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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 1 - 아동교육 심리학의 영원한 고전 ㅣ 한 아이 1
토리 헤이든 지음, 이희재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새댁중의 새댁 멜기세댁님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제가 티비에서 봤는데, 어느 교수가 하도 책을 많이 읽으니까 책에 손을 얹고 부르르 떨면 대충 책의 내용이 파악되는 경지에 올랐대요.” 놀라운 이야기다. 하지만 반드시 불가능 할 것 같지는 않은 얘기다. 생활의 달인 류의 TV프로그램에서 목도하듯 어떤 일이든 성실하게 매진하면 차원이 다른 능력이 계발되는 것이다. 물론 나의 독서의 질과 양이 알라딘의 수 많은 용자들에 비할 바는 못 됨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절반이 만화와 잡지와 무협지였을망정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을만한 책을 읽어왔다. 두어 수레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읽었지만 세 수레쯤 읽었을 때에는 나름의 분류법이 생겼고, 네 수레가 넘어서자 각종 분야와 작가의 미모, 색깔 크기별로 나름의 '사쿠라(벚꽃)서지학'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자신만의 서지학과 그것의 전파는 어쩌면 경지에 이른 자들의 본능 같은 것인가보다. 대관절 왜 그런지 이해하긴 어렵지만 수 많은 기관, 대학, 서점, 심지어 쇼 프로그램까지 똥강아지 똥 싸제끼듯 각종 책 리스트를 만들고 이리저리 퍼트리기에 힘 쓰는 거라. 하지만 주변의 강압과 왠지 모를 의무감으로 그러한 리스트에 선정된 책들을 친견해 보면, 우선 놀라운 무게와 베게로 쓰면 뒷목 쑤실만한 두께에 주눅부터 들어 선뜻 열어보기조차 겁나는게 사실이다. 간혹 만나는 두께와 무게가 만만한 책들에도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이기적 유전자’ 같은 것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에 새겨진 문자들은 분명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훈민정음의 모양을 따르나, 실은 비슷한 모양의 오랑캐 말로 쓰여있는지라 오로지 한글만을 최고로 알고 일생을 살아온 우리 같은 우국지사들은 실상 읽어도 읽는 것이 아니다.
이에 가슴을 치고 통탄하기를 어언 20여 분. 이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여기 이 척박한 독서의 광야에 새로운 서지학의 씨앗을 뿌리나니, 이름하여 '우국충정 리스트'. 본 리스트는 우선 얇고, 가벼운데다, 국민공통교육기본과정을 마스터 한 자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훈민정음으로 쓰여 있으며, 그 감동의 깊이가 무슨무슨 기관, 무슨무슨 대학의 추천도서 목록에 싸다구를 왕복으로 쌔려 줄 수 있다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렇다고 무슨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어린왕자’처럼 흔해 빠진 교양도서냐. 아니다. 이건 레어의 미덕을 잃지 않은 청정지역에서 공수해온 유니크 아이템인 것이다. 장르불문, 국적불문한 이 책들은 당신의 얼음 같은 심장에 콸콸 끓는 쇳물처럼 쏱아지리라. 물론, 읽는 이 중에는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는 위인이 선정 도서에 대해 이러저러한 의문점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어쩌라고. 추천도서목록 따위가 A/S 되는 거 봤냐. 낙장도 니 책임, 파본도 니 책임, 무감동도 오직 니 책임일 뿐.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서두가 길었다. 그래서 우국충정리스트의 첫 리뷰 도서(처음이자 마지막 리뷰일지도 모르지만)는 토리 헤이든의 한 아이. 본인, 이 책을 날밤 까먹는 귀신이라고 부르리라. 도대체 재미없을 것처럼 생긴 표지디자인과 알듯말듯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무슨 저주라도 걸렸는지 손에 딱 하고 붙어 떨어 질 줄은 모른다. 왜냐? 왜 나는 늘 책 선물을 할 때 늘 영 순위로 이 책을 고려하는 것이며, 선물 받은 이들은 껍데기는 열었으나 차마 닫지는 못하고 은한은 삼경일제, 잠 못 들어 하는 것인지. 당최 이 책의 무엇이 그들의 차가운 파토스에 불을 싸 질렀을까.
내가 생각하건대, 글의 감동은 진정성에서 온다. 절절 끓는 온돌이 폭신한 침대보다 개운한 건 뜨겁게 살 부비며 등 지지는 그 리얼함 때문이다. 그 리얼함이야 말로 침대가 갖지 못한 끈적한 진정성이다. 본 즉,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노후한 스승의 죽음과 아직 팔팔한 제자의 젊음이 대화를 통해 교차하는 이야기다. 약에 쓸래도 따분해서 쓰기 싫을만한 아이템이요 소설이라면 그저 지루한 냄비받침에 불과할 뿐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제법 팔려 이 변방 소국에까지 번역되어 나올 수 있었던 추동력은 바로 ‘논픽션’이 갖고 있는 파워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무서운 얘기가 무서웠던 이유가 그 이야기 자체의 힘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믿거나 말거나 ‘실화’라는 전제 때문이었는지.. 죽어가는 스승을 목전에 둔 제자,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을만한 얘기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전제는 그 전제만으로도 이야기에 힘을 보태 가슴의 둑을 허문다. 한 아이는 순도 100% 논 픽션. ‘모리’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절절한 논 픽션임을 본 필자 보증한다. 그 감동은 날카롭게 심장을 후벼파는 시퍼런 칼날이다.
입자가 거친 필름사진이 디지털 시대에도 살아남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그 거친 입자가 주는 아날로그적 감성 때문이다. 그 정제되지 않은 터프함에 매끈한 디지털 시대의 우리 감수성은 자극받는다. 헤이든의 한 아이는 필름사진을 상기시킨다. 이건 무지하게 와일드한 이야기다. 일곱 살 짜리 여자애가 네 살 먹은 한 남자애를 묶어놓고 옷자락에 불을 당긴다. 태워 죽이려고. 애새끼들이 전갈을 잡아 개미굴에 짖이겨 넣는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영화 ‘와일드 번치’ 충격이 오버랩 된다. 도대체 왜 천진이 난만하고 순진이 무구해야 할 일곱 살이 그런 숭악한 짓을 저지르게 된 걸까. 토리 헤이든은 반 평생을 특수교육에 이바지한 서술자로 한 아이 ‘쉴라’와 겪은 치열한 사건들을 나열하며 담담하게 그 상황을 독자에게 설득시킨다.
이건 우아한 성장소설의 장르적 관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단순히 개인의 ‘성장’과 발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이 책의 관심은 세련된 어휘를 구사하고, 수준높은 잡지를 읽다가, 난데없이 금붕어의 눈알을 파내는 ‘쉴라’의 내면과 그 내면을 만든 추악한 사회의 현실에도, 교육이 가지고 있는 제도적, 본질적 문제에도 한 다리씩을 걸쳐놓고 있는 것이다. 결국 책의 말미에서 쉴라는 정서적인 안정감을 찾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헐리우드적 관점의 해피엔딩의 조건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이 이야기는 예쁘게 포장된 햄버거가 아니라 펄떡거리는 우럭의 살점 한 조각이랄까. 그래서 이 책은 다소 일목요연하지 않고, 얼개는 포장이 덜 된 듯 거칠지만 읽을 수록 생살에 이빨을 쑤셔박고 육즙을 빨아먹는 쾌감이 더해가는 것이다.
본 서물書物 '한 아이'는 아동교육 전공자들 사이에서 이름을 얻은 책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힘은 결코 교육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건 교육을 뛰어 넘어 한 아이와 한 교육자의 삶을 통해 그 시대현실과, 인간의 심리, 그리고 독자의 감수성을 화살처럼 관통하는 가슴 저릿한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