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 현상 - 신뢰받는 언론인이란 무엇인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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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이유는 이른바 ‘자아갈등ego conflict‘이 아닐까 한다. 명백한 사실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서로 다르게 알고 있다든가, 서로 간의 가치관이 달라서 오는 갈등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든가, 서로 간에 일정한 양보와 타협을 통해 해결할 수 있지만, 그조차도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아갈등, 즉 자존심의 싸움이 아니던가. 나는 그것이 결국엔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내가 많이 쓰긴 하지만 학문적으로 정립된 용어는 아니다)‘에 머물고 만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진영만을 만족시키는 거꾸로의 일방적 소통일 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에 대한 적대감으로까지 연결된다면 토론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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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애를 말하다 -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그리고 사랑이 없는 무성애, 다시 쓰는 성의 심리학
앤서니 보개트 지음, 임옥희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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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1 그런데 도대체 이 연구자들이 양의 성적 취향을 연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양치기 농부들에게 양의 생산성을 이해시키고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양치기 농부들이 원하는 것은 종자 숫양이 새끼를 많이 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암양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숫양을 ‘포‘(FOR, Female Oriented Rams : 암컷 취향의 숫양)라고 이름 붙였고, 숫양에게 매력을 느끼는 숫양은 ‘모‘(MOR)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 쪽에도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숫양은 ‘노‘(NOR)라고 불렀다.
놀랍게도 ‘모‘의 비율이 상당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노‘의 비율도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었다. 찰스 로젤리와 그의 연구자들은 ‘지난 2년 동안 584마리의 양을 실험했다. 이 중 12.5%는 무성애였고 55.6%는 암컷에 올라타서 사정을 했으며 9.5%는 다른 수컷과, 그리고 22%는 수컷과 암컷 모두와 성행위를 했다.‘라고 논문에 실험 결과를 요약했다.
설치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들의 이런 성적 다양성이 테스토스테론의 순환과 관계가 있다는 강력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무성애 양들, ‘노‘는 ‘포‘나 ‘모‘에 비해 테스토스테론의 수준이 낮지 않았다. 이것은 뇌를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하는 부모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무성애적인 양들의 성적 취향이 발달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양들은 인간의 성을 이해하는 것과 특별한 연관이 있다. 사실상 인간의 성적 취향을 동물과 비교하는 데는 설치류보다는 양이 더 낫다. 인간의 경우 남성이 다른 남성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것과 유사하게, ‘모‘는 활발하게 다른 수컷들과 성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따라서 사람과 양의, 무성애를 포함한 성적 취향은 뇌의 특정 부위가 부모의 호르몬에 영향을 받아 구성되는 것과 서로 유사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 연구 결과가 암시하는 것은 뇌 시상 하부의 성 결정핵이라고 불리는 SDN-POA(Sexually Dimorphic Nucleus of Preoptic Area, 성적으로 동종 이형인 시색전핵야)의 구조적 차이가 양의 성적 취향과 관계가 있으며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아직도 ‘노‘의 뇌가 양의 성적 취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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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힘 - 2012 시대정신은 '증오의 종언'이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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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53년 전 영국의 작가이자 과학자였던 C. P. 스노우는 인문 ·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과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문제가 현대 서구 문명의 중대한 장애물이자 심각한 위협이라고 우려했다. 그런 ‘두 문화‘의 폐해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이과‘ 편 가르기를 하는 한국에서 양상을 달리해 나타나고 있다.
아는 분은 잘 알겠지만, 지금 한국 고등학교에서 ‘문과-이과‘ 구분이 낳는 폐해는 매우 심각해 구분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문제를 극복해보겠다고 ‘융합‘을 외치곤 있지만, 그 수준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과 출신과 이과 출신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지만, 이야기를 깊이 들어가보라. 정말 소통이 잘 안된다. 정치나 이념 문제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문과 · 이과 모두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에 길들어 각각 그 내부에서도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문과 출신들이 훨씬 더 심각하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사실상 문과 출신들이 지배해왔는데, 이게 불필요한 이념 투쟁을 격렬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야권에서 누군가가 ‘실용주의‘좀 하자고 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변절‘이라고 공격하는 것도 그 벌떼 속에 문과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론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경제향우 정치향좌經濟向右 政治向左‘ 실용주의 노선을 관철시켜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 대국으로 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거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이과 출신이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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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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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DNA 중합체 효소가 복제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면 돌연변이가 생긴다. 그러나 중합체 효소가 실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태양에서부터 오는 방사능 입자나 자외선 광자도 돌연변이의 요인이 된다. 또 우주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높은 에너지의 우주선 입자나 주위 환경의 화학 물질 때문에 돌연변이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뉴클레오티드를 변화시키거나 핵산의 끈을 꼬거나 묶는다. 돌연변이율이 너무 높으면 40억 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온 진화 유산의 탑이 송두리째 무너진다. 반대로 너무 낮으면 미래의 환경 변화에 적응할 새로운 종이 모자란다. 생물의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균형이 이루어질 때 새로운 환경에 놀랄 만큼 잘 적응하는 생물들이 탄생한다.
DNA 뉴클레오티드 하나가 바뀌면 그 DNA가 지정하는 단백질의 아미노산 하나에 변화가 초래된다. 유럽 사람들의 적혈구는 대체로 둥글다.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들 중에는 적혈구가 초승달이나 낫처럼 생긴 사람들이 있다. 낫 모양의 적혈구는 산소를 둥근 것보다 덜 운반하므로 빈혈증을 유전시킨다. 그렇지만 말라리아에는 강한 저항력을 제공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것보다 빈혈증과 함께 살아가는 게 낫다. 이렇게 두드러진 차이가 뉴클레오티드 하나에서 유발되는 것이다. 혈액 기능의 차이는 적혈구의 경우처럼 현미경 사진으로도 쉽게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변화인데, 그렇게 큰 변화가 그 작은 뉴클레오티드에서 왔다니 놀라울 뿐이다. 인간 세포 하나에 들어 있는 뉴클레오티드의 총수는 대략 100억 개나 된다. 어마어마한 수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100억 개 중의 단 하나가 그렇게 큰 차이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른 뉴클레오티드들에서 생긴 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무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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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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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물은 제작과정에 종속되는 생산품이 아니다. 사물은 인간에 대해 일정한 자율성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일정한 권위를 획득한다. 사물은 인간이 수용하고 따라야 할 세계의 중심이 된다. 제약 작용을 하는(사물적으로 만드는) 사물 앞에서 인간은 제약받지 않는 자(사물적으로 되지 않은 자)를 자처하며 반항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신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개입하는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를 상정한다. 신이야말로 제약받지 않는 자der Un-Bedingte이다. 세계는 탈소여화되고 전면적인 제작의 대상이 됨에 따라 완전히 신이 없는 상태가 된다. "궁핍한 시간"은 신이 없는 시간이다. 인간은 마땅히 "사물적으로 제약된 존재" "유한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 죽음을 폐기하려는 모든 시도는 신성모독이며 인간적 간게일 뿐이다. 죽음의 폐기는 결국 신의 폐기로 이어질 것이다. 하이데거는 고통받는 인간, 고통의 철학자로 남았다. 고통받는 인간만이 "영원한 것"의 향기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하이데거라면 죽음의 폐기가 안트로포스(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불멸의 존재가 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새로이 발명해야 할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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