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왕부지철학을 연구한 목적을 여기에 꼭 밝히고 싶다. 그 목적은, 좀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리 동양의 전통학문 내부에서 현대화를 추동시킬 수 있는 합리성과 이상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바 현대화란 비교적 서구화에 부합하는 성질에 경도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서구화란 구체적으로 말해서, 과학기술의 선진화요 민주적인 정치제도이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현대화는 이런 것이 아니다. 물론 현대화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선진화도 필요하고 민주적인 정치제도도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선진화는 그것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담당해야 할 것이요, 민주적인 정치제도는 정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범위에 속한다. 철학의 임무는 그들에게 필요한 이론 근거 혹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른바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민주적인 정치제도가 우리 인류에게 떠안기는 문제들과 그로 인한 위기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과학기술과 민주제도의 이론적인 기초를 검토해야 하고, 그 목적과 이상을 반성해야 한다. 필자가 현대화를 추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리성과 이상성은 바로 이런 검토와 반성의 기점 혹은 근거이다. 물론, 이런 합리성은 결코 이론이성에 치우친 서구의 합리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론이성과 도덕이성을 함께 중시하지만 도덕이성이 주도자가 되는 합리성이다. 동양의 문화전통에서 가장 특출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도덕성이다. 그러나 도덕이 비록 핵심이지만, 단지 도덕만으로는 인류가 이상에 도달하려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일련의 곤란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원칙 이외에, 또한 우리의 문화전통 안에서 도덕이성과 이론이성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둘을 회통할 수 있는 원칙을 발굴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발굴하려는 원칙은 일종의 ‘전체이성’에 관한 원칙이다. 이 원칙은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근거를 확립시켜 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곧 인문성·인문원칙이어야 한다. 물론, 자고이래로 인문정신은 동양문화전통의 주된 내용의 하나였으며, 이른바 유학이 표방하는 것 또한 이런 정신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인문정신은 오직 도덕원칙만을 강조하고 이론이성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서구처럼 근대화를 추동시키지 못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인문원칙은 하나의 전체이서의 원칙이다. 이런 이성은 왕부지 철학에서 비로소 발아하기 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점은 그의 「심론心論」을 살필 때 상세히 논의될 것이다. 왕부지의 최종적 포부는 바로 전체이성에 근거한 인문정신의 부단한 심화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일생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실천한 것 또한 학문이라는 영역에서 그 인문정신의 의의를 분명하게 밝히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말하는 합리성이 바로 인문성이다. 혹은 인문성은 적어도 합리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왕부지철학을 연구하여 동양문화전통 안의 합리성을 천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19세기 중엽이래로 서구문명의 타격으로 혼미함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동양문화로부터, 서구문명이 남겨놓은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합리성, 즉 인문성을 발견하여 인류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해보자는 것이다. - P8

앞 절에서 우리는 이미 도의 작용을 본체 차원에서 볼 경우와 천지만물의 입장에서 볼 경우로 구분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분명 천지만물의 입장에서 보는 도이다. 즉, 여기에서의 도란 특정 사물이 그런 사물이 되는 규율이자 법칙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사물이 없다면 그 사물의 규율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서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100 다만 사람들이 살피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결코 보편적 혹은 일종의 유적 공통 규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개별적 혹은 특정한 하나의 사물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그 특정한 개별 사물의 규율은 반드시 그 존재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규율은 존재의 규율이지만, 존재는 규율의 존재일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필자에게는 필자가 되는 개인적인 특성과 규칙이 있다. 만일 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특성과 규칙 또한 있을 수 없다. 종합하자면, 어떤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의 규율도 존재하고, 사물이 사라지면 그 규율 또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세상은 오직 기물일 뿐이다." 이런 관점은 동정이 음양의 동정이고 ‘신’ ‘도’가 기체의 그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존재의 각도에서 말한 것이다. 구체적 존재와 그 작용의 관계 문제에 대해 왕부지는 일관되게 존재의 우선성을 주장했다. - P99

그러나 또한 왕부지가 생각하기에,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설령 모두가 음양이 변화하여 그 형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음양의 덕성과 그 시기 및 자리가 적당한지 여부에 의해 그 사물이 온전한지가 결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전체 우주에는 마치 여전히 무언가 결핍된 사물이나 현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정체’는 "모두 지극히 풍족한 건곤으로부터 충분히 취하여 우주의 성대함을 극진하게 하며", "배합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천지 사이에 위대한 아름다움을 스스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른바 혹 결핍되어 보이는 것 같은 사물이나 현상은 단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만 그런 것일 뿐이다. 만일 전체 우주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그렇게 혹 결핍되어 보임 또한 완전하고 원만한 우주를 구성하는 일부분일 뿐이다. 혹 결핍되어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왕부지는 이른바 "열두 자리 음양"과 "반은 감춰지고 반은 드러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 P147

왕부지에 따르면, ‘무’를 주장하는 사람은 ‘유’를 주장하는 사람의 자극을 받아 그 주장을 타파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무’란 모두 특정한 ‘유’에 상대해서 그 특정한 ‘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북이에게 털이 없다는 것은 털이 있는 개에 상대해서 말한 것이고, 토끼에게 뿔이 없다는 것 또한 뿔이 있는 사슴에 상대해서 말한 것이다. 왕부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떤 주장도 그 근거가 있어야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를 근본으로 하는 주장은 여하한 시공, 즉 고금과 상하 사방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왕부지는 또 "세상에 어떻게 소위 무란 것이 있겠는가? 물건에 혹 있지 않다면, 사건에는 없지 않다. 사건에 혹 있지 않다면, 이치에는 없지 않다. 찾지만 얻지 못하니, 나태해져서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고서 무라고 말할 뿐이다." "노장의 무리는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에서 결단코 161 무라고 말한다. 비루하기가 심하구나!" "저들은 무명을 천지의 시작으로 여기고, 전부 소멸함을 진공의 창고라고 여긴다. (이는) 마치 소경이 사물 있음을 보지 못하여 사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어리석음은 나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왕부지는 또한 "무란 작용의 창고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이른바 무란 결코 절대 허공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지만 사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 P160

여기에서 말하는 괘는 건상진하의 ‘무망’괘이다. 왕부지가 생각하기에, 무망괘는 세 양이 위에 있는데 세 양은 하늘을 표시하므로 그 이치가 정확하고, 두 음이 그 아래 있는데 세 음이 아래 있어야 비로소 땅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성대함의 끝이 아니다." 그리고 첫 양효가 두 음 아래에서 "진동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기와 자리가 올바르지 않아서 이치적으로 있을 수 없고 다만 우연히 발생한 변화된 양태일 뿐이다. 그래서 매우 잘못되고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의 이해일 뿐이다. 사실상, 전체 우주는 늘 같은 형태로 그 순서를 규정하지만, 또한 몇몇 ‘변태’에 근거해서 "헤아리지 못하는 바뀜"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몇몇 ‘변태’ 또한 합리적 전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헤아리지 못하는 바뀜"도 결코 잘못되거나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왕부지는 또한 "열로 채워진 것은 하늘이고 아홉으로 부족한 것은 사람이다. 하늘의 수를 사람에게서 추구할 수 없고 사람의 수로 하늘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몹시 잘못되고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현상도 실제적으로는 모두가 진실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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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왜 일상적 삶에서 권위주의는 건재할까? 권위주의적 성격 中

*권위주의: 어떤 일에 있어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


우리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보호와 권위에 의존하는 삶을 살다가 자립할 때에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하면 오히려 자유가 부담스러워진다. 이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새로운 보호와 권위를 찾게 되는데, 이렇듯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권위에 기대려는 심리 상태가 바로 ‘권위주의적 성격‘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 프롬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권위주의적 생각의 공통적인 특성은 삶이 자기 자신, 자신의 관심, 자신의 소망 등이 아니라 그 밖에 있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확신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힘에 굴종하는 데 있다.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나오는 용기란 본질적으로 운명 또는 그의 상관이나 지도자가 그에게 요구한 것을 견뎌내는 용기다. 그 괴로움을 끝내거나 적어도 완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용기는 금물이다. 불평 없이 견디는 것이 최상의 미덕이다. 운명을 바꾸지 않고 운명에 복종하는 것이 권위주의적 성격의 영웅주의다." - P100

영국 심리학자 애드리언 펀햄Adrian Furnham은 "권위주의자는 복잡성, 혁신, 새로움, 모험이나 변화를 옹호하는 대상을 혐오한다. 갈등과 의사결정을 싫어하며, 자신이ㅡ 개인적인 감정과 욕구를 외부적인 권위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규칙, 규범, 관습에 복종하며 다른 사람들 또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정리하고 통제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그는 단순하고 경직된, 즉 융통성이 없는 법이나 도덕, 의무와 규칙, 과제를 좋아한다. 이런 성향은 예술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투표를 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 P104

옳건 그르건 우리는 이런 경우 별 고민 없이 갑질을 저지른 사람에게 갑질의 책임을 묻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갑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실 중요한 건 갑질을 저지르는 상사를 둘러싼 개인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회사 전체, 더 나아가 사회 전반의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이 생존 경쟁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한다면, 제발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져달라고 등을 떠밀어도 그런 성격을 가질 리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스로 고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세상은 어떤가? 왜 ‘갑질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갑질을 저지르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생존 경쟁에 도움이 된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조직 생활에서 널리 떠도는 속설 가운데 "잘해주는 사람보다는 못살게 구는 사람에게 잘해주려 애쓴다"는 말이 있다. 물론 약자의 처지에서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처세술 메커니즘은 권위주위적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그런 토양에서 자라나는 독버섯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권위주의 시대는 갔다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권위주의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이기도 하다. - P106

128 160여 년 전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자신의 마지막 책인 『부록과 추가』(1851)에서 "고슴도치들은 겨울에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제시했다. 고슴도치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 모여들어 체온을 나누는 습성이 있다는데, 같이 붙어 있게 되면 가시에 찔리고 떨어져 있자니 추운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답은 가시에 찔리지 않을 정도의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모이는 가까움과 멂의 균형이다.
인간 역시 인간관계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고슴도치와 같다. ‘고슴도치의 딜레마hedgehog‘s dilemma‘는 곧 ‘인간의 딜레마‘인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그런 말을 했나 보다 하는 정도로 묻힐 수도 있었던 이 개념을 널리 알린 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다. 프로이트가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1921)에서 쇼펜하우어를 인용함으로써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심리학의 영역에 편입되었고, 이후 수많은 저자에 의해 자주 거론되는 유행어가 되었다.
어떤 개념이건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용하다보면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점점 더 확장되어가기 마련이다. 정성훈은 "쇼펜하우어는 이 현상을 통해 외부로부터 따뜻함을 구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비관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여성을 비하하여 결혼도 하지 않았던 그에게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한편 인간관계가 점점 더 계산적이 되어가는 현대에 와서, 고슴도치 딜레마는 쇼펜하우어가 쓴 의미와는 달리 아무리 타인에게 다가가려 해도 두려움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고민을 절실히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인간관계에 큰 부담을 느끼는 젊은이들의 행태를 지적하는 용도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예컨대, 이주형은 "서로 알아가고 신경 써주면서 시간과 돈과 정신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혼자 편하게 지내는 것이 낫지"라고 생각하는 ‘신인류 고슴도치‘들이 늘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래서 오늘도 온라인상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들과의 적당한 거리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매일 메신저와 댓글을 통해 소통하는 동안 가시는 더욱 뾰족해지고 날카로워진다. 앞으로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하고만 소통하는 ‘관계의 편식‘이 일반화될 것이다. 이것이 당장은 세상 살아가는 데 별 불편함을 주지 않을 것이다. 갈수록 쿨한 사람, 쿨한 관계들로 넘쳐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단거리경주가 아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거시적 관점에서 사회 전체의 문제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는 『사회의 재창조: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찾아서』(2007)에서 이 딜레마는 ‘인간 협력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독립성의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상호 의존성을 인정한다. 우리는 온기와 우정과 도움을 나눌 다른 누군가를 펼요로 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한편으로 지나친 접근성은 긴장을 유발한다. 우리는 개인성을 개발하기 위한 사적인 공간을 필요로 한다. 서로의 비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밀실 공포증을 유발할 만큼 숨 막히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논의를 연장시키면 결국 ‘공동체주의 논쟁‘으로까지 이어지겠지만, 공동체주의 문화가 강했던 한국에서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가족주의가 야기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다. 그 딜레마는 ‘가족 파시즘‘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혜성의 장편소설  『마요네즈』에 나오는 "가족은 안방에 엎드린 지옥", 배수아의 장편소설 『랩소디 인 블루』에 나오는 "가족은 흡혈귀"라는 표현 등이 말해주듯이, 이미 여러 작가가 ‘가족 파시즘‘을 고발하고 있다.
한국인에겐 평소 잠재된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겉으로 불거져 나오는 특별한 기간이 있는데, 그게 바로 명절이다. 가족 또는 친족이라는 미명하에 말로 상처를 주는 한국형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은 ‘적정거리‘를 무시함으로써 "추워도 좋으니 뿔뿔이 흩어져 살자"는 생각을 갖게끔 만드는 주범 중의 하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고슴도치의 딜레마‘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포용적 개인주의 inclusive individualism‘다. 포용적 개인주의는 물리적 접촉 없이 홀로 존재하지만 상호 연결되어 있는 개인주의로, 그 핵심은 ‘따로 그러나 같이‘라는 슬로건으로 표현할 수 있다. 포용적 개인주의는 ‘강한 연결‘을 추구했던 이전의 방식을 탈피해 개인주의적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는 배척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ties‘과 친화적이다.
포용적인 개인주의는 이미 온라인에선 예외 없이 작동하는 법칙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오프라인에선 고립된 개인임에도 온라인에선 ‘사회적 실재감social presence‘을 느끼는 방식으로 사회의 구성원 지위를 만끽하는 것이다. 사회적 실재감은 매개된 커뮤니이션에서 사람을 ‘실제 사람real person‘으로 느끼는 정도, 또는 타인과 같은 공간을 공유할 때 느끼는 기분을 말한다. 온라인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은 ‘홀로 함께 플레이하기playing alone together‘에 빠져드는데, 한 플레이어는 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 주위에 실제 플레이어들이 있다는 게 참 좋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고, 서로 자기 할 일 하다가 우연히 마주치는것도 재미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온라인 세계의 삶이 실제로 오프라인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1인 가구 비율은 이미 27퍼센트를 넘어섰고(2015년 기준 27.2퍼센트), 통계청 추계로 본다면 당장 2019년에 1인 가구(590만 7,000가구)가 ‘부부+미혼 자녀‘(572만 1,000가구) 가구를 추월하고, 2045년(1인 809만 8,000가구, 부부 + 자녀 354만 1,000가구)이면 그 차이를 2배 이상 벌리게 됨으로써 가족의 범위가 사실상 ‘개인‘으로 수렴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가수 나미는 늘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관계에 대해 ‘좋아하는 우리 사이‘ 멀어질까 두렵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의심도 없이 그런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고슴도치 이야기는 우화였지만, 인간은 점점 고슴도치를 닮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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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사라지기를 원했다. 나는 <안정>을 갈망했다. 나는 지하에 혼자 있고 싶었다. 나는 <실제의 삶>을 사는 데 매우 서툴렀기 때문에 그것은 거의 숨도 못 쉴 정도까지 나를 짓눌렀다. - P598

정말 우리는 참된 <실제의 삶>을 거의 노동이나 근무 같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속으로 책에 씌어진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때때로 소란을 피우며, 왜 변덕을 부리며, 왜 바라는 것일까? 우리 자신도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 만약 우리의 변덕스러운 소원들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더 나쁘게 될 그런 위인들이다. 그래, 한번 시험해 보자, 우리에게 예를 들면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하라, 우리들 중 누구라도 손을 풀어 줘 봐라, 우리의 행동 영역을 확장시켜 봐라, 감독을 약하게 해봐라, 그러면 우리는 아마도……. 나는 당신에게 확언한다. 우리는 곧 다시 한번 감독받게 해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 말 때문에 당신이 내게 화를 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내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당신은 발을 구를 것이다. 「네 이야기만 해라, 지하에서의 너의 불쌍한 삶을, 그러나 감히 우리 모두라고는 말하지 마라.」 잠깐만, 신사 양반, 나는 그 모두라는 표현으로 나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내가 관련되어 있는 한, 나는 단지 내 인생에서 당신이 감히 절반도 실행할 엄두도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의 비겁함을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당신 자신을 속이면서, 그것에 의해 위안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 비하면, 내가 당신보다 더욱더 <살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 자세히 봐라! 결국 오늘날 우리는 정확히 이 <살아 있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며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혼자 내버려둬 봐라, 책 없이. 그러면 우리는 곧 혼란에 빠질 것이고 길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합류해야 할지도,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도,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들이, 진정한 자신의 육체와 피를 가진 그런 인간들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며 전례가 없는 일반적인 인간 같은 것이 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사산아들이다. - P602

물론 불협화음이란 가공할 만한 것이며, 사회가 우리 안에 조성하는 불균형도 소름끼치는 것이다. 외부적인 일들과 내부적인 일들은 평형 상태에 있어야 한다. 외부적인 경험들이 결여되면 내면적인 삶의 체험들이 우위를 점하게 되기 때문인데 이것은 가장 위험한 것이다. 신경 과민과 환상이 인간의 의식 안에 너무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모든 외부의 돌발 사건들은, 습관의 결여 때문에 거대해 보이며 어쨌든 놀라운 것이다. 우리는 삶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 P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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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이 인간을 상이한 얼굴들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이한 종류의 심성과 기질로 만든다고 믿는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심성과 기질의 경향에 따라서 행동한다. 그러므로 시대와 상황이 다양함에 따라서, 어떤 인간들은, 자신들의 처신방식이 시대와 부합하면, 자신들의 목적을 완전하게 성취한다. 반면에 자신의 처신방식이 시대와 상황에 잘 부합하지 않는 인간은 성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상이한 방식으로 행동한 두 사람이 동일한 결과를 얻는 사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방식은 주어진 상황이 나라나 국가마다 광범위하게 다르다는 점을 전제할 때, 각자가 행동하는 상황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은 종종 변화하고(일반적으로도 그렇고 또한 특정한 장소에서도 그렇다), 인간은 자신의 관념이나 방법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에, 한 사람이 어떤 때는 성공하고 다른 때는 실패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기실 시대와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사려 깊고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상 성공할 수 있을 것이며(아니면 적어도 실패는 면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현명한 사람은 별과 숙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인 셈이 된다. 그러나 그토록 사려 깊은 사람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 이유란, 첫째, 인간은 근시안적이고, 둘째, 자신들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명은 가변적이고 인간을 자신의 굴레에 씌우며 인간 위에 군림한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이 견해를 확인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견해는 그러한 사례들에 근거한 것이며, 그 사례들은 나의 결론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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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나는 내 동료들과 교제를 지속하지 못했고 서로를 욕한 후 우리는 곧 헤어졌다. 그때 아직 경험이 적은 청년기의 미숙함 때문에, 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까지 그만두었다. 나는 쉽게 그들과 절교를 했다. 그런 일은 딱 한 번 있었던 것이고 나는 보통 언제나 혼자였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독서로 보냈다. 나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모든 것을 외부의 감각들로 잠재우기를 원했다. 외부의 감각들 중에서 내게 유일하게 가능했던 것은 독서였다. 독서는 물론 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나를 흥분시켰고, 기쁘게 했으며, 괴롭혔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나를 대단히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행동을 원했다. - P498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 친구들에 대한 필요가 많아졌다. 나는 그들 중 몇 명을 가까이 끌어들이려고 노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는 언제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드러났고 저절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한때는 친구라고 할 만한 아이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는 폭군이었다. 나는 그의 영혼에 대해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길 원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에 대한 경멸감을 불러일으키길 원했다. 나는 그에게 그 환경과 당당하고 최종적인 결별을 하도록 요구했다. 나는 나의 정열적인 우정으로 그를 겁먹게 만들었다. 나는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고, 경련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그는 순진하고 복종하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완전히 굴복하자 나는 곧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마치 그를 패배시키고, 오직 그의 굴복만을 정확히 필요로 했던 것처럼. 그러나 나는 아무도 패배시키지 못했다. 내 친구 또한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았고 매우 보기 드문 예외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내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예정되어 있던 특별 근무를 떠나는 것이었고, 과거에 저주를 퍼붓고 먼지 속에 그것을 버려 두는 것이었다……. - P524

「말라깽이가 되었군! 쟤 바지 좀 봐!」 <오, 빌어먹을 바지! 바로 조금 전에 즈베르꼬프는 이미 무릎 위에 묻어 있는 노란 얼룩을 발견했다……. 오, 무슨 상관이냐!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야 한다. 모자를 집어 들고는 말없이 떠나야 한다……, 경멸하기 때문에. 내일 결투가 있을지는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악당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확실히 7루블이 아니야. 그들은 생각하지도 모르지……. 제기랄! 나는 7루블에 관해선 신경 안 써! 나는 이 순간에 떠날 거야!>
물론 나는 남았다. - P533

「리자, 넌 날 경멸하니?」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녀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없어 몸을 떨며 말했다.
그녀는 당황했고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차 마셔!」 나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물론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가를 치를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에 대한 무서운 분노의 감정이 갑자기 내 마음속에 끓어 올랐다. 나는 내가 그녀를 죽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는 그녀가 여기 있는 동안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속으로 맹세를 했다. 나는 <그녀가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 P590

그런데 갑자기 그때 이상한 상황이 발생했다.
나는 책에서 읽은 대로 상상하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몽상들 속에서 미리 꾸며 놓은 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속에 그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그 이상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상한 상황이란 내가 모욕하고 짓밟았던 리자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이해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그녀는, 여자가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다면 항상 무엇보다도 먼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즉, 나 또한 불행하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 P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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