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그들이 김선일을 참수했을때, 그날 아침 나는 여섯 번 손을 씻었다. 일어나서, 밥 먹고, 볼일 보고, 더 이상 아무런 구실이 없을 때 까지 손을 씻고 그제야 내가 비정상적으로 손을 씻어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빌라도가 죄 없음을 스스로 표현했던 행위도 손 씻기. 그건 너무도 치졸하고 조악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일 따름이었다. 

울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를 추도하는 의미었을까. 어쩌면 그 끔찍한 폭력의 사태로부터 내 감수성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에 대한 분노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 이후 '국가에 의한', 또는 '국가를 대하는' 내 휴머니티의 기준은 꽤 달라졌다. 김선일이 죽은 날은 2004년 6월, 공교롭게도 노무현의 재임기간(2003.02~2008.02)과 겹친다.   

#. 2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을 목도하며 노무현이 말 했던 개혁과 진보가 내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에 분노했고 또,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말한 그 개혁과 진보마저도 무참하게 현실에서 사그라지는 형편이 슬펐다. ‘이매진’을 BGM으로 깔아놓고 눈물 흘리던 그 이미지가 진정 ‘노무현’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실의 그는 공무원 임면권 정도를 행사하고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하나의 국가기관에 불과했다. 국가기관, 그것은 '이해'하고 '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외부의 조건에 의해 '작동'하고 '동작'하는 개체였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정치 시스템은 의원 내각제와 대통령제가 적당히 짬뽕된 형태로 여느 대통령제에 비해서 대통령의 파워가 강한 편이 아니다. 더구나 열린우리당은 노무현에게 충분한 지원사격을 해 줄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던 적이 없었다. 굳이 그 총체적 크기의 파워를 말하자면 언제나 내가 지지하는 쪽 보다는 노무현이 강했고, 노무현 보다는 한나라당이 강했다. 노무현의 기반은 늘 외로워서 그는 물길을 거슬러 가기 보다는 버티고 있기에 급급했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지금의 ‘한나라당’이 대표하는 그것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거시적 상관 관계를 간과한 노무현과 노무현을 둘러싼 모든 현상이 '인간 노무현'에 대한 애도와, 대 이명박이라는 키워드로 단순하게 도식되고 있다. 낭만적이고, 순진하다. 문제는 그런 집단적인 낭만과 순진함 배면에는 반드시 파시즘의 지류가 흐른다는 것이다. 김동길을 비롯한 여러 삐딱이들에게 여론의 십자포화가 터진다. 조금 달랐을 뿐 김동길과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 이웃 서재의 마태우스님 같은 경우도 정신없이 물어뜯기고 있는 모양이다. 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대한 대중들의 무차별적 폭력은 마치 디워 사태를 연상시킨다.

지금 우리의 이성은 물찬 비커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각양의 감정들로 번져나가는 슬픔을 단속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고무줄처럼 돌아왔다. 이제 알아야 한다. 그런 감정들은 단지 소모될 뿐이라는 것을. 

#. 3

노무현에게 자살은 어떤 의미었을까. 그는 단순히 자신의 정신적 사고와 육체적 감각이 이 세계를 벗어나기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살이 생산하고 연쇄하고 의미하는 정치적인 사태를 고려한 것일까. 아마 그는 단순히 이 세계를 벗어나기 원했겠지만 그 죽음이 몰고 올 정치적 후폭풍을 모르지 않았을 거다.

약자들에게 의미 없는 자살은 없다. 모든 약자들의 자살은 사회적 함수관계에 의한 자살이다. 그 어두운 함수관계를 이끌어 내는 기제를 편의상 ‘시스템’이라고 하자. 시스템에 의해 자살 당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두산 중공업 노조원 배달호의 분신, 어느 KT 노조원의 투신, 스스로 목을 맨 화물연대 노조원 박종태. 그리고 노무현. 이러한 흐름에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노무현 죽음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노무현의 자살은 ‘시스템’에 좌절한 사회적 약자의 죽음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 맥락에서 ‘정치 보복’이라는 말이 은닉하는 바를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노무현이 정치적 숙적에 의해 숙청된 느낌을 갖게 만든다. 노무현이 독재자였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무현이 한나라당이었다면 역시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좌절하는 사회적 약자였기에 자살했다.  

누가 그를 약자로 만들었는가. 이 지점에서 접근하자. 이 빌어먹을 시스템은 왜, 이토록, 자주, 약자들의 자살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수 많은 자살에 흔들리지 않고 그 뻔뻔한 권력의 옹벽을 사수하는지. 

이제 당신이 해야 할 바를 묻는다. 좌절에 이성을 맡길 것인가, 현상의 단편에 쉽게 분노하고 쉽게 사그라들 것인가. 생각해보자, 노무현이 우리에게 준 유산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몽둥이질 하고(改=己+攵), 살 가죽을 벗기는(革) 개혁의 정신이 아니던가.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참여’하는 것.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내 몬 시스템에 대한 유일한 저항의 방법이며 “우리 아이들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꼭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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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6-05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번쩍, 하는 느낌이에요.^^
요즘 과잉의 산물을 보면서 내가 가졌던 조그만 애정조차도 버리고 싶어지던 찰나였는데...

뷰리풀말미잘 2009-06-05 11:3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버릴거면 저 주세요! ^^
 

이빨이 몽창 빠지는 꿈을 꿨습니다.  

입 속에서 으깨진 이빨을 손바닥에 뱉어보니 한 움큼이 되더군요.  

노무현이 죽었습니다. 물론, 자살이겠죠.   

TV, 신문 안 보고 산지 벌써 수년, 정치 불감증인 저도 아침밥이 얹히는데  

오늘 약국에 소화제 품귀현상 일어나겠네요.    

오랫만에 TV켜고 신문 정치섹션 펼쳐보게 될 것 같습니다.

정부는 민심을 수습하려 동분서주 할 테고, 성난 민심은 좌충우돌 할 겁니다.  

사람들은 산 이명박과 죽은 노무현을 등위선상에 놓고 충돌시키겠죠. 

아마 정부 하는 짓을 보건데 민심 수습에 그리 세련된 모습을 보이지 못할 겁니다.  

조금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의 주식시장에도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죽은 노무현은 산 이명박의 정치 인생에 커다란 분기점을 만들겠군요. 

동시에 대한민국에는 넘어야 할 언덕 하나를 만들어 주고 갔습니다.   

그를 한번도 지지해 본 적 없는 제 마음속에도 일정 부분 부채를 남겼구요.   

그가 남긴 유산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제 산 사람들의 몫이 된 것이겠죠.  

노무현, 그 곳에서나마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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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5-2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보도통제 나오는 듯 합니다.
자살이라는 단어대신 실족으로 모든걸 퉁처리하고 있더군요..허허

뷰리풀말미잘 2009-05-23 12:11   좋아요 0 | URL
유서 나왔다니까 실족 얘기는 들어가겠지요.

Forgettable. 2009-05-23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잘님 글이 참 제 마음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09-05-23 12:12   좋아요 0 | URL
네.. 착찹하지요..
 


대략 6일 전 쯤, 그러니까 4월 11일 경에 알라딘에서 뭘 하나 주문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안 오길래 주문조회를 해 보니까 세상에, 4월 24일에나 받을 수 있단다. 상품은 '일시품절'. 주문 했을때만해도 품절 아니었는데.. 혹시 잘 엉기면 천원쿠폰 한장 쯤 던져줄까 싶어서 칭얼거려봤다.
 
----------------------------------------------------------------------------
제목: 도대체 언제오나요.. 

내용: 주문한지가 며칠짼데.., ㅠ_ㅠ 주문할때는 일시품절도 아니었는데...
    
----------------------------------------------------------------------------

놀랍게도 딱 3분만에 도착한 핸드폰 메시지.  

[알라딘] 1:1 문의 답변이 완료되었습니다. 

답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안녕하세요?
알라딘 고객팀 구지현입니다.
문의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문하신
많이 기다리고 계신데 예정보다 상당히 지연되고 있는 점 사과드립니다.
해외 거래처 발주시 실보유재고가 확인되었으나, 실시간으로 재고변동이 발생하다 보니, 발주 후 저희 쪽에 출고 가능 재고량이 이미 소진되었음이 뒤늦게 통지되었습니다.
부득이 현지에서 입수 가능성 있는 새로운 유통망을 이용해 상품확보를 의뢰하게 되면서 수령예상일이 예정보다 상당기간 지연됨이 불가피해져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현지 공급처에서 최대한 서둘러 확보를 마친 후 출고해드릴 예정이오나, 혹시라도 상품 입수가 여의치 못할 변수가 발생할 경우 추가 안내드리겠습니다.

해당상품은 4월 20일정도 입수 될 예정으로 1~2일 정도면 고객님께 배송될 예정입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뒷목이 뻐근하도록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변을 읽어내려가다가 문득 의문에 휩쌓였다. 근데 내가 주문한게 뭐였더라?  부득이 '현지에서입수가능성있는새로운유통망을이용해상품확보를의뢰'해야만 하는, '여의치 못한 변수'가 생길 수도 있는, 그래서 배송예정일이 2주를 오바하게 되는.

최근에 인터넷 쇼핑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베레타 M92F 권총과 소음기 셋트, 헤로인 500g, 재처리된 농축 우라늄, 메피스토님의 네번째 손가락, 소설 책 한권. 요 다섯 개 중에 하나였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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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4-1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뷰리풀말미잘님.
그동안 그냥 읽어보기만 하고 조용히 사라지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이 페이퍼 재미있어요(추천할정도로!!). 하하하하.

그리고 제 생각에 뷰리풀말미잘님은 '재처리된 농축 우라늄'을 주문하신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뷰리풀말미잘 2009-04-16 23:05   좋아요 0 | URL
히히.. 다락방님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제 생각에도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조선인 2009-04-1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알라딘 고객팀 김구라입니다. 문의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이 주문하신 상품은 뉴질랜드 초원에서만 자생하는 큐티말미잘로, 이를 입수하기 위해서는 알라딘사막의 메피스토칠봉낙타를 이용해야만 근접 가능합니다. 문제는 메피스토칠봉낙타가 너무나 깊이 하이드하고 있어 돌아오는 월화수목금금금요일에 마님이 출동하여야만 생포가 가능하다는것입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뷰리풀말미잘 2009-04-16 23:09   좋아요 0 | URL
흥. 그래봤자 하이드님이 가만두지 않으실겁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4-1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원츄~

Arch 2009-04-16 18:12   좋아요 0 | URL
찌찌뽕

뷰리풀말미잘 2009-04-16 23:11   좋아요 0 | URL
아치님, 찌찌뽕은 이럴때 쓰는 말이 아니잖아요. 모든 어휘의 어원과 용례를 섭렵하고 계신 멜기님이 가만두지 않으실겁니다!

Arch 2009-04-17 00:07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과 나는 같은 시간에 '무려 조선인'님의 댓글에 공감을 표했다구요. 멜기님은 제 성격의 모지란 부분을 아시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그냥 가만히 두실 것 같은데요^^

뷰리풀말미잘 2009-04-17 22:44   좋아요 0 | URL
아치/ 으음..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군요. 미처 알아채지 못했네요.. ;;

Arch 2009-04-1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은 너무 다재다능하세요. 페이퍼보다 더 웃기잖아요. (미잘 삐지기 없기!)
다시 의뢰를 받은겁니까?
경기도 어려운데 다행이네요.(응?)

뷰리풀말미잘 2009-04-16 23:12   좋아요 0 | URL
인정하면지는거야인정하면지는거야인정하면지는거야

마노아 2009-04-17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태그가 압권이군요!

뷰리풀말미잘 2009-04-17 17:02   좋아요 0 | URL
히히. 책 한권 낼까요? 태그사용 일주일이면 말미잘만큼 한다.
 

 

 

 

 

 

 

 

 #. 1 로쟈님의 댓글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http://blog.aladin.co.kr/mramor/2778876)이라는 로쟈님의 글이 포스팅 되자 노이에자이트님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에밀 뒤르카임은 사회주의자와 사귀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해 거리를 두었는데 그 제자인 마르셀 모스도 그랬군요.두 사람의 사회주의관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겠네요. 그레이버 책은 모스 연구서로 읽으면 좋겠군요.  

놀라운 노이에자이트님, 그의 내공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근현대사와 원숭이학을 아우르며 심오한 내공의 깊이를 보여준 그의 박학은 이제 사회학사까지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평소 노이에자이트님을 흠모했던지라 댓글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 달린 로쟈님의 댓글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뒤르켐'이라고 보통 읽지요(전공자인 김종엽 교수를 따라서). '뒤르카임'은 영미식이고, 보통 '뒤르껭'이라고 많이 읽었었지요.

나는 쿵 하고 떨어지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공포와 전율. 아아, 다시 강호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인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지난 40여년 한국 사회과학계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 부침의 세월들.. 그리고 그 역사와 함께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는 오랜 숙제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뒤르켐과 뒤르껭의 문제. 로쟈님은 오늘 역사의 컴컴한 우물 속에서 다시 그 문제를 길어올린 것이다. 


#. 2 한국 사회과학의 역사

조금 과장하면 한국 사회과학의 역사는 'Emile Durkheim'(정확하게는 그 이름에 대한 정확한 음역)에 대한 해석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문제를 놓고 전국의 120만 사회과학도는 사분오열했다. 곳곳에서 과열된 토론이 벌어졌고 토론의 끝엔 버릇처럼 주먹다짐이 오고갔다. 언젠가부터 사회과학도들은 사회과학을 연마하기보다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다루는 법을 연마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은 크고 작은 규모의 학생운동에서 약간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으나, 결국 한국의 사회과학계 전체의 관점에서는 어둠의 시기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시절 사회과학계의 분파는 크게 '뒤르켐' 파와 '뒤르껭'파, 그리고 뒤르켐파에서 갈라져 나온 '뒤르케임'파, 비교적 소수파였던 '뒤르카임'파와 뒤르카임파에서 갈라져 나온 '뒤르크하임'파로 나뉘었다. 이들은 무섭게 대립했고, 그 결과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절 칼침이 무서워서 뱃속에 자본론 하나쯤 안 쑤셔넣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시절을 한탄하며 자살론을 발 받침삼아 목 매다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이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녀석들은 죄다 군주론 같은걸 냄비받침 삼아 라면이나 열심히 끓여먹던 자들뿐이다.

어쨌거나 Durkheim문제는 점점 깊어져 학회는 열리기만 하면 이 문제로 격론을 벌이다 와해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사상자 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80년대 NL(National Liberation)과 PD(People Democracy)가 분열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재벌-국가 연합을 극복하기 위해 태동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National liberation-people democracy Revolution :NLPDR)의 노선투쟁이었지만 사실은 곪고 곪은 Durkheim의 문제에 다름아니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가는 이 논쟁의 끝물에 등장한 청년고수 이진경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사사방(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 이 모든 사태의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기록하지만, 실상 사사방이 나올 즈음해서는 양 측은 모두 더 싸울 기력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사사방은 그냥 시대를 잘 타고난 책이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 사회과학도의 해외유학이 빈번해 진 이유도 Durkheim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세외무림에서 찾아오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사사방 이후 Durkheim문제를 둘러싼 사회과학계의 대립양상은 점차 소강상태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 전쟁의 양대 축이었던 뒤르켐파와 뒤르껭파가 암묵적인 합의를 맺으면서 오늘날의 침묵의 시대로 접어 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로쟈님의 한 마디.

'뒤르켐'이라고 보통 읽지요(전공자인 김종엽 교수를 따라서). '뒤르카임'은 영미식이고, 보통 '뒤르껭'이라고 많이 읽었었지요...” 는 케케묵은, 그러나 충격적인 회고인 것이다.

도대체 로쟈님의 정체는 뭘까? 아마도 격동의 80년대, 로쟈님은 김종엽 교수(‘고수’를 잘못 표기한 것 같다)와 함께했던 뒤르켐파의 일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왜, 이 어수선한 시기에 다시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일까? 나는 그의 의중을 알 길이 없어 아연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달린 노이에자이트님의 댓글

알사스 로렌 출신이라서 독일발음처럼 읽는다고 해서 뒤르카임이 아닌가 하고 적었어요. 거기가 수천년 독일문화권이라서... 물론 프랑스 사람으로 통합니다만. 그런데 영어발음은 뒤르켐이 아닌가요? 전에 이 문제로 참고한 책이 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 저는 그동안 뒤르켕으로 표기했어요.
   
아아, 나는 그의 댓글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바라보았다. 노이에자이트님은 80년대 일당백으로 사회과학강호를 휘젓던 뒤르켕파의 초절정은둔고수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는 지난 20 여년간 은둔하며 독문무공을 갈고닦아 알라딘에 출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언급한 '전에 이 문제로 참고한 책'이라면 전설의 고수 독고구패가 남겼다는 비전서 '규화Durkheim음역의진실보전' 일 터.. 아, 그는 이미 화경의 경지에 접어들었구나. 이제 강호는 뒤르카임의 이름 아래 통일되는 것이구나..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크로를 내렸다. 

앗, 그런데 이게 왠 걸. '제레카폴'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또 하나의 고수가 등장했으니, 그는 절륜한 상승무공(常勝武功)을 펼쳐가며 로쟈님을 압박하기 시작 한 것이다.  

노자(역주*노이에자이트)님 말씀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불어식으로 뒤르껭이 아니라 절충적인 뒤르케임 혹은 뒤르켐(상식 수준에서 볼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불어는 이어진 두 모음을 하나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욱이 불어에서 h는 거의 음가가 없으므로 자음 kh도 k로 수렴되기 십상이겠죠)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압니다. 독어나 영어 사용자의 발음은 직접 들어보지 못했구요.
 
두둥.. 그 옛날 세외무림으로 Durkheim문제를 해결하러 떠났던 고수들, 아아.. 그들마저 돌아온 것인가. 
 

#. 3 그리고..

노이에자이트님은 키보드를 치켜 올리며 짧게 화답했다. 

그렇군요.  

강호에는 다시 피바람이 불겠구나.. 
 

#. 5 사족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 4 젠장

내가 원래 남기려던 댓글은 이런거였다.

우연찮게 지금 컴터 앞에서 읽고 있는 잡문서가 2008년에 나온 한국사회학 42집 5호인데 '근대사회이론에서 공동체 의미에 대한 비판적 연구'라는 논문에는 '뒤르케임'으로 나오는군요. ㅎㅎ 이것 말고도 좀 비주류이긴 하지만 '뒤르크 하임'이라는 학설도 있는데요 학문사에서 나온 21세기의 직업윤리라는 책에는 그렇게 표기되더군요. 뒤르켐, 뒤르껭, 뒤르카임, 뒤르케임, 뒤르크하임. 도대체 이 기표들의 본질은 뭘까요? ㅋㅋㅋ

썅! 재미도 없었는데 그냥 저걸로 할 걸. 
 

 

#. 6 그냥 지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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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04-13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뒤르켐(?)은 모르지만, durkheim 이라는 이름은 독일이름 같네요. 왠지 앞에 움라우트도 붙어있을것만 같다는; 독일발음으로 읽으면 두르크하임 정도일래나요? ㅎㅎ 앞에 움라우트가 있다면 뒤르크하임..

그러나 찾아보니, 움라우트가 아니라 에밀에 악상때귀가 붙어 있는 불어 이름;;이군요. 에밀 뒤르껭 http://forvo.com/word/%C3%A9mile_durkheim/
에밀 뒤르껭도 아니고;; 에밀 뒤르켐에 가깝네요.

아, 자전거 고치러 가야지

뷰리풀말미잘 2009-04-13 23:29   좋아요 0 | URL
프랑스 발음으로는 처음 들어봤습니다. 정말 '뒤르껭'이라기엔 문제가 있네요. 하지만 뒤르케임이라고 당장 결론을 내리기에 이 문제는 너무나도 심오한 것이에요. ㅎㅎ

Arch 2009-04-13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미잘!

뷰리풀말미잘 2009-04-13 23:30   좋아요 0 | URL
제가 좀 귀엽죠. ㅎㅎㅎ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4-1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나 글도 맛깔나게 쓰시는지.

뷰리풀말미잘 2009-04-16 16:45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Forgettable. 2009-11-19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낯익은 사족이 이곳에-

뷰리풀말미잘 2009-11-19 12:44   좋아요 0 | URL
ㅋㅋㅋ 뽀님 점심시간이신듯?

종이달 2021-10-1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 1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올해 11회째를 맞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여성영화제다. 출품작들의 평균적인 퀄리티는 말 할 것도 없이 훌륭하고 세계 각국에서 날라온 게스트들도 모두 저명한 인간들 뿐이다. 어찌나 저명한 사람들이 들끓는지 임권택을 구경하러 가는 길에 안성기 발에 걸려서 비틀거리다 공효진이랑 어깨를 부딪힐 지경이다. 심지어 토쿄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오타케 요코와 한국의 월드스타 강수진은 우글거리는 유명 인사들 무리에 섞여 부초처럼 떠밀려 다니고 있었다.   

이 발광어류들 사이에 끼어 있자니 존재론적 회의가 파도처럼 밀려든다. 

나도 나름 훌륭한 사람인데..    

#. 2

개막작은 제니퍼 팽(Jennifer Phang)의 하프라이프(Half-life). 사회를 본 배유정씨 표현대로 퐌타스틱한 영화였다. 기교와 편집이 능란하고 스토리가 탄탄했다. 선댄스 영화제 Best Feature가 무색하지 않게 불안한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심리를 깊이 있게 표현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 영화가 일반화 하고 있는 남성들의 꼬라지엔 동의하기 어렵다. 영화에 나온 모든 남자들은 심각한 결함이 있는 자들 뿐이니까. 가족을 팽개친 후 비행기를 몰고 세상 저편으로 날라가버린 남편, 세례연습이 취미인 꼴보수 목사, 그의 아들 동양인 게이, 그 남자친구 초등학교 선생님, 그나마 제대로 된 건 아직 남성성을 획득하지 못한 주인공 꼬맹이.  

내가 리셉션에서 "이건 구시대적이고 멍청한 페미니즘 영화잖아!" 라고 주장할 수 없었던 건 그 영화를 만든 제니퍼 '거세시술자' 팽이 내 옆에서 날카로운 이빨로 소시지를 씹어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3 

진보누리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진중권이 활동했고 청년 논객으로 유명한 한윤형이나 노정태도 거기에서 잔뼈가 굵었다. 한 때는 한국어로 운영되는 정치토론 사이트 중에서 최고의 퀄리티를 가진 사이트였다고 생각한다. 

이 사이트의 우 상단에는 밀집모자를 쓴 농부아저씨, 헬멧을 쓴 노동자 아저씨, 안경 쓴 전문직 아저씨가 가슴크고 머리가 긴 여자랑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서 있는 조그만 그림이 있었는데 사이트가 생긴 이래 그 그림에 주목했던 사람은 어느 이름없는 과객 하나 뿐이었다. 그는 뜬금없이 물었다. '도대체 저 그림에서 여성은 뭐냐'. 몇 안 되는 조회수를 자랑했던 과객의 글은 의미없는 댓글 몇개와 함께 영원히 '묻혔'고 그 작고 이상한 그림은 진보누리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했다.   

여자는 농부도, 노동자도, 전문직도 아니었다. 그냥 '여자'였다.  

사람을 대표하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여성'이라는 것은 과연 유효한 것일까?   

#. 4 

그날 영화제의 성 비는 흐뭇할 정도로 여성이 많았다. 그녀들은 제니퍼 팽의 영화를 보며 소외당하는 여성들에 대해 분노했(겠)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들의 명품 백과 반짝거리는 악세사리가 난무하는 현장에는 소외받는 여성은 없었다. 물론 소외당하는 여성만 여성인 건 아니지만 수 많은 페미니즘 영화가 우려먹는 여성들의 면면이 워낙에 소외에 가까운 것이라 그런지 그날 영화제는 뭔가 중요한 것 하나가 쑥 빠진 기분이었다. 맹물에 국수 말아먹는 심심함이랄까.

늘 궁금한 것이지만 이 사회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상류 계층이나,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하층 계급 노동자가 우글거리는 이유가 뭘까?  이상한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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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1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녀왔습니다. 물과비누와 반쪽의삶을 봤답니다. 둘다 참 좋았어요..
제가 새내기때 첫회였거든요. 그때부터 참가해와서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렇게 영화제가 성장해 왔다는게 참 신기했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09-04-12 14:40   좋아요 0 | URL
헉.. 세상 정말 좁군요. 그럼 리셉션할때도 계셨어요? ^^; 저도 3회째 출석중인데 한번 쯤은 옆자리에 앉았을수도 있었겠네요.

하이드 2009-04-12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회때부터 기회될때마다 갔는데, 제가 본 유명인은 변영주 감독 ,,, 정도;

뷰리풀말미잘 2009-04-13 00:02   좋아요 0 | URL
약간의 팁을 드리자면 유명인들은 개막식과 폐막식에 몰려온답니다. ^^ 참 놀라운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다 유명인이라 그런지 대체로 유명인에 초연하더군요. 저도 초연하려고 애는 썼는데 김혜나씨 지나갈 때 눈 돌아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너무 예쁘잖아요!

마법천자문 2009-04-1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상류계층이 '우글거린다'고 할 정도로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뷰리풀말미잘 2009-04-13 00:0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건 좀 오바였죠. 그런데 제 주변에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쉬운 게 없는 사람들이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알라딘에서도 그렇구요. 하지만 뒤집어 털어도 개뿔 없는 것들이 한나라당 지지하는 경우는 쌔고 쌨잖아요. 이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