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 1

 

수용소였다. 섬인 듯 했다. 그 곳에서 자의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오래된 학교처럼 아무 인상도 없는 무뚝뚝한 시멘트 건물 여러 동이 듬성듬성 있었다. 수용된 자들은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 중 어린아이나 노인이 아닌 자들은 모두 노역에 동원되었다대여섯 명에 한명 씩 감시자가 붙었다. 나는 순응적인 인간이었다. 소처럼 일했다. 구령을 넣어가며 삽을 떴다. 

 

노역이 끝나고, K(잘 아는 사람이다) 수용소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나는 먼발치에서 K를 발견하고 뒤따라갔다. 반갑게 인사를 할 요량이었던가. 하지만 나보다 먼저 그를 맞이한 건  불량한 패거리였다. K는 후미진 곳으로 끌려가 잔혹하게 폭행당했다. 나는 숨어 그 모습을 봤지만, 나서지 못했다. 녀석들이 자리를 뜨고, 비척이며 일어선 K는 의무실로 갔다.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날 때 까지 그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며칠 지났던 것 같다. 내가 의무실로 찾아갔을 때, K는 병상에 앉아있었다. 내 얼굴을 본 K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누나가, 누나가 나쁜 짓을 당하고 있어.”

 

K의 친누나, R(역시 잘 아는 사람이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를 추슬러 앞세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인가. K는 나를 멀리 떨어진 구석의 창고로 데리고 갔다. 창고는 오래된 학교의 목공실처럼 생겼다. 쇠사슬로 대충 양쪽 문고리를 감아 놓은 철문 앞에서 전의 그 패거리가 비쭉 열린 틈으로 걸레자루 같은 것을 쑤석거리고 있었다.

 

뭐지. 나는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나체로 개처럼 엎드린 R의 나신이었다. 그녀는 정신이 붕괴된 듯 했다.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혈관이 좁아져 손발이 차가워졌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한 녀석이 철문을 기어올라가 위에서 R을 내려다 봤다. 어느새 나는 녀석의 바지춤을 잡고 맨 땅에 내리꽂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처박혀 으깨진 녀석을 걷어차고 짓밟았다.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때 까지.

 

걷어차는 발에 생기가 걸리지 않자, 잊고 있던 공포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어느새 다른 녀석들은 도망가고 없었고, K는 멀찍이서 질려 떨고 있었다. “잘 들어, 너는 이 자리에 없었어. 이쪽으로 걸어가. 넌 그냥 걷고 있었던 거야. 알겠니?” 나는 K의 등을 떠밀어 창고의 반대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걸어 간 반대 방향을 따라갔다. 다리가 풀려 걷기가 어려웠다.

 

 

#. 2

 

곧, 지나가던 소녀를 만났다. “, 저기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 것 같아. 누군가에게 알려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다리가 불편하구나.”

 

소녀는 그 쪽으로 다다다 뛰어가더니 널브러진 녀석을 먼발치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시 나를 앞질러 뛰어갔다. 소녀는 말 할 사람을 찾으러 두리번거렸지만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오래된 분교처럼 생긴 수용동으로 들어갔다. 그 복도를 뛰어가 직원인듯한 여자에게 사람이 죽어있다고 말 했다.

 

그 순간 아이의 엄마인 듯한 여인이 아이를 낚아챘다. 여인은 표독스러웠다. 그것은 곤궁한 삶에서 맨 손으로 활로를 헤집어가며 단련된 날카로움이었다. “너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아이는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손가락을 펴 나를 지목할 새도 없이 아이의 엄마는 화를 발칵 냈다. “이 미친년아, 니가 왜 그걸 말하고 다녀!”

 

그녀는 정확하게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내 입으로 말 할 수 없어 소녀를 이용했다. 그게 사실이다. 이제 마음이 급해졌다. 지목당하기 전에 이 복도를 빠져나가야 했다. 복도는 길었고, 소녀는 재빨랐다. 날 찾아 이쪽으로 곧장 달려온 소녀는 놀라운 탄력으로 뛰어올라 멱살을 그러잡고 빽 소리를 질렀다. “이 씹팔새끼가 나를 속여!” 악을 쓰는 소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소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완력이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작은 손아귀에서도, 허름한 수용동에서도, 알 수 없는 섬과 그 기묘한 세계에서도 나는 도망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새벽 다섯 시 십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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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악몽처럼 연결된
    from 공음미문 2016-10-31 08:22 
    이 혹독한 2월에 어찌 춥지 않았을까?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다. "얘야, 나 좀 볼래, 착하지. 아저씨가 눈이 안 좋단다. 지독한 근시라서 편지 넣는 구멍을 못 찾을 것 같구나. 저기 있는 우체통에 나 대신 편지 좀 넣어줄래." 쪼그리고 있던 아이가 나를 보더니 일어섰다. 투명하리만치 창백한, 버기 드물게 예쁜 작은 얼굴이었다. 아이는 편지를 받아 들고 긴 속눈썹을 꿈틀하더니 경이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체통으로 달
 
 
컨디션 2016-10-31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놀랍네요. 꿈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무리 선명한 악몽이어도, 꿈이라는 게, 다시 되짚듯이 머릿속으로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기록까지.. 그것도 너무나 풍부한 표현을 담아 물 흐르듯이 재생을!..

뷰리풀말미잘 2016-10-31 00:32   좋아요 2 | URL
모든 꿈은 꾸는 이유가 있죠. 저는 꿈을 무의식과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꿈이 보여준 것들을 적어놨다가(안 적으면 금방 휘발되거나 왜곡되어 버리거든요) 시간 날 때 되새겨보면서 생각하고, 해석하면서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가련할 때도 있고 기특할 때도 있고 하고 뭐, 그렇습니다. : )



AgalmA 2016-10-31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뷰티풀말미잘님~ 실례가 되지 않길 바라며^^; 이 글에 떠오르는 소설이 있어 먼댓글을 썼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6-10-31 10:17   좋아요 1 | URL
♥Agalma♥
 
2016.10.12. 의자 마련

#. 1

    

 

추사가 말년에 은거하며 글 쓰고 그림 그리던 곳이 과지초당이다. ‘과천 땅에 풀로 엮은 집이라는 뜻인데, 풀로 엮긴 뭘 풀로 엮어. 추사 패밀리가 한창 잘 나갈 때 지은 곳으로 정원에 연못이 딸린 럭셔리 별장이다. 그 양반은 영면할 장소로 여기를 택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고양이 빌딩'을 지어 책을 저장한다. 창문에 커다란 고양이 스티커가 붙어있다. 장서가 몇 만권이라던가. 여기서 다카시는 주옥같은 원고를 썼다. 그는 방광암이 재발해서 곧 죽을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그와 그의 서재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붉은 돼지님의 서재 이름은 '사의재'다. 다산이 유배생활 하던 주막에 그런 이름을 붙였던 걸로 기억한다. '네 가지를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역시 서재 이름라면 뭔가 의미심장해야 의미심장한 것 같다

 

    

 

돼지님 페이퍼에 따르면 장석주 시인은 집 한 채 규모의 서재, '수졸재'를 지었다는데 찾아보니, 쩔어! 근데 부부가 시 써서 이런 서재를 지을 수 있나. 얼마 전 친구에게 만나지 말아야 할 남자의 부류로는 흑인, 걸인, 시인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시인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 2

 

  

나도 작은 서재를 가지고 있다. ‘You’re yeah‘. ’유어예游於藝.

 

이 말을 논어 옹야편에서 발견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어도-도에 뜻을 두고(志於道), 거어덕-덕에 의거하고(據於德), 의어인-인에 의지하며(依於仁), 유어예-예에서 노닐어라(游於藝)."

 

여기 흔들의자에 앉아서 흔들흔들 하며 책을 읽는다. 사실은 바닥에 쭉 엎드려서 읽기도 하고, 누워서 읽기도 한다. 솔까말 앉아서 읽다가 엎드려서 읽다가 누워서 읽는 코스다. 추사도 그랬을 거다. 아무리 지체가 높은들 어찌 허리 꼿꼿이 펴고 몇 시간씩 책을 읽을 수 있겠나.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따사롭지 않아도 좋다. 그거슨 책과 미모에 모두 치명적이니까.

 

 

#. 3

 

서재는 아니고 책과 잡다한 것들이 같이 쌓여있는 방이 하나 더 있다. 이 반만 서재의 이름은 노동 2. 책은 곧, 노동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노동 2호는 장차 대도서관으로 육성할 생각이다. 하지만 이곳은 은밀한 곳으로,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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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10-2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을 동시에 자극하는 글이네요.

뷰리풀말미잘 2016-10-28 14:00   좋아요 0 | URL
그럼 인슐린은요? 안드로젠은요? 히히. 글고 어디 성장호르몬 팍팍 샘솟는 글 보셨으면 공유좀..

cyrus 2016-10-2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달부터 겨울로 들어서면, 전기장판에 배 깔고 책 읽는 시간이 많아져요. 이불 밖으로 나가기 귀찮아집니다. ^^

뷰리풀말미잘 2016-10-28 18:15   좋아요 0 | URL
전기장판, 귤, 책 삼신기만 갖추면 겨울 끄떡없죠. ㅎㅎ

붉은돼지 2016-10-2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멋! 왠 자주보던 돼지가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ㅎㅎㅎㅎㅎ
사진은 장석주 시인의 수졸재가 아니라 수졸재 옆에 한 채 더 지었다는 `호접몽` 같아요. 시인으로서는 드문 재력이라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저서가 60권이 넘는다고 하는군요...

소생이 예전에 알라딘 서재 처음 만들 때 마침 정약용 관련 책을 읽고 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서재이름을 `사의재`라고 지었는데 소생에게는 참으로 가당찮은 당호라서 바꾼다 바꾼다 하다가 그냥 지금까지 오게되었습니다..

말미잘님의 `유어예` 는 이름도 참 멋지고 또 깔끔하군요...어째 말미잘스러운 서재를 예상했었는데....ㅎㅎㅎㅎㅎㅎ `노동2호`가 대포동을 거쳐 대도서관으로 거듭 발전하길 앙망합니다.^^ 노동2호 시험발사라도 한번 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만........


뷰리풀말미잘 2016-10-29 00: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붉은돼지님. 그럼 사진은 다시 찾는대로 바꿀까 합니다. 장석주 시인은 정말 책을 많이 냈네요. 저 정도 일하면 시로도 먹고 살만 해야죠. 그게 맞는 거 같습니다.

사의재는 좋은 이름입니다. 그냥 불림으로 효용이 다 하는 이름보다는 자꾸 뭘 생각하게 하는 이름이 좋아요. 저는 사의재를 지지합니다.

유어예는 정말 멋진 이름이죠. 유어예의 藝는 육예를 말하는데, 각각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의미합니다. 서랍엔 악기도 몇개 들어 있고, 숫자에 관련된 책도 제법 있으니 예, 악, 서, 수의 모양 정도는 갖췄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활쏘기)와 어(말타기)는 文이 아니라 武라서, 그걸 도저히 책으로 충족할 방법을 모르겠더군요. 권투 글러브를 한짝 모셔놓은 이유입니다. 상징같은 거죠. 실제로 사용하는 너덜너덜한 장비들은 노동 2호에..

어느날 대도서관이 완성되면, 저는 그 내부를 끊임없이 유랑하다 슬그머니 잊혀지고 싶습니다.
 

 

옛 말에 친아비 장작 패는 데는 안 가도 이붓아비 떡 치는 데는 간다고 했습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콜라죠. 하물며 책이라야!

 

현실문화에서 리뷰 써 주면 책 준대요. 한 달에 두 권이나.

 

님들, 리뷰 껌이잖아요.

 

http://blog.naver.com/hyunsilbook/220843998600

 

 

 

덧: 현실문화랑 저는 1도 관계가 음슴. (여기 책은 좋아함)

덧2: 이벤트 2틀 째인데 지원자 빵명인듯. (그럴 줄 알았음)

덧3: 전 글 쓰는거 시러해서 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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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6-10-2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네 개만 더 눌러주세요. 많이 보게. 저도 눌러봤는데 자기 글에 좋아요 누를 수 없다네요.. ㅠ_ㅠ

cyrus 2016-10-26 16:29   좋아요 0 | URL
꼼수지만, 비로그인 계정으로 본인 글 `좋아요` 누를 수 있어요.

`오프라인 활동` 조건 보고 포기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지방이거든요. ㅠㅠ

뷰리풀말미잘 2016-10-26 16:54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사이러스님.

제가 올린 페이퍼에 책임을 지기 위하야 방금 현실문화랑 통화를 해 보았습니다. 아래 녹취록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뷰말: 나는 알라디너 사이러스님의 대변인이다. 누구신지 아는가.

현실문화: 대인의 우레와 같은 명성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이리 대변인님을 뵙자오니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뷰말: 님께서 이벤트에 참여코저 하시나 거처하시는 곳이 멀어 잡다한 오프모임까지 나가실 수 없다고 하셨다. 아니 괘씸한 일인가!

현실문화: 헉, 번잡한 이벤트로 대인의 마음을 어지럽혀 드렸으니 혼백이 달아나는 듯 망연할 따름이옵니다. 허나 오프라인 모임은 책에 대한 반응을 들어보고자 하는 취지이므로 참가하시는 분의 사정을 고려하여 간단한 피드백 정도를 주시는 걸로 대체 할 수도 있사오니 이점 참작하여 주시옵소서.

뷰말: 알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대인께 말씀 올리도록 하겠다.

cyrus 2016-10-26 16:54   좋아요 0 | URL
제가 거물 소리 들을 놈은 아닙니다... ㅎㅎㅎ

SNS 홍보도 해야 하는데, 페북을 안 해요. 그래도 한 번 지원해보죠. 이벤트에 떨어져도 아쉬운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절 팍팍 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뷰리풀말미잘 2016-10-26 16:55   좋아요 2 | URL
겸손하신 줄 알고 방금 거물은 뺐는데. 댓글을 딱 달아주셨네요. ㅎㅎ 페북 없어도 서재만 보고서도 모셔갈 듯 합니다.

오거서 2016-10-26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원 조건에 현실문화 도서에 대한 리뷰를 제출하라고 하는군요. 지원자 빵명인 이유를 알 듯. ^^

뷰리풀말미잘 2016-10-26 18:02   좋아요 0 | URL
헐 그러게요. 현실문화 책 리뷰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AgalmA 2017-06-2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덕분은 아닌 거 같지만cyrus님과 AgalmA는 뒷날 2017년 잉문예술덕후 리뷰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ㅎ 한달에 두 권인데 리뷰 기한 압박이란 게 있어서 은근 스트레스가 쌓여요ㅎ;
저 은근 현실문화 책 읽었고 관심도 있었더라고요~

뷰리풀말미잘 2017-07-03 08:59   좋아요 0 | URL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겠어요. ㅎㅎ

갈마님, 굿모닝! 도대체 현실문화 책 누가 사 읽나 했는데 역시 갈마님이셨군요. 형극의 자갈밭을 걷는 출판사와 한 겨울 인동초와도 같은 독자입니다. 저같은 무지렁이가 보기엔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 역시 지성은 글렀고 미모나 가꿔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여.
 
포의 영시 번역 비교

 

 

 

 

 

 

 

 

 

 

 

 

 

 

 

 

#. 0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see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nd my bride,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ide of the sea.

 

-'애너벨 리' 중에서-

 

 

#.1

 

사이러스님이 에드거 앨런 포의 영시번역을 비교하는 포스팅을 쪘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모든 번역은 어차피 틀렸다. 원전과 1:1로 대응할 수 있는 역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고전 번역은 늘 새로워야 한다. 그 시대의 지성과 감성으로 원전을 해석하여 감수성을 새로 드러내고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서만 진리는 이따금 반짝거린다. 그것은 역자들에게 시지포스의 형벌과 같은 숙명이다.

 

내가 보기엔 네 수의 시 모두 각각의 문제가 있다. 특히 마지막 김정환 시인의 번역은 엉망진창이다. 생각은 갸륵하나, 그럴 거면 굳이 번역은 왜 하나? 옆에 네이버 사전 링크나 해 두지.

 

보기에 껄끄럽다면 그 때가 새 번역을 해야 될 때다. 영어전문가 김늘보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포스팅을 읽고 내게 뜬금없이 세 편의 시와 링크를 보냈다. (그는 요즘 들어 서재를 눈팅하는 듯하다. 나는 과문하여 사이러스님의 위명을 미처 알지 못했다.)

 

 

#. 2

 

다음의 세 편은 늘보의 번역이다. 

 

1.

 

내가 꾸지 않으면 달은 결코 빛을 내지 않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내가 보지 않으면 별도 결코 떠오르지 않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을.
그리하여, 모든 밤의 조류에 실려, 나는 그 곁에 눕네,
나의 그대, 그대, 삶, 신부의 곁을,
저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에서--
바다 옆 그녀의 묘지 속에서.

 

2.

 

달이 빛나는 것이란 내가 꿈을 꾸는 것이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별이 뜨는 것이란 내가 빛나는 눈을 보는 것이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을.
그리고 그리하여, 온 밤의 조류에 실려, 나는 그 곁에 눕네
나의 그대, 그대, 삶. 내 신부의 곁을.
저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에서--
바다 옆 그녀의 묘지 속에서.

 

3.

 

달이 빛난다는 것은 꾸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별이 뜬다는 것은 보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을.
그리하여, 온 밤의 조류에 실려, 나는 그 곁에 눕네
나의 그대, 그대, 삶, 신부의 곁을,
저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에서--
바다 옆 그녀의 묘지 속에서.

 


늘보에 따르면 1의 번역은 의역이다. 그러나 1, 2, 3모두 네 사람이 번역한 것보다 직역에 가깝다. 또 포가 의도한 운율을 다 맞췄다고 한다. 그것이 본늘 번역의 장점이란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영어와 모국어를 깊이 이해하고, 절제된 언어로 시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질 수 없지. 나도 한 수 거들었다.

 

 

내가 꿈꾸지 않으면, 달은 빛을 내지 않기에,
아름다운 에너벨 리의 꿈을;
내가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별은 결코 떠오르지 않으니,
아름다운 에너벨 리의 눈을;
그리고, 모든 밤의 밀물, 내가 곁에 누울 때
나의 달링, 나의 달링, 나의 삶 나의 신부
바다 곁 그녀의 무덤가에서--
바다 곁 그녀의 묘지에서

 

 

내 번역의 단점은 1, 2행의 쉼표를 영어식의 도치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데 있다. 한국어에서는 도치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하다. ‘달링’은 ‘그대’로 굳이 번역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놔뒀다. 달링은 달링이니까. 그 달착지근한 뉘앙스를 가진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지 않은가.

 

나의 발번역을 본 늘보는 쿠사리를 놨다. 특히, "never ~ but(without)의 의미는 그 자체로 시적이기에 잘 생각하고 번역해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It never rains, but it pours’라는 속담은 대개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로 의역된다. 그런데 그것의 실제적 의미는 ‘비는 절대 살살 오지 않는다. 쏟아진다.’다. 뉘앙스를 살려 해석하면 ‘세상의 비란 비는 죄다 쏟아지는 것뿐이다.’ 늘보는 이 속담이야말로 세상에 rain을 동사로 쓰는 경우는 없다는 선언과 같다고 했다. 이 문장에서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단어는 pour(쏟아붓다)다.

 

같은 맥락에서 ‘They never meet, but they quarrel.’이라는 문장을 네이버는 ‘그들을 만나면 꼭 다툰다’로 해석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그들에게 meet이란 행위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마주하는 일반적인 meet의 상황이란 오로지 quarrel밖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3행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나의 별은 그녀의 눈 뿐.”

 

모든 해석은 이 뉘앙스 위에서 노닐어야 한다는 것이다.

 

 

#. 3

 

 

 

 

 

 

 

 

 

 

 

 

 

 

 

그레이트 개츠비를 원서로 읽고 있다. 전에 읽었을 땐 큰 감흥이 없었는데, 최근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김영하의 번역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옮긴이에 말에 기존 번역들을 디스했다. 개츠비를 원서로 읽으면 생동감이 넘치는데, 한국어 판본을 보면 빡빡하게 느껴지며, 이것은 모두 번역이 거지같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부분을 위해 번역을 하게 됐다는 것. 한 번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거다. 정말 그런가?

 

막상 원서를 읽어보니, 이건 뭐 다른 책이다. 장중해야 할 소설의 뉘앙스가 가벼운 어휘로 부서져있다. 피트제럴드가 성 베드로 성당을 그려놨다면, 김영하는 그걸 보고 여의도순복음교회처럼 옮겨놓은 격. 한마디로 김영하의 개츠비는 기품이 없다.

 

나는 그래서 의심하게 됐다.

 

원서를 읽지 않고 개츠비를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특히 개츠비처럼 감정선이 섬세하고 복잡한 소설들, 예컨대 하루키라던가. 다니엘 글라타우어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나는 정말 읽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 소설들을 읽은 감동의 정체는 작가들의 의도와 사맞디 아니하는, 다만 기표의 영감을 받아 내 마음 속에 마구 지어낸, 뜨거운 의미의 덩어리들인지도 모르겠다.

 


#. 4

 

어차피 틀렸다.

 

영어전문가인 김늘보도 30분 만에 자신의 번역을 후회했다. But의 용법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시든 번역이든,

 

틀려도, 끝내 고쳐 쓰는 것이 문장이 아닌가. 어쩌면,
 
그게 아름다워서 문장은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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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0-05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궁금했던 점이 시원하게 풀렸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경주 시인의 번역이 읽기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번역이 시원찮다는 평을 보고 의아했습니다. 포의 시뿐만 소설도 번역하기 까다롭다고 합니다. 새로 나온 포 소설 전집에도 오역 몇 군데 보였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6-10-06 11:27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cyrus님. 김경주 시인의 번역은 문학적으로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달빛`이 마치 살아있는 듯 옮긴 부분이 좋습니다. `달빛은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면 따라오고` 이 부분이요. 하지만 의역이 많고 포가 의도한 의미와 운율의 맛을 전달하는데는 실패한 듯 합니다.

이백의 월하독작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혹시 번역의 모티프를 그렇게 얻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我歌月排徊 (아가월배회) 내 노래 소리에 달이 춤추고,
我舞影凌亂 (아무영능란) 나, 춤추니 그림자는 더욱 신나 흔드네.

사이러스님 덕분에 좋은 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전 사실 오역이든 뭐든 잘 눈치도 못 채는 편인데 이렇게 한번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것도 좋구요.

 

 

 

 

 

 

 

 

 

 

 

 

 

한수철님, 프로필 사진의 주인공은 왕좌의 게임에 '가시여왕', 올레나 티렐역으로 열연하고 있는 다이애나 리그입니다. 전에 쓰던 프로필 사진도 동일인물이고요. 1938년 무인년(이렇게 얘기해야 될 것 같은 역사적 연도로군요)생이신데. 젊어도 예쁘고, 나이 들어도 예쁘고.

 

예전에' 007여왕폐하 대작전'에 본드걸로 나왔어요.

 

 

 

 

 

 

 

 

 

 

 

 

 

 

 

 

 

 

 

 

 

 

 

 

 

 

 

 

 

 

 

 

 

 

 

 

 

 

 

 

 

 

 

 

 

 

 

 

 

 

 

 

 

 

 

 

 

 

 

 

 

 

 

 

 

 

 

 

 

 

 

 

 

 

 

 

 

언니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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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6-08-1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아름다운 그라데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