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정부론』

공의가 타락하고 ‘필터 버블‘이 공적 토론을 오도하면서 교양과 품격, 실력을 두루 갖춘 대표자가 예전보다 더 귀해진 느낌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무를 담당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진지하게 한 번 읽어봐주셨으면 싶은 책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주권이 국가 구성원 전체에 귀속되는 온전한 민주적 지배를 실현하면서도(‘평등하게 대표되는 전체 인민에 의한 전체 인민의 정부‘), 다른 한편으로는 능숙한 전문가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숙련 민주주의 skilled democracy‘를 꿈꾸었다. 이것을 위해 ‘소수파의 발언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의정부론』은 밀의 정치철학이 집대성된 책이다. ‘좋은 정부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이상적인 정치체제인가‘에 관한 대부분 주요 쟁점에 대한 그의 ‘성숙한 견해‘가 온전히 담겨 있다.

정치인들의 언어가 자꾸 전문가 등 특정(내/외)집단을 적으로 돌리고 희생양 삼는 포퓰리스트의 그것에 가까워진다. 밀이 19세기에 이미 늘공과 어공의 효과적인 배치와 운용을 깊이 고민했던 것을 보니 놀랍고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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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선집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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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정부론』 중에서... (교수님의 진짜 전공 분야라 그런지, 다른 편보다 번역이 매끄럽다고 느낀다.)

밀도 어쩔 수 없이 시대적, 인종적, 민족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싶은 내용도 있지만(다만, 그는 스스로 그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인하는 편이다),

훌쩍 미래를 내다보았다 싶은 대목이 많다.

좋은 정부인지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구성원들의 여러 바람직한 자질, 특히 도덕적, 지적, 활동적 자질을 얼마나 잘 발달시킬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 인상 깊다.

오늘날에도 대의기구 안에서 지지파를 규합하거나 반대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최악의 인물을 임명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 상당수 기구가 특별한 자격요건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사형집행대에나 올라서야 할 정도로 형편없는 작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자신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그 어떤 일에도 적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공공기관이 임명권을 행사할 때 정당의 입김에 영향을 받고 사적인 친분관계에 휘둘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총체적인 능력이 탁월하다는 명성 때문에 (이는 때로 전혀 합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또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인물을 임명하곤 한다. - P559

어떤 일이 잘못되면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일을 잘못되게 만든 것이 미연에 방지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결론을 당장 내리는 사람들이 길게 볼 때 세상을 가장 잘 발전시킬 수 있다. - P531

위대한 정치가란 전통에 부응할 뿐 아니라, 필요할 때 그것을 부술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전통에 대해서 무지한 채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인간의 일반적 경험이 인정하는 행동원리를 철저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런 통상적인 행동원리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환경에 대해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다. 공공기관이 하는 일에 따라 형성되는 이해관계, 그리고 그런 일을 특정한 방식으로 처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결과들을 평가하고 그 의미를 따져보자면, 관련 지식과 특수한 전문적 판단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에 단련되지 않은 사람이 그런 지식과 판단을 구비한다는 것은 법을 정통으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그쪽 분야를 개혁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행정부의 어떤 특별한 행위에 관한 결정을 내리려 하는 대의기구는 분명 이 모든 어려움을 간과할 것이다. 그것은 무경험이 경험에 대해 판단을 하고., 무지가 지식에 대해 판단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모르는 것의 존재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는 무지는 조심성이 없을 뿐 아니라 거만하기까지 하다. 자기의 판단보다 더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판단에 대해 적대감까지 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쨌든 애써 무시한다.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으면 그래도 봐줄 만하다. 실제로 이해관계가 걸리면, 여론의 감시를 받고 있는 정부 공직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부패보다도 더욱 뻔뻔스럽고 대담한 부정축재를 자행할 것이다. 이해관계가 얽힌 편견이 의회의 다수파에까지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 P556

사실 입법 활동은 그 어떤 지적인 작업보다도 더 오랜 실제 경험과 장기간의 힘든 공부를 통한 단련을 요구한다. (...) 모든 법 규정은 그것이 다른 법 규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대단히 정확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어 검토하고 난 뒤에 만들어져야 한다. 동시에 새로운 법은 기존의 다른 법과 조금이라도 어긋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제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잡다한 사람이 모인 의회에서 조문 하나하나를 놓고 투표하다가는 이런 조건을 충족할 수가 없다. (...) 오늘 이 순간에도 원래의 취지에 어긋나는 현행 입법 과정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 관련 문제에 대해 최고 전문 지식을 갖춘 권위자들이 모든 사항에 대해 꼼꼼히 검토한 뒤에 특정 법안을 만들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는 특정 주제에 관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몇 년에 걸쳐 검토하고 다듬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에도 하원이 자신의 어설픈 권위를 내세워 그런 법안에 대해 시비를 걸면서 통과시켜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누군가의 사적인 이익에 대한 집착 때문에 또는 법안 심사를 지연시키겠다고 위협하는 고약한 의원 때문에 법적 일관성이 없는 내용이 끼어들어 온 경우도 있다. 현안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잘난 척하면서 슬쩍 끼워 넣은 법조문 때문에 처음 발의를 했던 사람이나 그것에 찬성했던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결국 더 큰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다음 회기에 부랴부랴 문제의 법안을 다시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입법 상태가 이 모양이다. - P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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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7월에 나온 책인데, 큰 기대를 안 했지만 교과서로 쓰였기 때문에 가지는 의외의 유익이 있다.

  가볍게 읽으며, 책이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들을 다시 정리하고, 놓쳤던 문헌들을 채워본다. 


  제1장 프랑스의 정신적 가치


  1.1. 톨레랑스 정신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번역은 국가인권위원회 뉴스레터 참고하여 일부 수정하였다. http://www.humanrights.go.kr/hrletter/110801/pop01.html)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de 1789


제1조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Article 1. Les hommes naissent et demeurent libres et égaux en droits. Les distinctions sociales ne peuvent être fondées que sur l'utilité commune.

[주: 1789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기는 했지만, 공공"선"이 아니라 공공의 "효용(이익)" l’utilité commune을 들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참고로, 벤담(1748~1832)은 당시에 이미 사회개혁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프랑스혁명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프랑스 제헌의회에도 많은 서신을 보냈다. 1792년 프랑스 명예시민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9084684 참조.]

  

제6조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하여 그 형성에 협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법은 보호를 부여하는 경우에도 처벌을 가하는 경우에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지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

Article 6. La Loi est l'expression de la volonté générale. Tous les Citoyens ont droit de concourir personnellement, ou par leurs Représentants, à sa formation. Elle doit être la même pour tous, soit qu'elle protège, soit qu'elle punisse. Tous les Citoyens étant égaux à ses yeux sont également admissibles à toutes dignités, places et emplois publics, selon leur capacité, et sans autre distinction que celle de leurs vertus et de leurs talents.

[주: 국가인권위원회 뉴스레터는 la volonté générale를 '일반의사'라고 옮겼으나, 이것은 당연히 루소(1712~1778)의 개념으로, '일반의지'라고 옮겨야 한다. "능력capacité에 따라서", "덕성vertus과 재능talents에 의한 차별"과 같이 요즘 피상적으로나마 쟁점이 되고 있는 '능력주의'적 관점이 드러나있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몽테뉴(1533~1592) 『에쎄(Essais, 수상록)』 [중 특히 '레이몽 스봉 변론L’apologie de Raymond Sebond', 이른바 '회의주의적 관용론' https://fr.wikisource.org/wiki/Essais/Livre_II/Chapitre_12, https://youtu.be/kpyXQoRATWA]


"다른 사람들은 불확실한 추측으로 그대를 짐작할 뿐, 그들은 그대의 기교를 보는 만큼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견해에 매이지 말고 그대 자신의 판단에 따르라."


인간 이성의 한계

“우리는 존재와 아무런 소통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성 전체는 언제나 출생과 죽음의 중간에 있으며, 그 자체로는 어두운 겉모습과 그림자 그리고 불확실하고 어리석은 이견밖에는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파악하려고 그대들의 사유를 집중한다 해도 그것은 물을 움켜잡으려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본성상 사방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아무리 꼭 잡아 쥐어보아도 자기가 잡아 움켜쥐려고 하는 것을 잃게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Nous n’avons aucune communication à l’estre, par ce que toute humaine nature est tousjours au milieu entre le naistre et le mourir, ne baillant de soy qu’une obscure apparence et ombre, et une incertaine et debile opinion. Et si, de fortune, vous fichez vostre pensée à vouloir prendre son estre, ce sera ne plus ne moins que qui voudroit empoigner l’eau : car tant plus il serrera et pressera ce qui de sa nature coule par tout, tant plus il perdra ce qu’il vouloit tenir et empoigner.


인간의 오만

"참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을 상상한다고 생각하면서 바로 자신을 상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본다. 그들은 신을 자기들의 척도로 비교하는 것일 뿐 자기를 신의 척도로 비교하는 것은 아니다."


똘레랑스와 민주주의적 토론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그의 논거에 대해 내세우는 반대를 언제나 웃으면서 받아들인 것에 대해, 그것은 그가 가진 힘 덕분이며 그 이익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 반대를 새로운 승리의 이유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반대로 우리의 우월성에 대한 생각과 적수에 대한 경멸이 반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가장 민감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고쳐주고 교정해주는 반대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오히려 약자라는 사실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실로 나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도 거칠게 대하는 사람과 더 교제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들을 찬양하고 우리들에게 양보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싱겁고 해로운 즐거움이다. (...) 나는 내 적수의 약점으로 내가 그에 대해 얻는 승리로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언쟁이 한창 뜨거워질 바로 그때 내 적수의 이성의 힘에 내 자신을 굴복시키면서 나 자신에 대해 얻는 승리에 대해 더욱 자부심을 느낀다."





  로크(1632~1704), 『관용에 관한 편지(Epistola de tolerantia, 1689)



  "개인은 자신의 유일한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 『시민정부론』




  볼테르(1694~1778)와 '장 칼라스 사건'


“수도원장님, 저는 당신이 쓰는 글을 싫어하지만, 당신이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것입니다.” - 볼테르, 「Riche 수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Monsieur l’abbé, je déteste ce que vous écrivez, mais je donnerai ma vie pour que vous puissiez continuer à écrire.


"[불관용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선험적으로 유죄라고 평가하도록 이끄는 정신적 태도" - 『관용론』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속성이다. 우리 모두는 약점과 오류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서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자. 그것이 자연의 최초의 법칙이다. 조로아스터교 신자, 바라문교 신자, 유태교 신자, 마호메트교 신자, 중국인 신자, 브라만교 신자, 그리스정교 신자, 로마 기독교 신자, 개신교 기독교 신자, 퀘이커 기독교 신자는 암스테르담이나 런던 혹은 쉬라트나 바소라의 상품거래소에서 함께 거래하지 않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에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로에게 칼을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1차 니케야 공의회 이후 거의 중단 없이 서로를 죽였는가?” - 볼테르, 『철학 사전』



  루소(1712~1778)


"인간관계에서 불관용의 원칙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일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게끔 강요하는 폭력에서 분명 드러날 것입니다. 나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일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냉혹하게 지옥에 밀어 넣는 모든 사람들을 원칙적으로 관용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 루소, 「볼테르에게 보내는 편지」


"종교 교리는 오직 그것이 도덕과 관련되는 범위 한에서만 그리고 이 종교를 믿는 자가 타인에 대해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와 관련되는 범위 한에서만 국가 및 그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는다. 각자는 그 외에 자기가 원하는 의견을 가질 수 있으며, 주권자는 굳이 이것을 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영적 세계 안에서 아무런 권한도 없는 만큼, 내세에서 국민들의 운명이 어떻게 든 간에, 그들이 이 세상에서 선량한 시민이기만 하면 그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 『사회계약론』


"'공동의 힘을 모아 각 구성원의 신체와 재산을 방어하고 보호해 주는 연합의 형태 그리고 각 개인이 전체와 결합되어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함으로써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연합의 형태를 찾는 것' 이것이 곧 사회계약을 통해 해결해야 할 근본적 문제이다." - 『사회계약론』


"오로지 욕망의 충동만을 따르는 것은 노예적 굴종 상태이고 스스로에게 규정한 법을 따르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 『사회계약론』


"진정으로 관용적인 사람은 죄에 대해서는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사악하게 만드는 교리라면 어떠한 것도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 『산에서 쓴 편지』


"자유로운 국민은 복종할 뿐 섬기지 않는다. 그는 지도자를 가질 뿐 주인을 갖지 않는다. 그는 법에 복종하는데 오직 법에만 복종할 뿐이라서 사람에게는 복종하지 않는다. (…) 자유는 언제나 법과 운명을 같이 한다. 자유는 법과 함께 유지되거나 소멸한다." - 『산에서 쓴 편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 『자유론(On Liberty, 1859)』


  자유론은 다시 한 번 다룰 계획이어서 아래 구절만 인용한다. 좌표 찍기가 일상화된 시대라...


"곡물 중개상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배곯린다거나 사유재산은 강도짓이나 다름없다는 의견을 신문 지상에 발표한다면, 이런 행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곡물 중개상의 집 앞에 모여든 흥분한 폭도를 상대로 그런 의견을 개진하거나 그들이 보는 데서 그 같은 내용의 벽보를 붙인다면, 그런 행동을 처벌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 서병훈 역, 『존 스튜어트 밀 선집』, 383-4쪽.




  기타


"개인주의를 자유와 평등의 적으로 여기며 (1848년에 생각했던 것처럼) 공격하는 것은 자유의 토대를 세우는 일이 아니다. 자유는 본질에서 개인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개인주의에 대한 공격은 원시 공산주의와 봉건적 예속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사회와 인간을 동시에 파멸하는 일이다." - 푸르동 『소유권론』


"톨레랑스는 자신의 확신을 포기하거나 그것을 표명하고 옹호하고 유포하는 일을 삼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폭력적이고 부당하고 기만적인 수단의 사용을 금하는 데 있다." - 고블로, 『철학용어 사전(1901)』


"관용적인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이것이 톨레랑스에 한계를 부과해야 하는 이유이다. 사회는 사회를 붕괴시키는 행위와 그런 행위를 하는 구성원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할 의무는 전혀 없다." - 존 롤즈, 『정의론




Paul Ricœur, "Tolérance, intolérance, intolérable", Bulletin De La Société De L'Histoire Du Protestantisme Français (1903-), vol. 134, 1988, pp. 435–452. JSTOR, www.jstor.org/stable/24296238


"톨레랑스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존중이어야 한다. 나의 것과 다른 신앙, 내가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 견해들, 나에게 충격을 주는 행동이라도 아무 제약 없이 표현되어야 한다." - 로제 폴 드루아, 「톨레랑스의 얼굴들 Les visages de la tolérance」, franceculture 인터뷰 (2016. 9. 4.) https://www.franceculture.fr/emissions/talmudiques/les-visages-de-la-tolerance



11월 16일, UN 지정 '세계 똘레랑스의 날' (1995년은 '세계 똘레랑스의 해')

https://www.un.org/en/academic-impact/international-day-tolerance-16-nov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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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7월쯤 읽다 덮어둔 책을 다시, 마저 읽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1918~1933)부터 나치 정권 초기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미의식을 정치화하려 했던 독일 신보수주의 지식인(보수혁명론자)들의 초상과 그들의 반정치적 이념을 다뤘다.

  나치즘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탐구되어 마땅한 주제인데, 국내에는 참고할 문헌이 많지 않다.

  선구적 연구는 이종훈, "독일 신보수주의 이념의 형성과 전개: 1853~1933(下)", 역사학보 제97집 (1983).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465065

  이 책을 쓴 저자의 "바이마르 시기 '보수혁명' 담론에 나타나는 반근대주의", 독일연구: 역사, 사회, 문화 창간호(2001). 한국독일사학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www.germanhistory.co.kr/page/page_view?menu_num=88


  한때 비판자로서의 보편성을 (지금 와서 보면 우연히, 한시적으로, 일부나마) 담지하였으나, 어느덧 종파주의적 권력의지만 남아 칼 슈미트적 결단주의로 퇴행해버린 정치세력이 오버랩된다.

  지금의 반자유주의, 반지성주의적 정치 지형을 보면, 어느 쪽이라도 극단적, 파국적일 것 같아 우려스럽다.


  헌법이론가 카를 슈미트의 경우야말로 민주주의 개념을 보수혁명적으로 전유한 대표적 사례이다. 그의 『헌법론』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국가 형식 및 정부-또는 입법 형식으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명령 하달자와 복종하는 자 간의 일치이다." 슈미트의 민주주의관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를 모델로 했으며 따라서 그것의 기본 원리는 전 구성원 간의 "일체성"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근대 의회민주주의의 대의 체제는 민주주의 본연의 일체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결국 의회민주주의는 천박한 대중민주주의로 전락할 운명이라는 것이 슈미트의 입장이다.

  보수 혁명론자들에 의한 민주주의 개념의 도용은 이처럼 매우 자의적이었으며 결코 그들의 반민주주의적인 정치관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았다.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그들은 민주주의 개념을 자신들의 결단주의 정치관에 맞게 변조시키는 교묘한 방식을 통해 수행했던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보수주의 특유의 문화 비판의 시각에 따라 모든 종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불신하고 오로지 혁명적 결단만을 호소했다. 보수 혁명 담론은 이처럼 모순에 가득 찬 담론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갖가지 어휘들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려 든다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데올로기 대신 행동을 요구하면서도 스스로 추상적인 언어 게임에 몰두해 있고, 민주주의를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독점하려는 이들이 바로 보수 혁명론자들이었다. (책 77-8쪽)


  20세기 독일 보수주의 정치·헌법 이론의 거두인 슈미트는 "사회세력"에 의한 국가의 장악과 이로 인한 "정치적인 것"의 소멸을 근대 문명의 핵심 문제로 부각시켰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이상적으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개개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친구와 적"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갖는다. 친구와 적은 항시 상대적이며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이 "결단"을 요구받는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속성이다. 그런데 유럽의 전통 세계에서 이러한 정치적 결정권은 "절대주의" 국가에 집중되었고 그럼으로써 유럽 민족들 특유의 "법질서"가 유지되어 왔다. 이제 근대에 이르면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통해 정치적 결정권이 "사회 세력"들에게로 분산되며 이에 따라 "정치적인 것"은 "자유"나 "평등"과 같은 부르주아의 추상적 이념과 그들 개개인의 무책임한 사적 이익 추구에 의해 해소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자유주의적 "의회주의 입헌국가"의 이상은 의회가 민족의 정치적 통일성을 "대표"한다는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개별 사회집단이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장소로 기능했으며 결국 관료주의적으로 조직된 "대중정당"이 주도하는 "다원주의적 정당국가"로 변질되어버렸다. 슈미트에 따르면 한 국가가 "민족" 전체의 이해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총체적 국가"가 되어야 하며 "영도자 국가"야말로 그것의 이상적 형태라는 것이다.

  카를 슈미트는 (...) 모든 종류의 허위 의식을 내던져버리고 오직 구체적 행동 노선으로의 과감한 결단을 촉구했다. (...) 그들이 현실 정치 체제에 대해서 품었던 불만이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정책적 대안과 결부되지 않을 때 그것은 행동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추상적인 문화 비판과 과격한 행동벽의 결합이야말로 바로 이 허무주의적 담론의 근본 특징이었던 것이다. (...) 전체적으로 볼 때 보수 혁명론자들의 정치관은 반정치적 참여의 성격을 띠었다. (책 82-4쪽)


  샹탈 무페의 지적처럼, 인민주권이 독재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몽테뉴, 볼테르, 로크,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져 내려온 똘레랑스적 자유주의의 회복이 절실하다.

  김상범, "자유주의적 관용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2012)도 참조.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120581/1/000000010130.pdf


  책 69쪽의 다음 표는 대단히 유용하다(인용자 재작성, '게오르크 크바베'는 언뜻 찾아서는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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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실의 시대,

생각을 멈춘 많은 분들이 사리 분별력을 위탁한 채 가상현실 속에 살고있다.

이 폭주와 만용의 끝은 어디일까. 어떤 계기로 사람들은 마침내 빨간 약을 선택하게 될까.

책세상 판에 번역된 부분은 2009년에 다른 번역으로 읽은 적이 있는데,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읽는 번역이 조금 더 매끄러운 것 같다.

무지의 시대에 사람들은 가장 악독한 행위에도 아무런 의구심을 갖지 않는다. 깨달음의 시대에는 가장 선량한 행위를 하면서도 불안에 떤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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