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중세 신비 신학자요 수도자였던 에크하르트. 기도만 할줄 알았는데 그의 관한 책이 적지 않다. 안셀무스가 논리적 신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면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를 추구한다. 그의 관한 책을 일단 찾아 놓고 조금씩 정리해 나가자. 

에크하르트의 책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아직 영어로는 많이 번역되었지만 한글로는 몇 권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서적이 더 많다. 일단 독일어 논고와 설교1이 보이고, 선집이 한 권보인다. 이 세권부터 사는 것이 우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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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전혀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있다. 홍성사만 읽었는데... 말이다. 


홍성사는 개신교 출판사고, 바오로딸은 가톨릭 출판사.. 비교해 읽으면 느낌이 어떨지... 사뭇 궁금하다. 홍성사 침묵은 있으니 바오로딸을 구입해야 겠다.











사해 부근에서 앞 몇 장을 읽고 이상해서 자료를 찾으니 인간 예수에 관한 책이다. 엔도 슈사쿠에게 어울리는 주제다. 예전에 젤롯을 읽고 인간 예로서의 삶을 읽은 적이 있다.


보수적 관점에서 인간예수를 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4세기 이후 신경이 완성 되기 전의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주의해야할 부분도 있지만, 인간예수 읽기는 그동안 놓치고 간과했던 삶으로서의 신앙을 생각하게 한다. 


왜 인간 예수인가? 사람으로서의 삶, 생각, 고뇌를 고려하자는 것이다. 낳고, 배고프고, 배신 당하고, 슬픈 예수 말이다. 잘만 읽어 낸다면 참으로 멋진 읽기 아닌가? 


















예수라는 한 인물 안에 보수적 관점과 진보적 관점은 차이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둘을 같이 읽어야 한다. 아직까지 나에게 팀 켈러의 <예수를 만나다>의 관점이 강하지만, 만들어진 예수의 관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인간 예수의 이야기는 다시 번역의 문제로 돌아간다. 번역이란 외국어,즉 타언어 타문화의 관점에서 서술된 한 권을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로 읽어내는 것이다. 예전에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읽고 혼란스러웠다. 이 책은 정확하게 인간 예수로서의 삶을 강조한다. 즉 예수 믿음은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삶이며 현재 일상 속에 있다고 말한다. 주인공인 그 신부처럼 말이다. 


요즘들어서야 책 읽기가 뭔지 조금씩 감이 잡히는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말이다. 아니면 이제 독서의 양이 아닌 맛에 길들여지고 있는지도.... 하여튼 나도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삶이 당췌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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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E. 베일리


새물결풀판사의 케네스 E. 베일리 책들...  

















중동의 눈으로 본 시리즈. 하나는 새물결플러스 하나는 이레서원.




















선한 목자, 십자가와 탕자... 지금 유일하게 킹덤북스의 <십자가와 탕자>를 읽지 못하고 있다.  무슨 내용일까? 표지는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과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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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이 책을 구입한 때가 20131030일이니 벌써 440일이 걸린 셈이다. 사자마자 몇 장을 읽었다. 그러다 무슨 이유인지 읽지 못하고 책장에 두었다. 그러나 다시 꺼내 읽다 중지했다. 아마도 5번은 읽다 말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이윤기의 후기까지 읽었으니 모두 읽은 셈이다.

 

파스칼은 독서의 중용을 지키라 했다. 너무 빠르게도, 너무 느리게도 읽기 말라했다. 너무 빠르면 이해가 읽기를 따르지 못하고, 너무 느리면 이해가 기억을 잡지 못한다. 그러니 적당한 시간의 흐름. 즉 기억과 이해가 조화를 이루는 속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도 없다. 앞부분이 기억나지 않으면, 읽어가는 부분만 기억해도 된다. 그러면 앞부분이 무척이나 궁금해지리라. 그래도 이를 악물고 꾹 참는다. 그것을 인생이라 여기며.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이다.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난다. 난 그의 태어남과 자라만을 알지 못한다. 중년이 넘은 그 사람. 현재의 그를 안다. 만나고 또 만난다. 그러다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아니 말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는 현재를 분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편견을 심어주기도 한다. 어쩔 때는 모르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난 이 책 <그리스도인 조르바>를 그렇게 받기로 했다. 현재. 있는 그대로 말이다. 저자의 이름이 항상 헤갈 린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책은 두 번째 책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여행 서적이다. 그의 첫 장면... 조르바를 만나는 장면은 여행을 시작하면서이다. 그리고 여행 중에 일어난 이야기다. 나머지 한 권은 빨간 여행책이다. <천상의 두 나라>라는 제목이 달린 일본 중국 여행기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여행은 구도자의 생존 방식인듯하다. 그는 걷는다. 그리고 보며 성찰한다. 보는 것은 마음의 끌림이다. 사람은 보는 외부의 것의 내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마음이 보는 것만 본다고 생각한다. 보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은 곧 마음이다. 마음과 눈은 같이 움직인다. 굳이 칵테일파티 효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조르바에서 언급한 대로.. 운명. 필연.. 또한 헛된 저항이다. 


































이 책. 그러니까 예수가 사람됨을 소설화한 책... 많이 힘들었다지...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 책이 궁금하다. 이제는 읽어도 될법하다. 금서가 된 이 책은.... 성경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성모독이고, 기독교를 반격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삶으로 직접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목사들은 얼마나 많은가. 단지 글로 표현함이 죄가 되는 것이다. 종교 얽매이지 않으려는..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자유를 찾는 그에게 상상은 자유다.

 
















박완서의 기나긴 하루를 읽었다... 시부모와 이혼한 아들 가정 사이에서 일어나는 오십견? 아니면 중년의 후기에 일어나는 삶의 허망함.... 젊은 이들은 너무나 가볍고, 늙인들은 너무나 허황스럽다. 주인공은 모든 것이 빠져나간 유령이 된 늙은이들의 말말말을 괴로워한다.

 

그러나 아들의 세대는 너무나 가볍다. 늙은이들이 유령이 되었다면, 젊은이들은 속물 자체다. 그들에게 속은 없고 육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속이 빠져나가 겉만 남은 늙은이들이나 아예 속은 없고 처음부터 겉만 있는 아들 부부의 이야기... 주인공은 두 사이에 끼어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두 진영의 편을 드는 남편에게 짜증이 나는 것이다. 남자들은 속물이다. 저 즉물적 존재의 무의미를 보라... 기나긴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나고... 자신도 깊은 잠에 빠져든다. 속물인 자신... 아무도 보지 않는 꿈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코 골며, 아 아, 간간이 신음하며, 남편이 관찰한 나의 자는 모습이다.그러나 그도 나의 꿈속은 들여다보지 못한다." ...

 

철저히 속물인 조르바.. 그러나 그는 자유가 있다. 늙은 것들과 젊은것들의 즉물적 속성.. 그들은 속물이다... 그 사이에 고뇌하는 '두목'이나 기나긴 하루의 주인공인 며느리이자 시어머니인 ''도 속물이다. 인간은 모두 속물이다....

이것이 4년 동안 읽은 그리스도인 조르바의 결론이다.


그래도 나는 고상한 속물이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몇 권 보여 담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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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7-12-11 17:43   좋아요 0 | URL
아... 그랫군요. 감사합니다
 

존 D. 커리드


커리드의 <고대 근동 신들과의 논쟁>이 번역 출간되었다. 구약은 반신화적 관점에서 저술했다고 본다. 그래서 전쟁이 아닌 논쟁으로 보았다. 한글 책과 영어 원서가 매치 되지 않아 같이 담는다. 


고대 근동 문화는 필연적으로 고고학과 연결되고, 신화해석을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고대 근동은 그리스 신화와 이야기로 넘어간다. 모든 종교를 동일하게 바라본 종교사학파를 반대한 커리드의 저술은 독특한 입지를 차지한다. 지라드의 관점이 상당히 비슷하다.  



















































































근동에 대한 자료를 더 찾다가 위키백과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발견했다. 즉 근동이란 말은 19세기 대영적이 식민지적 사관에서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근동이란 단어는 쓰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이겠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어쩌겠는가... 구조주의 입장에서 지금 이 시대의 의미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고대 근동(古代近東, Ancient Near East)"이라는 낱말은 19세기에 대영제국이 관심을 가졌던 지역들을 지칭함에 있어서 근동(近東, Near East)과 극동(極東, Far East)을 구분하였던 용법을 활용하여 성립된 용어이다. 근동과 극동의 구분이 최초로 나타난 때는 크림 전쟁(1853~1856) 동안이다. 국가간의 외교에서 이 두 용어가 사용된 뚜렷한 예로 가장 큰 마지막 사건은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인과 아시리아인을 학살한 1894~1896년의 하미드 대학살(Hamidian Massacres)과 1894~1895년의 청일 전쟁이다. 당시 대영제국의 정치가들과 정치 고문들은 이 두 사건이 전개된 지역을 각각 "근동(Near East)"과 "극동(Far East)"이라 불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동(Middle East)이라는 낱말이 사용되었는데, 20세기에서는 "중동"이 "근동"보다 더 널리 쓰였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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