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애를 말하다 -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그리고 사랑이 없는 무성애, 다시 쓰는 성의 심리학
앤서니 보개트 지음, 임옥희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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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1 그런데 도대체 이 연구자들이 양의 성적 취향을 연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양치기 농부들에게 양의 생산성을 이해시키고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양치기 농부들이 원하는 것은 종자 숫양이 새끼를 많이 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암양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숫양을 ‘포‘(FOR, Female Oriented Rams : 암컷 취향의 숫양)라고 이름 붙였고, 숫양에게 매력을 느끼는 숫양은 ‘모‘(MOR)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 쪽에도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숫양은 ‘노‘(NOR)라고 불렀다.
놀랍게도 ‘모‘의 비율이 상당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노‘의 비율도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었다. 찰스 로젤리와 그의 연구자들은 ‘지난 2년 동안 584마리의 양을 실험했다. 이 중 12.5%는 무성애였고 55.6%는 암컷에 올라타서 사정을 했으며 9.5%는 다른 수컷과, 그리고 22%는 수컷과 암컷 모두와 성행위를 했다.‘라고 논문에 실험 결과를 요약했다.
설치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들의 이런 성적 다양성이 테스토스테론의 순환과 관계가 있다는 강력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무성애 양들, ‘노‘는 ‘포‘나 ‘모‘에 비해 테스토스테론의 수준이 낮지 않았다. 이것은 뇌를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하는 부모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무성애적인 양들의 성적 취향이 발달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양들은 인간의 성을 이해하는 것과 특별한 연관이 있다. 사실상 인간의 성적 취향을 동물과 비교하는 데는 설치류보다는 양이 더 낫다. 인간의 경우 남성이 다른 남성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것과 유사하게, ‘모‘는 활발하게 다른 수컷들과 성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따라서 사람과 양의, 무성애를 포함한 성적 취향은 뇌의 특정 부위가 부모의 호르몬에 영향을 받아 구성되는 것과 서로 유사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 연구 결과가 암시하는 것은 뇌 시상 하부의 성 결정핵이라고 불리는 SDN-POA(Sexually Dimorphic Nucleus of Preoptic Area, 성적으로 동종 이형인 시색전핵야)의 구조적 차이가 양의 성적 취향과 관계가 있으며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아직도 ‘노‘의 뇌가 양의 성적 취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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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힘 - 2012 시대정신은 '증오의 종언'이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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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53년 전 영국의 작가이자 과학자였던 C. P. 스노우는 인문 ·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과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문제가 현대 서구 문명의 중대한 장애물이자 심각한 위협이라고 우려했다. 그런 ‘두 문화‘의 폐해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이과‘ 편 가르기를 하는 한국에서 양상을 달리해 나타나고 있다.
아는 분은 잘 알겠지만, 지금 한국 고등학교에서 ‘문과-이과‘ 구분이 낳는 폐해는 매우 심각해 구분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문제를 극복해보겠다고 ‘융합‘을 외치곤 있지만, 그 수준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과 출신과 이과 출신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지만, 이야기를 깊이 들어가보라. 정말 소통이 잘 안된다. 정치나 이념 문제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문과 · 이과 모두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에 길들어 각각 그 내부에서도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문과 출신들이 훨씬 더 심각하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사실상 문과 출신들이 지배해왔는데, 이게 불필요한 이념 투쟁을 격렬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야권에서 누군가가 ‘실용주의‘좀 하자고 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변절‘이라고 공격하는 것도 그 벌떼 속에 문과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론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경제향우 정치향좌經濟向右 政治向左‘ 실용주의 노선을 관철시켜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 대국으로 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거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이과 출신이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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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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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DNA 중합체 효소가 복제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면 돌연변이가 생긴다. 그러나 중합체 효소가 실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태양에서부터 오는 방사능 입자나 자외선 광자도 돌연변이의 요인이 된다. 또 우주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높은 에너지의 우주선 입자나 주위 환경의 화학 물질 때문에 돌연변이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뉴클레오티드를 변화시키거나 핵산의 끈을 꼬거나 묶는다. 돌연변이율이 너무 높으면 40억 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온 진화 유산의 탑이 송두리째 무너진다. 반대로 너무 낮으면 미래의 환경 변화에 적응할 새로운 종이 모자란다. 생물의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균형이 이루어질 때 새로운 환경에 놀랄 만큼 잘 적응하는 생물들이 탄생한다.
DNA 뉴클레오티드 하나가 바뀌면 그 DNA가 지정하는 단백질의 아미노산 하나에 변화가 초래된다. 유럽 사람들의 적혈구는 대체로 둥글다.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들 중에는 적혈구가 초승달이나 낫처럼 생긴 사람들이 있다. 낫 모양의 적혈구는 산소를 둥근 것보다 덜 운반하므로 빈혈증을 유전시킨다. 그렇지만 말라리아에는 강한 저항력을 제공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것보다 빈혈증과 함께 살아가는 게 낫다. 이렇게 두드러진 차이가 뉴클레오티드 하나에서 유발되는 것이다. 혈액 기능의 차이는 적혈구의 경우처럼 현미경 사진으로도 쉽게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변화인데, 그렇게 큰 변화가 그 작은 뉴클레오티드에서 왔다니 놀라울 뿐이다. 인간 세포 하나에 들어 있는 뉴클레오티드의 총수는 대략 100억 개나 된다. 어마어마한 수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100억 개 중의 단 하나가 그렇게 큰 차이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른 뉴클레오티드들에서 생긴 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무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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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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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물은 제작과정에 종속되는 생산품이 아니다. 사물은 인간에 대해 일정한 자율성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일정한 권위를 획득한다. 사물은 인간이 수용하고 따라야 할 세계의 중심이 된다. 제약 작용을 하는(사물적으로 만드는) 사물 앞에서 인간은 제약받지 않는 자(사물적으로 되지 않은 자)를 자처하며 반항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신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개입하는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를 상정한다. 신이야말로 제약받지 않는 자der Un-Bedingte이다. 세계는 탈소여화되고 전면적인 제작의 대상이 됨에 따라 완전히 신이 없는 상태가 된다. "궁핍한 시간"은 신이 없는 시간이다. 인간은 마땅히 "사물적으로 제약된 존재" "유한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 죽음을 폐기하려는 모든 시도는 신성모독이며 인간적 간게일 뿐이다. 죽음의 폐기는 결국 신의 폐기로 이어질 것이다. 하이데거는 고통받는 인간, 고통의 철학자로 남았다. 고통받는 인간만이 "영원한 것"의 향기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하이데거라면 죽음의 폐기가 안트로포스(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불멸의 존재가 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새로이 발명해야 할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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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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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디지털 무간격은 가까움과 멂의 모든 변주 형태들을 제거한다. 모든 것이 똑같이 가깝고, 똑같이 멀다. "흔적과 아우라. 흔적은 가까움의 현상이다. 가까움이 남겨놓은 것이 아무리 멀다고 해도. 아우라는 멂의 현상이다. 멂이 불러일으킨 것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아우라에는 타자, 낯선 자, 수수께끼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디지털 투명사회는 세계의 아우라를 없애고, 신비를 없앤다. 포르노 영상의 일반적인 기법인 과잉근접과 과잉조명은 모든 아우라적인 멂, 에로틱한 것의 핵심인 멂을 파괴한다. - P16

16-7 포르노에서는 모든 몸이 똑같다. 이 몸들은 또한 똑같은 몸의 부분들로 분열한다. 일체의 언어를 빼앗긴 몸은 성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이 성적인 것은 성별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차이를 알지 못한다. 포르노그래피적인 몸은 더 이상 "그 안에 꿈과 신성이 각인되는" 현장도, "호화로운 무대"도, "동화와 같은 표면"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혹하지 않는다. 포르노는 몸뿐만 아니라 소통 자체의 완전한 탈서사화, 탈언어화를 추동시킨다. 바로 이 점에서 포르노는 외설적이다. 벌거벗은 육체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유희에는 가상이, 비진실이 필요하다. 벌거벗은 포르노그래피적 진실은 어떠한 유희도, 유혹도 허락하지 않는다. 성과로 간주되는 성 또한 모든 형태의 유희를 몰아낸다. 성은 완전히 기계화된다. 성과, 성적 매력, 피트니스를 명령하는 신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몸을 최적화해야 하는, 기능적 대상으로 획일화한다. - P16

35 진정성의 강제는 자아로 하여금 자신을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자아의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다. 진정성은 만인을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 만든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자아는 자신을 생산하고, 자신을 실행시키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다. 진정성은 판매 논리다.
오로지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의 노력은 타인들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낳는다. 같게-만들기의 논리는 다름을 같음으로 바꾼다. 그 결과 다름의 진정성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고착시킨다. 이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을, 다시 말해 잡다함만을 허용한다. 신자유주의적 용어로서의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다. 이런 잡다함은 어떠한 경제적 활용도 거부하는 상이성과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동형성이다. 같음은 다름을 관통하여 계속 자신을 고수한다. 다름의 진정성은 오히려 억압적인 획일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동형성을 관철시킨다. - P35

41-2 알랭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 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위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 P41

106-7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원성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융합되어버릴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적인 핵융합은 치명적이다. 알랭 바디우도 사랑을 "둘의 무대"라고 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의도적으로 사육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착취하는 에고는 병적으로 비대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타자의 언어로서의 저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과잉소통의 소음에 파묻히고 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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