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에 저자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는 데에는 대체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해당 책이 다름 아닌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 책에서 풀어내는 내용과 관련된 분야에서 저자가 상당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경우이다. 이러한 구분 하에서 보자면 지난 7월과 8월, 이 두 달 동안에 읽었던 책 중에서 <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와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그리고 <진산 무협 단편집>은 모두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존 듀어든은 한국 축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따뜻한 애정이 공존하는 칼럼으로 한국 축구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저자이고, 빌 브라이슨은 약간의 과장과 주관이 개입되어 있는 표현이긴 해도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기를 쓰는" 저자이며, 진산은 상당한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단편 무협'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들을 읽은 건 순전히 그 세 사람의 이름 덕택이었던 셈이다.
존 듀어든이 '한국축구'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점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 날아온 파란 눈의 사람이 하필 '한국축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데 대해 까닭모를 반감이 생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글을 지속적으로 읽어보다 보면 그가 '한국축구'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고, 그래서 그의 날선 비판들에조차도 고마운 마음이 들곤 할 정도다. 단적인 증거로, <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에는 'K리그'가 한 100번쯤 언급되는데(실제로 세어 보지 못해서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 정도쯤 되는 것 같다), 과연 세상의 그 어느 책에서 'K리그'라는 단어를 이렇게까지 많이 볼 수 있겠는가. 이쯤 되면 'K리그'를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데에 이 책을 강제로 읽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진정 애정 어린 비판을 보여주는 존 듀어든의 글이 축구팬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부 (높은 자리에 있는) 축구관련 종사자들에게는 그의 글이 그리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 유감스럽다. 얼마 전 울산의 김호곤 감독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해 존 듀어든의 칼럼에 화가 나서는 그를 고소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런 일화는 존 듀어든의 날카로운 펜에 대응하는 일부 축구인들의 고압적인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존 듀어든의 글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존 듀어든의 비판에 대해 김호곤 감독도 얼마든지 지면을 통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극단적인 방식을 고려한다는 게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간다). 이와 관련해 존 듀어든은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지적을 하는데, 이 지적은 축구 종사자들과 언론인 모두 새겨들을 만하며(비단 축구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축구팬들이 그의 글이라면 덮어 놓고 신뢰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쓰지는 말라"는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왜 안 되는 건가? 그들의 요점은 내가 자신들이 원하는 이야기만 써야 한다는 것인 듯하다.
한국 축구계의 지도자들과 언론이 편안하고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국 축구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다. 서로를 위해서는 좋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실패하고 바보처럼 행동해도 비난을 받지 않으며, 기자들은 유명 인사들과 꾸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물론 나는 영국에서 왔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측면도 있다. 또한 영국이나 유럽에서 보던 언론과 대표팀의 극한 상황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비판도 없고 토론도 없는 세상은 감독들에게는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축구 전체를 위해서는 결코 건강한 일이 아니다. (p253)
물론 감독들은 언론에 대한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하지만 축구와 언론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지도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언론은 감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팬들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언론인으로서 선수, 감독들이 내 기사를 좋아한다면 기분이 괜찮겠지만, 그들이 내 글을 싫어한다고 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축구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내 글을 좋아한다면, 오히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것 같다. (p430)
다른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 역시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보기 위해 모인 6만 5000명의 관중들은 맨유와의 친선전이 한국 축구의 위상을 널리 알리는 일인 양 기뻐할 것이고, 언론들은 맨유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기사로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내가 한국에서 접한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다. 내가 비록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축구 팬으로서 이번 일이 흘러온 모습에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던 것은 한국 축구계를 이끌어나가는 힘 있는 분들께서 보여준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태도였던 것 같다. (p453)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은 기대보다는 못했다.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지난 해 알라딘의 '올해의 저자' 투표에서 기꺼이 빌 브라이슨에게 표를 던진 바 있는데, 이것은 내가 빌 브라이슨의 책을 좋아한다는 것과 그렇기에 빌 브라이슨의 책에 대한 기대치가 조금 높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정당하게 말하자면, 빌 브라이슨의 영국 여행기도 나쁘지는 않았다. 초반에는 약간 지루한 느낌도 있었고 그가 즐겨하는 일 중 하나인 언어유희도 별로 재미있지 않았지만, 뒤로 갈수록 책이 흥미로워졌다. 그가 사물과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와 각 도시들을 여행하는 방식에 익숙해질수록 그의 이야기에 집중이 되기 시작했고, 특히 커다란 나라에서 온 그가 지난 20여 년간 산, 작은 섬나라 영국이 지닌 매력들을 하나하나 짚어줄 때쯤엔-그의 책을 읽으면 언제나 그러했듯-결국 때로는 악의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독설을 서슴지 않는 이 저자를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여전히 과장과 허풍을 일삼고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이따금 드러나는 그의 통찰과 따뜻함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도.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읽은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역시 이 책이 상대적으로 더 지루하고 집중이 안 되었던 건 사실인데, 여기에는 이 번역된 책 자체의 책임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하건대'를 '-하건데'로, '개중에는'과 '대개'를 마치 '게'가 좋아 미치겠다는 듯한 태도로 각각 '게 중에는'과 '대게'로 고집하고 있는 걸 우선 지적할 수 있겠다('대게'는 족히 수십 번쯤 쓰이는데, 책에서는 단 한 번도 그게 '큰 게'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지 않는다). 물론, '게 중에는' 역시 '대게'가 최고라는 데에 동의하거니와, '개'보다는 '게'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할 뿐더러, 무엇보다도 나는 모든 책이 국어맞춤법을 완벽하게 준수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생각도 없다(물론 가급적 그러면 좋겠지만, 그러기에 국어는 지나치게 까다롭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그러나 아주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오류들이 지나치게 빈번하게 나타나는 책에서 정확하고 매끄럽게 번역된 문장들이 이어질 거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고는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과연 실제로도 그랬다.
내가 집중하며 읽은 책 후반부에서 나는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널따란 부지가 있었다."나 "입김을 크게 불어 휙 날려버리고 건물들이 있다."와 같은 명백히 틀린 문장들을 더러 발견했고, 그러자 새삼 앞부분을 집중하지 못하고 읽었던 건 순전히 앞부분에 모호하고 틀린 문장들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오류가 심각하거나 완전히 엉망진창이라거나 할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가벼이 볼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의 관계자 분들은 이 책이 몇 번씩 거듭해서 읽을 만큼 재미있지는 않아서 그냥 한 번 보는 것으로 대충 교정을 갈음하고는 서둘러 출간을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적어도 만약 나라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거듭 읽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한 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게 이 책의 유감스러운 점이다.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아서 조금 긍정적인 이야기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만약 누군가 혹 이 책을 통해 빌 브라이슨을 처음 접한다면, 부디 너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의 매력을 드러내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이 책으로 빌 브라이슨과 만나자마자 곧 안녕이라고 작별을 고하는 것은 조금 이르다는 말이다. 특히 누군가 이 책을 중간쯤 읽다가 집어던져버렸다면, 다시 집어 들기를 권하는 바이다. 뒤로 갈수록 이 책은 좀 더 재미있어질 뿐더러, 책의 후반부에는 실생활에 굉장히 도움이 될 법한 대화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대화로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매번 불필요한 메뉴를 권하는 점원의 입을 막게 하는 것은 물론, 종교나 신문을 강권하는 사람에게도 응용하여 써먹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기술이다. 다만,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과감성이 필요해 보이는데, 다행히 평생 한 번이라도 이 대화를 써먹을 수 있다면 삶이 좀 더 흥미진진해질 것 같을 정도다. 사설이 길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다음에 인용하는 대목 하나만으로도 빌 브라이슨의 이 책은 용서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책이 나쁘지 않은 이유가 단지 이것 하나만이 아님도 물론이다).
마침내 커피 한 잔과 에그 맥머핀을 주문하는데 내 주문을 받던 젊은 남자가 물었다.
"애플 턴오버 파이도 함께 드시겠어요?"
나는 잠깐 동안 질문 당사자를 쳐다보았다.
"죄송한데, 내가 머리에 총 맞은 사람처럼 보이오?"
"네?"
"내 말이 틀린 데가 있으면 틀렸다고 이야기를 해요. 내가 애플 턴오버 파이를 주문했었던가요?"
"어..., 아니세요."
"그럼 내가 애플파이를 먹고 싶어 하면서도 주문을 못하는 지적장애로 보이오?"
"아니. 저희는 그저 모든 손님들께 그런 질문을 하라고 지시를 받았어요."
"애든버러에 있는 사람들은 다 머리를 다쳤답니까?"
"저희는 그냥 손님들께 더 여쭈어 보라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뭐, 좋아요. 나는 애플파이를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주문을 안 했죠. 자, 그럼 이번엔 또 어떤 음식을 안 먹을 건지가 궁금한가요?" (p388-389)
<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는 특히나 진산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집어 들기 어려운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 권은 기본이고, 언젠가부터 대여섯 권도 훌쩍 넘기기가 예사인 무협이라는 장르에서 '단편 무협'은 쉽게 받아들여지는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그 '단편 무협'을 '진산'이 썼다면 얘기가 조금은 달라진다. 이 '단편 무협집'이 거의 유일무이한 경우이니 구체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나는 '단편 무협'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는 단연코 진산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이 책은 유려하고 서정적인 진산의 스타일이 매력적으로 드러나는 책이었다. 단지 몇몇 단편의 경우에 다소 뻔한 결말이 조금 아쉬운 느낌도 있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역시나 자연스럽고 괜찮은 결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결말이야 어쨌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진산의 글쓰기 솜씨는 정말로 발군이다. 한때 충성스러웠던 무협 팬으로서, 이 멋진 스타일의 '무협 작가'가 현재 무협을 떠나 있다는 게 정녕 아쉽다.
이제까지 언급했던 책들이 모두 작가의 이름을 믿고 읽은 책인 것과 달리, <인간 수컷은 필요없어>는 순전히 흥미를 끄는 제목과 내용 때문에 읽은 책이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물론, 책에 대한 만족과 저자에 대한 호감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요네하라 마리의 경우에는 좀 더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책 속에서 한결같이 느껴지는 따뜻함과 올곧음, 그리고 간간히 드러나는 엄격함과 엉뚱하고 싱그러운 유머감각까지. 이런 매력들이 글로 오롯이 나타난다는 점도 대단하지만, 이런 매력들이 전적으로 요네하라 마리 본인에게서 기인한다는 점은 더욱 대단하다. 설령 책에서 큰 만족을 얻지 못했을지라도 이런 저자에게는 역시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이런 저자의 글이 만족스럽지 않기도 어렵겠지만). 앞으로 요네하라 마리의 다른 책을 만나는 일에 대한 기대가 크다.
끝으로 오타니 준코의 글에 오타니 에이지의 사진을 실은 <다이고로야, 고마워>는 괜찮은 책이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원숭이 다이고로가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생애를 있는 힘껏 살아내는 모습도 적지 않은 감흥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특히 그런 다이고로를 가족의 일원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한 가족의 모습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곧 죽을지 모르는 다이고로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로 받아들이는 아버지 오타니 에이지로와, 자신의 몸조차 힘든 와중에도 다이고로에게 애정을 다하는 어머니 오타니 준코, 그리고 장애를 지닌 다이고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주는 아이들. 그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엮어내는, 의지와 애정이 가득한 삶의 모습을 보는 건 실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사 읽은 데에는 무엇보다도 반값 할인이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나는 160여 페이지에 큼지막한 글자 크기를 자랑하는 이 책의 본래 가격에 대해서는 조금 불만이 있다. 生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다이고로가 고맙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얇은 책들이 그 몸집을 불릴 요량으로 양장을 입는 건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적어도, 그게 다이고로를 더욱 기리기 위함이나 혹은 다이고로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함이 아닌 한.
그나저나 연초에 세웠던 세심하고 사려 깊은 내 '독서계획'에 따르면, 본래 지난 7월과 8월에는 각각 <슬픈 미나마타>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를 읽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계획'이 본래 그렇듯, 6월에 어긋나기 시작한 올해의 '독서계획'은 태풍과 함께 완전히 방향을 틀어버리고 말았다. 이래서야 과연 애초 계획의 절반 수준이나마 달성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데, 이제서야 말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관심을 끄는 책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게 마련이니 연초의 '독서계획'이란 건 태생부터 사뭇 미련하고 융통성 없는 어리석은 짓에 다름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이제부터 '독서계획'을 대놓고 무시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역시 '독서계획'은 그저 거들 뿐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