쩝. 스필버그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위해 들려주는 동화. 혹은 스필버그라는 수조원대의 갑부 아이가 꿈꾸는 미국 사회.


스티븐 스필버그는 '미지와의 조우'라던가 'E.T.'를 통해서 외계인에 대한 기존의 공포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제 '동구권'이 대상인가. 어쩌면 9.11. 이후 동구권은 미국에게 예전만큼 큰 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는 물론 이슬람이쥐.


근데 재미있는 것은, 본 영화가 '이란'인이 실제로 난민보호 서류를 잃어버려서 11년동안 공항에서 산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란인'을 캐스팅했을 수는 없겠지. 관객이 안되니까. 이 영화도 관객이 별로 안 들었다고 한다. 톰 행크스는 대표적인 백인 미국 남성이었는데, 갑자기 동구권 아저씨로 나오니 말이다. 사실 영화 초반에 이는 관객들에게 극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저해 요소가 된다.


동화 답게. 선인은 승리한다. 온 동네를 다 친구로 만들며. 재미있는 것은 블루칼러 일들은 모두 유색인종이 맡았고 그들의 감독은 백인이라는 것이다. 아. 물론 주인공도 백인이다. 요리담당은 멕시코 사람이고 청소부는 인도 경찰들은 흑인인 식이다. 음. '리얼'하게 현실을 그려서 비판적 의도가 있는 것인가(별로 그런것 같지는 않는데..) 아니면 실제 청소부나 요리담당을 '백인'으로 그리면 관객들에게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인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서 그들을 그리기 위해 쓸데없는 정보가 필요한 것인가. (대중들에게 널리 인정된 '스테레오타입'은 캐릭터를 설정하고 관객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가기 쉽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캐릭터는 이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한국 드라마에서 예를 들면 못생긴 재벌집 아들 같은거 -_-; 사실 이거는 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서도. 음. 여주인공 아닌 착한 부잣집 딸 같은거; 말이다. 이건 반드시 관객들에게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그런 캐릭터는 스토리의 전개상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에 역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쩝.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풍기었던 스필버그 아저씨는 다시 이를 꺼내든다. 음...


스필버그에게 해주고 싶은말. 'grow up' (알아보니 이는 예전부터 많은 평자들이 스필버그에게 지적한 것이라 한다... 혹자는 불안한 유태계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스필버그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피터팬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라고 하던데.. 영화 '후크'를 떠올려보자..)


혹은.. 원래 그래야 돈 버는지도 모르겠다. '할리우드'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렇게 귀엽고 이쁜 영화 아니면 단순무식 때려부시는 액션 영화.. 인가...


아니면 무슨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일까.

9.11. 테러 이후 부쉬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


-.-; 너무나도 단순해서 이래저래 복잡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실사 디즈니 영화. 터미널.

인생은 무언가 소중한 것을 기다리는 것일 뿐이라는 교훈(?)과 함께 착한 사람이 승리하고 모든 사람들은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격언(?)을 내려준다. 2시간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는 않지만, 영화가 끝나면 한숨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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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이다. 다소 작위적이고 말이 안되는 부분들이 있다. 솔직히 '나비효과'라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중 타임머신 타고 공룡을 사냥하는 이야기가 훨씬 잘 짜야져 있다. 공룡을 한 마리 죽이면, 인류가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그런것이 나비효과이다.

 

 

 


스토리를 짜마추다보면 어설픔이 느껴진다. '감독판'이 그래서 있는 것일 터. 여러 암시들이 부합하려면 '감독판'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감독판'에도 해결하지 못한 것, 진정한 '나비효과'까지는 턱없이 못미친다는 것.


그럼에도 이 영화가 충격적인 것은. 나는 '지금-현재'를 살고 있고, 절대로 지금과 다른 '지금-현재'를 살 수 없다는 것.


신림역에서 영화를 보았다. '신림역 사람들'이라는 냄새를 '압구정역 사람'인 나는 갖을 수 없다... 그런 것이 두려웠다. 내가 '너'가 될 수 없다는 것. 또. 나는 내가 쌓아간 하루하루를 통해, 나는 내일의 내가 될 것이라는 것. 지금의 내모습에 나는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


나는 지금 내가 부끄럽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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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슈퍼맨의 등장이다. 이 영화는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고독한 물음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본'은 홀로 다친 몸을 이끌고 걸어가며 카메라는 거대한 아파트를 비춘다. 인간소외, 군중, 익명성, 고독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이 말은 단지 직장을 가지고 가족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경제적, 성적 필요성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아는 관계를 통해,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 '본'은 기억도 없고 혼자이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혼자이다.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직장 상사, 부하 마저도 없다. 그는 군중 속을 걸어가지만 그 곳은 무인도이다. 그에게는 그 마저도 없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물을 수 밖에 없다. 'who was I?' 현재의 관계를 통해서 확인 받지 못한다면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받아야만 한다. 아니면 '나'라는 것은 없다.

언제나 슈퍼 히로들은 고독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실제로 자기 자신인 슈퍼 히로인지를 숨기고 현실 생활에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을 '알아주는'이가 없고, 그들의 삶은 분열되어 있다. 그러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슈퍼 히로일 때의 삶에서의 위안과, 일상 생활에서의 즐거움을 동시에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본'은 그렇지 않다. 일상 생활이 없고, 관계도 없다. 그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였는가?'를 묻는다. 그에게 '지금'은 없음으로 그는 '과거'를 바탕으로 자신을 재구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에 킬러였다.

그러나 그의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과 그 여인이 죽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이 여인과 그녀와의 관계가 '본'의 핵심이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CIA 관찰관이 그의 과거를 말해주려고 할때, 그가 거부 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는 이제 'who I was'를 묻지 않는다. 그는 분명 킬러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를 극복한다. 그녀는 죽기 직전 그에게 그가 킬러'였음'과 상관없이 그는 지금 '그'임일 수 있음을 말한다. 그 당시 그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간절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대답이 있다. 그는 이제 그녀가 사랑하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나'로서 위치를 규정할 수 있고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그녀의 간절한 눈빛은 한발의 총성과 함께 흐려진다.
'적'들에게 '본'은 아직도 킬러이다. '본'은 다시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를 물으러 나선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즉 '마리'가 그것을 원치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그녀는 '그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즉 영화는 본과 마리의 모습과 대화를 통해 매우 처음에 이미 '본'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준비해 놓았고, '본'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해답을 자기화하게 된다.

그에게 그가 킬러였음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의 정체성은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서 보장되었다. '본'은 스스로를 그녀와 사랑을 했던 '본'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본 영화는 더욱 쓸쓸해지고, 우리의 슈퍼 히로는 더욱 불쌍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었고, 그 이후에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녀를 사랑한 '본'으로 규정짓기 시작하였으며 '킬러'를 바라는 CIA와 대립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이제 그 여자를 사랑했던, 그리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갔던 그 '본'이다. (영화의 처음에 그는 분명히 말한다. 내가 떠오르는 추억 중 아름다운 것은 그녀와의 관계뿐이라고) 스스로 그렇게 인지하며 그는 더 이상 킬러이기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그를 킬러라고 생각하는 CIA와 러시아의 비밀요원은 아직도 그를 찾고 있다.

그러면 이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선택의 폭은 적다. 그가 그임이 그녀와의 관계와 그 추억에 의해서 확인되었지만, 그 기억은 점점 옅어질 것이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그 관계 속에 '내'가 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자신의 기억을 부정한채, '일반인'으로의 위장 잠입의 형태로 될 것인가. 이는 기존의 슈퍼 히로의 이중현실과 마찬가지의 패턴이 될 것이다. 그들은 두 현재를 살지만, 본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절로.

아니면, 다시 본은 어떠한 경로로든 자신의 '적성'과 '과거'를 살려 킬러가 될 것인가. 그러나 이는 애써 정립했던 그녀의 애인으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녀와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떨쳐내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 쉽지 않은 행로이다. 이제 그 대답을 하게 될, 3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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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랙 시리즈는 정말 놀랍다. 특히 일제 식민지를 겪은 한국의 입장에서 Deep Space 9 시리즈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는 해방정국의 한국과 너무도 흡사한 상황이다. 특히 Ep19는 전쟁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문제, 민족주의-제국주의의 문제, 그리고 '윤리'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여러 혼란에도 불구하고 연방의 도움하에 자리를 자리잡아 가고 있는 베이조 공화국. 예전 독립투사였던 키라 소령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에 불타는 여장부로서 연방과 베이조 공화국을 매개할 수 있도록 우주기지에 부사령관으로 복무중이다.

 그런데 어느날 연방의 통제 하에 있는 우주기지에, 카다시안 전범이 질병 치료 문제로 들리게 된다. 이 남자는 베이조의 특수한 광산에서만 걸릴 수 있는 병에 걸려있었고, 때문에 그는 베이조의 노동자들을 유린하고 착취했던 사람에 분명했다. 남편 앞에서 부인을 강간하고, 노인을 생매장하는 등의 '활동'을 했던 그들. 키라는 그를 전범재판으로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카다시안인은 탄광에서 단순한 '서기'에 불과했다. 조사가 진행되자 그는 탄광 책임자이자 베이조인들을 살육한 인물로 밝혀진다. 그러나 더 조사가 진행되자, 그는 베이조인들을 살육한 총책임자를 자칭한 '서기'에 불과한 것으로 최종적으로 밝혀진다.

그렇다면, 뻔히 사형 당할 것을 알면서도, 왜 그는 자신이 탄광의 총책임자라고 밝혔을까? 그는 '카다시안 제국'을 위해서 그러한다. 제국은 식민지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그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믿으며, 자신이 재판에 회부됨을 통해서 카다시안 제국에도 일말의 반성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다시아인들이 베이조인들에게 저질렀던 천인공노할 범죄들이 재판과정에서 공개됨으로서, 카다시아인들은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또, 탄광 시절 베이조인들의 비명과 카다시아인들의 살육을 목도했지만 괴로워할 수 밖에 없었던 일개 '서기'로서의 책임 또한 해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가 전쟁 책임자로 자청한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정국의 한국의 상화과, 지금의 '한-일'관계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한다.

식민지에서 해방된지 어언 60년이 지났지만, 식민지의 잔혹한 일제의 기억들은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민족주의적 주체로 호명하게 한다. '우리'라는 집단의 정체성은 우리가 공통으로 기억하고, 또 망각하는 것을 공유함으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어떠한 스포츠든 '한-일'전에 열광하며, 최근 독도문제만 하더라도 인터넷 사이트등에서 욕설 가득한 네티즌들의 모습들.. '우리'는 식민지를 기억하며, 동시에 우리는 '지금'의 한-일 관계를 망각한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수출입 관게 5위안에 들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다. 일본의 '한류' 열풍과, 한국에서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청년들. 일본을 여행하고, 일본문화를 좋아하면서도 '한-일'전과 독도문제에는 일본에 대한 증오감을 표출하는 '우리'.

스포츠 한-일 경기의 카타르시스는 '식민지 경험'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식민지 경험은 '우리'에게 열등감, 증오, 수치심, 과 일말의 도덕적 우월감을 부여한다. 이러한 열등감, 증오, 수치심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정직한' '룰'에 의해서 규정되는 스포츠 공간 안에서의 경쟁이다. 국가간 대항 스포츠는 일종의 대리 전쟁과도 같은 것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상상적으로 일본과 재전쟁을 벌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식민지 시기 일본을 대표했던 조선의 마라토너 손기정과 관련한 '신드롬' 또한 이를 반영한다.


 

 

 

이렇게 끝나지 않는 식민지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본의 공식적인 전쟁 책임이 일본이라는 상상적 공동체의 중심에 서 있는 '천황'에게 물어지지 않았던 것과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공식적으로 전쟁과 식민지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더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증오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 안에 있던 '친일파'들에 대한 분노로도 연결된다. 천황이 미국 신탁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것처럼, 이승만 정권 초기 반민족특위 또한 친일파들이 정치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유야무야 흩어지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그렇다면 '친일'과 '비친일'의 경계는 무엇인가. 일제 헌병대원이었다면 무조건 '친일'인가. 아니면 낮은 계급이면 '면제' 될 것인가. 면서기는 어떠한가. 변호사는? 의사는? 지식인들은? 특별한 저항을 하지 않고, 직장에서 일하고 또는 농업에 종사하며 일정부분의 소득을 총독부에 '세금'으로 낸 사람들은 어떠한가? 여기서 '우리'는 식민지의 '회색지대'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어느정도 양보해 둔다고 하자. '우리'는 고통과 착취를 당했고,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때문에 '우리'는 일제에 죄를 물고, 죄값을 받아내야 한다. 그러나, 일제 또한 의열단이나 애국청년단과 같은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그 와중에 '그냥' 일본인들도 죽었다. '우리'가 '우리'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싸웠다면, '그들' 또한 '그들'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싸웠던 것이다. 그들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죄값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하지 않다. '죄'를 저지른 '법적 주체'에게 우리는 죄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체'만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라는 것은 '구조'의 효과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때, 하나의 행동은 그 전의 상황에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 또한 시냅스의 연결 등에 의한 물질적 화학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 것. 인간은 사회구조 속에서 행위하고, 그 행위는 사회구조에 의해 '이미' 제약되어졌을 뿐이다. 기존 가정교육, 학교교육과 같은 ISA는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접하게 되는 매스미디어가 매개한 정보들, 사회제도 등등...

주체는 텅 비어 있을 뿐, 실체가 없는 효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전쟁책임'을 한 개인에게, 개인들에게, 집단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칸트, 그리고 이를 구체적인 일본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책임'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고찰하는 가라타니 고진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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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부터 노현정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상상플러스 올드 & 뉴'를 보기 시작하여, 이제는 매우 열심히 시청하고 있다. 오락성과 공공성을 함께 가져가려는 KBS가 성공한 프로 중 하나이다. 요즘은 이휘재의 손가락 욕이나, 노현정 아나운서의 안티들 때문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그래도 꽤나 재미있으면서도 배우는 것도 많은 프로그램이다. 또, 노현정 아나운서도 무척 이쁘고 말이다.

프로그램 상에서 비속어나 외래어 대신에 '우리말'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조금 거부감도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상파 tv라는 영향력 큰 매체에서 많은 고유어들을 다시 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 그러면서도 프로그램 제목은 '상상plus Old & New'라는 것은 조금 아이러닉 하지만.

꼭 '우리말'만을 사용하자는 것은 언어민족주의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국어 반 한국어 반으로 대화하는 몇몇 '인테리'들도 거부감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문화자본과도 연결될 것이고 일종의 '구별짓기'로 작용하는 것 같다. 특히 문제시되는 것은 법전과 의학용어들. 일본식 한자어로 무장(?)한 법전과 영어와 라틴어를 그대로 가져다쓰는 의학용어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고 또 최근에 이르러서는 작은 성과도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세대간의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 '미제'라는 단어 때문에 최근에 겪은 에피소드가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세대'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J군은 20대 중후반의 청년이고,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J군의 아버지는 50대 중반으로 한나라당의 지지자이다.



이런 J군이 오랜만에 집에 갔다. 딴에는 효도를 하겠다고 아버지와 같이 장도 보고 했다. 그 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꿀 미제야"

J군은 순간 당황했다. '미제(米帝)'라는 용어를 아버지가 쓰시다니. 50대중반 한나라당 지지자요, 삼성맨이며 ROTC 장교 출신의 아버지가 '미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쓰다니. 이 용어에 대한 추억은 한 96학번 선배가 커피는 미제꺼니 마시지도 말아야한다는 말을 80년대 학번 선배에게 들었다는 말을 듣고 놀란 새내기 시절의 나에게로 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순간 놀랐던 마음, 이후 쇼핑이 끝나고, 이틀 집에서 묵고 다시 자취하는 방으로 돌아가서 곰곰히 따져본 이후에야, '미제'라는 것이 '美製'인 줄을 알았다.

아. 우리 세대에게 있어 '미제'라는 말은 美製가 아니라 米帝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자로 인식되었던 것.

이렇게 쓰는 단어에서부터 아버지와 J군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갭이 있다. 어찌보면 가장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는 부자관계. 언젠가 J군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가 전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단정하시면 화를 내기까지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심연을, 우리는 어떻게 건너야 할 것인가. 이제 조금 있으면 5.31 서울시장 선거. 우리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美製인가, 米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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