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 제의와 예식의 공간에서는 객관적 기호들이 유통된다. 이러한 공간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텅 빈 부재의 공간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 친밀사회의 거주민은 나르시시즘적 친밀성의 주체들로서, 이들에게는 연극적 거리두기의 능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세넷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경험을 찾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ㅡ무엇을 대면하든지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상호작용, 모든 연극적 장면을 폄하한다. [......]" 세넷에 따르면 오늘날 나르시시즘에서 기인하는 심적 장애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의 사회가 내적인 표현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조직화하고, 개개인의 경계 밖에서 일어나는 의미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의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친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 P76
루소는 이러한 가면과 역할의 유희에 마음과 진실의 담론을 맞세운다. 그는 제네바에 극장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연극은 "위장의 기술, 본연의 성격과 다른 성격을 취하는 기술, 진짜 자기 자신과 다른 모습을 연기하는 기술, 냉정한 상태로 흥분하는 기술,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기술"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정말 그러하다고 믿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야 한다.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다른 사람의 처지에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망각해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연극이 투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장과 가상과 유혹의 장소라고 비난한다. 표현은 포즈가 아니라, 투명한 마음의 반영이어야 한다. - P90
전면적 투명성의 도덕이 폭정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미 루소에게서 드러난다. 모든 베일을 찢어버리고,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며, 모든 어둠을 추방하려는 영웅적인 투명성의 기획은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미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발효된 바 있는 극장과 미메시스 금지령(플라톤에게 서사시와 연극은 미메시스적 예술이다.)으로 인해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루소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를 선호한다. "모든 개인이 언제나 공공의 감시하에 있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타인의 풍기단속관이 되며, 경찰도 어렵지 않게 모두를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의 사회임이 드러난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첨예화되어 하나의 정언명령이 된다.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윤리학의 유일한 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계가 보거나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 나 자신으로 말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에서도 다 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 했던 한 로마인이야말로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P90
신뢰는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타인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와 긍정적 관계를 맺게 한다. 신뢰는 무지에도 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신뢰란 것은 아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투명성이란 모든 무지가 제거된 상태를 뜻한다. 투명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신뢰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이 신뢰를 만듭니다‘라는 구호는 사실 ‘투명성이 신뢰를 철폐합니다‘로 바뀌어야 한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높아진다. - P98
거리가 소멸한 결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뒤섞인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으로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소셜네트워크 또한 사적인 것의 전시 공간이 된다. 디지털 매체 자체가 정보의 생산을 공공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시키고, 이로써 커뮤니케이션을 사적인 과정으로 만든다. 롤랑 바르트는 사적 영역을 "내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에겐 사적 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내가 이미지가 되지 않는 영역,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은 없기 때문이다. 구글 글래스는 인간의 눈 자체를 카메라로 만든다. 눈 자체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사적 영역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이미지에 대한 포르노적 강박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사적 영역은 완전히 철폐되고 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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