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두 책을 동시에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읽고 보니 재미있는 지점이 생긴다.


카뮈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살인을 허용하는 정치체제라는 관점에서 동일시 했다. 카뮈가 보기에는 허무주의에의 굴종과 역사에의 굴종은 모두 똑같이 땅 위의 인간들에게는 비극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어디에도 굴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만이 진정 옳은 선택이었다. 카뮈의 반항이란 절대를 부정하고 역사의 종착점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영원한 생성과 운동의 역사관을 갖고 생의 한계를 인정하며 온건하고 인도적인 태도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그런 의도로 쓴 저서가 《반항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카뮈는 이 책에서 파시즘만큼 이나 사실은 더 엄격하게 공산주의와 그 추종자들을 부정한다. 당시에 이 책은 하나의 무기인 셈이었다. 카뮈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도 되었으나 훨씬 더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 적들이 늘었다. 그 유명한 사르트르와의 결별에도 이 책은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우 아니면 좌여야 했던 때에 사람 좋은 주장이나 한다는 식으로 매도된 카뮈는 성인 소리를 들으며 깊은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말로의 소설은 카뮈의 에세이보다 23년이 앞서 출간되었다. 소설은 중국 광둥 지방을 중심으로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선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요 인물인 가린은 프랑스인이면서 회의하는 인터내셔널 소속 지도자이다. 가린은 표면적으로 광둥 지역 중국인들의 대대적 봉기와 더불어 이 지역에서 인터내셔널의 지배력이 강화되기를 원한다. 이에 맞서는 인물인 쩡다이는 중국의 간디라고 불리는 인도주의자로 이유불문 테러리즘의 거부와 중국 민족의 자주를 위해 헌신한다. 앞서 말했듯이 말로의 이 소설은 카뮈의 에세이보다 한참이나 앞섰다. 하지만 그 사상의 정수만 떼어 놓고 보자면 중국인의 정신적 아버지 쩡다이로부터 고독과 연대를 동시에 갈망했던 카뮈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가 않다. 카뮈는 말로를 존경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보다 말로가 노벨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쩡다이는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암살 당한다. 가린은 당의 기계적인 역사 구현에 피로감을 느낀다. 카뮈 역시 생전에 적지 않게 보복 테러에 대한 위협에 두려워했다. 그는 결국 자신이 개죽음이라고 여겼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카뮈의 죽음과 관련해 KGB 개입설을 주장한 교수가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뒷면 구석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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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병이란 건 말이야, 걸려 보지 않는 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법이라고. 사람들은 병이란 맞서 싸워야 하는 어떤 것,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천만의 말씀. 병이란 자기라고, 자기 자신이란 말이야......˝ ㅡ 《정복자들》, 앙드레 말로.

가린은 낭만주의에 대해 바리케이트라도 쌓은 인물처럼 보이지만 인간이란 얼마만큼은 모두 낭만주의자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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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글쓰기란 고독하다는 것. 누구에게나 그러하다는 것. 어떻게 될지, 심지어는 왜 이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경우에도 쓴다는 것. 성패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진실에 헌신하려 한다면 또 끝끝내 해낸다면 누군가는 알아줄 수도 있다는 것. 이 책은 하나의 쓸쓸한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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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이라는, 역사의 주목을 받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아프리카의 한 도시에 페스트가 창궐한다. 그것으로 이곳에 사는 모든 이들의 삶이 바뀌었다.

페스트는 삶을 송두리째 장악한다.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렇다고 상상할 수도 없다. 곧 누구라도 페스트에게 목덜미를 휘어잡히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선택해야 한다. 이것에 저항하거나 굴복하거나. 전부가 아니면 무. 카뮈는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글에 대한 반응에선 그것이 호평이든 비난이든 간에 가히 만족스럽지 못한 편이었다. ˝인간조건에 대해서라면 부정적이지만 인간에 대해서라면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던 그로서는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 결과물 중에 하나이자 대단한 성공작이 바로 이 《페스트》이다.

의사 리유를 비롯한 동료들의 패배를 감내한 저항의 드라마는 묵직한 위안과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공감을 자아낼 것이다. 페스트의 세계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계속되는 패배와 낙담 속에서도 할 일을 해나가는 성실성의 가치, 의당 그러해야만 하는 단순함의 인간적 가치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생이별이라는 그리움의 망치질과 죄 없는 어린 아이의 죽음 앞에서 실감하는 무자비의 세계라도, 그러한 세계이기에 옳은 일을 해야한다는 정당한 바로 그 도덕적 교훈 말이다.

페스트가 하나의 은유라는 것은 새삼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타루의 말처럼 누구나가 저마다의 페스트를 지니고 있는 법이며 또 그것은 죽음을 모르는 영원한 질병이다. 우리에겐 우리 시대의 페스트가 없을 수 없고, 카뮈는 우리에게 언제나 옳을 수 있는 진실한 조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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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이와 같이 도발적이고 한편으로는 해묵은 질문(질문이 해묵은 것과 답변이 명확한 것은 별개다)으로 시작해 카뮈는 어디에 도달하고자 한 것일까.

카뮈가 자살을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삼아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인간은 결국 죽어 없어질 뿐인데 도대체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인식은 새로울 것도 없다. 불교 신자가 아닌 나로서도 이것이 불교도의 근본 정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어쨌거나 세계의 비합리성(자연이든 사회든 그것은 어쨌거나 인간의 합리적 사고 바깥의 것들을 포함한 채로 굴러간다)을 인식하는 명철한 정신은 좌절한다. 왜냐하면 그것은(세계) 나(인간)와 무관하게, 나를 거의 무시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용어적으로 표현하면 `부조리`라고 한다. 부조리는 인간 조건이다. 말하자면 내가 눈 감고 도망친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카뮈와 당시의 지성들이 중시하고 빠져들었던 하나의 세계관이다. 어떻게. 그러니 자살을 한다?

결론을 짓자면 카뮈는 살자고 강변한다. 대신 피안의 세계를 품지 않은 채로, 사상의 속임수를 부리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아무런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엄마나 아빠를 찾지 않고 의연히 살자는 것이다. 이쯤되면 카뮈는 자신의 윤리적 감수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하고 명징한 주장이다. 카뮈의 매력이란 원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부조리를 (지속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부조리의 인간으로 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렇게 살기도 하고 또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 게다가 카뮈의 시지프는 얼마나 엄격하고 고독한지!
우리는 영생에 기대지 않아도, 영원을 구하지 않아도 살아간다. 단순히 습관이라고 하면 비약이다. 그것은 부조리를 강조하기 위해 지성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필멸하는 존재는 필멸하는 대로 삶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이 꼭 영원해야만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카뮈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사랑했고 많은 친구를 두었다. 나는 그가 종종 시지프를 떠올렸을 망정, 진심으로 그와 동화되는 경험이 잦았을 거라고 상상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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