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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정신분석을 제대로 파고 들어갔다. <꿈의 해석>을 읽었던 삼십 몇 년 전으로 돌아가본다. 프로이트가 쓴 책이 워낙 유명세라서 읽어두면 살이 되고 피가 되리라는 충동적 읽기였다. 그러다가 2/3를 읽다 말았다. 어째서 이 책이 그토록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점점 자라나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어서였다. 우리에게 있던 <꿈의 해몽>보다 못하다는 판단이 들었는데, 해석이 동양의 풀이와는 너무 달라서였다. 해서 이 비판적 평전이 반가웠다. 비판의 기능이 비난이 될 수도 있지만, 역기능의 한 축인 비난도 때로는 감지덕지지 않던가.

 
어떤 면에서 우상이 되고 싶었던 프로이트는 마술적 주문을 스스로 걸었던 듯 하다. 프로이트보다 12살 위였던 니체에게 강박증세가 있다고 책은 밝히고 있다. "니체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로이트 이론이 제기한 여러 문제를 감지하고 예상했다. 예슬 들면 망각의 가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과도하게 반응하는 예민함과 질병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사고 방식 및 기타 등등." 이라는 프로이트 학파 중의 허틀러의 거짓추리는 경악할만하다. 이들은 프로이트를 니체와 동급이거나 그보다 위로 치켜세우는 작업을 하면서 근거가 부족한 결함을 만들어 도덕적으로 매장시키려 했다. 철학자보다는 과학자이기를 원했던 프로이트가 어쩌자고 철학자인 니체를 공격했을까, 라는 의문은 이 책을 읽어가면서 씁쓸한 웃음이 되곤 한다. 니체의 영향력으로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의식(Unbewuste)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나온 '의지(Wille)'에서 영향을 받은 것같다고 저자는 추론하고 있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을 도용이라고 하며 심각한 사회적 질환으로 다루는 입장에서―프로이트는 도용의 선수라고 저자는 밝히고자 하는 게 보인다. 맞는 말이다. 자신이 영향을 받았던 이들을 모두 기록에서 삭제할 정도라면 신뢰보다는 몰상식에 가깝지 않을까. 과학자로 알려지고자 했더라도 그의 창작성은 철학자도 아닌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됐다. 정신분석학을 과학의 범주로 넣는 것이 마땅하지만, 프로이트의 행위에서 도덕불감증을 강하게 전달받는 것같다.

저자가 찾아낸 <꿈의 해석>은 『꿈의 열쇠』라는 아르테미도루스에서 원형을 발견한 듯 소개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의 『향연』 에서 양성애의 주제가 프로이트와 이론과 유사하다고 밝히고 있다. 고고학적인 방법으로 프로이트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인데, 프로이트보다 저자가 더 집요하게 파고드는 데 놀라게 된 책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과학의 탈을 쓴 철학자로 불리워야 하는 게 좋을 듯 싶다. 『꿈의 해석』 이 의식과 무의식을 나누는 사상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지만,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그러한 문제를 다루었다. 철학의 씨앗을 키우면서 다시 철학을 스포츠 브래이져를 차고 누르는 것같은 행위로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매우 침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네. 히스테리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일 때문에 상태가 점점 심각해졌어. 그뿐만 아니라 다른 정신이상도 생긴 것같아. 아직은 잠복기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네만 내 기분 상태에 따라 앞으로 상황이 달라질 것같아." 라고 프로이트 스스로 심각한 정신 신경증을 겪고 있음을 편지로 호소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을 다루는 과학자라면 그러한 병에 걸리지 않아야 하며,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환자는 물론 일반인들은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기분석에 그의 이론을 상당수 적용하는 과오를 범했다. 범용성이 뚝 떨어지는 것인 셈이다.


끝으로 의식과 무의식을 필자는 프로이트와는 다르게 접근해오곤 했다. 경험에 뿌리를 둔 사유는 앎知가 되고, 오감을 통해 인식되는 작용은 식識으로 이해하곤 했다. 이 둘의 관계가 동양적 사유이지만,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잣대로 나누지 않는다.


저자가 동양사상을 조금 더 연구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을 비교한 책이 나오길 기대를 한, 비판적 책일기였다. 좋은 논증이 되고, 참고서적으로 옆에 둘만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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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인기없는 에세이


러셀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이는 화이트헤드의 영향도 있는데, <수학원리Pricipia Mathematica>를 화이트헤드와 저술해서였다. 다양한 분야를 다루게 된 러셀은 지독하게 고독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하는데, 아마 여기서 그의 사상이 싹을 틔웠으리라 생각해보곤 했다.

러셀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결하고, 시원시원해서다. 시원하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8장 위대한 스승이 되려면>에서 훓어보고자 한다.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과거에 교사는 비상한 지식 또는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에 선뜻 귀를 기울였다. 고대 사회에서 교직은 정규직이 아니었고, 따라서 교사들은 무엇을 가르치건 제재당하지 않았다. p236"은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교육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살필 수 있다. 정규와 비정규로 나뉘면서, 비정규직의 호소는 거의 들리지 않는 현실은 암담한 편이다. 교육이란 정규의 몫만이 아닐 터인데도, 정규로만 묶어놓은 것은 일종의 벽이고 테두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결국 포기하게 되는 곳이 교육, 즉 앎의 과정이지 않던가. 그리고 러셀은 국가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 국가 교육은 명백히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안전장치를 꼭 마련해야 할 몇 가지 위험이 따른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이와 관련하여 두려워해야 할 해악들은 나치스 치하의 독일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고 소련에서는 지금도 목격되고 있다. 이러한 해악이 지배하는 곳에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독단적인 사상에 동의해야 하는데 자유로운 지성의 소유자라면 누구도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p238" 여기서 러셀은 국가교육에 대한 문제를 집단의 광기를 다루는 듯 싶다. 그 부분이 현재 미디어가 대중을 현혹하고 속이는 것으로 좋지 않게 발달하고 있다고 본다. 대중, 즉 많은 이들을 조금씩 물들여 그것이 없으면 안되는 상황에 빠지게 하는 독단론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교육의 부재이고, 앞으로도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 필자는 내다보고 있다. 아이가 한 명 있는데, 그 아이의 교육은 정부의 교육제도와 방침으로 상당히 까다로운 과정을 습득해야만 한다. 그 아이의 바로 아래 학년은 아주 쉽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혼란은 아이들을 아이답지 못하게 하기에, 계층간 소통이 나중에는 무너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부분을 연결시키고 회복시킬 수 있는 보완책은 그러나 보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러셀의 문명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꽤 괜챦다. "문명화된 공동체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한 나라가 기계류와 자동차, 화장실, 빠른 교통수단 등을 갖추었다면 그 나라는 문명국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보이에 대다수 현대인은 그러한 것들을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중요시한다. 문명이란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지, 삶의 유형적 측면에 따라붙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문명은 한편으로 지식의 문제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서의 문제이다. 이때 지식이 문제가 되는 이상, 사람은 시간과 공간 속에 놓인 이 세계와 연관지어 생각할 때 그 자신과 눈앞의 환경이 사소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라고 러셀은 주장했다. 옳은 이야기다. 현대인들의 문명은 거의 물질과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을 쫒도록 되어있지 않던가. 이러한 데도 교육은 여전히 생존적 가치보다는 가치적 생존이라는 어줍쟎은 기준으로 가르치고 있다. 거의 모든 매체는 소비를 자극하고, 교육에서 말하는 지식도 소비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필요하지 않은 것도 갖는 것이 더 잘 사는 것이라는 이상한 분위기가 현대의 문명 중 하나이기도 하고.

거의 모든 교육이 속성이다. 그래서 지식이 지혜로 전환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매체는 생산과 소비에 맞춰져 기계적인 의식구조로 변하고 있다. 이는 교육의 문제만이 아니지만, 교육을 생각하는 당사자들은 깊은 사색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속성이란 인스턴트이고, 인스턴트는 모든 고통의 근간에 있는 것이다. 속성으로 이뤄지는 모든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연계는 적응이라는 과정을 아주 느리게 진화해왔다. 인간만이 그것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러셀의 이야기로 충분히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읽어볼만한 <9장,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과 <10장,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은 세심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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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탐욕은 불평등을 만드는 질병이다.

처음부터 책은 심각하다. 세계 상위 10 %에 있는 부자들은 세계 부의 85%를 차지하고, 하위 50%는 세계 부의 1%만 차지한다―라는 증명은 가슴이 쓰리다. 주변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 천지다. 잘 사는 이들의 행태는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자본이 민주주의와 결합되면서 빈곤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탐욕에 맞춰진 자본은 일반인을 노예로 만들고, 그들이 생산한 제품을 다시 사용하게 하는 악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이윤추구가 동시에 공익을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라는 이 주장은 사실상 거짓으로 밝혀졌다, 라고 책에서 굵은 글씨로 호소하고 있다. 개인의 이윤추구가 곧 탐욕이 공익인가? 라는 설정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고, 회복되지도 않은 시장경제를 더 병들게 하고 있다. 모든 자원을 깡끄리 써버리겠다는 이상한 심보의 모습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속성 중 하나는 파괴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왔다.

불평등을 주제로 잡은 까닭에, 루소의 <사회불평등 기원론>을 한번 훓어보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생필품도 갖추지 못한 채  굶주리며 살아가는 파국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 라고 한 루소는 당시에 위험한 생각을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용감했다고 본다. 허나 탐욕을 이기심이라는 단어로 순화시키면서 자연계는 지배의 대상화가 되어 점점 타락이 되어갔다. 자본은 자연을 가공하면서 나타난 잉여물인데, 그들은 인간에게도 자연에게도 잉여가치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자본과 탐욕에 대한 지적은 숱하게 나왔지만, 입을 닫았던 까닭에 금융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그 금융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데아의 산물이고, 본질이 있다는 일자에 기인한다.

"우리의 세계가 원래부터 서로 경쟁하는 경제 주체들로 갈라지도록 만들어 있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경쟁적 경제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다." ― 존 쿳시 John M. Coetzee, p45

이는 경쟁을 한다는 현상에서 보자면 끝임없이 분열해야 마땅하겠지만, 그 끝에서는 통합을 하는 게 역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본은 통합이라는 과정을 인간적이지 않게 한다. 이기심으로 작동되는 자본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면서도, 기본적인 인간적인 성찰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좋은 제품이 과연 우리의 삶을 행복에 이끌어주는가? 라는 질문은 그들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싼 가전제품들이 꽉 들어찬 공간에서 살아야만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가? 지금의 시대는 문명도 문화도 아닌 제품의 시기라고 봐야 더 어울린다. 몇몇 기업들이 비슷비슷한 제품을 내놓고, 그것을 쓰지 않으면 왕따를 당하는 문화와 중독을 조장하고, 다시 소외를 만드는 일들은 자본의 어두운 면이다. 자본의 축적은 곧 자연을 회복불가능한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식주를 넘어서는 거의 모든 것들을 가치로 묶어놓은 현 시대의 문화는 대단히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이 대량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 것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면서였다. 경제적인 이익을 막대하게 얻기 위한 서구의 모습은 괴물의 그 자체였지, 문명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해오곤 했다. 그 사실을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았기에, 노예무역이 금융자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서구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 서구만큼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것은 인간을 사고 파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비의 방식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불평등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것도, 거의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는 소수의 투표권을 가진 경제 기득권자와 같은 파급력을 지닌 불매운동으로 전개해야만 불평등을 해소시킬 수 있다. 불평등의 사회를 만든 이 자본주의의 변화는 현재 전자사회로 바꾸어놓았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알게 된다 하더라도 나아지지 않는 보통사람들의 삶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

책의 내용은 상당히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다. "(금융기관과 신용 제공기관들에 대한) 탈규제와 이 기관들의 주식회사로의 전환은 금융 산업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보수와 커미션과 보너스를 제공해주는 또 하나의 노다지판이었던 것이다.―p65" 라고 밝히고 있다. 민주주의가 금융산업으로 떡칠이 된 것은, 민주주의의 시작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도 노예는 존재했었지 않았던가. 그러한 노동력의 착취가 사라지지 않고,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금융산업을 멀리할 수 없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생존인데, 생존보다는 이질적인 가치에 더 투자하게 하는 자본사회로 변질된 민주주의는 반성을 해야만 한다.

제4장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에서 <탐욕>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본다.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같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실로 섬뜩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시도해보지 않는 한, 거듭해서 그리고 더욱 더 열심히 시도해보지 않는 한, 그 생각이 틀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p115"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묵직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탐욕은 질병이라고 필자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었으며.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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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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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폭력의 자유


제목부터 끌린다. 상반된 개념이 만나도록 것은 문장, 글의 힘을 아는 이가 손댄 흔적이라 느껴진다. 그래서 천천히 읽었다. 자유의 폭력이라 하지 않고, 폭력의 자유라 한 점이 무엇이었을까? 의문이 들자 잠시 읽기를 쉬었다. 읽는 것을 쉽지 않게 하는 습관은 오래된 버릇이고, 무조건 받아들였던 때의 무지를 벗어보고자 애쓴 흔적이 이 책에서도 툭툭 기어올라왔다.

먼저 저자의 고생이 보였다. 그러나 그 반대로 역사란 거의 다 그러하지 않던가. 흑백에 대한 논의에서 흑이 있기에 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은 그러나 흑은 보여주면서 백은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지면의 한계라고 해두어야 하거나 껄끄러운 부분이 생략되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필자는 보수도 진보도 아닌 중도의 입장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평형의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누구의 편이 좋다면, 그 좋음이 싫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이 현실화되었을 때, 그것의 부작용은 늘 따라오지만 대부분 숨겨져있거나 미화되는 것이 역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여서다. 그런 관점에서 미화되거나 축소 또는 본능적으로 숨겨둔 듯한 부분을 읽어가려는 자세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보수언론이라고 지칭한 조중동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들이 물론 잘못한 부분이 적지 않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보든 보수든 공격성을 띄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언론 재벌의 문제를 일반 서민의 민생고까지 펼치지 못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언론이 정치에 묶여있어선 안되는 이유는, 이 책에서 여실히 밝혀주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명박의 <기관지확장증>이라는 병역면제를 밝힌 부분이다. 병역면제 후에 술을 엄청나게 마셨고, 병이 기적적으로 나았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거짓이라 생각했다. 폐는 다치면 재생이 되지 않는 까닭에 평생 그대로 살아야 하는 해서다. 그런 점을 짚어냈다는 것은 훌륭한 점이다. 필자는 근거가 있는 글을 채택하는 편인데, 이 책에서는 근거가 꽤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편이다. 그러면서 원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 모두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언론의 가장 큰 문제는 도덕성이지 않던가. 도덕성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래서 진보와 보수의 언론들이 새로운 신문을 만들 수 있기를 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언론은 접하지만, 객관적 기사라고 하더라도 주관적으로 쓸 수밖에 없는 입장이 있지 않겠는가. 상대방을 공격하여 흠집내기 위한 것이 정치의 한 단면이기도 하지만, 그 둘은 공론화를 보다 확실하게 펼쳐야 한다. <폭력의 자유>는 그 공론화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귀한 자료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제 치하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기자의 가치관은 높이 살 정신이라 보았다.

언론을 움직이려는 시도는 좋은 뜻도 왜곡되기 마련인데, 법률까지 만들어 옥죄게 했다는 점은 탐탁하지 않은 부분이다. 우리나라에 국한된 언론은 남북의 대치로 인해 다른 나라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 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허나 언론의 기획과 취재는 연재소설과 같은 지속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단편적인 뉴스의 흐름을 쯪는 경향을 보임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일반 대중에게는 정치도 중요하지만 생활이 가장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언론이 할 수 있는 일은 제대로 된 견제와 감시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알 권리를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알권리를 무시하거나 변경하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에 대한 우려가 사회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점에서 경계해야할 일이라고 본다.

일관성을 유지하는 책은 흔치 않다. 책 속에서 내러티브로 이야기하는 저자는 아마도 기자생활을 오래도록 했기 때문에 몸에 밴 습성이겠지만, 각 시대의 맞는 챕터에 반드시 언론의 조장에 관한 팩트를 찾아서 넣어두었다. 이런 조사가 쉽지 않았을지라도, 다른 각도의 이야기도 실었으면 했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좌우에 대한 입장을 확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보가 중요하다면 보수의 주장이 왜 좋고 나쁜지 이야기를 해두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으나 진보와 보수라는 운동성의 범위와 한계는 넘어서, 화합으로 가는 길은 없었을까―라는 기대를 다음에 기대를 해보게 됐다. 언론 재벌 머독과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소개와 위키리스크의 상반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론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저자의 혼을 느끼는 대목이기도 했다. 허나 역사에서 위키리스크 자료들이 쏟아져 나온 때는 없었다. 조선왕조에서도 왕은 자신의 역사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언론을 통제하게 되면, 기록을 변경할 수 있다는 위험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과 그 사건의 당위성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에서 사회의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

제1부 1장 일제의 '문화정책'과 친일언론
제2부 5장 이승만의 악정과 4월 혁명
제3부 9장 자유언론 실천운동
제4부 2장 해직언론인들의 조직운동과 권력의 언론 조작
제5부 4장 수서사건과 '죽음의 굿판'
제6부 4장 '황태자 김현철'과 '사고공화국' 문민정부의 몰락
제7부 3장 국민의 정부 1주년과 '옷 로비 사건'
제8부 5장 노무현의 죽음과 언론의 표변
제9부 5장 한국 언론사상 최대의 방송 연대파업

위의 장은 저자의 깊은 통찰이 묻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현대 한국사의 흐름도 엿볼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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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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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책은 기만을 다룬다. 기만이라, 속인다 라는 개념을 저자는 Deceit라는 단어로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행위를 파고 들었다. 기만欺瞞은 남을 속이는 것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을 자기기만이라고 하는 데―영어권에서는 이 단어를 같이 사용하는 듯 싶다. 이 또한 기만의 한 종류라 파악하게 됐고. 책은 그리 까다롭지 않은 진행을 하는 데, 마치 신문에 투고한 글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면 기만에 대하여 그간 써온 글들을 모은 것이라 해두는 게 좋을 듯 싶다. 조금 딱딱한 책을 읽다가 한 권의 책에 무척 다양한 사례를 담은 책을 오랫만에 읽게 되다보니, 읽는데 다소 혼동이 왔다. 쉬운 책과 어려운 책의 경계가 모호해졌는데, 그런 점에서 기만을 주제로 잡은 이 서적은 읽는 독자에게 <자기기만>을 퍼트리고 있는 중이겠다.

먼저 목차를 보자.

1장 자기기만의 진화논리
2장 자연에서 기만
3장 신경생리학과 강요된 자기기만
4장 가정의 자기기만과 분열된 자아
5장 기만, 자기기만, 섹스
6장은 자기기만의 면역학
7장은 자기기만의 심리학
8장 일상생활에서 자기기만
9장 항공 우주 재난과 자기기만
10장 거짓 역사 서사
11장 자기기만과 전쟁
12장 종교와 자기기만
13장 자기기만과 사회과학의 구조
14장 우리 자신의 삶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


저자가 기만을 내세우는 이유는 1장과 마지막인 14장에 들어있다고 본다. 서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진화논리와 자기기만과 싸워야 하는 이유를 그래서 살펴보는 것이리라 본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는 점이 적지 않게 보인다. "우리는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들어오는 정보뿐 아니라 해동하려는 내면의 이도를 본다. 마치 사전에 예측해야 할 일을 사후에야 알아치리는 듯하다. p502"에 있는 내용이 기만에 소재로 적당한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논리전개에 쓰인 설정은 기만이라는 개념에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듯이 보였다고 해두자. 책은 학술적이라기보다는 개인의 경험과 성공, 그리고 좋은 삶에 대한 추구로 넘어가려는 듯 보인다. 소로우의 명상 세계로 들어가려고 몸을 씻는 행위처럼, 스스로 기만에 물들었던 것을 바라보고 비워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남을 더 잘 속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인다. 남을 속이기 위해 우리는 있을 법하지 않은 온갖 방식으로 내부에서 정보를 재편하려는 유혹에 빠지며,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자기만의 주된 기능이 공격하는 것이라는―남을 속이는 능력이라고 볼 때―이 단손한 전제로부터 우리는 자지기만의 이론과 과학을 구축할 수 있다. p22" 로 돌아가서 기만의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저자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속인다는 말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개연성이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이 정의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기만은 진화를 설명할 때 저자만의 생각인 듯 싶기도 했다. 물론 소수의 생각이더라도 존중해야겠지만, 저자가 논증에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저자는 자기기만을 진화적으로 접근한다고 서두에 밝혔는데, 진화보다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한 듯 싶다.

필자는 기만을 생화학적으로 접근할 때, 호르몬의 역할로 보고 있다. 식물에서 보면 탄닌Tannin이라는 호르몬이 있다. 떫은 맛을 내는 데, 동물의 껍질을 가죽으로 만들 때 쓰이는 방부제이면서, 식물에서는 방어기능을 하는 호르몬으로 작용한다. 기만은 진화에서 보자면 보호본능에 속할 수도 있고, 방어본능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기만은 진화의 입장을 고수한다지만, 사회적 관계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사회적 관점도 물론 진화에 속하지만, 흔히 진화라고 한다면 관찰이 그래도 가능한 영역이 아니던가. 대개의 전개는 동양의 직관直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서양식 합리주의에 근거를 하고 있다. 합리주의라고 해도 조금 부족하다고 본다. 물론 플라시보 효과에 대한 정의는 비교적 잘 묘사되었다. 기만을 보는 관점을 기만 그 자체를 알고 접근했다기 보다는 기만을 기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본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유해성이 과연 진화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싶다. 그리고 전개는 자벌레 같은 것은 무시하고, 오징어와 문어에 대한 위장술에 더 집중하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조금 큰 동물이 영리하다고 기만을 더 잘 할까? 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허나 기만의 수준은 벌레나 큰 동물이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영리한 아이들이 더 잘 속인다는 것일 수 있다는 전제를 둔 저자는, 앎에 대한 접근이 상당히 급한 면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필자로서는 낯선 부분이며, 예술에 대한 전개에서도 그러하다.

프로이드가 꿈의 분석을 통해 이룬 것도 하나의 관찰에 대한 것이었지만, 세상을 바꾼 위대한 생각 중 하나였다. 위대하다는 것은 사랑과 자비가 들어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사랑과 자비보다는 개인적 경험과 그가 겪은 소소한 일들로 명철한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뭐라고 할까, <5장 기만, 자기기만, 섹스>에서 프로이드가 다룬 성의 개념과는 너무 다르다. 그렇다고 프로이드가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허나 저자의 기만은 섹스가 욕구에서 나왔다기 보아는 기만의 술책으로 본다는 점은 본능의 관점이 아니기에 진화에 가깝지 않은 전개라고 보게 되었다. 진화라는 것은 생각도 생각이지만 살아남기 위한 것과 살아남은 적자생존의 법칙이라고 볼 수 있다. 기만이 과연 그 법칙에 얼마나 포함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든 것은 저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성은 왜 있을까?> 라는 소목차에서 암수의 역할을 피력하지만, 동양에서는 암수는 음양이다. 성의 존재가 다양한 자손을 생산하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은 현재까지 밝혀진 보편적인 사실 중의 하나라 생각한다. 성이 물론 단세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다세포로 오고, 다시 척추동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나타난 현상 중에 하나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단세포가 성이 없다고 세포가 증식되지 않는가? 단세포는 세포분열이라는 가장 완벽한 복제를 하는 데, 척추동물이라는 고등생물의 입장에서만 다룬 성은 자손번석이 편협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단세포로 이뤄진 우리의 몸은 감기같은 세균조차도 면역력이 떨어지면 방어하지 못하는 편이다. 진화의 입장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었는데, 기만은 진화를 조금 가볍게 보려고 한 것같다. <여성에 불륜에 대한 남성의 반응>이라는 소제목을 보고 조금 웃었다. 책의 골라 꽤 괜챦은 책이라 싶어 천천히 읽어보려 했는데, 뷸륜이 나오다니! 놀랬다. 그리고 배란기에 대한 이야기는 국소적 현상이지 보편적이라 볼 수 없다. 그 또한 생명의 탄생을 기만의 영역에서 배란을 다룬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후에, 저자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후에 더 읽어보아야 할 듯 싶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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