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정말 싫어한다. 관심도 별로 없다. 투표도 잘 안 하는 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날마다 승질나서 참기가 힘들다. 나라꼴이 말도 아니다. 이게 나라인가 싶다. 자존심도 없는 윤씨를 보고 있으니 너무 화가 난다.


앞으로 남은 인생이 얼마인지 모르나 이 분은 꼭 알고 싶다. 단 한 번도 깊이 들여다 보지 않았던 분이다. 삼김시대의 주역이자 대통령까지 오른 분이다. 다른 어떤 지식도 없다. 단지 예전에 교도소에 들어가 영어 공부를 해서 서툴긴 하지만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은 들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아 중고로 구입했다. 저렴하게 구입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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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를 떠났다. 뭐 가끔 가기는 한다. 하지만 미련은 없다. 그렇다고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안 간다.


많은 고민을 한 것이 아니라 고민을 하지 않도록 강요 당했다. 결국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더이상 정신의 피폐함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책은 읽는다. 비아출판사의 시간들이다. 모두가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식이 싫고 귀찮다. 비아의 책들은 충분히 고뇌할 만한 가치를 준다.
















얼마전 복오븐의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었다. 나의 이야기다. 물론 인터뷰어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이견이 있다. 그럼에도 많은 부분 공유한다. 교회를 떠나야 한다. 참으로 교회가 무섭다. 따뜻한 사람도 교회만 가면 이상해 진다. 왜 그럴까? 교회가 만든 기묘한 옷을 입는 순간 이상해 진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변했다. 코로나를 빌미로 교회를 떠났던 이들의 80% 정도가 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무신한 자들은 배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교회가 싫은 것이다.














오래만에 오니 읽을 책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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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9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7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재미로 읽다가 100점 맞는 색다른 물리학 : 상편 - 교과서보다 쉽고 흥미진진한 물리학 교실 재미로 읽다가 100점 맞는 색다른 물리학
천아이펑 지음, 정주은 옮김, 송미란 감수 / 미디어숲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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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듣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불가분의 관계이죠. 빠르다 무겁다 가볍다 등등의 표현은 엄밀하게 물리적 표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공부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이 책은 물리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습득하도록 도와줍니다.


속도는 대부분 시속으로 정의합니다. 시속 30km는 한 시간에 가는 거리를 말합니다. 표시는 30km/h입니다. 초는 /s로 표시합니다. 요즘은 전투기나 미사일의 속도는 초음속이라고 표현하죠. 소리는 음속이라고 말하고 1초에 340m를 갑니다. 표시는 340m/s입니다. 시속으로 따지면 1224km/h입니다. 엄청난 속도네요. 이것은 영상 섭씨 15도시와 15 ℃, 1000 hPa 일 때입니다. 음속과 거의 비슷한 속도를 말합니다.


길이와 질량, 시간, 전류, 온도를 표시하는 기본단위를 아시나요? 온도를 섭씨가 아닌 켈빈으로 표시를 하네요. 물질량을 표시하는 몰(mol)도 있습니다.


자동차 운전면허를 시험 칠 때 안전거리를 배우게 됩니다. 안전거리는 다양한 이유로 앞차가 속도를 줄이거나 정지할 경우를 대비해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안전한 거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동차 속도에 따라 안전거리가 다릅니다. 안전거리는 차량 속도와 반응 거리 제동거리 정지거리로 구분해 정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이러한 안전거리가 만들어질까요? 안전거리는 등속 직선 그래프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쉽게 지나쳤던 물리학에 관련된 재미난 공식이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물리학에 부정적인 생각이 부담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이 책부터 먼저 읽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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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 사순절기와 부활절기를 위한 기도노트 비아 기도
비아 편집부 지음 / 비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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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서 성령강림주일까지

 

2022년 사순절은 202232일 수요일부터 시작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전례 중심의 예배가 설교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적의 선택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교회의 전통이 가진 장점을 상실하게 했고 심지어 전통 예배에 대한 왜곡된 편견도 심어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사순절에 대한 불필요한 경각심과 주의입니다. 아마도 종교개혁사를 공부했다면 츠빙글리의 사순절 기간 동안 고기를 먹은 사건을 들었을 것입니다. 일명 소시지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사순절 기간 동안 육식을 금하는 교회의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소시지 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엄밀하게 개혁이기 전에 논쟁이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성경이 사순절 동안 육식을 금하라고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성경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모든 기준은 성경이어야 한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파괴하는 일이 종교개혁 내내 일어났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디아포라(adiaphora)로 불려진 이 논쟁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많은 화제가 되었고, 현재도 중요한 화제 중의 하나입니다. 타락한 중세 교회에서 완전히 새로운 교회, 개혁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열심이 그릇된 극단으로 치달았던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극단의 오류는 한국의 신학교들이 교회사를 종교개혁 이후의 관점으로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필자도 교회사를 좋아하고 관련 책들을 즐겨 보는 편이지만 대부분 종교개혁 시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좀 더 확장해도 자신의 교단에 편중된 몇 권에 책과 관점으로 해석된 책을 읽게 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정통을 개혁교회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동방정교회와 관련된 책의 손에 꼽을 정도로 없습니다. 1453529, 정교회가 이슬람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멸망당한 후 러시아로 옮겨 가면서 이어지는 러시아 정교회사를 다룬 책은 1991년에 출간된 <러시아 정교회사>가 있을 뿐입니다. 사순절 이야기를 하려다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사순절은 중세 교회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교회의 가장 큰 절기인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해 초대교회로부터 지켜온 전통입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은 분명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 기간과 부활 주일은 예수님께서 명령에 대한 교회의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이 완전히 정착하기까지는 3세기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전 초대교회는 파스카 논쟁을 통해 부활 주일을 언제 지켜야 할 것인가를 논했습니다. 파스카는 유월절을 말하며, 예수님의 고난을 유월절의 사건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결국 니케아 공의회는 춘분이 지난 후 보름 후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합의하기에 이릅니다. 부활절이 정해지면 그날을 기점으로 앞으로 40일 동안 사순절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은 타락한 중세 교회가 만들거나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든 절기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의해 교회가 응답한 교회의 절기입니다.

 

이 책은 사순절에서 오순절까지 이어지는 기도 노트입니다. 32일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사순절이 시작되고, 411일부터 16일까지 고난주간, 65일 성경강림 주일까지 이어집니다. 비아의 뛰어난 편집 능력과 간결한 디자인은 읽는 이들에게 편안함과 친숙함을 선물합니다. 성공회 성서정과를 따라 본문을 제시하고, 묵사의 글로 인도합니다. 묵상의 글은 본문을 가장 잘 표현한 기도문과 묵상 글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사순 기간, 탐욕을 섬기던 우리의 습관을 벗고 야위고, 가난해지며, 잠잠한 가운데 당신을 알게 하소서. 평화의 왕이여, 당신의 불타는 마음으로 우리를 이끄소서.”

 

교회 안에서 형제를 존중하지 않는 이는 그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행동하고, 고난과 궁핍에 빠진 동료를 생각하지 않는 이는 바로 그 사람 안에서 멸시당하시고 계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사랑을 빚으실 수 있으며 그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고난과 신앙으로 곰삭힌 언어는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깊은 신앙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더듬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혼자 읽고 묵상해도 좋고, 함께 나누어도 좋습니다. 사순절을 함께할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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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더디 온다 - 말씀에서 말씀으로 살아 낸 사막 교부와 교모의 인생 가르침
사막 교부와 교모 지음, 이덕주 엮음 / 사자와어린양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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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교부는 영혼의 샘물이다. 문명과 과학의 발달을 통해 유토피아를 형성하려던 인류의 계획은 이미 오래전 사라졌다. 하지만 과학문명을 벗어나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특히 대한민국은 빨리빨리문화를 만들어 냈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을 불가피하게 요구했다. 한때 피곤한 도심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사찰에 들어가 심신을 가꾸는 템플스테이가 유행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적지 않은 이들이 참가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수년 전부터 특이한 한국만의 명상이 시작되었는데 멍 때리기라는 것이다.

 

불교의 명상과도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면도 적지 않다. 방법은 간단하다. 숲 속에 들어가 아무 생각 없이 몇 분에서 몇 시간을 있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과 장소에 따라서 불멍’ ‘숲멍’ ‘물멍으로 불려진다. 멍 때리기는 특정한 형식이나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생각을 잠시나마 덜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적자생존의 환경이 요구하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생각의 짐을 덜어내는 것이다. 일종의 도피 또는 회피 일 수 있지만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하기에 회복을 위한 잠깐의 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교회사를 가르쳐왔던 이덕주 교수는 은퇴 후 칩거(蟄居)하면서 그동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다. 초대교회 교부들에게 주목한다. 교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도심에서 활동하면서 말씀을 강해하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정통을 세워나가 일반 교부(Church Father)가 있고,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사막이나 광야로 들어가 홀로 살아가는 사막 교부(Desert Father)들이 있다. 터툴리아누스나 크리소스토무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도심의 교부들이다. 사막 교부들은 안토니우스와 압바스 아르세니우스, 압바스 포에멘, 압바스 마카리우스 등이 있다. 여기서 압바스는 아빠를 뜻하는 존칭어이다. 사막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이들은 영적인 아버지를 압바, 어머니를 암마로 불렀다. 남성을 교부로 부르며 여성을 교모로 부른다.

 

그런데 사막 교부들은 왜 생겨난 것일까? 3세기부터 5세기까지를 사막 교부들이 활동한 시기로 본다. 이 시기는 교회가 내외적으로 파란만장한 시기이다. 내부적으로 수많은 이단들이 들끓으면서 올바른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 치열한 교리 전쟁이 일어났고, 외부적으론 로마의 핍박이 몰려 있는 시기다. 콘스탄티노스 1세기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박해를 벗어나 주류 종교로 인정받는 과정이 이 시기이다.

 

하지만 사막 교부는 단순히 핍박을 위한 도피가 아니었다. 그들의 시기가 5세기까지 이어진 것을 볼 때 기독교가 로마의 중심에 자리하고 박해받는 자리에 있을 때도 사막 교부들은 사회로 돌아오지 않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막 교부들을 찾아갔다. 이러한 상황들은 사막교부들이 기존의 신앙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 때문임을 보여준다. 분주하고 어지러운 삶을 떠나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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