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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꾼들
발따사르 뽀르셀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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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멕시코 작가인 후안 룰뽀의 『뻬드로 빠라모』라는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은 그 소설을 기어이 다 읽어 내고야 말겠다, 라는 각오을 읽는 도중 어느 무렵인가부터 가지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에스파냐 작가라는 발따사르 뽀르셀의 『밀수꾼들』을 읽으면서 후안 룰뽀의 소설을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다. 이 소설 역시 기어이 읽어 내고야 말겠다, 라는 각오 없이 읽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발따사르 뽀르셀의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그 낯설음 때문일 것이다. 이 낯설음은 아무래도 에스파냐라는 이국의 역사적 문학적 특수성에서 비롯되었을 터인데 나로서는 이유를 따져 볼 재간은 없이 곤란한 결과만 남은 셈이다. 

등나무 교실 위로 얽히고 설킨 칡과 등나무처럼 에스파냐 근대의 역사는 복잡하고 그 뿌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후안 룰뽀의 조국 멕시코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나라는 봉건 사회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단히 복잡한 이해 관계가 동시다발적으로 분출하는 역사적 공통점이 있다. 여전히 부와 권력을 쥔 종교 및 귀족 집단의 보수 세력과 혁명과 독재라는 양가성을 띠고 나타나는 군부 세력,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세력으로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는 민중들, 이러한 세력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이합집산을 일삼던 역사가 에스파냐의 현대사였고, 이어지는 에스파냐 내전은 결국 독일의 나치와 이태리 파시즘 정부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 정부의 승리로 종결된다. 

발따사르 뽀르셀의 『밀수꾼들』은 내전이 종결 된 20년 후의 현재에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과거까지의 기억들을 병렬적으로 묘사한다. 보따폭 호라는 배의 밀수꾼 승무원들이 이 병렬적 묘사의 대상들이고 소설의 시점이라는 것은 이들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입체적 풍속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후안 룰뽀의 『뻬드로 빠라모』의 시점과도 유사하며, 중남미 계열의 소설들은 심심치않게 이와 같은 시점을 소설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점이 나에게 소설의 낯설음을 유발시키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데 이것은 소실점이 없는 회화를 감상하는 것보다 더 초점을 잡기가 어렵다. 일종의 훈련이 필요한 것인데 나에겐 전혀 그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다분히 이러한 입체적 풍속도의 시점이 앞서 언급한 역사의 특수성에서 자연 발화하여 선취된 그들의 방법론이 아닐까 짐작 할 뿐이다. 저 복잡하고 그 복잡함 속에서 참으로 기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을 다루기에는 이토록 광활한 시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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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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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소설들은 어딘가 닮았다. 다섯 편의 소설들 중 상대적으로 수준이 좀 떨어지는 「지요코」를 제외한다면 모두 동일한 윤리 의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요코」 자체도 근본적인 윤리 의식의 기저는 같다. 그것이 이 소설들의 닮은꼴을 형성한다. 소설의 텍스트를 활용하자면 이 윤리 의식이란 <돌베개의 에토스>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산 속에서 생활하는 부부가 친절을 가장하여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제공한다. 침구인 돌베개를 베고 나그네가 잠이 들면 부부는 망치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한 뒤 금품을 챙긴다. 부모의 끔찍한 범죄 행위를 막고 속죄하는 차원에서 부모 몰래 딸이 나그네와 자리를 바꿔 잠에 든다. 정황을 모르는 부모는 딸을 죽이고 나서야 후회하지만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이 「돌베개」라는 소설에 삽입된 <돌베개>의 이야기이다. 



인과응보. 나쁜 짓을 하면 돌고 돌아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교훈의 구비전승이다.

"저자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 봤어. 이런 인과응보의 사고방식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여간해서는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앞으로 십년쯤 후에는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를 다루는 그림동화에서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시더군."

이시자키도 동감이다. 예사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 입히고도 거리끼지 않는 인간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무섭게 증가하고 있다.(강조는 인용자)

― 「돌베개」, 108쪽.



"강연회 등의 테이프를 문자로 바꾸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의 훌륭함을 깨닫고"라는 책날개의 저자 소개글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와 같은 작중 인물의 언어가 작가의 발언임은 분명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은 인과응보라는 처벌의 공포와 죄책감이라는 양심의 재판장이 결합된 <돌베개의 에토스>가 다른 소설들에서도 윤리 의식으로서 핵심적으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속되는 심리적 기제로서의 에토스가 아니라 요즘 세태와 특히 젊은이들에게로부터 마모되어 가는 에토스, 자리에서 물러나 사라져 가는 재판장으로서의 에토스이다. 유년 시절 자신의 친구를 시기심만으로 살해하고도 죄책감 없이 살아가는 유카리가 그렇고(「눈의 아이」), 홧김에 여자친구를 살해하는 대학생 남자친구가 그렇고(「돌베개」), 14세 시절의 가즈미(「성흔」)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에겐 <돌베개의 에토스>가 통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래 전의 옛날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낡은 교훈에 불과하다. 그들이 또한 모두 젊은 세대에 속하는 인물들이라는 것 역시 작가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좌표를 가늠하게 한다. 그들은 "예사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 입히고도 거리끼지 않는 인간들"의 유형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마모된 돌베개의 에토스의 세계. 이 세계에 한 극점에 선 인물들이 우리에겐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성흔」에서 등장하는 가즈미라는 소년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었고, 자기 생각도 분명하게 말했지만 감정이 없었다고나 할까, 희로애락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이쯤에서 이른바 현대적 유형의 불량 생산물이자 병폐인 '사이코 패스'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것이다. 위키백과는 사이코 패스를 정의하는 키워드로서 '공감 및 죄책감의 결여', '양심의 가책 결여' 등을 꼽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이코 패스는 "망상, 비합리적 사고 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신병과는 분명히" 구분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이코 패스란 미유베 미유키에게서는 돌베개의 에토스가 완전히 마모되어 버린 인간, 기계적이고 인형이 되어버린 인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이코 패스의 낙인이 찍힌 인물들이 아니다. 사이코 패스에 가까운 인물들, 혹은 잠재적 성향을 일면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살인을 저지른 인물들이 기괴하거나 유별나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이 「눈의 아이」에 등장하는 유카리처럼 평범한 이웃, 은행의 창구 직원과 같아서 눈에 띄지 않는다. 폭행과 협박, 반인륜적 행위를 자신에게 일상적으로 자행하는 엄마와 동거인을 견디지 못하고 살해한 냉혹한 소년 가즈미마저도 가히 성자적인 자기 반성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미야베 미유키 소설의 인물이다. 돌베개의 에토스가 회복된 세계, 그것이 소박하지만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일 것이며, 시샘으로 친구를 죽인 유카리가 우등생에서 전락하는 세계, 두루주머니를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아사쿠라 다쿠미의 세계, 악마적 베르테르의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가즈미의 세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돌베개의 에토스가 회복된 세계라는 것은 작가의 지향점이기도 할 것이며, 또한 소박한 세계이다. 죄책감, 양심의 문제라는 것은 개인의 기질적 문제인 동시에 사회의 구조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며, 막연히 생각하자면 인류의 존속과 더불어 영원할 문제이어서 돌베개의 세계가 있었고 그것이 마모되어가는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근대라는 시대정신에 의해 발굴되고 금칠된 '개인'이라는 신성한 실존적 자각으로부터 배태된 문제일지도 모른다. 다만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학이랄까, 역시나 돌베개의 에토스가 마모된 세계의 일면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을 작가는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사이비의 세계'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범죄 피해자의 프라이버시가 점점 더 무시되고 있잖아? 다들 피해자에게 무례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보다 자세히 알고 싶어 하고, 알려졌으면 해. 그 내막에 무언가 자신과는 다른 '나쁜'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까. 사이비 종교에서는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행실이 나빳기 때문이니 인과응보라고 하잖아."(강조는 인용자)

― 「돌베개」, 109쪽.



본래 가해자의 죄책감이 심정적 재판장으로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은 피해자의 결점이 심정적 재판장으로 존재하며 이것이 악질적인 소문들을 양성해낸다고 하는 것이 작가의 논리이자 에토스이다. 이것이 바로 미야베 미유키에게 보이는 사이비의 세계, 정통의 윤리 의식으로부터 전복된 세계일 것이다. 묻지마 범죄, 사이코 패스, 이유를 알 수 없는 범죄 행위에 노출된 현대인들이 범죄로부터 자신을 거리두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는 예리한 부분이 있다. 이것은 이미 극도로 개인화 되어버린 사회, 소립자의 세계, 무늬화된 공동체의 세계, 일본이라는 특수한 세계에 국한되지 않고 이러한 현상이 보편화 되어버린 세계의 현대인들이 갖는 병리적 태도일지도 모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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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지금까지 올라온 4월의 신간 추천 도서를 보니 잘만 하면 고맙게도 폴 오스터의 신간을 받아 볼 수도 있겠다. 지지난 달의 신간평가단 선정 도서였던 『프라하의 묘지』의 출판사가 <열린책들>이었다. 기우인 걸까? 신간평가단 추천 도서로 선정되어서 폴 오스터에 대한 좋은 리뷰들이 많이 쓰여지기를(나 또한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지도에서 손가락으로 집어내라면 나는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신문지면과 뉴스를 통해 아무리 많은 뉴스를 접한다 해도 내게 그 소식이 비극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나의 무지와 빈곤한 상상력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무심함의 삼박자가 빗어낸 비극이려니. 이럴 때 소설이 필요하다. 비극을 비극으로 실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심한 사막에 단 한 송이의 꽃이라도 싹 틔우기 위해서. 나는 뉴스로는 안 되는 인간이니까.

 

 

 

 

학부생 시절 수업용 텍스트로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를 읽으면서, 또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읽으면서 참 글 맛깔나게 잘 쓴다하며 애증의 심정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사이의 히트는 권여선 소설 속 안동소주와 제육과 해물 반반 안주였으니 낭만으로 지갑 삼던 학부생 시절이라 입으로 다 해 처먹었던 기억도 난다. 아, 아닌 밤 중에 술 생각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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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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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서도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 소설이 있다. 정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하기에는 아쉽다는 조건에서 비롯된다. 전자의 경우는 함량미달이라 여기며 기피하게 되고, 후자의 경우는 곱씹으며 좋아하게 된다. 내 생각에는 좋은 소설의 조건이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소년이 있다. 그 중 제이라는 소년에게 관심이 쏠린다. 제이는 낳아준 어미가 있고, 길러준 어미가 있어도 결국 아무도 없었던 소년이다. 이를테면 태생적 고아가 제이에게 주어진 하나의 신분이다. 그리고 제이에게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동규라는 소년이 있다. 동규를 주어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제이가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있었다고 말 할 수도 있으리라. 동규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병으로 말을 잃었을 때, 제이는 동규의 언어를 이해하는, 조직하는, 구사하고 표현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제이는 동규의 에고이자 이드였다. 제이가 동규의 언어를 대변했고 욕망을 대리했다. 제이는 안티크리스트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 욕망이기에 억압된 폭력을 끄집어내어 사회에 내동댕이친다. 제이는 마구간이라는 목가적인 빈민의 풍경이 아닌, 터미널 화장실 부스라는 격리된 음습한 풍경에서 태어났다. 아이의 탄생을 경하하기 위해 동방박사 삼인이 방문하는 대신, 단지 참상을 목도하기 위해 터미널의 군상들이 피가 흥건한 화장실 부스로 몰려들었다.

폭주족이 숭앙하는 안티크리스트에게 동규란 상실된 초자아로 나타난다. 동규가 제이를 위해서 행한 두 차례의 행동 중 하나는 제이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보육원으로 강제 이송), 또 다른 하나는 제이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킨다(경찰의 진압행동에 의한 사고사). 제이의 죽음이 동규의 자살로 이어지는 것은 둘의 관계가 애초부터 그러했기 때문이다. 제이는 초자아를 상실한 채 에고를 두른 이드의 화신이었고, 동규는 자신의 에고와 이드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남은 초자아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초자아는 살해를 방기한 초자아를 용납할 수 없다. 초자아의 살해방기에 대한 심판은 극단적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이와 동규의 에고이자 이드이며 초자아이다. 용어 뒤에 숨어 있는 실상은 독자 개개의 몫이다. 에필로그를 읽고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소설의 형식과 어쩌면 그 의의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 역시 독자 개개의 몫으로 남는다. 소설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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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2]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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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서평을 쓰기가 아주 곤혹스러운 책들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고,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읽고 나서 무슨 서평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서평가와 책의 중량감이 비례 해야 하는 것은 아닌데도 은연 중에 비공식적인 묵계가 이 둘 사이에 성립되어 버린다. 쓰긴 쓰되 안 쓰니만 못 하다는 질책, 충분히 쓰지 못했다는 결핍, 무언가를 더 써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압력. 이런 종류의 불필요한 곤혹을 자생케 하는 저자에 이 사람의 이름이 빠질 리 없다. 움베르토 에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은 한 편만 읽어봐도 그가 어떤 부류의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다. 지적으로 섬세하고 해박하면서도 장중한 주제를 다룬다. 달변에다가 <지나칠>정도로 박식함이 드러나고 통속성<마저> 갖추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아주 많을 듯 싶음에도 할 말이 사실 별로 없는 소설. 작정하고 콜라쥬 형식의 글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런 관계로 내가 이 소설을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음에도 쓸 수 있는 글은 길지 않다. 시모니니라는 비열하고 혐오스러울지언정 그야말로 유능해서 괴로운 인물의 이야기를 즐겨보시라는 것, 정서적으로 역사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존재하는 거리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 를 함께 읽어도 좋다)와 세계의 지하실에서 암중비약하는 교파와 정파의 피로 쓴 역사도 알아보시라는 것, 이들의 메타포로 하여금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우리를 얼마나 그로기 상태로 몰아가는지 실감하시라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어느 문화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선생의 말마따나 이성적인 회의주의자이면서 감성적인 낙관주의자를 꿈 꿀 수밖에 없는지를 잠시라도 곱씹어 보시라는 것, 그리고 의뭉스럽게 해리성 인격장애의 소재를 활용하는 에코 선생의 귀여운 통속성에서 친근감을 가져보시라는 것 정도가 고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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