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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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들은 종종 '수상작'의 아우라에 낚인다. 책계界에 막 입문한 뉴비들은 물론이거니와 제법 읽는다 하는 대인배들도 수상작에는 쉽게 지갑을 열곤 한다. 한심한 일이다. 수상작 목록의 폐해는 사람낚는 베스트셀러 만큼이나 만만치가 않다. 굳이 열거하지는 않겠으나 특히 각종 신문사들의 문학상 또, 중, 소 규모의 문학상들은 좋은 작품을 선정하기보다는 상업적 폭탄들을 양산하는데 더 많이 기여했다. 상은 단지 참고적인 지표일 뿐, 책을 심판하는 잣대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세월일 것이다. 호머는 상을 받은 적 없지만 일리야드는 문학사적으로 독보적 위치를 획득했고, 검은 집은 제 4회 호러 대상을 수상했으나, 그 명성만큼 가치있는 책은 아니다.  

책 표지에서 인용하는 심사평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마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검은 집 만큼 확실히 보여준 소설은 일찍이 없었다. 시종 분위기를 압도하는 섬뜩한 캐릭터 설정, 절묘한 구성력과 복선의 묘미... 심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숨가쁘게 페이지를 넘겨가는 가운데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미저리보다 몇 배 더 강력한 공포, 일본 호러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  

부담스러울 정도로 미끄러운 평은 그 업계의 상도의니까 그러려니 하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틀린 부분이 눈에 띤다. 검은집은 '마음이 없는' 사이코 패스에 대한 이야기이며,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가장 중대한 결점을 꼽으라면 호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종 여유있는 분위기에 있다. 이 기세라면 심사위윈이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읽어봤는지도 조금은 의심해봐야 할 것 같다.  

#. 2  

어린시절의 트라우마, 연쇄살인, 트라우마와 사건의 극복. 말 할 것도 없는 클리셰, 진부한 플롯이다. 굳이 그 대표격인'양들의 침묵'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런 류의 이야기 보다 그렇지 않은 류의 이야기를 찾는게 더 빠를 지경이니까. 작가 기시 유스케가 내 세운 주인공, 몇 살 터울의 형의 자살을 상처로 품고 사는 보험설계사. 요것도 그리 독창적인 설정은 아니다.    

전체적인 소설의 완성도에는 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작가가 3인칭 관찰자 시점을 다루는 데 어설프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생각이 전환되거나 상황이 변환되는 부분을 무리하게 하나의 문단에 우겨 넣으려는 부분이 여러차례 나타나는 것. 또 하나는 사설이 길어 몰입도를 해친다는 점이다. 소설은 총 4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분되는데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1, 2 장은 클라이막스로 들어가기 위한 포석일 뿐이어서 전체적인 속도감을 저하시킨다. 또 에필로그에서 사회 아노미에 대한 작가의 일장 연설은 도대체가 김이 빠진다. 전기밥솥 샀는데 압력밥솥을 사은품으로 받은 기분이랄까.

소설의 잘 된 부분은 거시적 구도에서 보다 미시적인 부분들에 있다. 다소 밋밋할 수 있는 소설의 전개를 그럴 듯 하게 포장하고 말쑥하게 이끌어내는 건 곤충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바탕으로 등장인물의 행동과 유형을 대입시키는 장치다. 이러한 장치는 곤충학도 출신이라는 주인공의 배경과, 소설의 전개가 꽉 맞물린 은유로 기둥처럼 소설의 얼개를 구축한다. 곤충의 은유가 소설의 외부적 틀을 떠받친다면 소설의 내면적 축을 형성하는 건 정신분석학적 틀이다. 비록 프로이트와 칼 융의 고전에서 머물기는 하나 소설의 흥미를 위해서는 충분히 매끄러운 수준이다.   

#. 3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소설의 히로인이자 심리학도인 메구미와 또 다른 심리학도인 가나이시의 대립이다. 이 둘은 사이코패스의 구원 가능성을 놓고 충돌한다. 소설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아마 메구미의 심리학적 베이스는 칼 로저스(Carl Rogers)의 상담심리학일거다. 로저스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학문의 준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실현의 욕구를 가진 인간과 그 가능성을 믿으며, 정신적 위험상황의 모든 사람은 적절한 치유에 의해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기나이시는 샤와 로스(shah and roth)의 유전학적 범죄학의 적자다. 1974년, 샤와 로스는 유전자 염색체에 대한 표본 조사를 통해 특정 염색체(XYY)를 가진 사람이 키가 크고 공격적이며 전과를 가지는 경력이 있다는 결론을 냈다. 물론 이 이론은 불과 3년만에 덴마크 연구자들에게 반박된다. 요지는 XYY염색체가 불러오는 문제는 단지 지능장애이고, 낮은 지능으로 사기를 치다 보니까 단지 정상 염색체를 가진 사람보다 체포율이 높은 뿐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들의 반박도 범죄를 일으키는 특정 염색체가 없다는 확신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쨌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형질'이 존재하는가. 또 그러한 형질이 범죄를 유발하는가라는 의문은 18~19세기에 유행했던 골상학(骨相學) 이후, 오늘날 유전학까지 이어지는 범죄학의 오랜 테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직한 통계조사로 그러한 이론을 뒷받침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우생학의 끔찍한 전례를 들어 그러한 사고를 비판한다. (소설계에서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필립딕이 가장 강력한 비판자일거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은 아직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니고 과학적 발견과 생물사회학(Biosocial)적 진보에 의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중이다.   

기나이시와 메구미, 이 둘의 대립으로 소설의 두가지 이론적 배경은 부딪히지만 기시 유스케는 이 두 등장인물을 한 무대에 올려놓는 모험을 택하지 않는다. 다만 기나이시는 죽음으로 자신의 이론에 무게를 싩고, 메구미는 가까스로 살아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기회만을 얻을 뿐이다. 작가의 메타포는 힘 없이 희미하다. 나쁘지는 않지만 용기있는 선택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치열한 학문적 탐구를 녹여내지 못한 건 못내 아쉬운 부분이며, 결정적으로 이 지점에서 검은 집은 A급 소설에서 멀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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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03-1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기시 유스케의 소설과는 거리가 먼 리뷰네요. ^^;
기시 유스케의 책들의 플롯은 뻔하고, 소재 역시 흔해빠졌는데, 정말 무서워요.
사람따라 호러를 느끼는 부분이 틀린걸까요? 세상에서는 기시 유스케를 호러작가라고 하긴 합니다만. 간혹 뒤끝이 약하다는 느낌을 받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약점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가 읽은 가장 무서운 이야기는 기시 유스케의 <천사의 속삭임>이에요.

호러 대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 된 것은 이 작품과 <야시>지요. 일본에는 워낙 다양한 상으로 다양한 장르의 마켓을 장려하다보니 정말 눈에 안 차는 수상작들도 많지만,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나저나 이 작품은 수상작이어서기 보다는 영화로 명성(?)을 얻은게 아닌가요.

뷰리풀말미잘 2009-03-12 15:40   좋아요 0 | URL
어휴 하이드님 무섭죠. 무서운건 너무 당연하니까 안 썼을 뿐이에요. 한 반쯤은 눈 가리고 봤다니까요! 생각해보면 그렇게 아주 흔한 소재도 아닐지 몰라요. 요즘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는 국민상식이지만 요 소설이 출간된 97년 즈음에는 전문가나 알 법한 단어였을걸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범죄학의 저변이 좁아서 학회가 생긴지도 대략 2년 정도 밖에 안 됐다니까 더 그랬겠죠. 말씀하신 '천사의 속삭임'은 도서정보를 보니까 정말 재미있겠더라구요. 하이드님도 추천하시니까 조만간 꼭 볼 생각이에요. 하이드님의 선구안은 이치로 수준이니까요.

영화는 안 봤어요. 듀나가 재미 없대서. ㅎㅎ 듀나도 그 분야에서는 거의 이치로 수준이거든요.

Arch 2009-03-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히 댓글을 못달겠어요.(그럼 달지 말지?) 전 영화로 검은집을 본게 다인데다 호러 소설은 잘 읽지 않아서.
영화로 검은집을 볼 때는 미잘님이 말하신 부분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반전, 반전, 깜짝 놀래키기, 황정민의 연기변신인데 굳이 안 해도 될 연기변신만 보이더라구요.
미잘님은 미모로울 뿐만 아니라 어쩜 범죄학에서 우생학까지 두루두루 아신답니까.

뷰리풀말미잘 2009-03-12 15:43   좋아요 0 | URL
저도 호러소설은 잘 안 읽었는데 간만에 읽어보니까 또 재미있더라구요! 싼 값에 오래,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보다 메리트 있는거 같아요. ㅎㅎ 제 모든 지식은 미모에서 나오는 거 같아요. 단점이라면, 별 깊은 구석이 없다는 거지만.
 
한 아이 1 - 아동교육 심리학의 영원한 고전 한 아이 1
토리 헤이든 지음, 이희재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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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중의 새댁 멜기세댁님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제가 티비에서 봤는데, 어느 교수가 하도 책을 많이 읽으니까 책에 손을 얹고 부르르 떨면 대충 책의 내용이 파악되는 경지에 올랐대요.” 놀라운 이야기다. 하지만 반드시 불가능 할 것 같지는 않은 얘기다. 생활의 달인 류의 TV프로그램에서 목도하듯 어떤 일이든 성실하게 매진하면 차원이 다른 능력이 계발되는 것이다. 물론 나의 독서의 질과 양이 알라딘의 수 많은 용자들에 비할 바는 못 됨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절반이 만화와 잡지와 무협지였을망정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을만한 책을 읽어왔다. 두어 수레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읽었지만 세 수레쯤 읽었을 때에는 나름의 분류법이 생겼고, 네 수레가 넘어서자 각종 분야와 작가의 미모, 색깔 크기별로 나름의 '사쿠라(벚꽃)서지학'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자신만의 서지학과 그것의 전파는 어쩌면 경지에 이른 자들의 본능 같은 것인가보다. 대관절 왜 그런지 이해하긴 어렵지만 수 많은 기관, 대학, 서점, 심지어 쇼 프로그램까지 똥강아지 똥 싸제끼듯 각종 책 리스트를 만들고 이리저리 퍼트리기에 힘 쓰는 거라. 하지만 주변의 강압과 왠지 모를 의무감으로 그러한 리스트에 선정된 책들을 친견해 보면, 우선 놀라운 무게와 베게로 쓰면 뒷목 쑤실만한 두께에 주눅부터 들어 선뜻 열어보기조차 겁나는게 사실이다. 간혹 만나는 두께와 무게가 만만한 책들에도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이기적 유전자’ 같은 것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에 새겨진 문자들은 분명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훈민정음의 모양을 따르나, 실은 비슷한 모양의 오랑캐 말로 쓰여있는지라 오로지 한글만을 최고로 알고 일생을 살아온 우리 같은 우국지사들은 실상 읽어도 읽는 것이 아니다.  

이에 가슴을 치고 통탄하기를 어언 20여 분. 이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여기 이 척박한 독서의 광야에 새로운 서지학의 씨앗을 뿌리나니, 이름하여 '우국충정 리스트'. 본 리스트는 우선 얇고, 가벼운데다, 국민공통교육기본과정을 마스터 한 자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훈민정음으로 쓰여 있으며, 그 감동의 깊이가 무슨무슨 기관, 무슨무슨 대학의 추천도서 목록에 싸다구를 왕복으로 쌔려 줄 수 있다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렇다고 무슨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어린왕자’처럼 흔해 빠진 교양도서냐. 아니다. 이건 레어의 미덕을 잃지 않은 청정지역에서 공수해온 유니크 아이템인 것이다. 장르불문, 국적불문한 이 책들은 당신의 얼음 같은 심장에 콸콸 끓는 쇳물처럼 쏱아지리라. 물론, 읽는 이 중에는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는 위인이 선정 도서에 대해 이러저러한 의문점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어쩌라고. 추천도서목록 따위가 A/S 되는 거 봤냐. 낙장도 니 책임, 파본도 니 책임, 무감동도 오직 니 책임일 뿐.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서두가 길었다. 그래서 우국충정리스트의 첫 리뷰 도서(처음이자 마지막 리뷰일지도 모르지만)는 토리 헤이든의 한 아이. 본인, 이 책을 날밤 까먹는 귀신이라고 부르리라. 도대체 재미없을 것처럼 생긴 표지디자인과 알듯말듯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무슨 저주라도 걸렸는지 손에 딱 하고 붙어 떨어 질 줄은 모른다. 왜냐? 왜 나는 늘 책 선물을 할 때 늘 영 순위로 이 책을 고려하는 것이며, 선물 받은 이들은 껍데기는 열었으나 차마 닫지는 못하고 은한은 삼경일제, 잠 못 들어 하는 것인지. 당최 이 책의 무엇이 그들의 차가운 파토스에 불을 싸 질렀을까.

내가 생각하건대, 글의 감동은 진정성에서 온다. 절절 끓는 온돌이 폭신한 침대보다 개운한 건 뜨겁게 살 부비며 등 지지는 그 리얼함 때문이다. 그 리얼함이야 말로 침대가 갖지 못한 끈적한 진정성이다. 본 즉,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노후한 스승의 죽음과 아직 팔팔한 제자의 젊음이 대화를 통해 교차하는 이야기다. 약에 쓸래도 따분해서 쓰기 싫을만한 아이템이요 소설이라면 그저 지루한 냄비받침에 불과할 뿐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제법 팔려 이 변방 소국에까지 번역되어 나올 수 있었던 추동력은 바로 ‘논픽션’이 갖고 있는 파워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무서운 얘기가 무서웠던 이유가 그 이야기 자체의 힘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믿거나 말거나 ‘실화’라는 전제 때문이었는지.. 죽어가는 스승을 목전에 둔 제자,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을만한 얘기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전제는 그 전제만으로도 이야기에 힘을 보태 가슴의 둑을 허문다. 한 아이는 순도 100% 논 픽션. ‘모리’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절절한 논 픽션임을 본 필자 보증한다. 그 감동은 날카롭게 심장을 후벼파는 시퍼런 칼날이다.

입자가 거친 필름사진이 디지털 시대에도 살아남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그 거친 입자가 주는 아날로그적 감성 때문이다. 그 정제되지 않은 터프함에 매끈한 디지털 시대의 우리 감수성은 자극받는다. 헤이든의 한 아이는 필름사진을 상기시킨다. 이건 무지하게 와일드한 이야기다. 일곱 살 짜리 여자애가 네 살 먹은 한 남자애를 묶어놓고 옷자락에 불을 당긴다. 태워 죽이려고. 애새끼들이 전갈을 잡아 개미굴에 짖이겨 넣는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영화 ‘와일드 번치’ 충격이 오버랩 된다. 도대체 왜 천진이 난만하고 순진이 무구해야 할 일곱 살이 그런 숭악한 짓을 저지르게 된 걸까. 토리 헤이든은 반 평생을 특수교육에 이바지한 서술자로 한 아이 ‘쉴라’와 겪은 치열한 사건들을 나열하며 담담하게 그 상황을 독자에게 설득시킨다.

이건 우아한 성장소설의 장르적 관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단순히 개인의 ‘성장’과 발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이 책의 관심은 세련된 어휘를 구사하고, 수준높은 잡지를 읽다가, 난데없이 금붕어의 눈알을 파내는 ‘쉴라’의 내면과 그 내면을 만든 추악한 사회의 현실에도, 교육이 가지고 있는 제도적, 본질적 문제에도 한 다리씩을 걸쳐놓고 있는 것이다. 결국 책의 말미에서 쉴라는 정서적인 안정감을 찾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헐리우드적 관점의 해피엔딩의 조건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이 이야기는 예쁘게 포장된 햄버거가 아니라 펄떡거리는 우럭의 살점 한 조각이랄까. 그래서 이 책은 다소 일목요연하지 않고, 얼개는 포장이 덜 된 듯 거칠지만 읽을 수록 생살에 이빨을 쑤셔박고 육즙을 빨아먹는 쾌감이 더해가는 것이다.  

본 서물書物 '한 아이'는 아동교육 전공자들 사이에서 이름을 얻은 책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힘은 결코 교육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건 교육을 뛰어 넘어 한 아이와 한 교육자의 삶을 통해 그 시대현실과, 인간의 심리, 그리고 독자의 감수성을 화살처럼 관통하는 가슴 저릿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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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9-02-03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추천의 영광은 제가 가져갑니다 ^^

뷰리풀말미잘 2009-02-03 11:48   좋아요 0 | URL
라일라님의 추천이라면 제가 더 영광스럽죠. 히..

치니 2009-02-0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럼 두번째 추천이라도. ^-^

뷰리풀말미잘 2009-02-03 11:51   좋아요 0 | URL
치니님.. ♡

Arch 2009-02-0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영풍문고 갔다가 '이 아이'를 찾아내라고 직원들에게 타박을 해대다 쉴라를 보는 뭇사람들의 시선같은 뭐 그런걸 한몸에 가득 받았더랬어요.
한 아이, 꼭 읽어보고싶게 만드는 리뷰네요. 그런데 페이퍼처럼 리뷰를 써도 되는거에요? 전 리뷰 부담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나저나 우석훈씨가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유머'를 말미잘님은 곳곳에 무더기로 퍼붓고 다니는군요! 흠(메모메모^^)
아, 저도 쭉 다 읽은 후 추천!

뷰리풀말미잘 2009-02-03 20:44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방금 영풍문고에서 오는 길이에요. 종로점에 있었는데 혹시 같은 영풍문고? 결국 '이 아이'는 구입하셨나요? ^^
페이퍼처럼 리뷰쓰면 잡아가기라도 한다든가요. 리뷰를 쓰던 야설을 쓰던 쓰는 놈 맘이지. 흐흐..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전 아치님밖에 없는거 아시죠?

Arch 2009-02-03 22:13   좋아요 0 | URL
뭐 저기 저기 밑에 다른 분도 있던데요. 흥~^^ 콧방귀 살포!! 지지지
어어~ 나도 거기였는데^^ 그런데 영풍문고는 거기 한군데 아닌가요? 아님 패쓰. '이 아이'ㅋ는 미친 사수의 미친듯한 재촉 덕분에 구입하지 못했어요. 어제 주문을 넣은지라 아마 조금 있다 사게 될 듯.
아하! 그럼 전 야설 버전 리뷰 전문가라도 되어야겠습니다.(미개척분야에 몰두) 그때도 저 밖에 없으셔야할텐데...^^

뷰리풀말미잘 2009-02-03 23:52   좋아요 0 | URL
오호.. 야설리뷰라.. 아마 아치님이 쓰시면 리뷰계의 태풍이 될 겁니다. 어쩌면 아치 신드롬이라 불리게 될지도 모르죠. 음.. 예상할만한 부작용이라면 어마어마한 추천수에 비해 왜소한 수준의 댓글정도?

그럼 전 즐겨찾기에 아치님 빼고 다 지우러 가 보겠습니다.

Arch 2009-02-04 00:08   좋아요 0 | URL
이런식의 자극, 아주 좋아요. 그런데 리뷰 울렁증이 있어 야설이든 뭐든 나올런지 모르겠어요.
우리, 사랑의 단상도 쓱쓱 써야할텐데 말이죠...
말미잘님 돌아오셔서 제가 참말로 즐겁습니다. 댓글 늘어뜨리며 점점히 나빌레라하는 기분이랄까. 키힉^^ 아 자야겠다. 잘자요~

자발적실업자 2009-02-0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한 아이.
제게 추천한 도서중에서도 아마 거의 일순위였죠?
자기전에 가볍게 잡았다가 정말 말그대로 "시간가는줄 모르고" 새벽5시까지 두권을 다 독파해버리고 말았던 기억.
여러 추천도서 중에서도 여운이 깊게 남았던 책이었죠.

저도 추천날리고 갑니다.

뷰리풀말미잘 2009-02-06 14:15   좋아요 0 | URL
실업자님이 빨리 취업자님이 되셔야 저도 다시 대여업을 시작할텐데 말입니다. ^^ 앞 일이야 모르는 거지만 어쩌면 실업자님이랑 제가 한솥밥 먹게 될 거수도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드네요. 삼국지 보면 손책이 죽을때 이런 말을 남기죠. "나라 밖의 일은 장소와 논하고 나라 안의 일은 주유와 논하라." 아마 우리 사장님은 후임자한테 비슷한 말을 하게 될 지도 몰라요. "안의 일은 실업자와, 밖의 일은 말미잘과 논하라." 물론 안 밖이야 바뀔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만. 쿡쿡..

무해한모리군 2009-02-18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솔깃한 리뷰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09-02-18 23:35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 휘몰이님을 즐겨찾기에 추가했을 뿐인데 저녁에 님의 댓글을 볼 줄이야. 통한건가요. ^^;

무해한모리군 2009-02-23 11:55   좋아요 0 | URL
저랑 통하셨군요 ㅎㅎㅎ
 
노동의 종말 - 개정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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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대한 단상

종말이라는 단어는 가소롭다. 실상, 종말은 것은 ‘인간의’ 종말 일 뿐이니까. 베이컨의 말을 빌리자면 ‘종족의 우상’이다. 천지에 사는 것이 어디 인간뿐이겠는가. 오히려 다른 종에게 인간의 종말이란 긍정적인 사건에 가까울게다. 생각해 보건대 일상문법상 종말이라는 어휘가 담을 수 있는 함의는 매우 협소하다.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 세계 문명사를 상고해 볼 때 종말이 그 문명의 이슈가 되는 것은 헤브라이 문명 단 하나뿐이다. 그러한 헤브라이즘 문명의 판타지가 서구의 그레코-로망과 기독교 문명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개 문명의 찌꺼기가 세계사의 주류자리를 꿰 차고 그 사상을 좋은 면이든 좋지 않은 면이든 가리지 않고 여타 문명에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는데 있다. 그 선봉이 바로 개신교의 전도주의다.

그 와중에 인간의 역사는 종말이라는 어휘를 둘러싸고 수 없는 종말적 폐혜를 겪었다. 종말론자로 몰려 죽은 사람, 종말론에 가담하지 않아 맞아죽은 사람. 이 범주에는 예수도, 가롯 유다도, 어쩌면 자본의 종언을 말한 맑스도, 반공주의로 먹고 산 박정희도, 그로부터 비롯한 인류의 근현대사의 소용돌이도 포함된다. 이러한 문제는 현실과 신화의 구분이 모호했던 인류 여명기의 관성이 인류 역사를 통털어 멈추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제, 종말에 대한 편견 없는 독해법을 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을 대하는 두 개의 관점을 제시한다. 간단하다. 하나는 낡은 관점으로, 종말론과 협박자의 논리에 휘말려 간이고 쓸개고 빼다 바치는 것, 또 하나는 종말이 독선에 대한 신화적 비판자임을 알고 그와 조화를 모색해 나가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이 바로 본 글에서 제러미 리프킨의 저서, 노동의 종말을 대하는 독해법이 될 것이다.

   

『제러미스트라다무스』

리프킨의 문제의식은 기술발전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자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발전이 인간 역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리라고 예언한다. 그러한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산업 혁명기에 발명된 증기기관과 그에 연계되는 컨베이어 벨트다. 그 전까지 수많은 노동력이 달려들어 해결해야 했던 일을 증기기관의 힘을 빌려 단축시킨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전까지 컨베이어벨트의 역할을 해 줬던 사람들에게 ‘기술실업’ 을 야기한다. 어떤 공장장도 비싼 노동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싼 값에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려는 선택을 할 테니까. 거칠지만 리프킨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기술발전으로부터 비롯한 대량 기술실업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의 종착역이 바로 노동의 종말이다.

제러미스트라다무스

 

책에서 리프킨은 근 현대사를 아우르는 역사적 근거와, 무수히 많은 기술실업 사례들에 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러한 결론을 내린다. 예를 들어, 194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목화 생산업에서 기계에 밀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북부로의 대 이동을 했으며 북부에서는 이미 자동화 된 생산기계들에 밀려 비숙련 일용직 노동자로 몰리게 되고 결국 하층계급으로 떠밀린 현상은 리프킨이 말하는 기술실업의 대표적인 예다. 또한 도요타를 필두로 한 일본의 자동차 기업들이 기계 가동시간을 최고조로 높이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제조공정이(린 생산방식) 미국 자동차 업계에도 전이되어 이른바 포스트 포디즘을 이끌어 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작업장의 리엔지니어링이 결국 공업,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계층을 파쇄시키고 결국 블루칼라의 종말을 가져오며, 나아가 서비스업의 노동력도 대폭 대체할 것이라고 본다.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강의방식 E-Edu, 사서가 필요 없는 정보 도서관, 음악가를 배재시키는 디지털 합성 음악, CG기술의 발달로 인한 영화 엑스트라의 퇴출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다.


그래서 2003년 미국의 경기 회복세는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고용회복을 동반하지 못했고, 2001년부터 2003년 9월 사이에만 유례없이 3백만 개 가까운 일자리가 소실되었으며, 장기실업자들은 질은 숙련된 노동자와 고학력층으로 높아져 가고 있다고 한다. 이 시대에 중졸이 설 자리는 도대체 어디인가. 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리프킨은 대안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노동시간의 단축, 두 번째는 제 3부문의 강화, 세 번째가 사회적 경제의 세계화다. 과연 실효성이 있는 대안일까?

 

『아스트랄로피테쿠스』

뭔가를 주장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은 자신의 주장에 도취된다는 점에 있다. 가령 이명박이 주장하는 경부운하의 장대한 계획을 보라, 허경영의 바이칼 호수를 이용해 수자원을 충당하자는 옹골찬 계획을 보라. 그들은 이미 사바의 번뇌를 넘어 아스트랄의 세계로 향해 가는 자들이니.. 그들을 일컬어 신 인류, 아스트랄로피테쿠스라 하자.

 

노니는 아스트랄로피테쿠스 한쌍


 

리프킨의 첫 번째 아스트랄계 여행은 스러져 가는 노동시장에 대한 분석은 치밀하지만 새로 창출된 노동력에 대한 분석은 전무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분석의 결여는 다품종 소량생산 사회로 넘어가는 현대사회의 과도기를 과도기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리프킨의 두 번째 아스트랄은 기술진보에 대한 너무도 확고한 믿음이다. 아무리 디지털 샘플링이 발달한다고 해서 베토벤이 죽는 건 아니다. 아무리 AI가 발달하고 인공지능에 의한 실험적인 글쓰기가 성공했다고 해도 소설가들 밥줄이 끊어졌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다.

 

 

결국 기계가 인간의 마인드까지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은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인지과학이 정상과학의 고지로 올라 선 후에. 또, 신경생리학, 컴퓨터 공학, 인공지능학, 전산언어학, 심리학의 연구성과가 한데 묶여 미녀 로봇을 만들어 내고 그 미녀 로봇이 쓴 책의 마지막 구절이 이제 리프킨 즐. 을 선언하는 그 날, 그러니까 최소한 향후 100년 후에나 가능할 거라는 얘기다. 따라서 리프킨의 귀여운 주장에 기술낙관주의자나 SF틱 기술결정론적 사고라는 무시무시한 딱지는 붙이지 않겠다. 본업인 사회학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컴퓨터 공학에 대해서 높은 이해를 쌓지 못했기 때문일 테니까. 

  

리프킨의 세 번째 아스트랄은 세계사적 통시성의 결여다. 그는 미국에 대한 이해가 곧 세계사회에 대한 이해를 대변하듯이 주장한다. 기실, 기술실업의 영향을 받고 있는 미국인구가 세계 인구의 몇 프로나 되는가 하는 문제는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 인구의 가장 큰 덩어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권에 있다는 점과, 일본을 제외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분석이 없다시피 하다는 점도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유럽이나 제 3세계의 논의조차 새발의 피 수준이다.

그래서 그의 대안인 제 3부문의 강화가 와닿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제 3 부문이라 함은 교회나 지역사회, 사회단체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지불되는 ‘그림자 임금’(예컨대, 1시간 봉사를 하면 30분 봉사 받을 권리를 화폐화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사회구조가 조밀하게 지역경제를 떠받히고, 이러한 사회적 경제가 뭉쳐 세계적인 구조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현실성이 있는 얘긴가.

도시화 율과 아파트화가 고도로 진척된 한국 사회에서는 지역사회도 없고, 사회단체의 수준은 한심하고, 교회나 종교집단도 없느니만 못한 형국이다. 그림자 임금도 역시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의 공급은 넉넉한 편이다 개인의 기본의식 구조가 공동체 의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친구 필립이 사는 가나의 경우를 보자, 무려 인구 8000만이 복작거리는 그곳에서는 모두가 지역사회의 일원이고, 삶이 봉사활동이고, 국가 전체가 사회단체이자 종교단체다. 가나가 꼭 미국사회처럼 발전하게 될까? 인도도?  


『결론- 리프킨과 꿈을 꾸자』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예언서를 들고 우리를 무섭게 다그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은 노동의 종말에 있지 않다. 책에는 종말이 닥쳐왔을 때 지리산에 들어 가라던가, 정도령을 찾으라던가 따위의 언급도 없다. 그의 고민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경제적인 인간 사회구조의 밸런스를 깨뜨리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개척할 수 있을지에 맞닿아 있다. 즉, 앞으로 닥쳐올 변혁을 올바로 맞아들이기 위해 제 3부문을 확대하고, 제 3부문에 대한 국제적 연합을 통해 신자유주의라는 리스크에 대해 경계하자는 요지다.

하지만 리프킨의 전망과 진단은 나에게 있어서 체감온도가 높지 않다. 앞서 지적했듯이 리프킨의 견해가 미국사회에 최적화 된 것이며, 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그의 견해도 내게는 그다지 설득적이지 못하다. 제 3부문에 대한 언급도 자원봉사단체, 종교단체 등의 여러 제 3부문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본인에게 별로 깊게 체감되는 바가 없다. 특히 그림자 임금에 대한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요원해 보인다.

또 그의 견해처럼 자동화가 우리사회의 실업문제를 위협하는 요소이고, 노동시간 단축과 제 3부문의 확대가 그러한 위협에서 우리를 기적처럼 구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실질적인 저임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노동업무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의 진짜 노동자 계층에 대해 그러한 견해가 희망적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시장 경제의 작동을 너무 과시’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떤 사회학자가 그랬다. '리프킨이여 꿈을 꾸어라.' 가당찮은 소리 하지 말라는 얘기다. 어쩌면 노동의 종말은 사회학적 예언서에 불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언서가 보여주는 파국적 미래를 현실이 진보하도록 하는 채찍질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무분별한 신자유주의의 지랄발광과, 제 3부문, 국제적 연대, 실업문제에 대해 별 생각 없기가 체계적이기까지 한 우리 사회에 따끔한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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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 세트 - 전16권
김용.양우생 지음 / 중원문화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자고로 강호에는 예의가 있었다. 제자는 사부에게 사부는 사조에게 깍듯했고 감히 후배가 선배를 능멸함이 없었다. 협객들은 사악함을 불 보듯 했으며 협의를 목숨처럼 숭앙했다. 종종 이런 법도를 거스르는 무뢰배들은 마침내 선배 대협들의 한 칼에 자신의 예의 없음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그것이 무림의 법칙이다. 그래서 대협 김용은 ‘사조영웅전’의 마지막 장에서 ‘그래도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이다.  


나도 소싯적 3류 무협지 강호에서 협의의 길을 걸으며 졸작, 아류작, 삼류작들과 밤 새기를 날밤 까 먹듯 한 인간이지만, 보다보다 이런 예의 없는 무협지는 처음이다. 물론, 김용 대인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소오강호를 그 내용이나 문학성에 있어서 쓰레기라고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용과 문학성을 저급하게 만드는 번역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간판을 철판으로 코팅한 출판사다.


출판사는 표지 외에 책을 만들기 위한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반면 책을 팔아먹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 페이지 당 한번이상 등장하는 오자와 탈자, 번역인지 반역인지 모를 오역은 읽는 이로써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양우생의 소설을 소오강호 2부라는 타이틀로 한 세트를 묶어 팔아먹겠다는 심보는 가히 놀부 볼따구를 왕복으로 쌔려줄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독자에 대한 우롱이고, 저자에 대한 모욕이며, 상도에 대한 후안무치다.


그리하여, 무뢰배에게는 정의의 심판이, 예의 없는 출판에는 예의 없는 리뷰가 남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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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7-01-1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에 0개는 없는 비극...

마노아 2007-01-18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예의 없군요. 저자와 독자에 대한 모욕이에요ㅡ.ㅡ;;;

뷰리풀말미잘 2007-01-18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 그러게 말입니다! 알라딘은 별점 0개를 허하라! 허하라!
마노아님/ 네, 중원문화사 편집 담당자 뒷통수에 항룡십팔장을 시전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조선인 2007-01-1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오강호 이부라니. 이런. 꼬르르륵.

뷰리풀말미잘 2007-01-19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정말 꼬르르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achedge7 2008-04-04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출판그대로 우려먹기 반성하라

뷰리풀말미잘 2008-04-06 02:09   좋아요 0 | URL
반성하라! 반성하라!
 
소금가마니 외 - 2005년 제6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구효서 외 지음 / 해토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 1  about 구효서

구효서는 특출한 작가가 아니다. 주지주의적 기품이 묻어나는 이문열의 글이나, 유장하고 지독한 김훈의 문장, 혹은 참신하고 창조적인 박민규의 필체처럼 어떤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의 문장은 평이하고 담담하며,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내는 후각도 예민한 편은 아니다. 문단에서 구효서의 위치도 늘 그러했다. 수많은 문학상에 번번이 거론되는 것도 그의 이름이지만, 19년의 작가활동을 통틀어 별반 특별한 수상실적을 거두지 못한 것도 또 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 또한 그의 이름이다. 수많은 "기대주"와 "총아"가 쉴 새 없이 명멸하는 문단에서 그는 은근한 빛을 오래 밝힌 수성의 작가다. 윤대녕의 말 대로 "어떤 소설의 국면에 처해서도 자기 나름의 색깔로 이야기 할 줄 아는 작가"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의 글에는 꾸준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오래된 산삼의 약효처럼 응축되어 이제 비로소 제 향을 풍기고 알싸하고 끈적끈적한 진액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2005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한 "소금가마니"가 그 결과물이다.

소설 ‘소금가마니’에서 이효석이 수성의 대상으로 삼은 이야기는 닳고 닳은 모성신화다. 수많은 고통과 싸워 삶의 현실을 초극하고 끝내는 자식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영원히 살아갈 그런 어머니의 이야기다.

 

#. 2. 소금가마니- 세 인물을 중심으로

소금가마니에서는 세 인물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감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키는 어머니와, 빼앗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을 통해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어머니를 읽는 주인공 ‘인호’다.

어머니는 '지키는 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패악과 폭력 속에서 애틋한 과거의 사랑을 지켰고, 집안의 경제를 도맡아 지켰고, 나무에서 떨어져 죽어가는 딸을 지켰고, 처가의 어머니와 조카를 지켰고, 자신의 지성을 지켰다. 작가에게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부처'의 모습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남편에게 얻어맞아 구시월의 늙은 호박처럼 붉게 부푼 몰골로도 아무 소리 없이 두부를 만들고, 그 두부 판돈을 남편에게 빼앗기고, 그 두부 판에 온몸이 처박히게 맞는 일이 되풀이 된다” 그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묵묵히 참으며 아이들을 끌어안는다. “마치 눈 안보이는 장님처럼, 안 들리는 귀머거리처럼 (중략)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울음소리 한 번 내 뱉지 않고 모든 것을 초연한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불당 안에 온화한 모습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짓는 부처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가 두부를 만들어 팔아먹고 사는 형편이라 집에는 세 개의 소금 가마니가 있었다. 그런데 그 소금 가마니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덜어져나가면서 뱃구레가 꺼지는 모습이 영락없이 삼존불처럼 보이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어머니는 소금가마니며 부처인지도 몰랐다.”
 
이런 어머니 상은 소설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어머니의 유품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에서 어머니가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구절(소설에서는 고딕체로 표기된다)과 맞닿아 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신에게 이르기 위해 무한히 체념하고 다시금 모든 것을 부조리의 힘으로 손에 넣었다. 어머니도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삶 속에서 온전한 자신과 자신을 이루게 하는 요소들을 지키기 위해 '무한 체념'이라는 고행을 실천하며 끊임없이 침묵했던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와 대비되며 소설의 긴장구도를 형성하는 것은 '빼앗는 자'로서의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눈에 불을 키고 어머니에게 '두부를 판 돈'으로 대표되는 그녀의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성을 착취했고 그러고서도 죽 한그릇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는 가문의 맥 빠진 힘을 신봉하는 가부장이며, 어머니를 겁간해 임신시키는 마초이고, ‘해산한지 사흘’ 밖에 안 되는 어머니를 다시 생업전선에 밀어 넣어 착취하는 억압자이다. 결국 아버지는 다분히 인과응보적이고 권선징악적인 최후를 맞게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은 아버지가 죽어가며 ‘어머니의 손을 움켜쥔 손’과 ‘한줄기 눈물’을 흘리면서 일단락된다.

주인공 인호는 이런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한 시대 건너에서 관찰하는 오이디푸스적 고민의 체현자이다. 그는 아버지를 멸시하며, 회상을 통해 어머니에게 다가가려 하고 키에르케고르의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려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두 책의 밑줄 친 부분을 대조하고 있는 지금,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내가 밑줄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었던 때문이라고.”

무슨 의미일까? 작가는 근대적 어머니, 아버지 상의 대립을 통해 아버지와 정서적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고 주인공 인호라는 매개체로 현대사회와 어머니와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작가는 남성주체로서 품고있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어머니라는 한 인물에 집약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것은 명백한 모성신화의 연장이며  여성에게서 여성 본연의 여성성을 거세한(요상한 표현이지만) 남성용 판타지의 일종이니까.

하지만 문학이 반드시 현실을 초월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할 의무는 없다. 소금가마니도 분명 해석상의 한계와 의미론적인 평론에 있어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감동조차 한정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유일까? 이효석의 단단한 문장과 고밀도의 문단을 곱씹고 있자면 어떤 근본적인 향수가 뿌리부터 젖어 올라오는 것이다. 결국 '소금가마니'에서 구효서가 지켜낸 것은 근대적 어머니 상과 '리얼리즘의 승리' 그 두 가지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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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2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1-02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멋진 리뷰!^^
'소금가마니'라는 제목부터 땡기네요.
구효서, 이순원, 박상우가 말미잘님 말씀처럼 제겐 큰 특징이나 매력 없는
작가들로 묶이는데 말이죠.

뷰리풀말미잘 2006-11-0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분/ 옛날 라디오 DJ라.. ^^ 적절하고 재미있는 비유네요. 사실 구효서의 소설이 좀 뭐랄까.. 있으면 읽게되지만 억지로 찾아읽기는 좀 그렇잖아요. ㅋㅋ 저도 사실은 읽으려고 읽은게 아니라 모종의 어떤 이유때문에 반 강제로 읽게 된 거랍니다. 근데 구효서씨 계속 이렇게만 써 주신다면야 눈에 불을 키고 찾아읽게되는 작가군에 포함될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네요. 반갑습니다.

로드무비/ 앗! 로드무비님.. 멋진 리뷰라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 요 소설 만큼은 매력이 찰찰 넘친답니다. 2005년 현장비평가 어쩌구 좋은 소설로 뽑힌 작품이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