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황야의 이리의 서재 (황야의이리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LJH051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angel_vy_1004@naver.com</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23 Oct 2026 19:25:25 +0900</lastBuildDate><image><title>황야의이리</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LJH051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황야의이리</description></image><item><author>황야의이리</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왜 사는가’를 몰라도, 인생은 살아집디다. 사랑에 의해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LJH0513/17558251</link><pubDate>Tue, 06 Oct 2026 23: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LJH0513/1755825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7800&TPaperId=175582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97/coveroff/k992137800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  &nbsp;<br><br><br><br><br><br><br><br><br><br>&nbsp; 인생을 살면서, ‘왜 사는가’란 질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갑작스레 닥친 모진 풍파나 끝을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인간은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심지어는 성취 끝의 행복 속에서도 허무를 느끼며, ‘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기도 한다. 아무도 명확히 답해주지 않는 그 물음 끝에, 어떤 사람들은 나름의 답을 찾아 그곳에 안착한다. 누군가는 성공이나 출세 같은 세속적 이유를, 또 누군가는 천국행이나 열반행 같은 종교적 이유를 삶의 목적과 당위로 삼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답을&nbsp;찾지 못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를 모르기에,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올 이유 역시 찾지 못해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격렬히 고통스럽지 않아 보여도, 속으론 허무와 초조, 불안과 무의미에 시달리며 남몰래 병들어 가기도 한다.<br>&nbsp; 이번에 읽은 &lt;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gt; 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나는 왜인지 이 책에 자신의 생애를 담은 강순희 여사가, 이처럼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왜 사는가’를 몰라도, 인생은 살아집디다. 사랑에 의해서….”  &nbsp;  차디찬 새벽의 사법살인, 그리고 남겨진 자의 증언&nbsp; 1975년 4월 9일 오전 4시 30분, 아침 해도 뜨지 않은 차디찬 새벽. 서울구치소 사형장에 들어선 여덟 명의 시민은, 30분 간격으로 차갑고도 비정한 교수대로 옮겨졌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사형 판결이 확정된 지 불과 18시간 만에 집행된 사형, 아니 살인이었다. 이른 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장기 독재 체제를 유지하려는 박정희 정권이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고 유신 체제 반대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정교하게 조작한 사건이었다. 재판의 절차적 정당성도, 실질적인 증거도 부재했지만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 폭력은 죄 없는 여덟 이의 생명과 그 가족들의 행복을 잔인하게 앗아갔다.<br>&nbsp; 유시민 작가가 인터뷰어로 나서 그 진실을 기록해 낸 이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 강순희 여사는, 바로 그날 사법살인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여덟 명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인 고(故) 우홍선 씨의 아내이다. 하루아침에 네 아이의 아버지이자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기고 '간첩의 아내'라는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긴 채 살아내야 했던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가 통과해 온 가장 어둡고 참혹한 골짜기의 깊이를 보여준다. 유시민 작가는 감정적인 과장이나 통속적인 연민을 배제한 채, 역사적이고 정치한 질문으로 강순희 여사의 기억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강순희 여사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던 지난날의 고통을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풀어놓으며, 역사적 비극 뒤에 숨겨져 있던 한 개인의 숭고한 생존의 기록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nbsp;  사건과 일상, 그 부조리와 불합리.&nbsp; 이 책에는&nbsp;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겨야 했던 여덟 명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 유가족들과 강순희 여사가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국가 폭력의 부조리와 불합리가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증언되어 있다.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타당한 이성은 마비되어 있었다. 어디서도 논리와 합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수사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이들 피해자들을 간첩으로 몰고 갈 실질적 증거가 없자, 무자비한 고문과 협박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당시 피해자 중 한 명이었던 고(故) 하재완 씨는 전기고문으로 인해 탈장이 되었을 정도였으며, 사형되는 날에도 피해자들의 손발톱이 뽑혀 있는 등 고문은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사법부는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피고인들의 최소한의 방어권조차 보장하지 않은 채 속전속결로 사형을 선고했다. 왜 사형을 당해야 하는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왜 이런 사건을 겪어야 하는지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은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부조리했다. 또한 불합리했다.<br>&nbsp; 이러한 부조리와 불합리는 형 집행 이후에도 자행되었다. 정권은 유가족들에게 시신조차 제때 인도하지 않았으며, 고문의 흔적이 세상에 드러날 것을 의식해 시신을 탈취하여 강제로 화장시키기까지 했다. 남겨진 유가족들을 향한 국가의 감시와 탄압은 일상화되었다. 증거를 조작해 없는 죄를 만들어 여덟 명을 하루아침에 사형시키고, 그 가족들에게 평생 동안 간첩의 가족이란 낙인을 찍으며 고립을 강요했던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와 불합리의 연속이었다.  &nbsp;  비극적&nbsp;역사의 기록을 넘어 실존적 철학서로의 승화&nbsp;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이 책이 독재 정권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사법살인과 그 피해자들의 슬픔을 담은 역사적 비극의 기록물이라고만 생각했다. 시대의 불의를 고발하고 억울하게 잊혀 간 이들의 넋을 기리는 다큐멘터리 서사가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가며 강순희 여사의 증언을 읽어나갈수록, 나의 인식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나 정권에 대한 고발장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이 책은 극한의 부조리와 불합리 앞에 던져진 인간이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아니 인간은 무엇에 의해 살아지는가'라는 고뇌에 답을 내린 실존주의적 철학책이었다.<br>&nbsp; 이처럼 느낀 이유는, 비록 모든 인간이 강순희 여사처럼 역사적 부조리와 불합리의 피해자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본질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고 불합리적이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이유나 목적을 명확히 찾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부조리이다. 이들에게 ‘삶’이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왜 뜻밖의 불행과 이별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왜 실의와 절망을 겪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게 닥친 고통과 삶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때, 세상은 부조리와 불합리의 장으로 느껴지고 답할 수 없는 ‘왜’ 라는 물음은 생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왜 이토록 아파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내던져진 삶. 그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강순희 여사가 역사적 부조리와 불합리 앞에서 느꼈던 아픔과 본질적으로 그 궤를 같이 한다.<br>&nbsp; 강순희 여사는 자신을 짓눌렀던 그 거대한 역사적 부조리와 불합리, 그리고 나아가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실존적 고통을 몸소 겪어내면서도, 거창하게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당위적 질문에 집착하거나 갇히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 '인생이란 어떻게, 무엇에 의해 끝내 살아지는가'를 나지막이 증언하고 있다. 강순희 여사는 고통의 이유를 규명하느라 일상을 팽개치거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는지 세상을 향해 헛된 원망만을 쏟아내며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는 동안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며 자신의 삶은 불행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한다. 삶의 목적을 정립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견디게 하고 마침내 이겨내게 만든 그 실질적인 동력은 사랑이었노라고, 나지막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nbsp;  삶을 버티게 한 동력: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당위가 아닌, ‘사랑’&nbsp; 강순희 여사의 담담한 고백,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262p)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부조리와 불합리의 고통 속에서 당신의 인생을 마침내 살아지게 만든 실질적인 동력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br>&nbsp;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참혹한 국가 폭력으로 사랑하는 남편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 여사가 ‘팔자 한탄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195p)이라는 담대한 마음으로 서슬퍼런 독재정권을 대상으로 끈질기게 투쟁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언제나 따스한 눈빛으로 아내를 아껴주던 다정하고 자상했던 남편 우홍선 씨를 향한 깊고 굳건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 후 대법원 판결이 내린 지 불과 18시간 만에, 시신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만든 야만적인 사법살인으로 남편을 황망히 떠나보내야 했을 때, 남편을 따라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 속에 빠져 있었지만 그 속에서 당신을 살아지게 만든 건 남아 있는 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나아가 혼자만의 상처에 갇히는 대신, 자신과 똑같은 비극으로 피눈물을 흘리던 다른 피해 유가족들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으로서의 사랑은, 여사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지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다시 사랑할 용기로 이어졌다.<br>&nbsp; 결국, 강순희 여사가 삶을 살아내게 만든 것은 삶의 목적이나 생의 당위, 원대한 정치적 신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고도 사랑했던 남편, 그 남편을 닮은 네 아이, 그리고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뭇사람들. 그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래서일까. 이토록 풍요로운 사랑 속에서 삶을 살아냈던 강순희 여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는 동안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해요. 불행하지 않았어요. 행복하게 만났고, 행복하게 살았고, 행복하게 애들 키웠고, 일도 닥치는 대로 행복하게 했고, 남편 때문에 싸울 때도 있는 힘을 다했어요.’(263p) 라고….  &nbsp;  강순희 여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의도하지 않은 다독임 &nbsp;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이유를 찾아내기 힘든 비극적인 시대인지 모른다. 오늘날은 중세 신앙의 시대처럼, 사회 전체가 종교적 신념이나 공통의 진리를 절대적 기준으로 공유하는 시대가 아니다. 또한 사회·경제적인 노력이 그에 상응하는 안정과 보상으로 되돌아오던 성장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 이 시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극심한 불확실성의 시대로,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삶의 이유에 스스로를 정박시키기가 극히 어려운 시대다. 이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무엇 하나 쉬이 믿지 못한 채 극심한 실존적 허무와 고통, 인생이라는 부조리와 불합리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br>&nbsp; 나 역시 그랬다. 불과 몇 년 전이던 20대 시절까지만 해도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다시 생각하기도 힘든 끔찍한 개인적 고통이 아니라, ‘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이에 대한 명확한 정답을 찾아야만 내 고통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내 삶에 스스로 의미를 씌워 사는 것처럼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름의 성실한 탐구 끝에 성숙해진 지금은 영적인 답을 찾아 삶의 자리에 안착했지만, 삶의 목적을 찾아 방황하던 그 시절은 매번 바닥 없는 절망에 발을 디디는 것만 같던 막막한 나날이었다. 지난날 나의 고통이 감히 강순희 여사를 비롯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가족분들의 고통에 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고통의 본질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내게도 인생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했기 때문이다. <br>&nbsp; 열렬하고 뜨거운 목소리로 삶의 거창한 목적이나 당위성을 목청 높여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나지막하고 담담하게 ‘삶은 결국 사랑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라고 전하는 강순희 여사의 증언은 왜인지 과거의 나에게 전해지는, 말 없는 위로 같은 봄바람 같았다. 또한 그 고백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이들에게 던져지는 따뜻한 다독임이자 조용한 기다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강순희 여사의 증언이, 은연 중 ‘당장 정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 ‘삶의 거창한 이유를 몰라도 당신은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며, 아직은 삶을 부조리와 불합리로 느끼고 있는 뭇사람들의 지친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아주는 위로의 손길처럼 느껴져서 그랬을 것이다.<br>&nbsp; 마치 지난날의 나처럼, 아득한 실존적 허무와 극도의 고통 속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끝없이 질문하며 영혼을 떨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이 책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소곤소곤 말해주고 싶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지는’ 거라고. 이처럼 철저한 부조리와 불합리의 고통 속에서도,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삶의 이유를 모른다 해도 살아낼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그 사랑에 의해 살아지고 살아내다 보면,&nbsp;당신도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절망에 지지 않고 생을 다 살아낸 93세의 강순희 여사처럼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른다고….<br>&nbsp; ‘인생이 뭘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한테 주어진, 자기 앞에 펼쳐진 운명을 열심히 살아가는 거, 그게 인생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서 극복하며 사는 거,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장애물이 닥쳐도, 원망 같은 거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그런 게 쌓여 인생이 된다. 애들한테 늘 그렇게 얘기했어요. 나도 그렇게 살았고.’(259p)<br><br><br><br><br>------------------------------------------------------------------------------------------------협성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협성 독서왕' 공모전에 응모했다가 떨어진 글!'어떤 부분이 미흡했을까' 를 염두에 두고 읽어보니, 독후감을 독후감처럼 쓴 게 아니라 서평처럼 썼다는 걸 알았다.&nbsp;이왕 서평(?)처럼 쓴 글이니, 서평의 기능을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대로 게재합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97/cover150/k992137800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09769</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