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위로했다. 요즘 공부 좀 한다는 애치고 프로작이랑 렉사프로 안 먹는 애가 어디 있어? - P24

초롱은 영군에게 사과해야 마땅했다. 영군을 무단 유포자로 오해한 것뿐 아니라 쓰기의 폭을 좁게 생각한 것에 대해서도. 초롱에게 논문같이 문학이 아닌 글은 문학에 밑도는 글이었다. 사과할 것은 넘치는데 사과할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초롱은 뻔뻔하게도 영 85 군이 자신을 한번 봐줬으면 했다. 영군이 한 번만 용서를 꿔줬으면 했다. 그러면 언젠가 초롱도 푸지게 자서 피부가 맑고 마음이 순한 날,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마냥 용서하겠다고 다짐했다.
 "미안해요."
 초롱이 눈물을 터뜨렸다.
 "영군씨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못 자서. 너무 못 자니까 마음에 마귀가 들어서."
 "다음은요?"
 영군이 초롱의 울먹임을 가볍게 무시함으로써 은근한 용서를 베풀었다. - P84

당신도 말의 시간차공격을 당하는가? 나는 요새 자주 말의 시간차공격을 당한다. 오래전에 들은 별것 아닌 말이 멀쩡히 몸을 돌아다니다 갑자기 내장을 찢는다. 그러면 나는 시간차공격을 당한 배 234 구 선수처럼 속수무책이다. 상대편 공격수가 뛰어서 나도 뛰었는데, 어느새 공격수는 사라지고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다음 공격수가 스파이크를 때려넣는 것 같다. 말의 강타. 나는 그저 당할 뿐이다. 도끼날 아래 장작처럼. 게다가 배구와 달리 말의 이차 공격은 수년, 심지어 수십 년 후에 비로소 시작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남이 나에게 했던 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색무취였던 말이 뒤늦게 악취를 풍겨 때늦은 앙심을 품게 했다. 그러다 다행히—계속됐다가는 유치원 시절 문방구 아주머니를 수소문해 칼을 들고 찾아가게 된다—점차 내가 남에게 했던 말 때문에 괴롭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은 오묘하다. 오묘하게 치사한 것이다. 분명 내가 남에게 한 악담인데 마치 내가 들은 악담처럼 느껴진다. 과거로 돌아가 이번에는 내가 상대가 되어, 어린 내가 하는 나쁜 말을 꼼짝 못하고 듣는 것이다. 내가 한 말에 나 자신이 상처받는 격으로—오, 몹쓸 중년이여, 거지같은 회상이여— (하략)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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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쪼록 인식론을 공부하면서 내 자신이 경험했던 지적 흥분이 한국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 P15

인식론은 지식과 정당화된 믿음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인식론이라는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다음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다.

Q1 지식이란 무엇인가?
Q2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Q3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Q4 우리의 믿음들 가운데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는 믿음인가? - P21

많은 인식론자가 정당화되지 않는 옳은 믿음은 요행수 추측(lucky guess)에 불과하며, 요행수 추측은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 P26

물리적 대상들로 이루어진 외부 세계가 있다는 믿음을 생각해 보자. 이 믿음은 이상적으로 정당화되는 믿음의 훌륭한 후보다. 그렇지만 많은 철학자가 이 믿음이 그르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 P30

마지막으로 옳은 믿음이란 유용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실용론을 살펴보자. 진리성과 유용성이 이 이론이 가정하는 것처럼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전혀 유용하지 않은 옳은 믿음을 상상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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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신은 믿음의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p라는 것을 불신한다면, 당신은 p의 부정이 옳다는 걸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 P33

그렇다면 두 종류의 요행수 믿음을 구별해야 한다. 첫째, 어떤 믿음은 관련된 어떤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옳을 것 같지 않았는데도 옳았기 때문에 요행일 수 있다. 둘째, 어떤 믿음은 그 사람의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옳을 것 같지 않았는데도 옳았기 때문에 요행일 수 있다. 전자를 (더 좋은 이름이 없다면) 요행수 진리라 하고, 후자를 요행수 추측이라 하자. 그렇다면 정당화는 옳은 믿음이 요행수 추측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요행수 진리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 P36

따라서 어떤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과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 P38

동연적이지만 필연적으로 동연적인 것은 아닌 두 개념의 또 다른 예는 "x는 심장을 가진 동물이다"와 "x는 간을 가진 동물이다"다. 자연법칙의 진행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면, 한 개념의 실례인 것은 무엇이든 또한 다른 개념의 실례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그 점과 관련하여 필연적인 것이 전혀 없다. 자연은 변할 수 있다. 이 말은 그런 변화를 생각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일지는 몰라도, 미래의 생물이 심장은 있지만 간은 없는 형태로 진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 P67

 이러한 사고가 동기로 작용하여 최근 몇 년 동안에 규범적 속성들이 비규범적 속성들에 수반한다(supervene)는 신조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규범적 속성이 비규범적 속성에 수반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략 어떤 대상이 어떤 규범적 속성을 갖는지 아닌지가 그 대상의 비규범적 속성들에 의존하거나 그것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똑같은 말을 달리 표현하면, 사물들은 자신의 규범적 속성을 비규범적 속성들에 의해서 갖게 된다. 또 다른 말로,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그 대상이 갖는 규범적 속성을 갖게 만드는 것은 그 대상의 비규범적 속성이다. 이 생각을 윤리학에 적용하면, 수반 신조는 어떤 행위의 도덕적 격위가 그 행위의 비규범적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인식론에 적용하면, 수반 신조는 어떤 믿음의 인식적 격위가 그 믿음의 비인식적 격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런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는 사물들이 자신이 가진 속성들을 어쩌다 우연히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속성들은 갖고 다른 속성들은 결여하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다는 믿음이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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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이 꽃이 왜 피어오르는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이런 걸 17 따져 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역》을 읽다가 무심히 올라오는 가지 끝의 흰 것 하나를 보고선 하늘의 뜻을 읽어냅니다. 이게 바로 통찰입니다.
 그 많은 선승들이 면벽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이치를 따지면 훨씬 더 많은 깨우침을 얻을 텐데 면벽을 하면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법정스님은 입적하기 전까지 산에 암자 하나 지어 놓고 몇 권의 책을 들고 들어가서 실존철학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힘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습니다. 법정 스님은 "지식은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의 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핵심이었습니다. 저는 이게 동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은 어떤 것을 알기 위해 따집니다. 따지고 알아보고 분석하고 그리하여 기어이 답을 찾아냅니다. 그게 그들의 아주 좋은 장점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우리를 화성까지 보냈습니다. 일례로 화성에 간 우주선의 이름이 "큐리어시티curiosity", 즉 "호기심"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이 인간을 화성에 보낸 겁니다. 두려움 없이 끝까지 파헤쳐 뚫고 가는 힘이 우리를 우주로 안내했습니다.
 반면 동양은 어떨까요? 동양에서 분석적인 삶의 태도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봄꽃에서 하늘의 뜻을 보는 이 능력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 P16

 반면 많은 중국 고전이 유럽에 전해진 시기에 중국은 유럽 고전에 대해서 거의 까막눈이었습니다. 유럽 고전을 번역한 게 별로 없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그 당시 중국 사람들은 "드디어 중국 문명의 위대함이 전 세계에 퍼지는구나. 오랑캐들이 찾아와서 배워 가는구나"라고 해석했을 겁니다. 대신 이들은 "유럽인들에게 지고 있구나. 유럽인들이 총, 칼, 경제 이런 것으로 앞서가는 정도가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이미 더 앞서나가는 징표가 아닌가"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야 마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P33

18~20세기까지 이 세계를 호령한 것은 분명 서구 문명이었습니다. 서구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해서 세계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편적인 틀을 만들어서 전 세계에 강요했습니다. 물론 민주적인 가치를 비롯해 서구 문명의 많은 것들이 인류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이 지나는 동안 이런 것들이 사악한 측면과 동시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폭력적인 지배 상황으로 귀결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서구 문명이 세계의 보편적인틀이 되었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뭔가 새로운 틀을 짜고 새로운 사고와 문화를 일궈내야 할 때입니다. - P33

 앞으로 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란 말은 아마 맞는 말인 듯합니다. 34 21세기에는 한·중·일이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고 갈수록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아시아의 시대가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특히 이 말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금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강대국에 밀렸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근래 들어 ‘우리도 한번 이 세상을 지배해 봐?‘ 하는 생각을 갖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런 사고방식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잘살고 경제적, 군사적으로 앞서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당했던 만큼 갚아야지‘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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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해라, 말해라, 말해라. 그녀는 그저 사람들이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바랐다. 어울리지 않는 시대에 태어났다. 이 끝없는 수다. 그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먼 옛날을 상상해 보았다. 다른 세기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말이 거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더라면. 새벽 여명에 일어나 외양간에 가서 음매 소리를 내며 반기는 소의 젖을 짜는 일. 분홍빛 젖꼭지를 쥔 채 양동이에 떨어지는 젖줄기의 속삭임과 파리의 윙윙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일, 비, 발아래의 부드러운 풀, 겨울에는 뽀드득거리는 눈, 우물의 텅빈 메아리. 그녀는 우물에서 울리는 소리를 좋아했다. 지금 수도꼭지 대신 우물이 있어서 기뻤다. 아연 양동이가 우물로 내려가 춤출 때면 들려오는 금속성 노래. - P70

 크리스티나는 병원에 잘 적응했다. 부모님은 그녀에게 다시 공부를 시작하거나 적어도 다른 일자리를 찾으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부모님보다 늘 몇 시간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5킬로미터 떨어진 병원으로 가서 청소도구 수레를 밀며 복도를 지나다녔다. 그녀는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다른 뭔가가 올 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청소 일은 이 다른 뭔가를 향한 기다림이었고, 깨어나 귀를 기울이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거의 2년 동안 일했다. 그런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 P72

 세상에는 우리에게 오는 열쇠를 지닌 사람이 있다.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가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방을 열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과 우리는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성별이 같고 연령도 어느 정도 맞으면 사랑에 빠진다. 다른 경우에는 마법에 걸린다거나 종속된다거나 표현이야 어떻든 하여간 그런 상황이 되지만, 사실은 두 경우 모두 똑같다. 나에게 안네 마리는 이런 열쇠를 지닌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 만난 사람.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그다지도 큰 의미가 있었다. 반면 안네 마리에게 나라는 의미는 그 정도로 크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사라질까봐 늘 두려웠다. - P84

 조선소 노동자는 벽에 단열 장치를 했다. 그는 1년 내내 오두막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조선소를 그만두었지만 예술가의 삶은 살지 못했다. 술에 빠져들면서 마을과도 마찰이 생겼다. 그는 그저 오두막에 누워 술을 마시며, 속도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죽어갔다. 그 뒤로 오두막은 비어 있었다. 권리를 주장하는 상속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 P103

 크리스티나는 오두막의 첫 겨울을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경험했다. 안개에 싸여 잠든 경작지, 안개 고동의 외로운 울부짖음. 자연이 보여주는 다양한 노란색과 갈색, 내리기는 하지만 제대로 쌓이지는 않는 눈, 절벽을 거대한 털짐승처럼 보이게 만드는 축축한 서리, 밤새 얼었다가 파도에 부서지고, 다음날 밤에 다시 얼어붙는 만(灣)의 얼음. 차가운 공기 중에 떠도는 자작나무 향기.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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