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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기이하다. 가정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가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다. 철저히 육적이면서도 동시에 영적인 일을 하는 이들이다. 


클라우스 핏셴 (Klaus Fitschen)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결혼하게 된 목사들의 이야기, 또는 자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모두 51명을 선별해 그들의 삶을 추적한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어떤 삶을 영위했을까? 독일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독특한 목사 가정 이해는 목회자의 가정이 어떠해야 할지를 조명해 준다.




정두성 박사의 두 번째 책이다. 첫 책이 교리교육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라면, 이번에는 현대 속에서 가르쳐야 할 교육 방법에 대한 것이다. 홀로 읽고 깨닫고 나누는 과정을 통해 성경의 중요한 교리를 이해하고 묵상하도록 돕는다.






교부 관련 세 권의 책도 눈에 띈다. 비아에서 출간된 <교부와 만나다>는 이미 손에 있지만, 아직 몇 장 읽지 못했다. <교부들의 성경 주해>는 연이어 나오고 있는데 초대교회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고 바라보았는지 많은 도움을 준다. 정교회 출판사가 그레고리오스를 출간하다니... 아직 읽지 못했지만 주목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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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란 허상이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소유의 개념이 신석기 시대 이후, 특히 청동기 시대 권련이 집중화 되면서 급속하게 일어난 현상으로 파악했다. 청동기 시대를 권력의 집중이 일어난 시기로 상정한 이유는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건축과 화려함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개  BC 3000년 ~ BC 1200년을 청동기 시대로 본다. 물론 반대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구분할 때 돌, 간 돌, 동, 철 등으로 구분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를 바라보는 일반 역사학자들의 관점을 드러낸다. 역사에 무지한 내가 그들의 주관에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동조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역사의 발전을 믿지 않으니까.


집 근처 공원에서 나무를 타고 올라오는 담쟁이를 보았다. 한 컷의 사진으로 구도를 달리해 크롭했다. 첫사진은 가장 일반적인 수평과 1/3 구도이다. 가장 안정적이고 평온하다. 두 번째 사진은 중간을 잘랐다. 그리 좋은 구도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왕성함'을 강조하고 싶어 그렇게 했을 뿐이다. 세 번째 사진은 수직이며 역시 1/3 구도로 잡았다. 풍경은 사진은 구직 구도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수평구도가 안정감을 준다면 수직구도는 긴장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역동성을 드러내고하는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수직구도로 사진을 찍거나 크롭한다.


문득, 동일한 사진이고 피사체도 동일하다. 그런데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보이느냐에 따라 독자들은 달리 해석하게 된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비평적 관점을 지닌 이들이라면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다양한 관점으로 보려고 노력하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도 종종 보이는대로 본다는 것은 흔하다.




역사도 이와 같지 않을까? 주류의 역사가들이 만든 관점을 따라 역사를 해석하고 저술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관점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다른 관점이나 특이한 관점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려 한다. 이것이 인간의 사유의 게으름이다. 나 또한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추구하면서도 그것들에 함몰되어 있다. 이상하면 일단 제외로 한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과 관점에 합일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이것이 인류가 고민하지 않은 생각의 소유이고, 소유의 관점이다. 그러니 사유의 소유도 권력이고, 개인의 종말이다. 진정한 무소유는 혼돈. 그러니까 누구도 일치하지 않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우린 인간들이고, 한국인이며, 한글과 한국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일정한 합의와 공유된 상징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이 또한 소유이다. 그러니 소유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은 사회인은 소유가 존재인 이유이다.


자 이제 세 권의 책을 읽어 보자. 추석이니 말이다. 하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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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해안을 다녀왔다. 태어나 세 번째 강원도를 찾았다. 한 번은 기억도 흐릿한 그등학교 수학 여행 때 통일전망대를 찾은 것. 다른 한 번은 아은 몇 분과 서울에 갔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에 들른 것. 그리고 이 번 아내와 함께 찾았다.


주문진항을 바로 아래 두고 있는 남애리 해수욕장. 아내는 늘 그곳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쉽게 갈 수 없었던 머나먼 타향 같은 곳. 결국 아내는 그곳에서 바다를 보았고 또 보았다. 


고양이. 고양이는 존재만으로 풍경이고, 그림이고, 행복이다. 아내를 고양이를 불렀다. 기다린다. 한발자국 다가간다. 휑~~ 고양은 한 번 뒤돌아 보고 저만치 물러난다. 또 한 번의 다가가감. 또 한 번의 멀어짐. 고양이는 가깝고 멀다. 그렇게 삶은 영원한 밀당처럼 손에 닿을듯 닿지 않을 듯 소망하며 살아간다. 



동해 막국수에 들렀다. 그리고 막국수를 주문했다. 

입을 잘 열지 않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추억이었다. 그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아내는 아버지와 함께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이 가게인지 저 가게인지는 흐릿한 기억 때문에 알 수는 없으나 하여튼 막국수를 먹었다고 한다. 


"변했다."

"당신이 변한 것 아니고?"


불완전한 기억. 그래서 불안한 기억. 그러나 추억은 맛을 기억해냈고, 변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한 추억. 그리고 맛. 추억이 맛이다. 

추억은 아름답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시간도 흘러가면 달콤한 추억이 되는 법. 나이가 들면 맛이 아니라 추억으로 먹는다.


로버트 스타인의 <예수님의 비유 해석 입문>서가 출간 되었다. 마태복음과 비유의 권위있는 학자인 스타인의 책이다. 배경과 해석사, 해석 원리까지 더한 귀한 책이다. 2017년에 이레서원에서 출간된 베일리의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와 더불어 읽는다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책들이다. 

















최근들어 책을 읽는것이 무엇인지 흐릿하게 알 것 같다. 또한 함부로 어떤 책을 평가하는 것이 얼만 위험한 것인지도 알 것 같다. 책은 그 존재만으로 아름다움이다. 아직 잉크냄새가 가시지 않는 스타인의 책을 보다, 문득 동해안에서 만났던 고양이를 기억해냈다.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기에. 


내가 지금 왜 이글을 쓰고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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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던, 초기 교회의 기원


정말 무지막지한 인간이다. 가장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인 초기 문헌을 샅샅히 뒤져가며 하나의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제임스 던, 그는 괴물이다. 던은 이제 초기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그 과정을 치밀하게 더듬어 간다. 


마치 N.T. 라이트를 따라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예전에 출간된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상하>도 대단했다.  당시의 쟁점을 간략하게 정리한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예배했는가?>도 주목할만한다. 

















제임스 던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예배했는가>와 래리 허타도의 <아들을 경배함>은 서로 대립적이면서도 보완적이다. 던은 후기에 예수를 경배했다고 주장하지만, 허타도는 매우 초기에 이미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서 경배했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허타도가 매우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나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기원후 45-50년 사이에 기록된 문서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편집으로 문제로만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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