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언어나 문자의 매개에 의존하지 않는 직접 체험주의 ‘진리의 세계는 각자의 깨달음을 통한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언어나 문자로서는 보여 주거나 전해 줄 수가 없다.’라는 의미의 불립문자나 교외별전이란 주장은 잘 알려져 있는 선불교의 슬로건이다. 이를 언어나 문자의 설명으로는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언전불급이라고도 하며, 물의 차고 더운 맛은 물을 마셔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의미로 냉난자지라고도 말하고 있다. 즉, 불법은 자기의 몸으로 직접 수행하여 체험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선의 문헌은 조사들의 이러한 생생한 수행과 체험의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임제록」에 임제 선사는 자기의 수행생활과 경력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여러분! 출가 수행자는 먼저 도를 배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산승도 지난날 일찍이 율장 공부에 전심하기도 하고 경전이나 논서의 연구에 전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률론 삼장이 모두 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약과 같은 것이며, 언어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단번에 경전을 뿌리치고 곧바로 선의 수행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훌륭한 스승과 도반들을 만나게 되어 비로소 도의 안목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어 이제 천하 선사들의 견해를 바로 볼 수 있고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곧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몸으로 참구하고 연마하여 수없이 많은 좌선의 수행을 반복하여 어느 날 갑자기 깨닫고 알게 된 것이다.
임제가 주장하고 있는 체구연마는 경률론으로 표현된 언어 문자에서 벗어나 각자가 직접 선 수행을 통하여 불법을 깨닫게 된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처럼 선의 본질은 언어 문자의 경전이나 과학적인 지식, 대상적인 인식이나 분석적인 판단에 의하지 않고 직접 체험적인 직관지, 반야의 지혜로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직관적인 지혜나 반야의 지혜는 임제가 주장하는 불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이며 진정한 견해인 것이다. 상대적이고 분별·차별의 2원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근원적이며 직관적인 지혜로 자기를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직관적인 지혜는 우리들 각자의 불성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와 똑같은 지혜를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하여 자각과 깨달음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즉, 이성에 대한 인식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좌선의 실천으로 체득한 직관은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은 똑같은 차원에서 서로 상대를 공격하는 관계가 아니다. 믿음은 지식의 한계성을 보완하고, 지식은 믿음의 독단을 수정하는 것으로 양자는 상호 보완의 기능을 갖는다.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사실 진리에 대한 의심 없는 확인이며 철저한 확신인 것이다. 따라서 ‘신(新)은 힘이다.’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한편 신(信)은 맹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의성은 충분히 자각하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혜는 구체적인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지혜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직접체험주의는 이러한 확신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 P293
이처럼 선의 실천과 수행이란 불교의 정신이나 실천 방법을 알고 있고 외우고 있는 그 지식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정신과 실천 방법을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과 인격과 정신으로 만들어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삶인 것이다. 경전이나 선지식의 지시를 받는 등, 비록 간접 경험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자기가 몸으로 직접 실천하고, 또 지혜롭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인 것이다. - P297
1. 생물을 죽이는 짓에서 떠나는 일 2.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짓에서 떠나는 일 3. 갖가지 애욕의 사된 행에서 떠나는 일 <이상은 신업(身業)> 4. 거짓말에서 떠나는 일 5. 중상하는 말에서 떠나는 일 6. 욕말에서 떠나는 일 7. 아첨과 수다 떠는 말에서 떠나는 일 <이상은 어업(語業)> 8. 탐욕에서 떠나는 일 9. 증오에서 떠나는 일 10. 바른 견해를 가지는 일 <이상은 의업(意業)> - P304
시[布施]는 지계와 더불어 초기 경전에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윤리 덕목으로 그 정신적 기반은 4무량심이다. 이는 ‘남’이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위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남은 나의 생존 경쟁적 적대자가 아니라 나의 안락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반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사랑한다면 그 이상으로 남을 또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불교에서는 ‘자(慈, maitri)’라고 부르는데, 원어의 뜻은 우정(友情)이란 말이다. 남을 나의 진정한 친우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랑에는 남의 괴로움을 나의 괴로움처럼 슬퍼하고, 남의 즐거움을 나의 즐거움처럼 기뻐하고, 남이 비록 나의 뜻을 몰라 주어도 평정을 잃지 않는 마음이 뒤따를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우정·슬픔·기쁨·평정의 4가지 마음은 특정한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고 일체 중생들에게 확대되어야 한다. 보시는 바로 이러한 4무량심의 바탕이 되는 사랑의 외적 표현이다. 일체 중생을 진정한 친우로 보고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그와 함께 사랑스러운 말을 하고, 이익을 주며, 함께 일하는 행동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가 되겠다. - P314
이처럼 깨침은 나와 남, 나와 대상세계를 나누던 ‘나다’하는 벽이 깨져서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조사들은 그 깨진 세계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하늘과 땅이 나와 더불어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
나와 남, 나와 다른 생명 및 우주와 한 몸을 이룬 소식이다. 이 둘이 아닌 진리가 바로 불교의 사상적 기초이며, 따라서 그 진리에 눈뜨자는 것이 다름 아닌 불교인 것이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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