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향씨의 예수전에 대한 문제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역시 그의 성경해석에 관한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형식이 예수에 관한 '김규항의 견해'를 전달하는 데 효율적이지만,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는 데는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12쪽)고 말한다. 그는 이 책이 자신의 견해가 아닌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의 예수의 견해를 한번 분석하고 그것이 과연 옳은가를 진단해 보자.  

 먼저 마가복음에 관하여  

이 책은 마가복음을 주 텍스트로 삼아 서술되었다. 역시 12쪽에서 "이 책은 바로 마르코복음을 읽기 위한 책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왜 마가복음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네 개의 복음서,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종교적 첨가도 적"기 때문이다.(12쪽) 

 

[마르코복음]이는 용어에 있어서-마르코는 영어식으로하면  [Mark]이고 한국 개신교는 [마가]로 번역했다. 그럼 마르코는 어디서 왔는가? 천주교식 용어이다. 이 말은 라틴어를 그대로 번역한 글로 마르코라고 읽혀진다. 그가 채택한 성경도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이 아니라 천주교에서만 사용되는 천주교전용 성경이다. 그는 일러두기에서 이것을 밝히고 있는데,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된 [200주년 신약성서]이다. 이건 분명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천주교는 2차 바티칸 회의를 통해 방향자체를 완전히 틀어버렸다. 보수꼴통에서(그곳에 내가 좋아하는 한스큉이있다) 완전한 개방과 진보로.. 그러나 여전히 라틴어는 살아있다. 라틴어로 미사를 들여야 한다는 보수주의 말이다.  

또 다른 마가복음은.. 

그는 분명 마르코 복음을 선택한 이유가 덜 종교적이고, 가장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이란다. 이것이 사실일까? 당연히 거짓이다. 마가복음은 덜 종교적이지 않다. 누구나 알듯이 마가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상을 돋보이기 위해 기록된 가장 강력한 복음이다. 마가복음 자체가 복음이라는 뜻이다. 마가복음 1:1을 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한글개정개역판 / 김규항은 끊임없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며, 오로지 그의 인간됨에 촛점을 맞추려 하지만 틀렸다. 성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단정하고 시작한다. 그런데도 애써 이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를 읽기를 원하다면서  자신 마음대로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하나.. 마가복음이 과연 가장 처음 기록되었는가?  

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이 가장 처음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이론이요 설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상당한 부분들이 마가복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비평학의 원리에 따라 원문서는 가장 간단하고 명료하다는 것에서 [마가복음우선설]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런식이다. 비평학에 의하면,, 초기의 문서는 아주 간단한 몇개의 문장으로 되었있었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설명하거나 첨가해서 더 부풀려진다는 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래전의 일이지만 이러한 비평학의 중요한 원리는 어느정도 권위를 잃었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초기의 작품이 책10권의 분량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싶지만 많은 분량에 눌려 읽지 못하자. 어떤 사람이 요약본을 내어 놓는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수도없이 많다. 만약 이것이 믿기지 않는다면 폴터 사이트에서 마가복음 우선설을 검색해보라.

이러한 간단한 예만으로 이 책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마가복음 우선설에 대하여 알고 싶다면 다음 사이트로가서 송영목교수의 공관복음의 유래라는 글을 읽어보라.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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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고 안상영 부산 시장의 유서이다. 그가 왜 자살했을까? 그는 노무현 정권때 열린 우리당 입당강요를 거부하자 갑자기 1억 뇌물 수수죄를 뒤집어 씌웠다. 그는 수치속에서 모욕당하다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   

이제 이명박 대통령을 욕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을 이명박 대통령이 죽였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글을 보여주고 싶다. 그들은 할말이 있는가? 답을 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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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遺書) 

 


국민여러분! 
 
사마천의 사기라는 책을 보면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형벌은 사대부에 이르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대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깊은 산에서는 백수의 왕인 호랑이도 우리속에 갇히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걸하게 됩니다1 협박을 당하고 고통을 받은 결과가 그러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손발을 묶이고 벌거벗겨저서 채찍을맞고 감옥속에 쳐박히면 옥리만 보아도 머리를 땅에 박고 간수나 잡역부에게조차 겁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때 오히려 자기가 기개를 세우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 입니다. 
무릇 영웅 호걸들도 당국에 잡혀 감옥속에 갇히게 되면 자결하지도 못하고 치욕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저 안상영이는 감옥속 추운 방에서 盧武鉉의 말을 듣지를 않았다는 그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모함을 당하여 치욕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두툼한 솜옷도 감방속으로 차입이 되지를 못 하였습니다 
모든 명예를 다 버리고 용기도 없이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용기있다거나 비겁하다는 것도 사실 상황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부터 사대부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모, 처자를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입니다. 

저는 절대로 돈을 받지를 않았습니다! 억울 합니다! 

 

제가 盧武鉉의 요구대로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을 하였다면 저는 이 추운 감옥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나라당에서 추천을 받아 선거를 해서 부산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한나라당을 떠나서 열린 우리당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 입니다. 
저를 믿고 따르는 부산 시민들을 절대로 실망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저들은 그런 고집을 부리는 저를 서울로 데리고 다니면서 주리를 틀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사마천의 글 속에서 저 거대한 나라의 형법도 당상관은 감옥속에서도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저 안상영은 서울 구치소에 잡범들 방으로 들어가서 잡범들에게 무수하게 몰매를 맞았습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잡범들 방에 저를 몰아넣고 잡범들에게 몰매를 맞는 그 순간에 저 안상영이는

모든 것이 무너저 버렸습니다. 


저 안상영은 생명을 아까워하는 비겁한 자에 불과하지만 거취만은 분명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어찌 치욕을 모르고 죄인 노룻만 하고 있겠습니까? 

 

저 盧武鉉이는 그렇게 악독한 人間 입니다. 
국민들은 절대로 저 위장된 盧武鉉에게 속아서는 않됩니다! 
盧武鉉은 강금실을 시켜서 서울 구치소 잡범들 방에서 저를 잡범들을 시켜서 무수하게 구타를

하게 하면서 마지막까지 열린 우리당 입당하라고 몰아부쳤습니다. 


盧武鉉이 盧武鉉당인 열린 우리당을 창당 한 것 자체가 경남과 부산에서 열린 우리당을 한 석

이라도 더 당선시키려는 부정한 기획으로 민든 당 이기에 저를 부정한 부산시장으로 몰아부쳐 저

를 감옥속에 처 넣어야 했던 것 입니다. 
그 이유는 盧武鉉이 끝까지 저 안상영이를 죄를 물었고 자백을 하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열린 우

리당으로 입당하라고 몰아부쳤던 것입니다.

 

저는 죽음의 길로 걸어가면서 저 부정한 盧武鉉 정권에 죽음으로 항거합니다. 
저는 어둠속의 감방속에서 또 하나의 진실된 조국 대한민국 역사의 장래를 진심으로 다시 생각

하게 되었습니다. 


盧武鉉은 나 안상영이를 죽음으로 몰아 갔지만 저 부정한 정권은 그리 길게 가지는 못할 것 입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무수하게 몰매를 맞고 부산 구치소로 돌아오니 부산은 나의 집 이었습니다. 

국민여러분 평안 하십시오! 

 

 

 

안상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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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09-06-26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아직도 왜 전노무현 대통령을 추종하는 이들이 고안시장의 유서 이야기를 한번도 꺼내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서운 것일까?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까봐서..

알려주마 2019-10-06 15:3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위 안상영 유서는 한마디로 가짜 유서입니다. 안상영은 노무현 집권 때인 2004년 2월 4일 자살했습니다. 2월 5일 유족이 유서와 일기를 공개했습니다. 공개한 유서에는 정치적인 내용은 없고 가족에 대한 미안함 등 개인적인 내용이 주류라고 합니다. 2009년 5월 말부터 돌아다니는 가짜유서는 <국민여러분! 사마천의 사기라는 책을 보면~>으로 시작하는 글입니다.(안상영 부산시장 가짜 유서 http://tszmo.tistory.com/6 ) 안상영 가짜유서가 만들어져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5월 23일 직후입니다. 진짜유서는 이미 언론에 공개가 되어 있습니다. 아래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에 실린 유서 내용입니다.

故안상영 부산시장 유서 공개
동아일보 2004-02-05 12:32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40205/8026656/1

안상영 유서 수감고통・가족에 미안함 토로
한겨레 2004.02.05(목) 23:38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2/005000000200402052338510.html

자살한 安相英 부산시장의 유서와 일기
조갑제닷컴(월간조선 보도를 인용)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7608&C_CC=AD

안상영 시장 유서 공개
http://m.news.naver.com/read.nhn?oid=052&aid=0000026223&sid1=&mode=LSD

고 안상영 시장 유서 공개
http://m.news.naver.com/read.nhn?oid=052&aid=0000026217&sid1=&mode=LSd

그래서 다음과 네이버를 통해서 안상영 유서를 검색해봤습니다. 언제부터 안상영의 가짜 유서가 돌아다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에는 2009년 5월 30일에 실린 <안상영 부산시장 유서>가 처음 등장합니다. 이에 2009.05.31. <유서마저 위조하는 수꼴놈들!>이란 글도 올라왔습니다.

안상영 부산시장 (가짜)유서
http://tszmo.tistory.com/6

유서마저 위조하는 수꼴놈들!
http://roricon.egloos.com/1912263

네이버에는 <故 안상영 부산시장의 자살에 대한 의문>이 2009년 5월 29일 노노데모(우리가 만들어가는 대한민국)에 처음 등장합니다. 글쓴이는 유서 내용을 소개하지 않고 읽은 소감을 썼는데요, 감옥소에서 잡범들에게 몰래 어쩌고 하는 구절을 보니 안상영 가짜 유서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이미 2009년 5월 29일에는 누군가가 가짜 유서를 작성했고 유포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故 안상영 부산시장의 자살에 대한 의문
https://cafe.naver.com/nonodemo/146703

결국 다음과 네이버에는 2009년 5월 31일부터 본격적으로 안상영 유서가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지금은 엄청난 양의 안상영 가짜유서가 블로그와 카페에 게시돼 있습니다. 그럼 이 시기는 어느 때인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 죽은 2009년 5월 23일 직후입니다. 미루어 짐작건대 이명박 측이든 누구 측이든 알 수는 없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으로써 존경받는 상황을 싫어하는 무리였을 것으로 봅니다. 가짜 유서의 내용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할 내용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그 유서가 진짜라면 언론을 탈 만큼 충격적인 내용인데도 신문과 방송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야당도 안상영 사망 후 아무런 이의제기도 하지 않았고요.
 


이 책은 자신을 B급 좌파로 생각하는 김규항이라는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 저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알라딘 서점의 대대적인 광고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베스트셀러가되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알라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보통 그런 책으로 쓰여진 상식적인 교회비판론으로 생각했다. 서평란에 예수전에 대한 제목 좋지 않는 평을 달아놓았는데 이것이 어느 독자에 의해 책을 읽어 보았느냐는 이야기를 통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만큼 김규항이라는 사람들을 추종하는 세력이 많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대충 읽었던 책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빨간펜으로 밑줄을 그으면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분노했고,

읽으면서 화가났고,

읽으면서 무척 기분이 나빴다.

 

왜일까?

그건 책 쓰는 목적 자체가 교회를 비판하기 위한 비판적 목적이었고, 화해나 올바른 삶의 변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의도적이었으며, 비판적이었고, 심지어는 오로지였다. ‘오로지’ 정말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오로지 교회를 비판하기 위한 책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뿐이랴 정말 화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그의 전제들과 사용방법들은 오만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탐심이나 연구가 없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다. 이러한 기술방법은 정말 기분을 상하게 한다. 단순히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만한 그의 글쓰기 때문이다.

 

그는 386세대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세대이면서 불행한 세대이다. 왜일까? 정체성을 잃어 버린 탓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기존세력을 비판하지만 궁극적으로 답도 대안도 없는 그런 세대이기 때문이다.

 

서평자의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만 나는 지금 감정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마음이 무척 상했으며, 또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들이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욕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기분 나쁨이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다가 중단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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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6-23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미있게 잘 읽은 터라 어떤 관점을 제시해 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낭만인생 2009-06-23 18:40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나쁩니다. 근거 없는 무작위 비판들은 별로네요.

nll 2009-06-23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화가나고 욕이나왔다는말에 심히공감을 느끼며.....
근데 제가 보기엔 교회를 비판하려고 한다기보다, 그냥 자기 자신의 사상(사회주의)을 주장하고 펼치기 위한 목적이 주인듯해요. 성경은 그 주장을 뒷받침기 위한 세련된 도구로서 갖다쓰였을 뿐..
각 구절의 이야기를 자기식대로 해석한 내용에 얼마나 경악을 했는지 모릅니다;(특히 돼지떼에 로마군 이야기;;)

이건 솔직히 정치적 입장의 문제도 아니고, 교회에 대한 문제도 아닌거 같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풀어야 하는 영적인 책인데,신앙이 없는 사람이 성경을 해석한다는것 자체가..불완전할수밖에 없겠죠



낭만인생 2009-06-23 18:41   좋아요 0 | URL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제게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의 글쓰기가 성경을 자기 원하는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말입니다.

어느멋진날 2009-06-23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판1 이라시면 비판2도 곧 쓰실 생각이신거죠?^^ 비판2도 꼭 읽겠습니다.

낭만인생 2009-06-23 18:42   좋아요 0 | URL
사실 별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안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규항!  

처음 듣는 이름이다. 1962년생, 정확히 나와 10살 차이다.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에서 같은 고향사람이다. 1980년대 초 한신대를 다녔다는 말은 왜 이 사람이 좌파로 살아가는 가를 보여주는 삶의 고고학적 유물이다. 개인 블로그를 운영할 정도의 깨어있는, 또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의 전형이다.  

이 책 뿐 아니라 김규항은 전에 몇 권의 책을 더 썼다. 2000년 홍세화 진중권들과 함께 극우 집단주의와 싸우는 사회문화 비평지인 [아웃사이더]를 만들어 편집주간을 지냈고, 2003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펴내며 상품화되는 아이들을 위해 투쟁했다. 이쁜인가 [B급 좌파]와 [나는 왜 불온한가]를 통해 자신의 좌파적 성향을 마음껏 들어내고 있다.  

책 소개말에서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교리 속에 화석화된 예수를 되살려 내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끌어내고자 하는 이 책은 그가 오래전부터 가장 힘써 고민해 온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책이 수많은 ‘나의 예수전’으로 거듭나길 소망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나는 먼저 이 책을 읽은 독자의 한 삶으로 또한 기존교회의 한 성도이며,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비평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를 시도한다.  

크게는 저자가 무엇을 잘못 썼으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밝힐 것이며, 

 나아가 그가 시도하는 것들이 왜 틀렸는가를 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의 대안으로 참된 삶의 변혁이 무엇인가를 논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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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뛰어서 2009-06-23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눈에 뛰어서 말씀드립니다.
편집주가ㄴ->편집주간, 지점하기를->지적하기를,

낭만인생 2009-06-23 15:14   좋아요 0 | URL
댓글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차좋아 2009-06-23 15:20   좋아요 0 | URL
눈이 뛸 수 있나요?ㅋㅋ(활어도 아니고...)
정말 눈에 띄는 덧글이라..
뛰어서님은 몰라서 틀린거 같고
정현욱님은 오타 같은데...

낭만인생 2009-06-23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좋아 님은 참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댓글 감사합니다.

눈에 띄어서 2009-06-23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차좋아/ 오타를 지적하는 댓글에 오타가 있었네요. 좀 재밌는 상황인듯... 지적 같사합니다.
 

엘륄을 뒤 따라 가며....


엘륄의 가장 깊이 있게 다가왔던 책은 도시의 의미이다. 그 책에서 가장 강열하게 다가왔던 주제는 도시의 의미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했던, 뿌리 잃은 이들을 위한 뿌리 내림을 돕는 공동체의 역할이다.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의 방랑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 했던 엘륄의 도전은 저주 받은 도시에서 찾아야 하는 인간의 의미는 아닐까? 하여튼 이러한 묘한 연결고리들은 나 혼자만의 푸념이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마지막 구원의 걸림돌은 정통신앙이다” 혁명적으로 다가왔던 그 짧은 문장은 가슴 깊이 사무치도록 나를 괴롭혔다. 인간의 구원은 교리나, 논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헌신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마25장에는 아주 이상한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의인들을 향하여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말을 들은 의인들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친다.

37 '주님, 저희가 언제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명확하다. 의인의 조건,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구원의 조건은 자신이 구원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했을 때 놀라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의 희생적 삶을 잊어버리며 살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기억되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다음으로 나오는 저주받은 자들 역시 의인들과 동일한 질문을 한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입히지 않았고, 먹이지 않았고, 찾아뵙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질문이다. 그들 역시 의인들처럼 놀라 경악하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그랬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놀라는 이유는 자신이 모르는 상급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답변을 듣기 때문이라고.

칼빈주의가 자랑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던가? 그것 때문에 수많은 이단들(?)이 죽어갔고, 바로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소유한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던가? 내가 너무 칼빈을 오도하는 것일까? 그도 사회적 약자로 살았던 사람인데. 칼빈의 정치사상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너무나 매혹적인 이론이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신자는 그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바르게 사용만 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것들이다. 정말이지 이처럼 좋은 이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 위대한 칼빈주의 후계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 세계에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유명한 말은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나에게 얼마나 가슴 설레게 했던가!

그러나 엘륄을 접하면서, 그 말은 곧 나에게 수치가 되었다.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목마르고, 헐벗고, 고통당하셨던 주님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초대교회 교인들이 카타콤에서 칙칙한 모습으로 서 계시는 익명의 주님을 그리다가 얼마 후 시대가 변하여 천상의 주인이요, 우주적 주권자인 그리스도를 그리는 성화의 변천을 보는 듯하다. 천박하기 그지없던 주님이 만유의 그리스도로 그려지자 그들의 신앙은 아름답고 화려해지고, 세련되고 교양적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두려워하게 했던 그들의 시퍼런 신앙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는 권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분명 엘륄파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벌써 따라가고 있다. 어색한 동행이다. 십자가를 지고 저주받은 골짜기로 나아가셨던 주님의 Via dorosa를 따라 가야지. 아직도 도시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가인의 저주받은 백성을 찾아 가 봐야지.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지. 그리고 잊혀지고 또 잊혀져 망각의 삶을 살아 가련다. 그것은 나팔이 아닌 침묵, 그것은 거리가 아닌 골방.  

자크엘룰의 책들은 비범한 통찰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책은 아무래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자유의 투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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