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일과 영성 -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역사 사이의 줄 잇기
팀 켈러 지음, 최종훈 옮김 / 두란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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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기독교에 입문했을 당시 주변인들은 모두 내게

너도 교회 다니냐?”, “네가 기독교인이야?”,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뭐 그러냐?”

등등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대개의 경우는 친한 사이에 오가는 농담조의 질문이기는

하였으나 솔직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었다 - 그런 물음에 내가 일일이 대꾸하는 것 자체가

짜증스럽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평소 나의 행동이 어떠했기에 나를 두고 이런 소리들을 할까?

하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 없듯이 위와 같은 세인들의 질문 배경에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 행했던

나의 사려 깊지 못한 그 어떤 언행으로 인해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 나의 종교적 신념이 강화되고 주님의 말씀 속에서 살게 되면서 이전보다는 더욱

매사를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이런 행동 변화의 배경에는 인생의 연륜이 쌓였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종교인답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그 옛날 아무 죄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예수님을 생각 없이 떠드는 세인들의 입에 값없이 르내리게 하여 불쾌한 의문의 1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나도 원죄의 그늘 밑에서 쉽게 허물어지는 연약한 인간이다 보니 직장 및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불의에 속절없이 농락당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내가 행한 불의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스스로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나의 종교

내가 종교인이라는 것을 편의대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저급한 마스터베이션급 삶에 만족하며

살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켜켜이 묵은 먼지처럼 나의 몸과 마음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현실적 저급한 쾌락이 나의 종교적 신념을 지배하고 있음을 자각하였고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나의 생활은 물론 회사 업무처리는 물론 대인관계에까지도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음을

세월이 흐른 뒤에 나는 알게 되었다.

거의 모태 신앙에 가까운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어온 사람 - 와이프

권유로 입문한 신앙 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점점 수영장에 빠진 사람과 같이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교회를 찾고자 마음을 굳힌 그 날의 목사님 설교 내용도 유사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수영장이라는 곳에 가게 되면 얕은 물에서는 다시 말해 발목까지 물(신앙심)닿았을

때는 물장구치는 어린 아이처럼 한없이 자유스럽지만 수영장물(신앙적 관점)점차 허리와

가슴까지 차오르게 되면 도저히 본인의 의지대로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게 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 된다 할 것이다.

지금은 완전히 잠수를 탈 지경이 되다 보니 행동 하나하나가 과거와 같지 않게 되었음을 느끼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아무리 물(신앙심) 속에서 나의 행동을 자유스럽게 가져간다 해도 내가

몸 담고 있는 물(신앙적 관점)을 역류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자신의 업무나 직장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지를 성경

구절 속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다.

어느새 나는 구원 받았음에 감사하는 삶속에서 살고자 노력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얼마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잘못된 종교관이 빚어내 국내와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을 보면서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들어 몹시도 안타까웠고 작금 한국 사회의

종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회 세습의 추태아닌 추태를 보면서 그 안타까움은 내가 한 때

믿었고, 의지했었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감으로 다가왔고 그들에게 자신의 일과 교회

그리고 교회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 속에 영성(靈性)’이 존재하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왜 그리도 세상적인 일에....주님이 살아오신다면 뭐라 이야기하실지가 참으로 궁금하다.

어찌되었던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나는 작품에서 나의 종교관을 재 정비하는 교훈적 문구를

찾았기에 여기에 옮겨서 모두와 그 깊은 뜻을 나누고자 한다.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P 45)

-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는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P 47)

- 일을 보는 기독교적인 관점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이의 능력을 최대로 표현하는 게 곧....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P 47)

- 자유는 구속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올바른, 다시 말해서 자신과 세계의 본질에 부합되는 한계

  속에서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다.(P 48)

-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일한느 존재로 지으셨으며 지금도 분명히 그 설계에 따라 살라고

  부르시고 이끄신다. 짐스러운 명령이 아니라 자유로 이끄시는 초대다.(P 49)

- 일을 정기적으로 몀춘 뒤 예배하고,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즐기는 시간을 갖지 않는 ,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체득할 수 없다.(P 51)

- 일은 의미 있는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핵심요소이다. 신체적으로 기운을 되찾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상과 일상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일손을 놓고 쉬어야 한다.

  (P 52)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 신들이 일을 시키려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축복으로 보지

  않았다.(P 56)

  그리스 철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신을 고독하고 자급적이며 세상사에 개입하거나 인간들이

  벌이는 북새통에 발을 담그지 않는 완벽한 정신쯤으로 이해했다.(P 57)

- 올바른 삶이란 희망과 두려움을 모두 벗어 버린 인생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실상과 화해하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라고 가르쳤다(에픽테토스, P 57)

- 창세기에 나오는 문구를 해석해 보면, 식물과 짐승들은 그저 충만하고 번성하라명령을

  받았을 따름인데, 유독 인간은 명확하게 일을 부여받았다. , 정복하고 지배하며 세상을

  다스리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P 59)

-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며 일종의 부섭정(vice-regent)으로서 나머지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P 60)

- 성경은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게 귀족적이고 배타적으로 사용되던 개념을 민주화(P 61)

-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친구로 보았다. 육신에 갇힌 생명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고 지적한다.(P 63)

- 물질과 영혼이 영원토록 통합된 상태로 함께 사는 꿈을 제시하는 종교는 오로지 기독교 뿐이다.

  (P 64)

-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개척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과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P 65)

 

[일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단]

- 인간은 일하도록 설계되었고 일을 통해 존엄하게 되며, 일은 창의성, 특히 문화 창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이기도 하다.(P 68)

-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건 청지기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P 69)

-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면, 주님의 사역 패턴을 따라 일해야 한다.(P 72)

- 창세기 2:19~20절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 짓는 작업은 창조 과정에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주님은 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키셨다.

  (P 75)

- 하나님은 일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시며 뒤를 따르라도 신실하게 부르신다.(P 77)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 신약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부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그리스어 칼레오(kaleo)인데 이는

  보통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묘사할 때 사용

  되는 말이며, 교회를 가르키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 자체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

  의미한다.(P 80)

-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혁신 통찰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권력을 얻을 속셈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을 대해서는 안 된다.(P 83)

- 중세 교회는 교회를 위해 교회 안에서 행하는 직무이어야만 하나님을 위한 일의 요건을 갖출

  수 있었다. 오로지 수도사와 신부, 또는 수녀가 되지 않고는 부름을 받아 주님을 섬길 수

  없었다.(P 84)

- 아버지 어머니는 자녀들의 소원을 무엇이든 다 들어주길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책임질 줄 아는 인간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일을 시킨다.(P 87)

- 혁명적인 노동관은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고상한 의미, 다시 말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목적을 부여한다.(P 91)

-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 이웃을 사랑하기에 좋은 방법은 없다,(P 94)

- 완벽하게 해 내기만 한다면, 감자 껍질 벗기는 일로도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아무리 일해도 열매가 없다]

- 수치심이란 존재의 중심에서 자신을 향해 갖는 불편한 감정(P10)

- 아무리 땀 흘려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다.(P110)

- 열매가 맺히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한다.(P114)

- 가시덤불이 생겨도 소망은 있다.(P117)

- 저마다 일에 대해 품고 있는 간절하고 원대한 염원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미래에 온전히

  실현되리라는 메시지를 저만의 방식으로 들려준다.(P118)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

- ‘전도서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악인이 디지모 말라고 경고하면서 중도를

  걸으라고 권면한다.(P122)

- 전도서의 작가는 철학자를 앞세워 읽는 이들을 몰아세워 가며 하나님의 초월적인 독특성과

  필요성을 납득시키려 노력한다.(P123)

- 전도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실존적으로 의지하는 자세야

  말로 흔들림 없고 목적이 분명한 인생의 전제조건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P123) 

- 전도서는 3가지 인생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P124)

   첫째, 지식과 지혜를 통해 인생의 참뜻을 헤아려 보려는 탐색

   둘째, 즐거움을 기반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시도

   셋째, 열심히 일해서 뚜렷한 성과를 올리려는 노력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되다]

-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교만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분열,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P 144)

- 바벨탑은 자신을 넘어 창조주 안에 토대를 두지 않는 한, 집단적인 노력으로 무얼 만들든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P144)

-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출세의 수단으로 보는 대신 뭇 사람들을 섬기는 데 쓸 수도 있다.

  예전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또는 신앙에 관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던 걸 뉘우치고 입을 열어 무얼 믿으며 따르는지 알리기로 작정 할 수도

  있다. 하나같이 크리스천이라면 받드시 가져야 할 선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이다.(P156)

-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먼저 누리신 은총을 덧입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중재자시다.(P158)

- 성경에 에스더 왕후로 불리우는 것은 모두 14차례이다.

  그 가운데 13번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고백 이후에 등장한다. 주인공이 되려고 발버둥

  칠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던 분을 섬길 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P159)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다]

- 거짓말하는 죄의 밑바닥에는 우상숭배라는 더 교묘하고 근원적인 악이 깔려 있다.(P167)

- 개인적인 우상들은 노동을 비롯한 인간의 행동을 광범위하게 자극하고 빚어낸다.

  우상은 죄와 문제가 싹트는 온상이 된다.(P168)

- 인종의 우상이 지배한다는 건 수많은 일거리들이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과 사상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P173)

-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관심사와 욕구보다 더 큰 동기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삶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역할도 크게 바꿔 놓았다.(P176)

- 그리스도를 좇는 이들은 인간의 행복을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까닭에 현대 문화의

  집합적인 우상들이 빚어내는 강력한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기 일쑤다.(P186)

- 복음은 신실하게 일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왜 그럴까?(P187)

   1) 복음은 일과 관련해서 맥락이 전혀 다른 대안을 내 놓는다

   2)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파트너가 되어 세상을 돌본다는 새롭고 풍성한 노동관을 제공

   3) 인간의 마음과 관련한 지혜로운 조언뿐만 아니라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온갖

      건강한 지침들을 통해 대단히 새롭고도 민감한 윤리 기준을 선사한다

   4) 복음은 일을 하는 동기를 백팔십도 바꿔 놓을 뿐 아니라 상황이 좋든 나쁜든 늘 함께하는

      신선하고 강인한 힘으로 심령을 가득 채워준다.

 

[복음의 관점으로 일을 이해하다]

- 스토리에는 삶이 어떻게 흘러가야 마땅한지에 대한 해설과 어쩌다가 균형을 잃게 되었는지에

  관한 설명, 그리고 어떻게 다시 삶을 바로잡을 것인지 기술하는 해법이 제시되어야 한다.(P195)

- 복음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삶의 의미가 있으며 그 작동 원리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P199)

-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어 그 관계를

  망가뜨렸다. 그러므로 구원과 은혜를 통해 옛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P200)

- 기독교 신앙은 오직 크리스천의 세계관만이 세상의 일부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 자체를 문제로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책으로 삼는다.(P201)

- 오직 신뢰할 만하고 한결같은 독립성의 보증인만이 이윤을 올릴 수 있다.

  목적이 없는 이윤은 재앙을 짓는 레시피다.(P207)

-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착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이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수준이 아니라 복음적인 세계관에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P209)

 

[일에 대한 이원론을 배격하다]

- 일은 섭리를 이뤄 가시는 창조주의 주요한 도구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 세상을 유지해 가는

  주님의 방식이다. 크리스천의 노동은 거룩한 창조 사역의 현장이다.(P228)

- 일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섭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보는 성경의 노동관은

  대단히 중요하다.(P230)

- 하나님은 세상에 선물을 쏟아부으시면서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문화를 두루 연구해야 한다.

  (P237)

- ‘이원론은 성()과 속()을 가르는 장벽을 설명하는 데 쓰는 말로 죄와 일반 은총,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한 얄팍한 이해가 낳은 일차적인 폐해다.

  이런 태도는 일반 은총의 장엄한 그림과 인류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은밀한 영향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P243)

-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올바른 신앙이 이끌어갈 정점에 섰다고 볼만큼 선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해서 그릇된 신념이 끌어갈 가장 낮은 바닥에 이르렀을 만큼 약한게 아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의 일을 하든지 양쪽 모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 그 문화와 표현들을

  비판적으로 즐길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쪽짜리 진리를 알아보고 우상을 배격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삶의 모든 국면에서 정의와 지혜, 진리와 아름다움의 흔적들을 분별하고

  만끽하는 비결을 익힐 힘이 생긴다.(P245)

 

[일을 하는 동기가 바뀌다]

- 성경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공 동체에 피해를 주는 악인들과 달리불이익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바로 의인이다.(253)

-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사랑과 경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가운데서 이미

  누리셨던 사랑과 기쁨, 존경과 영광을 나누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다.(P255)

- 인권 의식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다는 기독교 신앙을 토양으로 성장했다.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해 인권을 이해하는 자세를 가져라(P260)

- 어떻게 해야 자신과 다른 이들의 마음에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정답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이 보내 주시는 성령님을 통해서.(P262)

- 일꾼, 직원의 마음가짐

   1) 온 마음을 다해 일해야 한다

   2)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3)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 상대가 인격체라는 인식을 토대로 관심을 기울이며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삶 전체에 투자해야 한다.(P269)

- 크리스천은 편협한 종파주의자처럼 비쳐지면 안 된다.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똑같이 존중하고 대우해야 한다.(P273)


[새로운 능력으로 일하다

- 안식일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에 제정되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거룩한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면 누구든 노예 신세다.(P292)

-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참뜻은 예수님을 찬양하며, 따라가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안에서 쉼을 누리는 이들을 가르킨다.(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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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0 법칙 - 20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80/20 법칙
리처드 코치 지음, 공병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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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3

 

어느 과학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쥐 열 마리를 폐쇄된 공간에 가두고 먹이를 찾아 미로를 벗어나게 하는 실험이었는데,

열 마리 중 2마리는 아주 적극적이었고 4마리는 중간 정도의 열의를 보였고, 2마리는 앞에

열의를 보이는 쥐들을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자세를 보였는데 나머지 2마리는 미로를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완전히 개판을 치며 장난만 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어진 실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던 2마리 쥐를 빼내고 8마리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추진하자, 역시 또다른 2마리는 적극적으로 길을 찾아헤맸고, 4마리는 적극적으로 2마리를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역시 2마리는 개판을 치는 것이었다.

여기서 또 적극적인 2마리를 빼내자 역시 여섯 마리 중 2마리가 적극적으로 미로를 찾아 전진

했지만 역시 그 중 2마리는 또 개판을 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재미난 사실은 개판을 치는 단골 2마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본 작품을 읽으며 해당 다큐멘타리 실험이 생각났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다큐멘타리 내용과 본 작품 내용이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작품이

전해주고자 하는 내용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 작품 ‘8020’에서 이야기하는 법칙이란

노력, 투입량, 원인의 작은 부분이 대부분의 성과, 산출량, 결과를 이루어낸다는 법칙으로 투입량

20%가 산출량의 80%를 만들어 내고, 원인 가운데 20%로부터 결과의 80%도출되며,

전체 노력의 20%에서 전체 성과의 80%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이 법칙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 인간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핵심적인 소수하찮은 다수의 차이점을 깨닫고 이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또 이를 우리 기업

활동에 대입해 본다면, 80/20 법칙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생산성이 낮은 투입 자원을

생산성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성과는 단순 증가를 넘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성과의 80%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20%에 집중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며 위에서 언급한

실험 쥐들을 대상으로 작품의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면 모든 일은 20%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중요한 20%에 더 많은 힘을 쏟고 80%는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하라

작품을 읽다보면 하나도 버릴 구석이 없는 금과옥조의 말로서 점철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나의

뇌리를 강하게 때리는 문구를 하나를 들어 본다면

누구나 위대한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 아니라 성취하기에 적합한 것을 찾아

내는 안목이다

이라는 문구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문구에서 버릴 단어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문구에 마음이 간 것은 8020의 법칙을 통해 안목을 기르자는 결론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 저자는 작품을 통해 소잡는 칼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소잡는 칼의 사용법에 대해 나름

설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품은 시종일관 8020 법칙 및 활용성에 대한 이야기를 중언부언하고 있어 짜중스런면도

있었으나 결론적으로 해당 법칙을 활용하여 개인, 기업, 사회에 적용해 큰 효과를 얻어보자는

내용이었으며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8020이라는 법칙을 설명하면서 뜬금없는 몇가지 원칙이 제시되고 있는데 여기에 옮겨

보았다.

8020의 법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첫째, 노력과 보상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발상의 전환을 하라

둘째, 여유 시간에 대한 죄의식을 버려라

셋째, 타인이 지워준 의무에서 벗어나라

넷째, 관습이나 상식의 틀을 깬 시간활용법을 생각하라

다섯째, 80%의 성과를 내는 20%의 시간을 파악하라

여섯째, 핵심적인 20%애 사용하는 시간을 늘려라

일곱째, 가치가 낮은 활동을 중단하라

따라서 8020의 법칙은 명확하다. 자신이 타인보다도 놀랄만큼 뛰어나고 스스로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면 성공과 행복은 당연히 따라온다

 

또 이런 이야기도 언급되고 있다. - 8020의 법칙과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나

작품에서는 심혈을 기우려 이야기하고 있다 - 성공을 위한 10가지 주요 지침

1) 아주 좁은 분야로 전문화해서 핵심 능력을 개발하라

2) 스스로 좋아하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일인자가 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라

3) 지식이 곧 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4) 시장과 핵심 고객이 누구인지를 알아내 공략하라

5) 20% 노력으로 80% 성과ㅏ 나타나는 분야를 알아내라

6) 그 분야의 일인자에게 배워라

7) 전문 분야에서 자기 사업을 하라

8)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직원을 가능한 한 많이 고용하라

9) 핵심 역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아웃소싱하라

10) 자본의 지렛대 효과를 활용하라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있다. ‘8020의 법칙으로 바라본 행복한 삶을 위한 7가지 전략

1) 인생에 대한 통제력을 극대화하라

2)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워라

3) 유연해져라

4) 당신의 파트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라

5) 소수의 행복한 친구를 만들어라

6) 소수의 직업적 혐조자를 만들어라

7)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로 바꾸어가라

세상일이 이런 법칙과 이론으로 파악되고 당초 의도하였던 자신의 목적이 달성된다면 이런

자료와 법칙을 누가 소홀이 다루고 업신여기겠는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인간사이기에 오늘도 이런 저런 작품을 읽으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될까해서 기웃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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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폴 고갱의 삶과 그림
폴 고갱 지음, 최경해 옮김 / 가람기획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1

 

작품을 읽다보면 아래와 같은 문구가 나온다.

- 그는 고갱일 뿐이다. 답답한 문명을 미워하는 미개인이며, 창조주를 시샘하여, 틈을 만들어

  작은 창조를 이루는 거인 같은 사람이며, 다른 장난감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장난감을 깨뜨리는

  어린애이며, 하늘을 대중과 같이 푸르게 보기보다는 붉게 보기를 좋아하며, 늘 부인하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P 47)

- 예술은 창조이므로 자연과 부합하며 이 창조는 사랑과 가치를 함께 한다.(P 56)

- 회화는 감각의 세계와 지성과의 모순을 해결하는 길을 준비하는 예술이다.(P 56)

- 사람이 죄업을 의식하고 마지의 저승을 무서워하며 해방을 바란다면, 고독이야말로 참으로

  바람직하며 망각이야말로 후련한 것이다.(P 81)

- 언제나 화가가 불행하게 생각하는 점은 자기 재능을 알 수 있는 상인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P169)

- 참된 외교관이란 지나치게 그 지성을 과신하지 않고, 발뺌하는 회답을 하고, 의상을 갖추고

  아주 멋있는 대접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P236)

  

나에게는 해당 작품이 내가 위에서 언급한 문구 외에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의미의 문자만 나열된

그런 작품집이었다.

이런 작품이 훌륭하다느니 불세출의 작품이라고 떠드는 사람들과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작품 행간에 숨은 그 어떤 의미를 이야기하기 보다 폴 고갱의 굴곡진 삶을 반추해 보는

것이 더 나을듯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런 류의 작품 읽기는 정말로 책을 사랑하고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작품에서 다가 온 것은 작품의 제목 외에는 없었다!!!!!



고갱은 서른다섯 살에 미술계에 입문한 늦깎이 화가다.

화가가 되기 직전 고갱의 그림 실력은 아마추어 화가 지망생 치고는 수준급 회화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기성 화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직업화가로의 길에 들어서지만 현실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친구인 고흐처럼 꾸준히 자화상을 그렸는데 모델을 사서 그림을 그릴 형편이 못 되어서 습작에

자화상만큼 좋은 소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갱의 자화상은 다른 화가들의 자화상과는

분명 달랐다. 그는 다른 인물에 자신을 이입시켜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

그의 자화상에 등장한 인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 있다.

또 악당으로 전락한 천사 루시퍼도 보인다.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자신의

작품인 노란 색의 그리스도기괴한 모습을 한 고갱이라는 작품을 함께 병치시켜 완성한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마흔두 살의 고갱은 아직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 파리 근교를 전전하다

퐁타방이라는 시골 마을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 마을에 있는 트레말로 성당에 걸린 예수상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그 모습을 곧바로 캔버스에 옮겼다.

이 그림이 바로 노란 색의 그리스도이다.

고갱은 핍박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서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을 악마 루시퍼의 모습으로 묘사한 후광이 있는 자화상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과 소재만으로도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미술사에서 전해오는 수많은 뒷 담화 중 고흐와 고갱 두 사람이 실은 동성애 관계였다는 얘기에

서부터 고흐의 귀를 자른 것은 고흐 자신이 아니라 고갱이라는 주장까지 두 사람에 얽힌 소문은

많다.

 

고갱과 고흐는 어느 날 자화상을 그려 서로에게 선물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고갱은 고흐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고흐의 눈빛에

이것 밖에 못 그리나?'라는 조소가 섞여 있다고 고갱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흐의 독촉이 거세지자 결국 고갱은 고흐에게 보내기 위한 자화상을 한 점 그리는데,

그것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화상이다.

고갱은 당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주인공 장발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던 차에 고갱은 장발장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그린 레미제라블고흐에

게 선물했다.

고갱은 이 그림 오른쪽에 그 당시 가깝게 어울려 지내던 화가 베르나르(Emile Bernard, 1868~1941)의 초상을 함께 그려 넣었다. 자화상에 자신의 다른 작품을 배경으로 그리는 것은

평소 고갱이 자주 시도하던 방식으로 그림을 받아본 고흐는 뛸 듯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자화상도 한 점 그려 고갱에게 보냈다.

 

1897,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다.

화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은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철학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그 당시 고갱은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때 죄악의 도시라고 부르던 파리를 향해 자신의 예술을

인정해달라며 구걸하기도 했다. 이 일로 세상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졌고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고갱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독초를 먹었다.

당시 그는 죽은 뒤 산짐승이 자신의 시체를 먹는다면 완벽한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갱은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 역시 살아생전에 그리 성공한 화가는 되지 못했다.

고갱을 미술로 이끈 것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었지만, 직업화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부터는

인상주의 사조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고갱은 "예술이란 사물의 객관적인 형상과는 다르며

작품에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인상주의와 결별을 선언

했다.

 

고갱은 1888년에 '종합주의'(synthétisme, 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렬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했다역주)라는 세로운 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1889년 인상파전이 열리던 전시장 건물 앞 볼피니 카페를 빌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

화가 전람회'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기성 화단과 평론가 집단은 고갱의 예술적 재능에 큰 호감을 얻지 못했다.

컬렉터들도 고갱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갱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지만 나이만 먹고 있을 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파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파리에서의 생활을 접고 타히티로 떠났다.

고갱은 타히티의 풍경과 사람들을 소재로 다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고흐가 아를로 거처를

옮기면서 창작 활동에 전환점을 마련했듯이 고갱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른바 '원시미'가 돋보이는 새로운 그림들을 그렸다.

 

1893년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타히티에서 그린 새로운 그림들이 들려 있었다. 그는 파리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작품들을 하루빨리 보여 주고 싶었다. 드가는 고갱의 그림들을 위해 전시를 주선해

주었고, 피사로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고갱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일부 미술관에서는 고갱의 그림을 전시

하는 것조차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즈음에 그린 또 한 점의 자화상은 당시 고갱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고갱은 이 자화상 안에도 자신의 그림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이 자화상 안에

전시된 그림은 고갱이 타히티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던 죽음이 지켜보고

있다라는 작품이다.

 

1895년 고갱은 또 다시 파리를 떠났다.

파리에서 그에게 남은 거라곤 냉소와 조롱뿐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역시 타히티였다.

1903년 심장병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고갱은 그곳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고갱이 자화상에 남긴 그림의 제목처럼 그를 끝까지 지켜봐 준 것은 '죽음'이라는 그의 작품

뿐이었다.                                                                                        (daum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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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권유도 3

 

작품 서평에

좀머 씨의 삶은 무엇이고, 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생을 죽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으로 살며 지내다가 결국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고 그는

 죽어 버렸다. 이승에 무수한 발자국만 찍고 다녔을 뿐, 사실 그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애초에

 자기가 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 버렸다. 그는 사는 동안 오로지 자신이 되돌아가게 될 죽음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하고 자연의 회귀질서에 철저하게 복종한 사람이다. 지독히도 순결하고,

 극단적으로 완고하게 전생에서부터 저승까지 이어지는 인생길을 끝까지 걸어서 가 버린 그가,

 살았지만 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가 나에게 던져 준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라였다

 

위의 서평이 작품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일까?

십여년 전 본 작품을 읽었을 때 뭐 이런 작품을 갖고 사람들이 열광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웃고 말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다시 그 작품을 골라 재 도전하면서 무슨 이유로 당시

독자들이 열광하였을까를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 작품을 접하게 되었는데 요번에도 실패

하였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무리 작품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거꾸로 메쳐봐도 어떤 대목에서 작가께서 주장하고 있는

서평 내용과 같은 구석이 있었는지를 솔직히 동감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국내 작가가 위와 같은 작품 그러면 출판도 안 되었겠지만 을 어렵사리 출간해

독자에게 선 보였다고 하면 아마도 그의 문학적 생명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예저녁에 황천길

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백 번 천 번 양보를 해서 서평에 담긴 내용이 진실이라고 해도 주인공인 좀머 씨가 앓고 있는

병인 밀폐 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해도 살아 있을 동안 그가 꼭 자신이

되돌아가게 될 죽음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하고 자연의 회귀질서에 철저히 복종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 알 수 있는지를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작품을 옮긴 분하고 출판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너무 과대포장하여 아름답게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는 이 작품을 그냥 어떤 주인공의 어린 시절 이야기 수준으로 이해하고 싶고 더 이상의

확대 해석은 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민족의 비극적 전쟁의 상흔이 엷어져가던 시대에 태어났고, 보리고개가 당연한 우리 삶의

한 과정인 시기에 성장을 했다.

한마디로 모두가 못 먹고, 못 입고 하던 시기에 자랐다는 이야기다.

내가 살던 동네는 서울 한 복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네 어귀는 넝마를 줍는 패거리들과 깡통을

배고픔을 잊으려 두들기던 거렁뱅이들 그리고 자칭 참전 용사라 외치며 동정을 강요하던 상이

군인들이 의수를 흔들며 스쳐지나던 그런 동네였다.

하지만 이런 부류에 전혀 끼지를 못하고 동네 후미진 곳으로 숨어다니던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좀머 씨 부류와 같은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언젠가 그분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동네 어른들 속에서 회자

되면서 평소에 그분들을 알고 계시던 동네 어른들이나 주변인들은 한결같이 애잔하게 이야기

하셨던 내용은

가슴 아픈 사연을 가슴에 묻고 한 많은 세상을 살다 갔네

는 정도로만 애통해 하는 것을 어린 나이에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작품 속 좀머 씨와 내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좀머 씨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고 또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보는데 그저 애처럽다는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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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역사 - 역사학자, 조선을 읽고 대한민국을 말하다
이덕일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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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 8

 

해당 작품을 읽고 어떤 느낌이나 소회를 적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의 역사에서 어떤 터닝포인트를 제공한 사건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특정 사건 하나만 갖고

이야기하기 상당히 버겁다고 이야기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느낌이나 주의, 주장을 피력하기에 나의 역사에 대한 안목과 일천한

역사 지식으로 인해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부담스러울 뿐이다.

역사를 사랑하고 역사에서 뭔가를 배우기 위해 공부하는 이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어느 시점에

조용히 들쳐보면 좋을 듯한 내용으로 축약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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