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인들이 용병으로부터 겪은 수난
베네치아인들의 발전사를 보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군대로, 곧 귀족과 무장한 인민들이 아주 능숙하고 용맹스럽게 전쟁에 임했을 때에(즉 그들이 이탈리아 본토에서 전쟁을 하기 전에), 그 나라는 안전했고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본토에서 전쟁을 하게 되자마자 그들은 그들의 용맹을 포기하고 이탈리아의 전쟁 관습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내륙의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용병대장들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병합된 영토가 아직 많지 않았고 베네치아인들의 명성이 아주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카르마뇰라의 통솔하에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그들의 과오는 명백해졌습니다. 그들은 (그의 통솔하에 밀라노 공작을 격파했기 때문에) 그가 매우 유능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만, 반면에 그가 전쟁을 마지못해 수행하고 있다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그 자신이 승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계속 고용해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병합된 영토를 잃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그를 해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P92

원군으로부터 겪은 근래의 위험한 사례들
원군이란 당신이 외부의 강력한 통치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당신을 돕고 지켜주기 위해서 파견된 군대인데, 이 또한 용병처럼 무익한 군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군은 최근에 교황 율리우스에 의해서 이용된 적이 있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용병부대가 페라라 전투에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스페인의 페르난도 왕에게 자신을 도울 군대를 파견하게 함으로써 원군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원군은 그 자체로서는 유능하고 효과적이지만, 원군에 의지하는 자에게는 거의 항상 유해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패배하면 당신은 몰락할 것이고, 그들이 승리하면 당신은 그들의 처분에 맡겨지기 때문입니다. - P97

과거 위인들의 모방
지적인 훈련을 위해서 군주는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데, 특히 위인들의 행적을 조명하기 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들이 전쟁을 수행한 방법을 터득하며, 실패를 피하고 정복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들의 승리와 패배의 원인을 고찰하고, 무엇보다도 우선 위대한 인물들을 모방해야 합니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 역시 찬양과 영광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그들의 선배들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킬레스를 모방했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모방했으며, 스키피오는 키로스를 모방했다고 이야기되는 것처럼 항상 선배들의 행적을 자신들의 모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크세노폰이 저술한 키로스의 생애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키피오의 생애와 행적을 고려할 때, 크세노폰의 저작에 기록된 대로 키로스를 모방함으로써 스키피오가 영광을 성취하는 데에 얼마나 커다란 도움을 받았는지, 그리고 스키피오의 성적인 절제, 친절함, 예의바름, 관후함이 얼마나 많이 키로스의 성품을 모방함으로써 얻은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 P107

근면함은 운명의 신을 물리칠 수 있다
현명한 군주라면 항상 이와 같이 행동하며, 평화시에도 결코 나태하지 않고,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부지런히 자신의 입지를 강화함으로써 역경에 처할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 결과 운명이 변하더라도 그는 운명에 맞설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 P108

윤리적 공상과 엄연한 현실
이제 군주가 자신의 신민들 및 동맹들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마땅한가를 고찰하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많은 논자들이 이 주제를 논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제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다른 사람들이 제안한 원칙들과 특히 이 문제에 관해서 크게 다르기 때문에, 제가 건방지다고 생각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용한 것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행하지 않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의 몰락은 불가피합니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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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명이었다고 들었다. 20만 명이 갔다가 해방 후 돌아온 숫자가 고작 2만 명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자신이 20만 명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2만 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 놀랐다. 20만 명 중 2만 명이면 10분의 1이었다. 말하자면 열 명 중 한 명……. 그녀는 자신의 셈이 틀렸지 싶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서 돌아왔을까 싶다. - P125

열세 살이던 그녀는 어느새 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 7년 동안 그녀의 키는 손가락 두 마디밖에 자라지 않았다. 7년 전 함께 만주 위안소에 왔던 소녀들 중 그곳을 떠나지 않은 소녀는 그녀와 애순, 둘뿐이었다. 분선도 어느 날 오토상을 따라 그곳을 떠났다. 언제까지나 잊지 말자며 실과 바늘과 물감으로 왼손 손목 위에 문신을 새겼던 연순과 해금도 뿔뿔이 흩어졌다.
7년 전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리던 열차에 타고 있던 소녀들 중 가장 어리던 그녀는 제법 나이가 든 축에 속했다.
오토상은 소녀 둘을 더 데리고 왔다. 그중 하나는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 먹은 소녀는, 7년 전 대구역에서 열차에 오르던 그녀의 환영도 함께 데리고 왔다. 검정 광목 저고리에 깡똥하고 얄궂은 바지를 입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애기가 어쩌다 이런 델 다 왔을까?" 영순이 소녀에게 말했다. 열여섯 살이 된 영순의 손에서는 담배가 타들고 있었다.
"왔으니 할 수 없지. 팔자려니 하고 사는 수밖에……."
영순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매운 담배연기가 영순의 얼굴을 지우면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하는 소녀들에게 일본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사다코다."
사다코가 한옥 언니의 이름이라는 걸 깜빡하고는. 606호 주사를 맞고 늘어져 있던 한옥 언니가 트림을 하다 말고 경기하듯 떨었다. - P138

살아 있는 증인이 있는데,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까, 눈물이 나고 기가 막히고 감감해서…….
김학순 그 여자는 그래서 자신이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신문기사 군데군데 붉은색 펜으로 밑줄이 쳐져 있다. 그녀는 신문지 쪼가리를 집어 들고 붉은색 펜으로 밑줄 친 부분들을 소리 내 읽기 시작한다. 한 문장을 연달아 읽지 못하고, 언 동태를 토막 내듯 끊어가면서 읽는다.

오직 나 홀몸이니

거칠 것도 없고

그 모진 삶 속에서

하느님이 오늘까지 살려둔 것은

이를 위해 살려둔 것.

죽어버리면 그만일 나 같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

왜 나는 남과 같이 떳떳하게 세상을 못 살아왔는지.

내가 피해자요.

그 여자를 따라 위안부였던 여자들이 하나둘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 P143

내가 아는 이는 시집갔다가 남편에게 매독균을 옮기는 바람에 들통이 나 쫓겨났잖아. 얼마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멀쩡하게 살다가 마흔 안짝에 정신병이 왔잖아. 그런데 글쎄 정신병원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오라고 하더래. 그래서 갔더니 의사가 어머니만 남고 다른 가족들은 다 나가라고 하더니 혹시 매독 앓은 적 있냐고 묻더라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나왔다지 뭐야. 매독이 그렇게 무서운 거더라구. 그이도 참 안됐지. 본의 아니게 아들 인생까지 망쳐놓은 셈이지 뭐야. 아들이 정신병원에서 나오기는 했는데 가끔 발작을 하는가봐. 의사가 얘기했을 리 없는데 아들이 에미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고는 하나봐. 더러운 개구녕에서 나와서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구.
그 심정이 어땠을까? …… 내가 날마다 두통약을 한 알 먹는데 그날은 두 알을 먹었어.
신고하고 더 쓸쓸해졌어. 과거가 알려지면 조카들 시집가는 데 지장 있으니 그냥 조용히 지내라고 큰언니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뿌리치고 신고를 했더니, 언니하고 조카들이 발길을 뚝 끊더라구.
94년 정월부터 보조금 탔어. - P146

신빙성이 없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위안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리고 다니는 이들을 향해서. 몇 살 때 끌려갔는지, 누구한테 끌려갔는지, 어디로 끌려갔는지 분명히 대지를 못하니까. 고향 지명조차 제대로 모르는 데다, 학교에 다니지를 못해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던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걸 고려도 않고. 수십 년이 흘러 기억들이 토막 나고 뒤죽박죽 뒤섞여버렸다는 걸 모르고.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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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우려에서 기인했을 겁니다. 어쩌면 20세기 말에 생명과학과 뇌과학이 자연주의를 강력하게 내세우고 인간의 인격과 정신을 부정하게 되진 않을까 하는 우려 말입니다. 근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또한 자연계의 일원이며, 그 인격과 정신을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그런 자연주의적 인식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그가 기독교와 우연히 만난 근거가 됩니다. 이런 변화를 ‘포스트 세속화론적 전환’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 P210

테일러에 따르면 ‘세속성’이란 개념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국가·교회와의 분리, 즉 정치·종교와의 분리입니다. 이로 인해 종교는 사사화되지요. 또 하나는 신앙의 쇠퇴, 즉 사적 영역으로서 종교가 쇠퇴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테일러가 주목하는 세속성은 제3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조건 변화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를 쓴 의도를 이 제3의 의미인 세속성과 관련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제3의 의미에서 세속적 사회로서 검토하는 일이다. 여기서 내가 명확히 밝히고 싶은 특징이 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사회에서, 신앙을 갖는 것이 당연한 신자에게조차도 단순한 선택지에 불과한 사회로 변했다는 점이다. (중략)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이미 자명하지 않다. 그것은 선택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환경에 따라 신앙을 계속 갖기가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테일러는 이런 세속성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서양 근대의 5백 년을 분석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서기 1500년 무렵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도리어 2000년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불가피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테일러가 이 의문을 제기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표현주의 혹은 표현 혁명이라 부르는 현대의 상황입니다. 테일러에 따르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적 생활양식과 표현방식을 원리로 작동하는데, 패션으로 대표되는 소비자 중심주의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입장에서 보면 신앙은 본래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위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주의했으면 하는 건 테일러가 현대의 세속성을 설명할 때 결코 신앙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분명 표현주의의 입장에 서면 제도적 종교는 쇠퇴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과 연결된 종교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로 새로이 모색됩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를 적극적으로 좇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테일러는 《현대 종교의 다양성》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비기독교적인 종교, 특히 동양에 기원을 둔 종교가 융성했다. 뉴에이지형 종교의 모든 활동양상이나 인간주의적 경계와 영적인 것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든 견해, 혹은 영성과 치료를 결합한 모든 실천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더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전이라면 택하지 않았을 입장에 선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스스로 가톨릭 신자를 자인하면서 그 중추적 교리는 대부분 거부한다. 혹은 기독교와 불교를 조합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의 유무에 확신을 갖지 않은 채 기도한다.

이렇게 보면 테일러가 ‘세속의 시대’에서도 단순히 종교의 쇠퇴설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눈치챘겠지만 테일러의 세속화 논의는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서양 지역을 대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속화 문제를 고려하려면 세계 전체를 시야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최근 이슬람 원리주의의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면 서양에 국한된 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P212

특히 현대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전까지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고 새로운 발상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작업에 딱 들어맞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구체적 상황에만 몰두할 때는 전체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 현상과 거리를 두고 전체를 바라봐야 사물의 본질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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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악한 자도, 선인도, 비열한 자도, 정직한 자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가 없었다. 영리한 인간은 진정 아무것도 될 수 없고 단지 바보들만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비뚤어지고 무엇에도 쓸모없는 위안으로 나 자신을 흥분시키면서, 나만의 구석에 처박혀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 19세기의 영리한 인간은 도덕적으로 절대 어떤 성격을 가져서는 안 될 의무가 있다. 성격을 가진 인간, 즉 활동가는 대개 모자라는 인간들이다. - P442

나는 예전에는 이 방에 살았으나 이제는 이곳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 P443

당신께 맹세컨대,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이것은 병이다. 진짜 완전한 병이다. 인간의 일상 생활에는 평범한 인간의 의식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불행한 19세기에 태어나 살고 있는, 그것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계획된 도시(도시는 인위적으로 계획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뻬쩨르부르그에 사는, 이중의 불행을 짊어진 지식인들은 그들 몫으로 주어진 의식량의 2분의 1, 4분의 1만으로 충분하단 말이다. 소위 능력 있는 사람들과 실무자들이 사는 데 필요한 정도의 의식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 P444

선한 일에 대해, 그리고 이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관해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나는 더욱더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었고 그곳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 마치 우연처럼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었던 것처럼 발생한 데에 있다. 마치 이것이 나의 정상적인 상태이고, 결코 병도 타락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러한 타락과 싸움을 벌이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은 이것이 정상적인 나의 상태라는 것을 내가 거의 믿게 되는 것으로(아마도 사실은 믿었을지도 모른다) 끝났다. 그런데, 처음 얼마 동안은 이 싸움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아 내야 했는지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살면서 내 자신에 대해 이것을 비밀로 했다. 나는 수치스러웠다(심지어는 지금도 수치스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은밀한, 비정상적인 비열함에서 오는 쾌감을 느꼈고 어떤 기분 나쁜 뻬쩨르부르그의 밤에 방구석으로 돌아와서는 오늘 또다시 추잡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리고 저지른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내면적으로 은밀하게 자신을 갉아먹고, 갉아먹으며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쓰라린 비애는 어떤 치욕스럽고 저주받을 달콤함으로 바뀌었고, 드디어는 결정적이고 진지한 쾌락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다. 쾌락으로, 쾌락으로 말이다! 나는 이것을 확신한다. 나는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도 이 같은 쾌락이 있는지 알고 싶다고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설명하겠다! 이 경우의 쾌락이란 바로 자신의 비하를 너무나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즉 당신 스스로 마지막 벽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끼며, 이것이 추잡한 일이지만 달리 방도가 없고, 이미 당신에게는 출구가 없다는 것, 그리고 결코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는 시간과 믿음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당신은 아마도 변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며, 원했다 할지라도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변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 모든 것이 강화된 의식의 정상적이고 기본적인 법칙에 의해, 그리고 이러한 법칙들로부터 기인하는 무기력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며, 이때 당신은 단지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강화된 의식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열한 인간이, 자신이 실제로 비열한 인간이란 것을 느끼고, 이것을 위안처럼 여기고 있다면 이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만두겠다……. 에이,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다. 나는 무엇을 설명하려는 건가? 이때의 쾌락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설명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끝까지 가볼 것이다! 나는 그래서 손에 펜을 잡은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나는, 곱사등이나 난쟁이처럼 의심이 많고 성을 잘 낸다. 그러나 정말로 나에게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누군가 내 뺨을 때리는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도 나는 심지어 이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다. 아마도 나는 이때 내 특유의 쾌락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물론 절망의 쾌락을 말한다. 절망 같은 것에도 가장 열렬한 쾌락들이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낄 때 특히 그렇다. 그리고 따귀 같은 것을 맞는 바로 그 때,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온통 기름칠해 버린 것 같은 의식을 느끼고 답답해 한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든 일에 죄가 있는 것은 그 첫째가 바로 나구나>라고 느끼면서 끝나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 없이 죄의식을 느끼는 일은 흔히 말하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자면 무엇보다도 치욕적인 일이다. 내게 죄가 있다. 왜냐하면 첫째로, 나는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보다 영리하기 때문이다(나는 항상 내 주위의 모든 이들보다 내가 영리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때때로 심지어 이 사실을 수치스러워했다는 것을 믿어 주기 바란다. 적어도 나는 전생애를 통해 웬일인지 옆을 보고 살았고 절대로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 외에도, 내게 죄가 있다. 만인 내게 관대함이 있었더라면, 그것이 아무 쓸모 없다는 의식 때문에 나만 더욱더 고통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내 도량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용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욕을 준 사람은, 아마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나를 때렸을 것이며, 자연의 법칙이란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법칙이란 어쨌든 치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완전히 옹색해지기를 원했다 할지라도, 정반대로 나를 모욕한 사람에게 복수하기를 원했다 할지라도, 나는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에게도 복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는 결심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심을 할 수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무엇 때문에 결심을 할 수 없었을까? 이것에 관해 나는 특별히 두어 마디만 하고 싶다. - P445

예를 들어 이 쥐 또한 모욕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그런데 쥐는 거의 항상 모욕을 받고 있다). 그리고 또한 복수하기를 갈망한다고 해보자. 쥐 내면에서 증오감 같은 것은, 아마도 자연과 진실의 인간보다 더욱더 깊이 쌓이게 될 것이다. 모욕을 준 이에게 이와 같은 증오심으로 복수하려는 혐오스럽고 저열한 욕구는 아마도 그 자연과 진실의 인간보다 이 쥐 내부에서 더욱더 추악하게 용솟음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자연과 진실의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 우둔함 때문에,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복수를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쥐는 자신의 날카로운 의식의 결과로, 이런 경우 정당성을 부정한다. 우리는 마침내 문제의 본질에 다다르게 되었다. 바로 복수라는 행동이 그것이다. 불행한 쥐는 원래의 혐오스러움에 덧붙여 혐오스러움만큼이나 많은 질문과 의심 등의 형태로 자신의 주위에 이미 장벽을 쌓아 올렸다. 그 쥐는 한 가지 문제에 다른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계속 덧붙여서, 그 주위에는 어떤 운명적인 영문 모를 일과 악취 나는 진흙탕 같은 것이 쌓이게 된다. 이것은 회의, 불안, 그리고 직선적인 사람들이 내뱉은 침으로 구성된 것이다. 직선적인 사람들은 환희에 차서 그 쥐 앞에 선 채 재판관과 독재자처럼 쥐를 큰 소리로 비웃고 있다. 물론 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모든 것에 대해 발을 구르는 것밖에 없다. 자기 자신도 믿지 않는 가장된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수치스럽게 자신의 쥐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곳, 자신의 더럽고 악취 나는 지하에서, 우리의 모욕받고 타격받고 비웃음을 당한 쥐는 곧 차갑고 독기 서린, 그리고 수세기 동안 지속되는 증오심에 빠져 들게 된다. 40년 동안 계속해서, 자신이 받은 가장 치욕스러운 마지막 모욕을 일일이 기억할 것이며, 자신의 환상으로 자신을 사악하게 조롱하고 화나게 하면서 이때마다 자신이 받은 모욕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들을 할 것이다. 쥐 자신은 자신의 환상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기억ㅈ하고 뒤적거리며,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구실로 자신에 대한 수많은 비난들을 생각해 낸다. 이 쥐는 복수를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때로 하찮은 방법으로 어쩐지 이따금 생각난 듯이 벽난로 뒤에서 은밀하게 복수하려고 한다. 자신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다는 것도, 자신의 복수가 성공하리라는 것도 믿지 않으면서, 그리고 복수하려는 시도들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복수당하는 사람들보다 1백 배는 더 고통스러우며 정작 복수의 대상은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 P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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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하는 육신의 울타리를 쳐 놓고 나와 남을 가르고, 나와 다른 생명 및 세계를 나누어 보는 우리들의 삶은 한마디로 자기 중심적인 삶이요 욕심 부리고 성내며 어리석은 이른바 탐진치 삼독의 삶이다. 나와 남, 나와 대상을 둘로 보면, 내 앞에 무엇을 더 놓으려 하고,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면 성내고 짜증 부리게 된다. 이런 자기 중심적 삶은 개인적으로는 이기적인 삶으로 나타나고, 다른 생명이나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비좁은 인간 중심적 삶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만을 중심으로 보아 다른 생명이나 자연을 인간의 편의를 위해 정복하고 착취하는 삶인 것이다. 이런 삶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람과 다른 생명 및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괴로운 삶일 수밖에 없다. - P343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사실 논리적 귀결을 기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종교 상황의 문제점이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이고, 다종교 현상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도 증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종교 사회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극단적인 종교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요한 이유는 2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서 강력한 사회 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위 공동체 간에 분쟁의 소지가 적다. 종교 분쟁이 심각한 사회와 달리 한국은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지만, 양 진영이 종교를 한 가지씩 나누어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쪽에서는 종교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다른 한 쪽 역시 하나의 종교가 압도하고 있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일 남북한이 각각 하나씩의 신앙을 나누어 가진 채 대립하고 있다면 분쟁의 정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며 통일을 향한 전망도 그만큼 어두울 것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들이 종교적 심성이 분열이나 개성보다는 통합과 총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해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생활을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따르고 있다. 특히 조상 제사는 전적으로 유교의 것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기독자들조차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점차 수용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기독자를 포함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기거나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는 등, 인생관이나 가치관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든 간에 합리적 이성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거나 일생의 중요 고비에 당면하면 대체로 점 치는 집을 찾거나 굿거리를 마련한다. 한국인들은 새로 들여온 점보 제트기나 슈퍼 컴퓨터 앞에서도 고사를 지내야 안심한다. 대규모 관급 공사의 기공식에서 해당 부서의 수장(首長)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얹거나 막걸리를 올리는 광경 역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무속적이다. 요즈음은 예수를 몸주 혹은 귀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기꺼이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구성상의 성격과 한국인의 심성이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이나 알력이 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심각한 종교 분쟁을 겪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종교 상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알력과 반목의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과 알력에서 비롯되는 불쾌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종교 가정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가족 구성원들끼리 불안을 겪거나 다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다툼은 심각한 가정 불화로 비화되기도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갈등과 알력을 분쟁 직전의 수준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알력 때문에 종종 저질러지는 방화 사건은 어쩌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팔만대장경 같은 민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갈등과 알력이 집단적인 분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차원에서는 분쟁의 잠재력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390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 실재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여 웃고 울고 성내고 기뻐한다. 타종교인을 위한 헌신은 타종교인을 위한 ‘공감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느끼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타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 없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공감적 이해도 없이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 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야말로 진정한 공감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 P401

4) 고정적 실체를 부정하는 종교
독자들은 지금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 책이 언제 어디서나 책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불교는 실체적 존재로서의 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책이란 존재는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책으로 존재한다. 즉,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물체에 담긴 내용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책이 존재한다. 그 물체를 베고 누우면 그것은 책이 아니라 베개이다. 그 물체 위에 그릇을 올려놓으면 그것은 그릇 받침이다. 찢어서 오물을 닦으면 휴지가 된다. 틀어쥐고 때리면 무기가 될 것이다. 심지어 뜯어먹는 염소에게는 음식이 된다.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그 물체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 의해서 책이 되는 것이다. 그 물체 자체가 언제나 스스로 음식인 것이 아니라 뜯어먹는 염소에 의해서 음식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이처럼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불교는 자신을 어떤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연기의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드러나는 것이 불교의 자기 개방성이다. 자신을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존재에게 자기를 열어 놓는 것이다. 이 자기 개방성은 자신을 절대시하거나 완결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놓인 상대에게 영원히 열려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임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 - P407

5) 상대적 한계를 고백하는 종교
불교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성격을 대체로 4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눈·귀·코·혀·피부의 5가지 감각 기관이 각각 그 상대인 색깔·소리·냄새·맛·사물을 감지하는 인식으로서 전오식이라 하고, 둘째는 의식이라는 여섯 번째 감각 기관이 이 5가지의 감각적 인식들을 통합하여 모든 존재들에 내재하는 원리를 인식하는 제6식이다. 셋째는, 제7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과 사물의 원리를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성격을 갖는다. 넷째는, 제8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과거의 행위에 영향을 받아서 인식하거나, 현재의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도록 현재의 행위의 결과를 간직하여 미래로 전달해 주는 씨앗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인식 과정의 성격을 파악하는 이러한 불교의 입장에서 역시 불교의 자기 개방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분명 사물을 자기 중심적으로 인식한다. 술이 반쯤 담긴 술병을 앞에 놓고 ‘이제 반병밖에 안 남았구나’와 ‘아직 반병이나 남았구나’로 전혀 다른 인식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은 인간 자신의 상대적인 한계를 역설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인간은 반드시 과거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며 미래의 인간은 현재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다는 사실 역시 인간의 상대적 한계를 고백하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 존재가 이러한 이상 인간의 종교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어떠한 계시도 그것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다. 계시 역시 구체적이며 상대적인 역사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본다. 불교는 모든 종교가 각자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성립한 자기 자신의 역사적 한계 속에 놓여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흔히 역사적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불교는 자신의 역사적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또 한 번 불교가 철저한 자기 개방성을 갖고 있으며, 그로부터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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