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기초
아쿠타가와 야스시 지음, 방현희 옮김, 유형종 감수 / 미진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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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셋째 아들이 쓴, 음악의 기본 요소들에 대한 본질적 접근. 재출간해 널리 읽혀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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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악법 - ORCHESTRATION
WALTER PISON / 태림출판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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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 나 있는 기본서... 지난 번에 한번 올리긴 했는데, 볼 때마다 너무 새롭다. 음향의 테피스트리를 견고하고 아름답게 짜기 위한 직조기술.

실무와 결합된 여느 학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허심탄회한 반복이 중요한 것 같다. 수문당에서 나온 박영근 편 『악기론』, 세광아트의 나운영, 『관현악법』을 헌책방에서 구해 참고하고 있는데, 결국 베를리오즈/R. 슈트라우스 『악기론』, 림스키 코르사코프 『관현악법』, 새뮤얼 아들러, 『관현악 기법 연구』를 읽어야 할 것이다.

Walter Piston,
Fantasy for English Horn, Harp & Strings
https://www.youtube.com/watch?v=wUsQeGXRfiU&feature=youtube_gdata_pl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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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30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학이 싫은 친구들에게 음악부터 가르치면 좋겠다..생각해요.
대위법과 평균율..등..수학이라면 질색하던 저인데..바흐가 너무 좋아서 그의 평균율이 ..삶의 수학같더라는..경영서 이론은 몰라도..

묵향 2015-01-30 15:43   좋아요 0 | URL
아! `그장소` 님! 정말 좋으신 생각이세요^^ 삶의 수학으로서의 평균율... 정말 멋지네요~

[그장소] 2015-01-30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의 평균율을 이해하다보면 어쩌면 아이에게 쉽게 접근할수있지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되곤 하죠.수학머리는 나쁜데.
ㅎㅎㅎ 자녀들을 위한 많은 곡을 남긴 바흐..감동스럽기도하고요.
 
현대관현악기법
카셀라 외 / 수문당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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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책이지만 저자 두 분의 음악을 몇 개 찾아 들어 봤는데... 아니, 세상에 이런 곡들이 있었나 싶어 너무 깜짝 놀람!!! #.#

Alfredo Casella,

Symphony No.2, Op.12
https://www.youtube.com/watch?v=02MMhs3mcTU&feature=youtube_gdata_player

Virgilio Mortari,

Sonatina Prodigio
https://www.youtube.com/watch?v=awZSeoKKcJg&feature=youtube_gdata_player

Fox-Trot futurista
https://www.youtube.com/watch?v=NNt7TqojlTk&feature=youtube_gdata_player

"비록 이 책이 주의깊게 쓰여졌다 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책은 틀림없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하며, 어느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무엇보다도 매일매일의 실습과 삶의 경험이 유용하듯이 '노력'으로써 그리고 때때로 실패의 고통과 투쟁하기도 하면서 얻는 그 경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악기론의 어려운 기술을 공부하는데 젊은 학생들에게, 우리는 요즈음(인용자 주 : 1940년대^^;;;) 쓰이고 있는 일반적인 악기들의 현상태와 그것들의 가능성에 대하여 가능한 한 시대에 부응하는 소개를 하고 싶었다.

물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있는 전문가들과 꾸준한 관계를 가지고서 자주 그들의 실습과 전문지식과 이 책이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질문하여 배워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악기들에 대한 진정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고 미래의 어둡고 위험한 길을 걸어나갈 수 있으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Stravinsky나 Ravel 같은 대가들도 오랜 세월을 실지 음악가들의 작품과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접촉함으로써 매번의 자극을 마치 보물 모으듯이 했던 것이다."

- Casella, Mortari가 1946. 9.에 쓴 맺음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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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30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과 음악까지 감사합니다.
삶이 풍부해집니다.덕분에..^^

묵향 2015-01-30 15:43   좋아요 1 | URL
저도 함께 훈훈해지네요~ 감사합니다^^
 
인간과 음악
백대웅 / 어울림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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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였지만, 내게는 사실 생각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전거가 된,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다. 부분 부분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있지만, 동시대의 음악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분들과 한번쯤 이야기 나눠보고픈 지점들이 많이 담겨 있어 이 기회에 공유한다.

그중 한 꼭지.

“음악에서의 빠롤과 랑그

(...) 음악의 빠롤은 소리의 울림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음악의 랑그는 빠롤 안에 있는 소리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 안에는 음색의 개념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빠롤은 물리적인 현상이고 랑그는 그것을 있게 하는 인간의 의식 안의 체계입니다. 그래서 빠롤이 울림의 결과라면 랑그는 울림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울림은 귀를 통해서 느끼는 것이고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소리이니까요. 그러나 질서는 귀로도 알 수 있지만 눈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질서’를 기록해놓은 것을 우리는 악보라고 합니다. 말의 랑그를 기록한 것을 문자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악보는 문자와 같이 일종의 기호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보의 기호체계는 문자와 같이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악보를 소설처럼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빠롤을 위한 것이지요. 음악의 랑그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우리는 음악이론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음악이론을 넓은 뜻으로 사용해서 음악역사, 음악미학 등을 포함하는 경향이 있지만 음악이론은 음악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음악의 랑그가 빠롤로 바꾸어지지 않는 한, 음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음악은 귀를 통해서 인식되는 예술이라는 정의가 타당하다면 말입니다. 음악이론은 반드시 빠롤의 현실성을 대상으로 하는데 비하여, 음악역사나 음악미학은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음악의 빠롤을 위해서 랑그가 설정되는 과정을 작곡이라고 합니다. 작곡은 악보에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머리로 생각하고 그것을 바로 소리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음악에서 작곡이라는 말이 창작(creation)이 아니고 구성(compositon)이라는 사실은 매우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것에는 첫째, 창작이라는 말은 하이든의 ‘천지창조’라는 오라토리오처럼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이때는 대문자 Creation으로 씁니다-할 때나 쓰는 말이지 인간이 무엇을 만들 때는 쓰지 않는다는 기독교적인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또 하나, 구성이라는 말은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짜 맞춘다는 뜻입니다. 즉, 구성이라는 말에는 음악도 말과 같이 공동체의 약속체계와 제약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음악에 대한 이론이 매우 엄격해지겠지요. 이것이 중세의 서양음악이론이 엄격했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낭만주의시대라고 부르는 19세기 이후에는 서양 사람들도 음악이 공동체의 제약이나 약속체계에 얽매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는 음악의 흐름을 강의할 때 이야기하지요.

한편 음악의 랑그를 빠롤로 바꾸는 행위가 곧 연주(performance)입니다. 이 연주도 악보 연주, 구전 연주, 즉흥연주 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양 음악의 콩쿨이라 하면 악보대로 그려내는 연주를 생각하지만 (...) 그러나 베토벤 시대만 해도 즉흥연주를 잘 하는 사람이 연주를 잘 하는 사람으로 꼽혔지요. 여러분이 아는 변주곡(variation)이 바로 그러한 생각의 소산입니다. 단순한 흉내보다는 해석과 변용이 연주에서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콩쿨을 기준으로 해서 음악인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


나누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인용하는 김에 한 가지만 더.

“소리의 높이에 집착한 서양음악과 소리의 음색에 집착한 동양음악

동서음악의 차이를 크게 보면 서양음악은 주로 소리의 높이와 크기에 집착해왔고 동양음악, 그중에서도 우리 음악은 소리의 길이(리듬)와 음색에 집착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리의 높이에 집착하게 되면 자연히 높이의 미세한 차이까지 신경을 쓰고 또 높이가 서로 다른 소리의 어울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양음악은 화음이라는 거대한 선물을 받게 되었지요. 이 화음은 그 원리가 배음구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니까 여러 가지의 높이를 한데 합치는 소리를 음색으로 생각할 수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음악이 추구한 화음은 음색의 추구라는 면보다도 주로 조성과 관련된 화음의 진행방법이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화음에서 새로운 음색의 추구는 20세기 이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즉 서양음악은 19세기까지 배음구조의 원리 안에 있는 3도씩 쌓아 올리는 방법에서 탈피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3도씩 쌓아 올리는 화음은 그 원리가 소리의 원리 안에 있는 배음구조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인간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소리이고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소리이고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일곱 번째 시간에 얘기하겠어요(눈의 대칭과 관련지어서). (...) 그러나 동양의 음악은 소리의 높이와 관련된 생각보다는 소리의 음색과 관련된 생각을 더 많이 해온 음악입니다.

여러분은 팔음(八音)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말 그대로 여덟 가지 소리라는 뜻입니다. 이 여덟 가지 소리는 음의 높이나 크기와는 상관없는 소리의 음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팔음은 악기를 만드는 재료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쇠, 돌, 실, 대, 나무, 가죽, 흙, 바가지입니다. 음악에서 팔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물질의 소리가 서로 어울릴 때 좋은 소리가 난다는 우주론적인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동양에서 소리의 어울림이나 화음의 개념은 높이가 다른 소리의 어울림이 아니라 음색이 다른 소리의 어울림입니다. 그래서 공자를 제사지내는 문묘제례악이나 나라의 조상인 역대 임금을 제사지내는 종묘제례악에서는 악단구성의 원칙으로 이 팔음을 모두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후대에 오면 조금씩 변동이 있지만. 여러분은 ‘금슬이 좋다’는 말을 알 것입니다. 부부의 사이가 금(琴)과 슬(瑟)이라는 악기소리의 어울림과 같이 좋다는 뜻입니다. 금과 슬은 모두 우리나라의 가야금과 비슷한 중국의 현악기인데 이 두 악기의 음색은 잘 조화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양과 서양은 소리를 인식하는 방법과 가치관이 달랐습니다. (...)”


기본적으로 강의록을 바탕으로 써진 책이다 보니 인용된 문장들이 다소 투박하다. 그래도 본지는 전달되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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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음악은 '말'한다 -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헤르메스 총서 1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지음, 강해근 옮김 / 음악세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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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음악가가 되려면 피아노 연습시간만큼 책 읽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 브람스

읽고 너어어어어어어어무 크으으으으으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어렴풋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음악에 대한 태도나 관점이 사정없이 뒤흔들리는 듯하다. 더 좋은 연주, 더 좋은 감상을 하고 싶으신 모든 분들께 권해드리고 싶은 책! 깊이 고민해봄직한 문제들을 많이 제기하고 있다. (비록 전면적이고 총체적으로 다뤄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책의 번역 제목대로, 바로크 음악을 해석하는 유용한 팁과 주의점들이 골고루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빈에서 묵을 당시 친구의 서가에 꽂혀 있던 것을 눈여겨 봐두었다가 이번에 사보게 되었다.

아래는 아르농쿠르가 1980년에 에라스무스 상을 받고서 행한 기념연설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다소간 길게 인용한다. 작은따옴표에 의한 강조는 저자와 인용자의 것이 섞여 있다.

“중세에서 프랑스혁명에 이르기까지 음악은 문화의 한 기둥이자 삶의 한 기둥이었다.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일반교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음악은 오페라나 연주회에 가는 것으로 공허한 저녁시간을 메우거나 공적인 축제의 분위기를 돋운다거나, 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집안의 적막감을 물리치고 활기를 찾게 하는 장식으로 변해 버렸다. 현대인들은 양적으로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음악을 듣고 있다. 그것도 실로 거의 끊임없이 음악과 함께 하면서도 그 음악이 우리의 삶에서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채 그저 사소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 모순에 찬 상황이 되고 말았다.

(...) 음악의 의미의 전적인 변화는 이처럼 지난 2세기 동안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동시대의 음악에 대한, 그리고 동시대 예술 전반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나타났다. 음악이 삶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인 한, 음악은 ‘그 시대에’ 작곡된 것만 기능할 수 있었다. 음악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이고, 동시대인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음악은 인간을, 청중과 음악가 모두를 변화시켰었다.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정신성에 호응하여 그때마다 새로운 집을 다시 세워야 했던 것처럼 음악도 그때그때 새로이 창작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오래된 음악, 즉 지나간 세대의 음악을 이해하는 것도 활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과거의 음악에 대해서는 그 훌륭한 기법에 대해 경탄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음악이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즉, 장식으로서의 음악은 우선 첫째로 ‘아름다워’야만 하게 되었다. 음악은 결코 껄끄러워서는 안 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현대의 음악은 보다시피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음악은 여타 예술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정신적 상황에 대한 진지하고 가차없는 비판이 단지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 파고들어 간섭하고 껄끄러운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방해한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방해해야만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현대의 음악으로부터 멀어지는 모순에 찬 상황이 초래되었다. 사람들은 비판 따위를 바라지 않는다. 회색의 일상에서 치유받기 위해 아름다움만을 원하였다. 그리하여 예술, 특히 음악은 단순한 장식이 되고, 사람들은 역사적 예술, 즉, 옛음악으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옛음악에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조화가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옛음악으로의 이와 같은 지향은 일련의 명백한 ‘오해들’이 겹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었다고 본다. 우리는 아름답기만 한 음악만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현 시대는 보다시피 그러한 음악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아름답기만 한 음악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아름다움’이란 음악의 구성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구성요소를 모두 제쳐놓고 무시하는 경우에 ‘한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특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우리가 음악을 ‘전체로서’ 이해할 수 없게 된 이후, 어쩌면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은 후부터 음악을 '그 아름다움만에로' 끌어내릴 수 있게 되었고, 말하자면 다리미로 평평하게 펴 버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음악이 일상의 예쁜 장식에 지나지 않게 되자 우리는 옛음악을-즉 원래 음악이라고 부르던 그것을- 더 이상 ‘그 전체로서’ 이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음악을 미적인 것으로 끌어내려 다리미로 펴버리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가 삶을 변화시키는 음악의 힘을 여전히 믿으면서도 현대의 정신적 상황이 음악을 그 중심적 위치에서 주변으로, 즉 감동적인 것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격하’시킨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면, 우리는 거의 출구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그 상황과 타협할 수는 없다. 그렇다. 만약 그것이 우리 예술이 처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음악하는 것을 당장 그만 둘 것이다.

나는 더욱 부푼 희망을 안고서 확신한다. 우리들 모두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음악을 포기할 수 없으며-내가 말한 것과 같은 ‘이해’를 동반하지 않는 ‘저속화’야말로 포기이다-, 예컨대 몬테베르디나 바흐 혹은 모차르트의 음악의 힘과 메시지에 우리 자신을 안심하고 의탁할 수 있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음악을 보다 깊고 광범위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러한 음악이 어떠한 것인지, 아름다움을 아득히 초월하여 그 언어의 다양성으로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에이게 하고 설레이게 하는지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몬테베르디나 바흐 혹은 모차르트 등의 음악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들의 언어’로 말하는 ‘우리들의 문화’이자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시대’의 현대음악을 다시 찾아야 한다.”


덧) 보잉 표시의 유래에 관한 흥미로운 가설 하나.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당시 생활의 각 영역이 그러했듯이 모든 것이 서열화되어 있었는바, 음표 중에도 고귀한 음표(nobiles)와 비천한 음표(viles), 즉 좋은 음표와 나쁜 음표가 있었다. 그리고 이 때 고귀함, 천함이라는 개념은 강세와 관계된다. 예컨대 보통의 4/4박자 리듬에 이를 대입하면 고귀한 제1박, 나쁜 제2박, 좀 덜 고귀한 제3박, 비천한 제4박(쉽게 말해, 강 약 중강 약 내지는 f p f p. 좀더 세밀하게 표시해보면, f > mp < mf > p)과 같은 식으로 되는데, 이 때의 n v n v 를 찬찬히 보라. 다운 업 다운 업의 보잉 표시를 닮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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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29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르농쿠르 너무 좋아하는데!!! ^^
당장 들어야 겠어요.
울적하면 듣던 건데..예외도 있는거니까..

묵향 2015-01-30 15:45   좋아요 1 | URL
예, 그가 음악을 대하는 자세로부터 참 많이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