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나 타자기로 공들여 편지를 작성하는 사이에 즉각적인 흥분은 이미 수그러든다. 반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을 가능하게 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그 시간적 특성만으로도 이미 아날로그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매체는 감정 매체이다. - P118

디지털 매체를 통한 네트워크의 확산은 대칭적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한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참여자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으로 정보를 생성하기도 한다.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명백한 위계질서는 없다. 모두가 송신자이자 수신자이고,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것이다. 그러한 대칭성은 권력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권력의 커뮤니케이션은 한 방향으로, 즉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환류가 일어나면 권력의 질서는 파괴된다. 악플은 온갖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는 일종의 환류라고 할 수 있다. - P119

소음 또는 잡음은 권력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청각적 신호다. 악플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이다. 권력의 아우라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카리스마는 악플에 대한 최상의 방패막이다. 권력의 카리스마가 있는 곳에서는 애초에 악플 같은 것이 불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 P120

권력이 있다면 나의 행위 선택, 나의 의지에 따른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개연성이 줄어든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권력은 거절보다 승낙의 가능성을 높이는 작용을 한다. 승낙은 거절보다 훨씬 잡음이 덜하다. 거절은 언제나 시끄럽다. 권력의 커뮤니케이션은 잡음과 소음, 즉 커뮤니케이션의 엔트로피를 현저하게 줄인다. 그리하여 권력의 말은 불어나는 소음을 일거에 제거한다. 권력의 말은 고요함을 산출하는데, 그것이 곧 행위를 위한 여유 공간을 이룬다. - P120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존경심도 권력과 유사한 작용을 한다. 존경받는 사람의 견해나 행위 선택은 종종 이견이나 반론 없이 받아들여진다. 존경받는 사람은 심지어 모범으로 여겨지며 모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방이란 권력의 차원으로 표현한다면 미리 앞서 가는 복종에 해당된다. 시끄러운 악플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존경심이 사라져갈 때다. 존경받는 사람이 악플로 뒤덮이는 일은 없다. 존경심이 형성되는 것은 인격적, 도덕적 가치의 부여를 통해서다. 그래서 전반적인 가치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존경의 문화까지 침식시킨다. 오늘날 모범이 되는 인물들은 내적인 가치와 관계가 없다. 외적 특질이 그들을 모범으로 만든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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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 제의와 예식의 공간에서는 객관적 기호들이 유통된다. 이러한 공간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텅 빈 부재의 공간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 친밀사회의 거주민은 나르시시즘적 친밀성의 주체들로서, 이들에게는 연극적 거리두기의 능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세넷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경험을 찾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ㅡ무엇을 대면하든지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상호작용, 모든 연극적 장면을 폄하한다. [......]" 세넷에 따르면 오늘날 나르시시즘에서 기인하는 심적 장애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의 사회가 내적인 표현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조직화하고, 개개인의 경계 밖에서 일어나는 의미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의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친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 P76

루소는 이러한 가면과 역할의 유희에 마음과 진실의 담론을 맞세운다. 그는 제네바에 극장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연극은 "위장의 기술, 본연의 성격과 다른 성격을 취하는 기술, 진짜 자기 자신과 다른 모습을 연기하는 기술, 냉정한 상태로 흥분하는 기술,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기술"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정말 그러하다고 믿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야 한다.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다른 사람의 처지에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망각해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연극이 투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장과 가상과 유혹의 장소라고 비난한다. 표현은 포즈가 아니라, 투명한 마음의 반영이어야 한다. - P90

전면적 투명성의 도덕이 폭정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미 루소에게서 드러난다. 모든 베일을 찢어버리고,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며, 모든 어둠을 추방하려는 영웅적인 투명성의 기획은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미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발효된 바 있는 극장과 미메시스 금지령(플라톤에게 서사시와 연극은 미메시스적 예술이다.)으로 인해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루소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를 선호한다. "모든 개인이 언제나 공공의 감시하에 있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타인의 풍기단속관이 되며, 경찰도 어렵지 않게 모두를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의 사회임이 드러난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첨예화되어 하나의 정언명령이 된다.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윤리학의 유일한 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계가 보거나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 나 자신으로 말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에서도 다 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 했던 한 로마인이야말로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P90

신뢰는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타인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와 긍정적 관계를 맺게 한다. 신뢰는 무지에도 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신뢰란 것은 아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투명성이란 모든 무지가 제거된 상태를 뜻한다. 투명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신뢰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이 신뢰를 만듭니다‘라는 구호는 사실 ‘투명성이 신뢰를 철폐합니다‘로 바뀌어야 한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높아진다. - P98

거리가 소멸한 결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뒤섞인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으로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소셜네트워크 또한 사적인 것의 전시 공간이 된다. 디지털 매체 자체가 정보의 생산을 공공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시키고, 이로써 커뮤니케이션을 사적인 과정으로 만든다. 롤랑 바르트는 사적 영역을 "내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에겐 사적 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내가 이미지가 되지 않는 영역,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은 없기 때문이다. 구글 글래스는 인간의 눈 자체를 카메라로 만든다. 눈 자체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사적 영역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이미지에 대한 포르노적 강박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사적 영역은 완전히 철폐되고 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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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가 자신의 자본 일부를 임시적으로나마 우리에게 월급 형식으로 주고 다시 상품 판매 대금으로 회수하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자본가는 다양한 유혹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혈안이 된다. 이미 월급으로 우리에게 준 돈을 강제로 뺏을 수 없다면, 남은 길은 자발적으로 소비하도록 유혹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 P248

어두운 밤바다의 집어등처럼 화려하기만 한 대중문화는 바로 이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오징어를 잡을 때, 선원들은 배에 가득 화려한 등을 밝힌다. 이것이 바로 집어등이다. 바다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오징어의 시선을 끌기 위해 마련된 치명적인 유혹의 장치인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오징어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 드라마, 축제, 대중음악, 광고 등등 대중매체가 던져 놓은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가장 모던하고 새로운 것, 이것들을 가지기만 하면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주는 것들이다. - P249

그는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보다는 자본주의가 우리 내면을 길들이는 방식에 주목했다. 기 드보르의 진단은 차갑기까지 하다. 그에 따르면 스펙터클 사회는 인간으로부터 상품에 대한 시각적 감각을 제외한 일체의 현실 감각을 박탈해버린 거대한 매트릭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역설적으로 스펙터클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다.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 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P253

왕충은 마차 바퀴와 잡초의 마주침, 들판을 뒤덮은 화마와 잡초의 마주침, 거미줄과 날벌레의 마주침에서도 사건의 우발성에 주목한다. 물론 이 모든 사례들은 인간의 삶이 우발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이 예기치 않은 마주침에 의해 요동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인간을 깨우려는 것, 그래서 그들을 삶의 진실에 이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왕충이 하려는 것이었다. - P256

"이까짓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하마터면 나의 큰 장수를 잃을 뻔했구나!"
조자룡은 황망히 허리를 굽히고 팽개쳐져 우는 아두를 끌어안고서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제가 이제 간뇌도지하더라도 주공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국지연의』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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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를 행동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실은 커뮤니케이션학이다. PR학이다. ‘설득‘ 기술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이미 넛지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PR · 광고 전문가들은 행동경제학에 대해 코웃음칠지도 모르겠다. 무슨 옛날 이야기를 그렇게 새로운 것처럼 하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을 비웃을 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선 오래된 이야기일망정, 넛지의 이치를 정부 · 공공기관 · 시민단체 등의 정책에 고려하는 건 별개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의 정부부처 · 지방자치단체 · 공공기관들이 애용하는 플래카드는 노골적인 계몽과 훈계의 메시지로 가득하다.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강조한 텍사스 주의 과오를 교정할 뜻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오늘날 ‘계몽의 종언‘이 외쳐지고 있는데, 그건 과연 진실일까? 누구에게든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면 "감히 누굴 가르치는 거냐?"고 반발하지만, 교묘하게 이벤트나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취해 주입시키면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즉, 문제는 계몽의 포장술이다. 그런데 포장에는 돈이 많이 든다. 버네이스의 이벤트 연출 묘기는 모두 다 대기업의 금전적 물량 공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금력과 권력을 가진 쪽의 포장술은 갈수록 세련되어가는 반면, 그걸 갖지 못한 일부 개혁 · 진보주의자들은 계몽에 들러붙은 엘리트주의 딱지를 떼면서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내기 위해 독설과 풍자 위주로 카타르시스 효과만 주는 담돈에 집착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계몽과 설득이 처해 있는 딜레마다. - P266

영국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인류학적인 문헌을 통해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이렇게 말한다. "150이라는 숫자는 진정으로 사회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개인적인 숫자를 나타내는 것 같다. 이런 종류의 관계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는 그런 관계이다.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을 때 초대받지 않은 술자리에 동석해도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 숫자이다." 이 150이라는 수를 가리켜 ‘던바의 수‘라고 한다.
저널리스트 맬컴 글래드웰은 잠시, 누군가가 죽었을 때 당신을 진정으로 망연자실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전부 기록해보자고 제안한다. 대다수 사람에게서 나온 평균적인 대답은 12명 정도였다. 심리학자들은 이 12명 정도의 이름들을 ‘공감 집단‘이라고 불렀다. 글래드웰은 이 집단의 크기가 더 커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그런 목록이 두 배로 길어져서 30명쯤 된다면 결과적으로 그 목록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에게 절반의 시간만을 할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과 여전히 절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려면 최소한의 시간을 들여야 한다. 단지 시간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정서적인 에너지 역시 투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을 깊이 배려하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어떤 특정한 지점, 즉 10명에서 15명 선에서 우리는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는 친화동기와 친애동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도 있다. 친화동기는 타인과 어울려 지내고자 하는 동조적이고 의존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로 남들에게 배척당할까 불안해하는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친화동기가 강한 사람들은 남들과 잘 어울려 지내긴 하지만 그것이 깊은 우정이나 사랑을 지향하는 특성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적으로 불가능해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반면 친애동기가 높은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양보다는 질을 추구해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한 교분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관계가 보다 안정적이고 깊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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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정철운은 "맥락 저널리즘은 기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중립적 형식의 객관 저널리즘과 달리 언론인의 주관이 듬뿍 담기게 되는데, 이때 중요한 전제가 기자와 언론사에 대한 ‘신뢰‘다. 신뢰가 없는 맥락 저널리즘은 편파 방송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뉴스룸>은 포맷상 그 어떤 뉴스보다 ‘신뢰받는 언론인‘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최적의 퍼즐은 신뢰도 1위 손석희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JTBC는 2014년 4월 손석희 사장이 직접 진도 팽목항에 내려가 뉴스를 진행하고, 서복현 · 김관 기자를 수개월간 팽목항에 남겨두는 식으로 시청자에게 그들의 ‘진솔한‘ 태도를 강조했다. JTBC ‘사회부 소셜스토리‘는 손석희 사장에게 겨울 장갑과 점퍼를 요구하는 장면을 통해 기자들의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그 결과 시민들은 뉴스의 관점을 갖고자 할 때 JTBC를 믿고 보게 됐다. ‘신뢰‘다. JTBC <뉴스룸>은 타 방송사에 비해 기자 개인의 브랜드를 키우는 데도 적극적이다. 과거 ‘팩트체크‘의 김필규 기자를 비롯해 서복현 · 심수미 기자 등 여러 기자들은 생방송에서 손석희 앵커와 마주하며 성장한다. 이는 BBC를 비롯한 전통의 공영방송 뉴스가 신뢰도를 높여 온 과정과도 유사하다. 예컨대 이 뉴스에서 이 기자가 등장하면, 시청자는 뉴스를 보기 전부터 뉴스를 신뢰하게 되는 식이다." - P242

손석희의 저널리즘적 의미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괴리를 돌파해냈다는 점에도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저널리즘 학자가 강단에서 저널리즘의 바람직한 방향과 내용에 대해 말하기는 쉽다. 그 누구도 실천을 요구하지 않는 학자로서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천은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런데 손석희는 그 두 세계를 연결하는 데에 적잖은 성공을 거두었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 P243

"기자들이 청와대의 권위에 주눅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그건 예의도 질서도 아닌 직무유기일 뿐이다. 어느 취재 현장에서도 질문 순서를 짜고 질문 내용을 조율하는 곳은 없다. 질문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듣기만 하는 취재는 다른 취재 현장에서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대본이 없으면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대통령,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려 하는 청와대와 무력하게 청와대의 요구를 따르는 착한 기자들, 이 기묘한 질서가 청와대를 망치고 한국 사회를 이 지경으로 몰고 왔다. 청와대 기자실이 바뀌지 않으면 언제든 이런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 - P251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기자이기에 앞서 하나의 시민이고, 그의 신고는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개인의 결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시민으로서 신고하기로 했다면 보도를 포기했어야 했다. 그리고 만약 보도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관찰자로 남았어야 했다. 그게 보도 윤리다. 그런 게 2017년 언론계에 남아 있다면 말이다."
이어 박상현은 "양심 있는, 행동하는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기자의 역할은 다르다. 특히 자신의 신고로 자신이 속한 언론사의 시청률이 올라간다면 그때부터는 이해의 충돌이라는 심각한 문제마저 낳는다. 신고하고 체포되는 장면까지 방송한 JTBC 보도는 재난 현장에 있다가 갑자기 도와줘야 하는 위치에 처한 기자의 윤리를 논하는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명백한 이해의 충돌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P253

『조선일보』 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박은주는 「그럼에도, 사악해지지 말자」라는 칼럼에서 "해당 방송사가 ‘보도 윤리를 깼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행위를 일반 원칙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가정은 어떤가. 지난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어느 주택에 숨어 있었다고 치자. 그를 인터뷰하려고 며칠을 기다리던 기자가 다른 곳으로 도주하려는 한씨를 경찰에 신고했다면? 한쪽은 기자를 ‘경찰 프락치‘라고 비난하고, 다른 쪽에서는 ‘현행범을 고발하는 건 시민의 의무‘라고 옹호했을 것이다"며 다음와 같이 말했다.
"그들이 지향한 ‘철학‘을 빼고, 정유라와 한상균의 차이는 뭘까. 한마디로 정유라는 국민 밉상이고, 한상균에겐 지지자가 있다. 니체가 말한 ‘괴물의 심연‘은 언론에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다수가 증오하는 자를 신고하면 선, 좋아하는 사람을 신고하면 악인가. ‘다수‘의 기준은 뭔가.‘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 구글이 이런 모토를 갖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막대한 개인정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닥다리 세대에 속하는 기자는 언론이 구글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많은 국민은 언론에 악마도, 괴물도, 천사도, 보안관도 되지 말고, 그저 ‘잘 닦은 거울‘로 남을 것을 요구한다고 믿는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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