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 작은 아씨들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건 항상 기분이 묘하다. 당시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인물간 관계도가 이해가 가기도 하고 전혀 다른 인물이 더 마음에 드는 등 감상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막내 딸 에이미의 행동이 그리 이기적으로 보이지 않았었는데 조가 몇년에 걸려 집필한 유일무이한 책을 태웠을 때 느낀 분노란...부모님이 안 계신 사이 베스가 죽음의 위기를 겪고 에이미도 대고모님께 받은 반지를 미친 듯이 자랑하지 않을 만큼은 성장하지만 그래도 앙금이 남았달까.
오히려 굶주려서 생선 장수에게 생선을 구걸한 여인에게 커다란 생선을 턱하고 안겨줬다는 옆집 할아버지의 일화가 새롭게 기억에 남았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며 새로운 기억, 새로운 감상이 덧붙여졌다. 언젠가 다시 읽으면 또 감상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래도 둘째 딸 조가 제일 마음에 든다는 것만은 변하지 않겠지.
2. The Graphic Book 더 그래픽 북
(인포그래픽으로 즐기는 세상의 여러 가지 사실 2,663)
학교를 다니면서 수많은 미술과제를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건 모자이크다. 큰 색종이를 샤프 끝으로 눌러 깨만한 조각으로 찢어 붙였던 촘촘한 모자이크. 대충 북북 찢어서 만든 애도 있었는데 대체 무슨 영화를 보자고 그런 걸 만들었었는지 아직도 그 끝없는 과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기억까지 지긋지긋하게 따라 붙는 정도랄까.
그런데 정작 <그래픽 북>을 보면서 떠올린 게 바로 그 모자이크였다. 멀리서는 그저 색이 들어간 그림이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이 책 역시 자잘한 지식들로 모여 있다. 그것도 생활에 그다지 쓸모 없고 굳이 알야할 할 이유도 없는 지식들이다. 우주 비행사가 칫솔을 우주에서 잃어버려서 다른 사람 것을 같이 썼다는 사실, 클링온 어, 실패하고 만 도청 고양이 같은 정보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알고도 '훗'하고 날려버려도 될 정도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좋았다. 뭔가를 암기해야 한다는 압박이나 감동을 느껴야 한다는 강박은 필요없다. 테이블이나 책상 한 구석에 던져놨다가 슬쩍 펴서 한 두 장씩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려한 인포그래픽과 디자인은? 아무래도 좋은 사소한 지식에 더해진 즐거운 덤인 셈이다.
3. 메리 러셀, 셜록의 제자
개인적으로 코난 도일이 쓴 원작을 제외하고선 다른 소설 속에서 홈즈가 등장하는 게 그다지 달갑지 않다. 취미로야 괜찮지만 누군가 공들여 완성한 세계에 슬쩍 기댄 걸 출판화까지 하다니... 그걸 볼 시간에 어느 작가든 오랜 고심 끝에 완성했을 오롯한 신세계를 맛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나마 뤼팽 시리즈에서 허접하게 등장했던 건 아예 홈즈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예외. 그런 마음을 가속화했던 건 언젠가 읽었던 홈즈 오마주라고 할지, 대체 뭐였는지 알 수 없는 책이 별로 였기 때문이다. 상도 받았다고 쓰여 있었으나 기억에서 제목마저 삭제될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지인을 봤을 때 무심코 부정적인 말부터 내뱉었다. 헌데 정말 놀랍게도 읽어보니 재미있었다. 뭐, 홈즈를 재해석 했다든가 그런 말을 붙일 생각도 없고 여태 읽은 책 중에 최고라고 할 생각도 없다. 몰입도도 보통. 그럼에도 묘하게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흥미를 자극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한나 스웬슨 시리즈 같은 코지 미스터리에 홈즈 풍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배합했는데 그게 딱 맛이 들었다는 느낌이었다.
참고로 먼저 읽은 지인은 추리소설을 기대했던 터라 중반부까지 지루하다고 했다. 반면 메리 러셀의 모험이 곁들여진 성장 소설이란 관점에서 읽으면 초반부터 제법 괜찮다. 사실 제일 좋아하는 탐정은 홈즈가 아니라 미스 마플이라 광적인 셜로키언도 아니고 장르 소설은 결국 재밌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나저나 이거 12권까지 나왔다는데 현대문학에서 끝까지 번역하긴 할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원서로 읽어야 하나. 아이고.
탐나는 책
1. 엿보기 톰의 집에 어서 오세요
젊은 남녀들을 한 집에 몰아넣고 최후의 1인을 뽑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살인이 벌어진다. 정상적인 반응은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건만 관음증에 물든 사람들은 누가 범인일지 그저 궁금해한다. 당연히 돈독에 오른 제작진은 치솟은 시청률에 열광하고 방송을 계속하는데...
수많은 카메라와 도청기가 부착된 촬영장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서로가 경쟁자인 상황이지만 실상 이들은 진짜 갇힌 건 아니다. 상금을 목적으로 참여했으니 누군가와 같이 있는게 싫어서 못 견디겠으면 그만두고 나가면 되는 게 아닌가. 허나 살인자의 심리는 그저 짜증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를 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욕망이 들끓는 촬영장 안, 진실은 콜리지 경감의 손아귀에서 풀려 나온다.
표지부터가 독특한 책이다. 살인이 일어나는 리얼리티 쇼 제작사는 무려 '피핑 톰' 프로덕션이다. 백작 부인이 사람들의 감세를 위해 알몸으로 말을 달리는 일을 감행했다. 개인적 수치심을 감수한 고귀한 행동이라 모두가 창문에 커튼을 치고 절대 보지 않기로 했는데 재단사 톰만이 그걸 훔쳐 봤다는 데에서 나온 '피핑 톰'이다. 관음증을 부추기는 프로덕션인 셈이다.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된 사람들 틈에서 벌어지는 촌극과 유일한 방관자로 사건을 추리해가는 경감의 이야기라니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2. 원시인 식사법
인류의 유전자에 맞는 식사법으로만 바꿔도 살이 빠지고 피로감이 사라진다고 한다. 동물성 단백질이 모두 나쁜게 아니라 콜레스테롤 수치를 올리는 고지방 육류를 피하면 된다고 말하는 책이다. 거기에 완전 식품이라고 이름 높은 우유가 안전하지 않다는 지적을 덧붙이는데 통념을 바꾸는 내용이라 고개가 갸웃하기도 하지만 일단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만은 확실하다.
3. 용이 산다1
전작 <내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가 감동 계열이라 차기작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었는데 용을 주인공으로 한 일상 판타지물이라 놀랐던 기억이 있다. 용이 나온다고 하면 보통 무찔러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던가. 하지만 <용이 산다> 속의 용은 그저 지역 주민일 뿐이다.
판타지 소설가에 게임 폐인인 김용은 말 그대로 용이다. 인간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하는데 옆집에 이사온 최우혁에게 단박에 들통이 나서 친분을 쌓게 된다. 둘이 복작복작 싸우며 이웃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많아서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일상툰 같은 느낌도 있다. 단, 어디까지나 주요 인물이 용인 터라 여의주로 비를 부르기도 하는 등 독특한 내용이 전개 될 때도 많다.
4. 1일 2분 스트레칭
하루에 2분 운동해서 '평생 젊고 날씬하며 통증없는 몸'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목에 혹하고 내용에 멍해진 책이다. 매일 스트레칭 할 수 있는 <1일 2분 12주 프로그램>과 어깨 결림, 다리 부기, 요통, 구부정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단기집중 1일 15분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일 운동해야지 하면서도 미루게 되는데 2분 정도라면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마음이 내키면 15분에도 도전해보고.
5. 당신 없이 무척이나 소란한 하루
무언가를 잃고 고통받은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94가지 이야기. 치유처방전이라고도 하는데 그런만큼 첫 번째 장에서 증상을 확인하고 나머지 네 개 장에서 '인정-고통-치유-성장'을 다룬다고 한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소제목은 '자신을 용서하세요'다.
살면서 사랑하는 무언가를 잃고 상처받은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게 뜻대로 되던가. 마음의 상처야말로 그냥 덮어두면 곪아 문드러지기 마련이다. 뭉크처럼 그림으로 표출할 수 없다면 상처받았던 일을 글로 써서 하나의 빛바랜 사진처럼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다. 요점은 발산이니까. 그마저도 안 된다면 누군가의 위로를 한 권의 책으로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6. 날 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
수많은 요리책들 속에서 요리는 쏟아지지만 정작 그걸 만든 사람은 시선이 잘 닿지 않는 한 켠에 빗겨 서 있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콘플레이크를 먹을 거면 차라리 포장지를 먹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하는 요리사란다. 그건 '사람이 먹으라고 만든 음식이 아니라 톱밥이야'가 차라리 예의 차린 말처럼 느껴진다. 요리를 곁들여 여러 요리사의 이야기를 읽는 책이라니 궁금해졌다. 음? 굳이 표지에 칼을 들고 있을 것 까지야. 매혹이 아니라 위협의 요리사 같네. 그래도 보고 싶다.
7. 거인의 역사
건물 3층 높이의 키를 가진 거인을 3명의 여자가 이야기 한다. 그의 어머니, 아내, 딸이다. 거대하다는 걸로 유명해졌으니 소수자 중에 소수자인 남자에게 생활 지원을 해준다며 CIA에서 접근해 온다. 이미 꼬여버렸던 그의 인생은 그 제안으로 인해 시대의 무게에 짓눌려 간다.
'미국의 비극'이라는 문구가 붙었고 유명한 가운데 고독에 시달렸다고 하니 보나마나 안 좋게 흘러 갈 것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어떤 이야기가 풀려나갈지 궁금하다. 단, 읽은 후에 씁쓸함은 자동적으로 따라 붙을 것 같다.
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