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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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기독교는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 그 이전에도 보수 기독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기에 역부족했지만, 세월호 이후 그들의 약점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국 보수교회는 처음 예수가 보여준 초대기독교의 진정성을 상실한 함량부족과 그릇된 재료를 사용하는 불량식품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사도바울의 권면을 망각한 탓이요, 예수 가르쳐준 교훈을 따르는 제자 삼는 일을 버렸기 때문이다.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며,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예수를 따르기보다, 권력과 명예, 쾌락과 돈을 따르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본주의와 무신성으로 가득 찬 파렴치한 정치의 합작품’(133)인데도 놀랍게도 한국 보수교회는 세월호 참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했고, 하나님의 심판인 것처럼 교란시켰다. 국무총리 후보로 나온 문창극 후보의 모교회 강연이 사람들로부터 지탄 받고 있을 때, 다수의 보수교회 교인들은 문창극을 추켜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경제를 좀먹는 벌레 취급이 되었고, 애국심이 전혀 없는 불온한 국민이 되었다. 세월호 침몰이 하나님의 뜻이니 잠잠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는 고통 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거했던 예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함을 변호하고 옹호하기 위해 안달이 난 듯 하다. ‘인간과 세상을 구원해야 할 신을 인간 자신이 변호해줘야 하다니.’(118) 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일인가.

 

 

저자는 하나님의 뜻이란 고상한 명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고통 받는 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한국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인과응보의 논리에 함몰된 보수 기독교는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잘못 때문으로 정죄한다. 그들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정죄하고 회개하라고 외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존재이다. 그러나 고통이 그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보다 악하고 죄가 많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수많은 죄악을 지었음에도 건강하고 평안하며 떵떵 거리며 산다.(39) 하나님은 왜 그들은 벌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인과응보의 원리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릇되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고통은 현실의 감춰진 부조리와 모순이 드러나는 틈이다.”(120) 고통은 인간의 차가운 이성과 논리로 메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욥의 고난을 보라. 한 순간의 전 재산과 자녀를 한꺼번에 잃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를 원했지만 오히려 욥의 분노를 일으켰고, 심지어 하나님께 정죄 받았다. 고난은 인간의 얕은 체험이나 지식을 풀 수 없는 신비다. 욥기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하시지만 답하지 않으신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욥기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신학, 혹은 고난의 원인을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시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좌절된다. 어쩌면 고통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뿐일지도 모른다.”(90)

 

고통당하는 이들을 쉽게 위로하지 말라. 어설픈 위로는 더욱 큰 아픔을 준다. 그들에게 굳이 하나님을 해명하거나 변호하지도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다만 그들의 아픔을 나누려는 겸허함만 있으면 된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제럴드 싯처는 상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상실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해 놓고 그날 사고로 돌아가 보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랐고 쓰디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하나님 앞에서 울다)

 

아무도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로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이 충분히 절규하도록 도와야하고, 충분히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자신의 슬픔에 충분히 슬퍼하는 자만이 오히려 스스로 눈물을 닥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116) 이다. ‘고통당하는 자의 무능과 약함에 함께 동참함으로 부조리와 모순에 맞설 수 있는 힘을 북돋워줘야 한다.’(121) 하나님의 창조적 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폭력적 무력이 아니며, ‘세상과 무관하게 자기 속에 갇혀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창조의 모험을 감행하시는 분이다.’(107) 하나님의 창조적 모험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예수의 성육신과 고난, 십자가와 죽으심을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의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다.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103)

 

교회도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103쪽)

“이처럼 욥기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신학, 혹은 고난의 원인을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시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좌절된다. 어쩌면 고통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뿐일지도 모른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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