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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러셀 크로우(노아), 제니퍼 코넬리(나메), 엠마 왓슨(일라) 등 출연/ 상영시간 139분/ 15세 관람가



‘신께서 인간의 죄악을 보고 한탄하사,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의 유명한 대목 중 하나인 ‘노아의 방주’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백조의 호수’를 참신한 시각으로 재구성한 영화 ‘블랙스완’으로 호평 받았던 감독은 이 짤막하고 오래된 전설에 살을 붙여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대립으로 재해석한다.

 

이야기의 얼개는 이렇다. 방탕한 인간의 모습에 분노한 창조주는 홍수로 세계를 정화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노아를 선택해 동물 한 쌍씩을 태울 거대한 방주를 만들게 한다. 노아가 가족들과 함께 길이 300규빗(약 135m), 폭 50규빗(약 22.5m), 높이 30규빗(약 13.5m)의 방주를 건설하니 아니나 다를까, 대홍수가 일어나 온 세상을 덮친다. 이 모든 일이 끝나자 신은 더 이상 물로 인간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하고, 약속의 징표로 하늘에 무지개를 건다.

 

감독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고, 스토리를 가필하고, 대규모 특수효과의 힘을 빌려 이 전설을 화려하게 덧칠한다.  특히 인물을 해석하는 시각이 독특한데, 성경에서 ‘의인’으로 묘사되는 노아는 홍수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완벽하게 단절시키려는 완고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성경에서 대장장이로 짤막하게 묘사되는 두발가인은 인간의 왕이자 신의 심판에 대항해 인류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려는 안티히어로로 묘사된다. 

  

영화 속의 노아에게는 자비가 없고, 구시대의 인간들과 두발가인에게는 포기가 없다. 따라서 기독교적 독선을 의미하는 노아와, 속물적 자유의지를 대표하는 두발가인은 영화 내내 맞서 으르렁거린다. 이 두 거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함’, 기적처럼 생긴 구시대의 마지막 아이를 아버지의 독단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샘’과 ‘일라’ 등 노아 가족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껍데기를 두르고 있지만, 파격적인 묘사로 인간의 불안심리를 통찰하는 대런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먼 느낌이 아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는 성경을 거슬러서 불경한 이야기일수도, 장르적 쾌감을 기대한 팬들에게는 복잡해서 불편한 이야기일수도 있겠으나,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책은 쓰인 부분과 쓰이지 않은 부분으로 나뉘는 법. 책에 주저앉은 이야기를 깨우고 부추겨 걷게 한 감독의 상상력이 놀랍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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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 O.S.T.
밥 딜런 (Bob Dylan) 외 노래 / 워너뮤직(WEA)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현대의 리듬 앤 블루스는 흑인 영가의 영향을 받았다. R&B 가수들이 구사하는 이른바 소몰이 창법은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 인들의 흐느끼는 듯한 창법에서 유래했다. 리듬 앤 블루스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가진 슬픔의 정서를 대변한다면, 포크송에는 유럽 이주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포크 싱어들은 소박한 유럽의 옛 민요를 다시 엮어 밑바닥 삶의 서러움을 노래한다.

 

집을 떠나, 빈털터리로 방황하는 노동자의 마음을 담담하게 노래한 ‘Five hundred miles’, 주인공 르윈이 담배연기가 자욱한 카페, ‘가스등에서 부르는 'Hang me, oh hang me'는 오히려 슬픈 가사로 질척거리는 뒷골목의 인생들을 위로한다. "날 매달아주오. 난 죽어 사라지겠지. 목숨엔 미련 없어도 무덤 속에 누워 지낼 긴 세월이 서럽네."

 

하지만 포크는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음악장르가 아니고, 모든 포크싱어들이 밥 딜런 처럼 성공가도를 달렸던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실제 모델인 데이브 반 롱크도 변변한 히트곡 없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많은 가수 중 하나였다. 감독, 코엔 형제는 르윈이 신나는 팝 음악인 '플리즈 미스터 케네디'(Please Mr. Kennedy)의 녹음에 참여하지만, 푼돈을 받고 저작권을 포기하는 장면을 통해, 정통 포크 싱어와 대중적인 음악만을 원하는 시대의 불협화음을 담담하게 스케치한다.

 

반세기의 간극을 넘어, 코트 한 벌 없는 떠돌이의 음악이 재조명되고, 마음 깊은 곳의 울림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아직 끝나지 않은 이곳의 꽃샘추위가 1960년대 뉴욕의 겨울 만큼이나 냉랭하기 때문에. 혹은, 삶의 바닥에 뿌리내리고 피어나는 예술혼이 우리 가슴속의 무엇인가를 뜨겁게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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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뇨리따 2014-03-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난히 영화만큼이나 따뜻한 리뷰글이라 느껴지는것은, 말미잘님의 글이 음악빨을 받은걸까요 아니면, 커피같은 중독성을 가진 이 음악이, 말미잘 글의 분위기빨을 받은것일까요? 듣고 또듣고 또듣고 또듣고. 마치 말미잘님 글을 읽고 또읽고 또읽고 또읽고 하는것 처럼.


뷰리풀말미잘 2014-03-16 21:45   좋아요 0 | URL
음악 좋죠? 약간 청승맞고 우울한게 민요 냄새도 남아있고. 저도 요즘 자주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흥얼거리기 좋은 노래잖아요.

음악빨일겁니다. 앞으로는 페이퍼에 웬만하면 음악을 넣어야겠어요. ㅎㅎ

2014-09-02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2 0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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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2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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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2 1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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