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

그때 나에게  

너는 온세상으로

존재했었지

 

너의 슬픔은

영혼의 무게만큼

투명한 아픔



노을의 끝에

홀로 섰다, 추억을

배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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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4-19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기인님... ^^
논문 마무리 잘 하시길...

해적오리 2006-04-19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첨 뵙네요.
왠지 모르게 짜릿한 싯구입니다.
@-&--
@-&--

논문 마저 잘 쓰시구요, 서재에서 뵈요. ^^


기인 2006-04-20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반갑습니다. ㅎㅎ ^^
 



스타트렉 Deep Space Nine 의 첫번째 화 'Emissary(使者)'는 흥미롭다. 은하연방은 60년간 식민통치에서 풀려난 '베이조'의 요청에 따라 이들을 보호하게 된다. 이 베이조 행성의 궤도를 도는 소위 '우주정거장'(이라기 보다는 우주 소도시)의 사령관이 주인공이다. 쉽게(?) 말하면 일제 식민통치가 끝나고 독립을 하려는데 미국이 와서 보호라는 명목에 위탁통치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기존 독립운동가들 중 화끈한 사람들은 이에 반대를 하고 (예를 들어 우리의 김구 선생처럼), 정세를 계산할 수 있는 이들은 외세의 힘을 얻으면서도 빨리 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려 하게될 것이다. (사실 김구가 해방정국에서 어느정도의 정세파악을 하고 있는지 정말 미지수다. 고등학교 교육에서는 김구를 위대한 민족운동가 중 거의 대표격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정확한 정세파악과 정치적인 힘에 있어서는 역시 여운형이 대세가 아니었을까 싶다. 따른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 속에서 초점화자로 '미군 사령관'이 설정이 되었으니, 역시 미국이 자랑하는 드라마이다. 변방 제국의 탐사를 우주탐사라는 알레고리로 묘사한 점,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이제 전지구적 제국이 이루어졌으니, 우주로 나가는 수 밖에.

 

 

 

 

그리고 스타트랙에서 묘사하고 있는 '제국' 또는 '연방'은 그렇게 드러내고 폭력적이지는 않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할 때만 도움을 두고, 중립적인 위치에 서고자 노력한다. 이라크의 미국과는 물론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스토리 상에서, 첫번째와 두번째화는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기억은 아스만이 지적한 것처럼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한다. 드라마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외계 생명체와 만났을 때 인간은 경험의 총체요, 선형적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이라고 답하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

 

 

 

 

이 괴생명체는 '시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육체'를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외계'생명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스타트랙에 등장하는 '영어'를 쓰는 대부분의 외계인은 '인간형'으로 미국 배우들이 분장을 하고 탈을 뒤집어 쓴 것에 불과하다. 스타워즈의 '요다'는? 이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그저 '인종'들의 차이에 불과할 정도로, 비스무리 짬뽕하게 생겼다. 진짜 '외계' 생명체라면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 살고, 다르게 구성이 되있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마이클 크라이튼이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이번화에서도 제법 '외계'스러운 존재가 나타난다. 그는 '시간'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주인공은 갖은 애를 다 쓴다. 이 와중에 만약 주인공이 이 '외계'존재를 이해시켰다면, 이것이야말로 미국 제국주의적 사유이다. '계몽'을 통해 타자를 자신의 사유와 동일화 시킬뿐, 자기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말로 계몽의 폭력성이고, 제국주의적 사유의 핵심이다. 자신은 '이성'을 지녔고, 이를 통해 '야만'인들을 '계몽'시킬 수 있다는 것. 결국은 '야만'의 파괴일 뿐인 것을.

그러나 이 드라마가 역시 '건강'할 수 있는 것은, '외계'존재들을 이해시키려고 하면서 결국은 스스로가 자신이 '선형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현재'를 살지 않는다는 것. 시간은 단지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속을 살며, 때로는 '미래' 속을 산다. 우리가 어떠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나 '그 곳'에 존재하는 것. 첫사랑을 회상하고, 이제 사라진 소중한 것들을 추억할 때 그것은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예상하고 상상하고 들떠있을 때, 우리는 '미래'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깨달음은 '외계'존재와 주인공을 '소통'하게 한다. 1~2화는 여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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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스칼렛 요한슨을 처음 본 것은,  '판타스틱 소녀백서'(2001)에서의 엉뚱하고 멋있는 여주인공의 이쁜 친구로서였지만, 실제로 '그녀'를 주목하게 된 것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에서 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 이 영화를 보고 그녀의 필모그라피를 검색해 본 결과 '판타스틱 소녀백서'로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었지, '판타스틱 소녀백서'에서 그녀는 그리 빛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검색 결과로 놀란 것은 그녀의 나이. 1984년 11월 22일 생! 키 163cm. 이런! 84년생이라니. 한국 연예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마 중학교 졸업 후이겠지만, 요즘 tv를 켜면 나오는 연예인들 대부분이 80년대생이라는 사실에 깜짝깜짝 놀랄 뿐이다. 그런데, 스칼렛이 84년생!

여하튼, 스칼렛이 아름답게 나오는 이 영화는 전직 테니스 선수가 상류계급에 편입하기 위해서 부잣집 여성과 결혼을 한다는 스토리. 그 과정에서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그러나 상류계급의 안락한 삶에 적응(?)된 남주인공은 결국 자신에게 매달리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스칼렛을 제거(!)하고 자신의 안온한 삶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스토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그런 것이지만, 역시 문제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 우디 앨런 감독 특유의 먹물 근성과 대사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과 즐거움을 준다.

보면서 계속 느껴지는 것은 '상류계급'의 아비투스(habitus)



 

 

 

 

주인공은 프로 테니스 선수를 그만두고, 고급 테니스 클럽에 코치로 들어간다. 얼마전에 딴지에서 골프와 테니스 중 어떤 것이 더 고급 스포츠인가 하는 설문을 했듯이, 테니스는 전통적인 상류층의 스포츠이다. 물론 동네 아파트에서 테니스를 치는 것이 아닌, 컨트리 클럽에서 테니스를 치는 것. 여기에 다니는 사람은 모두 상류계급이며 '그들만의 리그'를 돈독히 한다. 이 리그에 편입하기 위해서 그는 그들의 아비투스를 모방하려고 애를 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며, 이에 대한 개론서도 함께 읽음으로서 '그들'과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토론을 하며 오페라를 듣는다.

 

 

 

 

테니스, 도스토예프스키, 오페라, 승마, 사격, 샴페인.(부르디외의 연구에 따르면 '샴페인'은 문화자본과 상업자본이 많은 층이 애용하는 아비투스라고... 어쩐지 나는 마셔본 기억이 없다. -_-; ) 이와 자신의 핸섬한 미모와 매너를 이용하여 마침내 상류계급의 여성과 결혼을 통해서 그는 '그들만의 리그'에 진입한다. 영화는 내내 상류계급의 아비투스와 그들의 매너를 지루하지 않게 보여준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주인공과 스칼렛의 진짜 모습이다. 스칼렛 또한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서 상류계급의 남자와 만나지만, 그들은 한눈에 서로 끌린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나, 비슷한 아비투스를 갖은 그들. '그들만의 리그'에서 외로운 가면놀이를 하고 있던 그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은 보다 철저히 아비투스를 매개로 상류계급의 일원에게 인정을 받지만, 스칼렛의 유일한 무기는 그녀의 미모였을 뿐. 스칼렛은 버려지고, 남자 주인공은 결혼에 성공한다.

이제 문제는, 바로 '불륜' 혹은 일부일처제의 비인간성(?).

 

 

 

 

 

'불륜'은 말그래도 '윤리가 아니다'라는 것. 그러나 사회생물학적으로, 일부일처제는 과연 옳은 것일까. 끊임없이 불륜이 문제시 되는 이유, 뜨악한 한국영화 제목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 혹은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것? 그 이상의 사회생물학적인 이유들이 있을까.

 

사회생물학은 매우 매력적인 학문분과(?)이다. 에드워드 윌슨이 '지식의 대통합'으로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합치되어야 하고 합치될 수 있는 매개로 내세운 것이 바로 '사회 생물학'이다. 사회학, 인문학 또한 넓게 보아 생물에 대한 학이며, 생물에 대한 학으로서 인간과 사회가 설명될 수 있다는 것!

어쨌든 영화에서 너무 멀리 나왔으니 다시 되돌아가자면, 여기서 주인공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안온한 삶과 매력적인 정열적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은 전자를 선택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운'에 대해 남주인공-상류층 여성/스칼렛-상류층 남성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이다. 상류층 사람은 '열심히 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스칼렛과 남주인공은 '운'이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논한다. 일반인이 보았을 때, 상류계급은 특히 2세의 경우 '운' 때문에 그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이 생각을 진전시키면, 이 사회의 불평등성에 대해서 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반면에 상류계급의 인간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차지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맑스 할아버지께서 보았으면 그들의 '착취'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셨으리라.

 

 

 

 

결국 주인공의 범죄도 '운'에 의해서 봉합이 된다. 첫장면에 테니스에서 네트에 공이 맞았을 때, 이것이 상대편 네트로 넘어가면 승리요 네트를 넘지 못하면 패배이고 이는 순전히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과 마지막에 주인공의 아기에 대해서 상류계급의 일원들도 '운'이 이 아기와 함께 하기를~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아... 결국은 운 좋은 놈이 장땡이란 말인가....

결국 실력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다는 것은 만화에서만 가능할 뿐인가! (재미있게도 '해피'라는 만화에서 주인공이 연습하는 첫번째 필살 샷은 의도적으로 네트를 맞추는 것!)

 

 

 

 

아니면 만화에서는 '실력으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라는 지배이데올로기를 배포할 수 밖에 없는, 배포 해야만하는 '대중예술'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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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매스컴과 현대사회'라는 수업을 들었다. 속칭 '매현사'라고 하는 수업이었는데, 꽤나 인기 수업이어서 100명이 넘는 수강생들이 들었다. 이 수업과, 이 수업에 추천한 책들을 읽어나감으로서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필터로서의 '매스미디어'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비판적으로 읽어야만 된다는 '사실'은 '사실'로서 신문과 뉴스를 접해왔던 나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스미디어'는 큰 자본이 투하되는 일종의 '사업'이다. 때문에 이윤을 발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문, TV의 주된 이윤은 어디서 올까? 독자들의 구독료, 시청자들의 시청료? 물론 아니다. 매일 열장이 넘는 신문들이 한 달에 2만원도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몸값 비싼 연예인들이 하루 온종일 나오는 TV는 시청료를 내본 기억도 까마득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업'은 어떻게 유지되는 것일까.

물론 광고료이다. 때문에 신문이나 TV는 자신의 주수입원인 대기업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의 '자매사'인 중앙일보는 말할 것도 없고, 메인 주간지들은 대기업이라는 '주인'을 비판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공중파는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데, 국가가 상당한 양의 주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TV광고주들의 대부분이 또 대기업이다. 이렇게 우리는, 국가와 대기업들의 입김이 상당정도 삼투되어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문의 독자나 TV의 시청자는 제한되고 가공된 정보들 속에서 서서히 그들의 입맛에 맞게 세상을 바라보고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안적인 매체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라크 전에서의 '알 자지라'방송 같은 매체, 또는 적은 자본으로 중요 일간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정론들을 피력하는 '말'지나, 인터넷의 '오마이뉴스', '딴지일보'와 같은 통로는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최근 개봉된 조지 클루니 감독의 'Good Night, and Good Luck'은 이러한 대중매체의 외부적 압력과 이에 맞서는 언론인들의 고투를 보여준다. 그 유명한 '빨갱이 열풍'의 '매카시' 상원의원과 대결하여 마침내는 그의 악질적인 마녀사냥 수법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불편했던 심정은, 자본주의나 정치권력과 언론의 유착에 대한 폭로보다는 결국은 미국의 장점과 그 이상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지 않았나 하는 심정 때문이다.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이라는 명저는 미국인들의 이상을 '미국 혁명'이라는 원초적인 장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미국의 선거를 보면서 계속 골때리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각 주마다 상원의원 2명과 인구수 비례 하원의원을 뽑는 상원-하원 제도, 각 주마다 투표를 해서 몰아주기를 통해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 각 주마다 법체계가 달라서 살인범이 주 경계를 벗어나 사형제도가 없는 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 등등, 도저히 3천리 국토의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이는 '개인'과 '국가' 사이의 상충에서부터 비롯된다.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해도 미국의 주들에서 총기가 허용되는 이유는 이러한 '개인'의 자기방어 때문이라고 한다. 국가에 의해서 침해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라는 것이다. 영화 '굿 나잇, 앤 굿 럭'에서도 이러한 점이 표나게 강조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침해될 수 없는 권리를 부인하는 이가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200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언론에 대한 비판보다는 미국의 이상을 강조하고 있으니 갑갑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청년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아름답게 묘사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당시 프랑스 구권력을 비판 견제하며,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이상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2005년 시점에서 조지 클루니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라크 침공의 온갓 거짓들과 고문들을 은폐하려고 애써 노력하는 부쉬 행정부를 꼬집은 것이 의도였다면, 이 영화는 언론인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들의 투쟁과 외부의 압력에 더 초점을 맞춰야 되지 않았을까?

또 개봉된, 조지 클루니가 출연한 영화 '시리아나'를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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