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28 좋은 생각 10월 79쪽에 실린 이야기이다. 네덜란드 한스 교수는 60cm 정도 떨어진 거리에 가치관이 비슷한 친구가 있으면 체온이 2도 정도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그러나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며 실제보다 더 차갑게 느껴진다고 한다. 싫은 사람끼리 만나 마주 앉아있는 것을 보고 '냉기가 흐른다'라는 농담을 던지고 하는데 이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의 신기할 뿐이다. 옛선조들이 하는 말들이 아무렇게나 지어진 말은 분명 아는 듯하다. 따듯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차갑게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미움와 시기가 가득한 사람은 차가운 사람이고 웃음과 위로를 주는 사람은 따뜻한 사람이 맞는 것이다. 가을이다. 이제 따뜻한 것이 필요한 시간이 되었다. 좀더 따뜻하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나무행렬 송충이' 이야기
 
프랑스의 과학자 파브르의 "곤충기" 에는 여럿이 줄지어 다니는 소나무행렬송충이가 등장한다.
 
송충이들은 그저 대장 송충이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맨 앞의 대장송충이가 움직이는 대로 나머지는 뒤에서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다.
 
파브르는 소나무행렬송충이를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하였다.
우선 소나무 가지에 줄지어 달라붙은 송충이들을 바닥에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나 나서 지름 1,5m의 화분 가장자리에 일렬의 송충이를 놓고, 거기에서 1.8m 떨어진 곳에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솔잎을 뿌려 놓았다.
그러자 화분 주위에서 원을 그리며 맴도는 송충이행렬이 만들어 졌다.
 
다음 날 파브르는 화분 쪽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송충이들이 여전히 화분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송충이는 촉각을 통해 솔잎을 느끼는 습성이 있는데, 1.8m 떨어진 솔잎을 느끼지 못해 그런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무리를 따라가는 습성이 있는 송충이니만큼 화분 주위에서 헤매는 선두를 따라갈 뿐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았다.
결국 어리석은 송충이들은 화분을 빙빙 돌면서 기어 다니다가 7일 후에는 모두 굶어 죽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리스트텔레스는 노예제를 찬성했다. 아니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했다. 지금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이러한 주자은 20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간과할 것만은 아닌 듯하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살펴본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생각한 시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보자 더 숭고하고 까다로운 존재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치의 목적은 단지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공정한 규칙을 제공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본성을 표방하고, 좋은 삶의 본질과 인간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트텔레스의 정치목적은 그의 시민론으로 이어진다. 그가 생각하는 시민은 현재의 사람들이 아니라 특별히 구별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여기서에서 시민들에의해 시행되는 정치에서 여성들과 노예들은 제외되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트 텔레스에 따르면 여성과 노예의 본성은 시민이 되기에 절적치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우리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가 가진 철학적 배경인 목적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당시의 사고체계가 그의 목적론적 사고에 영향을 주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성과 노예를 정치에서 제외시킨 이유는 적합성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다. ... 사람들에게 제 몫을 준다는 것은 그들의 자격에 맞는 공직과 영광을 주고 본성에 어울리는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억지스러운 주장처럼 보이지만 당시는 이러한 적합성은 중요한 판단 근거였다는 것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러한 텔로스와 적합성이라는 개념은 의심스러울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현대는 합의가 주된 정치의 주제라면 당시는 텔로스 즉 적합성으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노예제가 정당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노예가 필요해야하고, 누군가는 노예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즉 노예의 적합성이 충족되는 사람이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어떤 사람은 노예로 타고난다.(천성적으로,본성적으로) 이들은 육체가 영혼과 다르듯이, 일반인과 다르다. 이런 사람은 노예로 타고났으며 이들은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에대한 찬성론 속에 인간에 대한 엄격한 구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구분론(필자가만든단어)은 후에 유럽의 노예제도에 힘을 실어주며, 현재까지도 힘을 실어주는 민족구분론까지 이어간다. 히틀러의 유대교말살정책이나 사르비아사건까지.. 아니면 미국의 유색인차별정책과 중국의 소수민족 비하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영역에 걸쳐있다. 

좀더 나아간다면 한민족 한나라 안에서의 학벌과 지역주의까지 이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생태론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일원론의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 스토트가 본 로이드 존스 로이드존스와 존 스토트 “로이드존스 박사를 추모하며” 마틴 로이드존스 박사의 죽음과 더불어, 약 30년 동안 영국에서 가장 강력했던, 그리고 가장 설득력 있었던 그의 복음주의 목소리는 이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는 주로 성경 강해자로서 세인의 뇌리에 기억될 것이다. 버킹엄게이트(Buckingham Gate),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무하던 50년대와 60년대의 전성기에 그는 2천명의 회중을 1시간, 혹은 1시간 15분 동안 마법에 매혹된 듯 꼼짝 못하게 만들곤 했다. 그는 과학적으로 훈련된 지성이 가질 수 있는 분석적 솜씨와 웨일즈인의 정열을 겸비하고 있었다. "설교란 무엇인가?" 그는 이에 대해 감동적인 그의 저서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에서 "불타는 논리! 웅변적 이성!"이라고 답변했다. 이 양자 겸전(불타는 웅변과 논리적 이성)의 힘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그의 설교를 직접 들어보아야 하겠지만 여러 권으로 나온 그의 '로마서 강해'와 '에베소서 강해'를 통해서도 이런 힘은 지금도 계속 전달되고 있다. 로이드존스 박사는, 강단에서는 준엄한 인상을 주었지만 서신에서는 수줍어하는듯한 인상을 풍겼다. 친구들에게 보낸 서신에서조차 그는 첫머리에 "My dear Sir"(나의 친애하는 분께)라고 썼다. 그리고 자신의 세례명 (David Martyn)으로 서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또한 교회 집무실이나 서재에서 내담자들과 상담을 할 때는 그보다 더 동정적이고 자애로울 수가 없었다. 의사로서 호더경(Lord Horder)의 조수로 일하던 초년 시절 이후 줄곧 그는 의학 서적 읽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약점과 단점에 대해 의사와 목사의 통찰력으로 직시할 수 있었다.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저서 가운데 하나인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 its Causes and Cure)는 실제적인 성경적 지혜로 가득 차 있다. 교회관에 있어서 로이드존스 박사는 강력한 독립교회주의자였다. 그리고 복음주의자가 어떻게 영국국교회와 같은 "혼합된 교파"의 신도로 남아 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해 동안 계속하여 그는 지조있는 복음주의자들이 자교단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6년 웨스트민스터, 센트럴 홀에서 열린 전국 복음주의자 대회(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그는 우리에게 교단을 탈퇴하여 신실한 복음주의적 "남은 자"를 결성하자며 감동적인 호소를 하였다.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가 강연을 마쳤을 때 나 자신은 그와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이 문제를 다루게 되어 있었으므로 문제가 논의되기도 전에 일부 목사들이 경솔하게 사직서를 제출할까 하는 염려도 들어, 나는 이런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로이드존스 박사를 찾아가 사과를 드렸다. 물론 내가 말한 내용 때문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나의 견해가 옳다고 믿고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모임을(로이드 존스 박사의 표현대로) '논쟁장'으로 만들뻔했기 때문에 사과를 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그때 나의 이의에 반론을 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려 논쟁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그 후에도 계속하여 따스한 인격적 관계를 유지했다. 나는 로이드 존스 박사에 대해 애정과 감탄어린 존경심을 늘 품고 있다. 신학적으로 혼란스런 시대에 그는 역사적,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고수했다. 그는 논쟁적인 연설가였으나 언제나 원리 원칙과 인신 공격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았으며, 가슴이 따스한, 사랑과 평화의 사람이었다. '박사님'은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아버지 같은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신학적, 영적으로 가히 심각한 공백이 빚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존 스토트(John W. Stott) / 올 소울스 교회의 교구목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놀라운 임에는 틀림없다. 

하루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요즘 글좀 올렸더니 몇분들이 찾아 와서 행복하다. 좀더 많은 글을 써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