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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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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이런 류의 책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자꾸 발행되는 이유는, 자본의 해학이 문화 전반을 병들게 한다는 지적을 하려 함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 상위 1%들이 더 똑똑한 것도 아닌데, 더 많은 부를 움켜잡게 된 이후로 가난은 고질병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이 배우는 학문을 <측정의 오류>라고 봄직하다. 그들의 세계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부유함을 잔인함이라고 봐야만 하지 않을까? 대다수의 가난한 자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동굴로 스스로 들어간 물고기에 지나지 않다. 자신이 만든 어두운 동굴에서 살기에, 소통이 원할하지 않다. 이 사회문제는 더 많은 부를 획득하도록 만드는 서구의 교육에 문제가 있다.  욕심이라는 것이 한계가 없다지만, 끝이 없는 그들의 획득으로 인해 전지구적 황폐화가 가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학의 관점이 아니라 인문학도 그들의 탐욕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시킨 잘못을 책에서 조금 다루고 있다. 조지프 스티글라스의 비판적 견해는 다음과 같다. "경제학적 설명은 아주 분명합니다. 미국과 중국처럼 서로 다른 나라들이 문호를 개방할 때, 잘 사는 나라의 임금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충분히 예상한 결과죠. 세계화란 미국의 임금수준이 중국과 같아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 시장의 의미입니다. 결코 환영할 수 없는 결론이죠."

그렇다. 필자는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노동의 착취로 얻어진, 그들의 자본은 언젠가는 세계화가 아닌 지구 전체에 큰 해악을 끼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 의 시대는 현재 상황을 꽤 잘 묘사한 개념이라고 본다. 승자들도 불안하다는 것은 대기업 정책과 세계화가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승자의 유지기간이 극히 짧아졌다는 점은, 그들―플루토크라트가 힘든 이들에게 남긴 흉터다. 부의 공평한 분배가 사라지고 난 후, 모든 이데올로기까지 부에 집중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선사업을 어디에서 해야할지 모르고 있는 실정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고향이 없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된 까닭에, 전 세계가 그들의 고향이라는 패러독스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투자를 하지 않거나, 투자를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의 반대개념인 보이는 투자를 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플루투크라트가 그러하지는 않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정경유착이 유독 심한 편인데, 개발이 최우선으로 둔 까닭이다. 단기간에 승부를 거는 정책이나 방법들은 언제나 후유증이 심각하지만, 최정상의 부를 추구하는 이들은 나머지를 아랑곳하지 않는 편이다.

저자와는 상관이 없을 수 있지만, 우리 시대의 모순(The Paradox of Our Age)를 적어둔다.

The Paradox of Our Age / Dr. Moorehead, 1995

We have taller buildings but shorter tempers; wider freeways but narrower viewpoints; we spend more but have less; we buy more but enjoy it less; we have bigger houses and smaller families; more conveniences, yet less time; we have more degrees but less sense; more knowledge but less judgement; more experts, yet more problems; we have more gadgets but less satisfaction; more medicine, yet less wellness; we take more vitamins but see fewer results. We drink too much; smoke too much; spend too recklessly; laugh too little; drive too fast; get too angry quickly; stay up too late; get up too tired; read too seldom; watch TV too much and pray too seldom.

We have multiplied our possessions, but reduced our values; we fly in faster planes to arrive there quicker, to do less and return sooner; we sign more contracts only to realize fewer profits; we talk too much; love too seldom and lie too often. We've learned how to make a

living, but not a life; we've added years to life, not life to years. We've been all the way to the moon and back, but have trouble crossing the street to meet the new neighbor. We've conquered outer space, but not inner space; we've done larger things, but not better things; we've cleaned up the air, but polluted the soul; we've split the atom, but not our prejudice; we write more, but learn less; plan more, but accomplish less; we make faster planes, but longer lines; we learned to rush, but not to wait; we have more weapons, but less peace; higher incomes, but lower morals; more parties, but less fun; more food, but less appeasement; more acquaintances, but fewer friends; more effort, but less success. We build more computers to hold more information, to produce more copies than ever, but have less communication; drive smaller cars that have bigger problems; build larger factories that produce less. We've become long on quantity, but short on quality.

These are the times of fast foods and slow digestion; tall men, but short character; steep in profits, but shallow relationships. These are times of world peace, but domestic warfare; more leisure and less fun; higher postage, but slower mail; more kinds of food, but less nutrition. These are days of two incomes, but more divorces; these are times of fancier houses, but broken homes. These are days of quick trips, disposable diapers, cartridge living, thow-away morality, one-night stands, overweight bodies and pills that do everything from cheer, to prevent, quiet or kill. It is a time when there is much in the show window and nothing in the stock room. Indeed, these are the times!

누군가 번역을 하였는데, 이 부분도 적어두고.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視野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부족하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한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더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돈을 버는 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은 잊어 버렸고,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고, 우주를 향해 나아가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고, 세계평화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더 줄어들었다.


자본주의가 도금주의를 만들었고, 돈이면 다 된다는 풍조를 퍼트린 장본인이다. 자본은 인간이 만든 개념인데, 그 개념에 구속되기에 실천이 뒤따라야만 한다. 책의 결론은 여러 저명한 이들의 견해가 있는데,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보다 평등을 우선시하는 사회는 둘 다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평등보다 자유를 우선시하는 사회는 두 가지 모두를 상당 부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는, 평등이 쟁취의 목적이 된 듯 싶었다. 서구의 개념은 소유와 쟁취같은 것을 벗어나야만, 그들의 문제를 비로서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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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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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일베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전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꽤 조사가 잘 되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그들의 과격한 이야기가 퍼져나가지 않았으리라 본다. 인터넷과 익명성으로 위장이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필자는 일베의 사상적 근원을 익명성과 민주주의의 헛점에서 찾곤 했다. 저자가 논증하는 일베의 사상이 어디에 닿았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읽어나가게 됐지만, 의외의 소득이 생기곤 했다. 저자가 네이버 블로거로 활동할 때, 그의 글을 종종 읽어볼 때와는 다른 접근이었다. 논문과 비슷한 논조였던 블로그의 글쓰기와는 달리 읽기가 수월했다. 저자의 주장은 몇 가지로 압축되는 데, <관심병과 신상털이>를 비교적 차분한 시각으로 전개했다. 거의 모든 대립은 그래서 점점 이데올로기로 확대되지만, 그 근원에 있는 극히 사소한 충돌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어떤 사상이든 뜬구름잡기와 다르지 않다. 하워드 진은 "우리가 평생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것,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나 평등, 자유 같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친절함'이다. 즉, 친절하지 않기에 적대적이 되었고, 익명성 뒤에 숨고자 했다. 그런 행위가 한 사람이 아니라 집단으로 표출되는 원인은 분출구가 없어서다. <관심병>이란 그들의 분출구이고, 더 만흔 관심을 받고자 <신상털이>를 하는 짓을 서슴치않았던, 일베는 그들의 행동이 무법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쉬지 않으려 하기도 했다.

불수의근不隨意筋이라 해둔다. 일베의 사상은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중독적인 현상이라고 보곤 했다. 익명성으로는 논증을 할 수 있어도, 익명성이 민주적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의지는 자유가 아닌 방임에 가깝다. 신상을 터는 행위는, 경험도 노력도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퍼트린 괴상망측한 단어까지도 청소년에게 바로 오염시키면서도, 의지와 상관이 없다는 표명을 하는 태도는 꽤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곤 했다. 한 할아버지의 죽음을 인증샷을 하던 손자의 행위는 충격적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도덕적 해이이지 않던가. 자본사회가 되면서, 하나하나 힘을 잃었던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분노를 표출한다지만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저자의 지적은 페이스북의 행위를 허세로 본 부분도 있는데, 일정부분은 그럴 듯하다. 논증을 위해서 끌여들이다 보니, 논리를 위한 논리로 논증을 하게 된 경우가 전체의 맥락을 강경일변도로 바꾸었다. 그런 점이 이 책의 옥의 티라 해야겠다.


뉴라이트 사상이라고 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없기에 자극적인 요소로 사회를 더 병들게 하려는 일베를 파헤친 노력은 높이 사고 싶다. <일베의 사상>은 사태나 개념 그리고 존재를 그들의 우스개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기에, 저자는 문화적 맥락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같다. 그러나 필자는 문화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세다고 생각해오곤 했다. 애매한 대상을 제외한 서양의 합리론처럼, 일베의 행태는 모호한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기능을 실현하지 않았다. 그들의 한계라고 봐야할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두 장에서 빛이 난다. 책의 앞부분은 일본의 한 학자의 반성과 맥을 같이 풀이하면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담은 듯 싶기도 했다. <인터넷은 공론장인가?> 라는 장에서는 저자의 사유가 그대로 녹아들었다. "결국 공론장에 참여하려는 시민들은 스스로가 말하는 바의 이해 가능성, 진리성, 정당성, 진실서을 담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최소한 그러한 성실성을 타인에게 납득시키야 한다. 한편 하버마스는 이른바 '왜곡되지 않은 생활세계' 안에서는 그러한 의사소통 규범이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다시 말해 권력과 돈이 중심이 되는 '체계'가 훼방만 놓지 않는다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행위규범에 도달하게 되며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체계에 대한 '비판적인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라고 뜻을 심었다. 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공론을 바라는지 이 책을 통해 한국사회의 병을 진단해볼 수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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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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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표창원 교수는 꽤 알려진 프로파일러다.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을 CSI를 통해 엿볼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도 꽤 세밀하게 살피는 이를 표교수라고 방송은 소개하곤 했다. 책의 제목이 수상하기도 하거니와 전문 인터뷰로 알려진 지승호의 대담은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1부. 한국적 범죄의 탄생
2부. 연쇄살인을 복제한느 사회의 어두운 고리
3부. 과학수사를 파괴한 사법 시스템의 죄악
4부. 거대 국가 범죄에 가담한 경찰들
5부. 차가운 분노, 그리고 뜨거운 희망

이 책은 범죄를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시스템의 부조화로 끌어내려고 한다. 맞는 지적이다. 개인의 분노를 다른 에너지로 바꾸지 못하는 자본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들어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곱추가 있었다. 노틀담이라는 곳에 사는 그다.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편견으로 인해 닫혀버린 인식은 드레퓌스를 계속 생산해내면서도 회수하지 못하는 구조적 결함이 있다. 더 많이 가진 이들이 편법으로 죄를 짓고도 유유히 풀려나는 도덕적 해이의 시스템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그런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같다.

그러나 인터뷰는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이야기같은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되기도 한다. 그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속시원한 해법은 보여주지 않았는데 인터뷰의 특성으로 치워버리기에 아쉬운 부분이다. <신파가 아니면 엽기인 가족 관계> 에서 지승호는 "가족은 누가 안보면 갖다 버리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라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이야기와 "한국 사회의 가족관계는 신파 아니면 엽기"라고 했다는 류승완 감독의 이야기로 인터뷰를 몰고갔다. 이것은 질문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사회의 단면이기는 하더라도 인터뷰어가 객관적이지 못했다. 물론 솔직하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해법을 구하는 과정에서 선택된 자료는 허술하다거나 잡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미래를 위해 자식을 키운다는 논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서다. 그들의 생각은 특수한 것을 보편화하려는 모습이 적지 않게 보여주기에, 신문기사를 읽는 듯 했다. 적어도 몇 개의 신문을 읽다보면 사회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인터뷰는 둘 다 비슷한 시각을 갖거나 한 사람의 사유에 맞추는 것같이 보였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리스크를 피하고 있음을 알려주려는 듯 했다.

표교수가 철학의 방법을 종종 꺼냈지만, 그 방법이 정착되지 않은 이유를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판사의 명령을 거부하는 검사의 부조리한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표교수가 프로파일러이므로 그들 검사들의 심리상태까지 파헤쳐주는 것은 어땠을까. 단순히 그들이 그러하다, 라는 이야기로는 설득력을 얻을 수는 있어도 뜨뜻미지근한 것같았다. 그가 한 일도 있었지만, 대개는 외국의 사례를 들면서 제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적용하다가 실패한 곳도 있을 터인데 실패사례같은 이야기는 희박했다.

공소시효가 없어져야 한다는 표교수의 주장에는 필자도 동의한다. 사실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이 자본주의 슬픔이라고 하지만, 그 축적에 개입된 유착관계를 끝까지 파헤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은, 그가 이론가만이 아니라 생각에 도착하게 했다. 객관성을 위해 객관성을 버린 듯한 아슬아슬한 인터뷰라는 게 필자의 견해다. 어떤 대화는 깊이 들어가고자 했지만 주어진 주제가 있어서인지 들어가지 못했다. 적지 않은 페이지를 할당하면서, 언론에 공개되어 알게 된 사실보다 조금 더 사건들을 연결해주기는 했다. 그 부분이 호불호다. 그래서 이번의 인터뷰는 무엇인가 빠진 게 있는 듯 싶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가난한 이들을 변호하는 것도 괜챦지만, 가진 자들의 특성을 파헤치는 것이 조금 더 날카로웠으면 싶었다.

그래도 이 책에서 더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이들을 위하고 있기에, 고마움을 표하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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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없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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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없는 에세이


러셀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이는 화이트헤드의 영향도 있는데, <수학원리Pricipia Mathematica>를 화이트헤드와 저술해서였다. 다양한 분야를 다루게 된 러셀은 지독하게 고독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하는데, 아마 여기서 그의 사상이 싹을 틔웠으리라 생각해보곤 했다.

러셀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결하고, 시원시원해서다. 시원하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8장 위대한 스승이 되려면>에서 훓어보고자 한다.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과거에 교사는 비상한 지식 또는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에 선뜻 귀를 기울였다. 고대 사회에서 교직은 정규직이 아니었고, 따라서 교사들은 무엇을 가르치건 제재당하지 않았다. p236"은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교육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살필 수 있다. 정규와 비정규로 나뉘면서, 비정규직의 호소는 거의 들리지 않는 현실은 암담한 편이다. 교육이란 정규의 몫만이 아닐 터인데도, 정규로만 묶어놓은 것은 일종의 벽이고 테두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결국 포기하게 되는 곳이 교육, 즉 앎의 과정이지 않던가. 그리고 러셀은 국가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 국가 교육은 명백히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안전장치를 꼭 마련해야 할 몇 가지 위험이 따른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이와 관련하여 두려워해야 할 해악들은 나치스 치하의 독일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고 소련에서는 지금도 목격되고 있다. 이러한 해악이 지배하는 곳에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독단적인 사상에 동의해야 하는데 자유로운 지성의 소유자라면 누구도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p238" 여기서 러셀은 국가교육에 대한 문제를 집단의 광기를 다루는 듯 싶다. 그 부분이 현재 미디어가 대중을 현혹하고 속이는 것으로 좋지 않게 발달하고 있다고 본다. 대중, 즉 많은 이들을 조금씩 물들여 그것이 없으면 안되는 상황에 빠지게 하는 독단론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교육의 부재이고, 앞으로도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 필자는 내다보고 있다. 아이가 한 명 있는데, 그 아이의 교육은 정부의 교육제도와 방침으로 상당히 까다로운 과정을 습득해야만 한다. 그 아이의 바로 아래 학년은 아주 쉽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혼란은 아이들을 아이답지 못하게 하기에, 계층간 소통이 나중에는 무너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부분을 연결시키고 회복시킬 수 있는 보완책은 그러나 보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러셀의 문명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꽤 괜챦다. "문명화된 공동체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한 나라가 기계류와 자동차, 화장실, 빠른 교통수단 등을 갖추었다면 그 나라는 문명국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보이에 대다수 현대인은 그러한 것들을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중요시한다. 문명이란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지, 삶의 유형적 측면에 따라붙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문명은 한편으로 지식의 문제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서의 문제이다. 이때 지식이 문제가 되는 이상, 사람은 시간과 공간 속에 놓인 이 세계와 연관지어 생각할 때 그 자신과 눈앞의 환경이 사소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라고 러셀은 주장했다. 옳은 이야기다. 현대인들의 문명은 거의 물질과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을 쫒도록 되어있지 않던가. 이러한 데도 교육은 여전히 생존적 가치보다는 가치적 생존이라는 어줍쟎은 기준으로 가르치고 있다. 거의 모든 매체는 소비를 자극하고, 교육에서 말하는 지식도 소비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필요하지 않은 것도 갖는 것이 더 잘 사는 것이라는 이상한 분위기가 현대의 문명 중 하나이기도 하고.

거의 모든 교육이 속성이다. 그래서 지식이 지혜로 전환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매체는 생산과 소비에 맞춰져 기계적인 의식구조로 변하고 있다. 이는 교육의 문제만이 아니지만, 교육을 생각하는 당사자들은 깊은 사색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속성이란 인스턴트이고, 인스턴트는 모든 고통의 근간에 있는 것이다. 속성으로 이뤄지는 모든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연계는 적응이라는 과정을 아주 느리게 진화해왔다. 인간만이 그것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러셀의 이야기로 충분히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읽어볼만한 <9장,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과 <10장,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은 세심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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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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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은 불평등을 만드는 질병이다.

처음부터 책은 심각하다. 세계 상위 10 %에 있는 부자들은 세계 부의 85%를 차지하고, 하위 50%는 세계 부의 1%만 차지한다―라는 증명은 가슴이 쓰리다. 주변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 천지다. 잘 사는 이들의 행태는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자본이 민주주의와 결합되면서 빈곤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탐욕에 맞춰진 자본은 일반인을 노예로 만들고, 그들이 생산한 제품을 다시 사용하게 하는 악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이윤추구가 동시에 공익을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라는 이 주장은 사실상 거짓으로 밝혀졌다, 라고 책에서 굵은 글씨로 호소하고 있다. 개인의 이윤추구가 곧 탐욕이 공익인가? 라는 설정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고, 회복되지도 않은 시장경제를 더 병들게 하고 있다. 모든 자원을 깡끄리 써버리겠다는 이상한 심보의 모습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속성 중 하나는 파괴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왔다.

불평등을 주제로 잡은 까닭에, 루소의 <사회불평등 기원론>을 한번 훓어보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생필품도 갖추지 못한 채  굶주리며 살아가는 파국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 라고 한 루소는 당시에 위험한 생각을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용감했다고 본다. 허나 탐욕을 이기심이라는 단어로 순화시키면서 자연계는 지배의 대상화가 되어 점점 타락이 되어갔다. 자본은 자연을 가공하면서 나타난 잉여물인데, 그들은 인간에게도 자연에게도 잉여가치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자본과 탐욕에 대한 지적은 숱하게 나왔지만, 입을 닫았던 까닭에 금융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그 금융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데아의 산물이고, 본질이 있다는 일자에 기인한다.

"우리의 세계가 원래부터 서로 경쟁하는 경제 주체들로 갈라지도록 만들어 있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경쟁적 경제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다." ― 존 쿳시 John M. Coetzee, p45

이는 경쟁을 한다는 현상에서 보자면 끝임없이 분열해야 마땅하겠지만, 그 끝에서는 통합을 하는 게 역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본은 통합이라는 과정을 인간적이지 않게 한다. 이기심으로 작동되는 자본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면서도, 기본적인 인간적인 성찰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좋은 제품이 과연 우리의 삶을 행복에 이끌어주는가? 라는 질문은 그들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싼 가전제품들이 꽉 들어찬 공간에서 살아야만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가? 지금의 시대는 문명도 문화도 아닌 제품의 시기라고 봐야 더 어울린다. 몇몇 기업들이 비슷비슷한 제품을 내놓고, 그것을 쓰지 않으면 왕따를 당하는 문화와 중독을 조장하고, 다시 소외를 만드는 일들은 자본의 어두운 면이다. 자본의 축적은 곧 자연을 회복불가능한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식주를 넘어서는 거의 모든 것들을 가치로 묶어놓은 현 시대의 문화는 대단히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이 대량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 것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면서였다. 경제적인 이익을 막대하게 얻기 위한 서구의 모습은 괴물의 그 자체였지, 문명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해오곤 했다. 그 사실을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았기에, 노예무역이 금융자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서구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 서구만큼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것은 인간을 사고 파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비의 방식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불평등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것도, 거의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는 소수의 투표권을 가진 경제 기득권자와 같은 파급력을 지닌 불매운동으로 전개해야만 불평등을 해소시킬 수 있다. 불평등의 사회를 만든 이 자본주의의 변화는 현재 전자사회로 바꾸어놓았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알게 된다 하더라도 나아지지 않는 보통사람들의 삶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

책의 내용은 상당히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다. "(금융기관과 신용 제공기관들에 대한) 탈규제와 이 기관들의 주식회사로의 전환은 금융 산업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보수와 커미션과 보너스를 제공해주는 또 하나의 노다지판이었던 것이다.―p65" 라고 밝히고 있다. 민주주의가 금융산업으로 떡칠이 된 것은, 민주주의의 시작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도 노예는 존재했었지 않았던가. 그러한 노동력의 착취가 사라지지 않고,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금융산업을 멀리할 수 없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생존인데, 생존보다는 이질적인 가치에 더 투자하게 하는 자본사회로 변질된 민주주의는 반성을 해야만 한다.

제4장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에서 <탐욕>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본다.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같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실로 섬뜩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시도해보지 않는 한, 거듭해서 그리고 더욱 더 열심히 시도해보지 않는 한, 그 생각이 틀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p115"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묵직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탐욕은 질병이라고 필자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었으며.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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