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몸의 모든 느낌들 가운데 고통만이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과 같다. 인간이 쾌감을 좇으려고 애쓰는 곳 어디서나 쾌감은 막다른 길임이 밝혀진다.
_발터 벤야민 - P7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에른스트 융어의 이 구절은 사회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고통은 암호다. 고통에는 각각의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비판은 고통을 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에만 맡길 때, 우리는 고통이 기호로서 갖는 성질을 놓치게 된다. - P9

 고통공포는 정치까지 장악한다. 일치강제와 동의 압박이 심해진다. 정치는 일종의 진통지대에 자리를 잡고 활력을 모조리 상실한다. "대안의 부재"라는 주장은 정치적 진통제Analgetikum로 작용한다. 막연한 "중도"가 진통작용을 한다. 논쟁하고 더 나은 논거를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우리는 체제의 강제에 투항한다. 탈민주주의가 확산된다. 탈민주주의는 진통적인 민주주의다. 그래서 샹탈 무페는 고통스러운 대결을 피하지 않는 "경합적 정치agonistische Politik"를 요구한다. 진통적인 정치는 고통을 줄 수 있는 비전이나 날카로운 개혁을 추구하는 능력이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체제의 기능장애나 불화를 그저 은폐할 뿐인, 단기 효과만 지니는 진통제를 움켜쥘 뿐이다. 진통적인 정치는 고통을 감수할 용기가 없다. 그 결과, 동일한 것이 지속된다. - P10

 생산은 창의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 전략으로서의 창의성은 동일한 것의 변주만 허락한다. 완전한 타자에는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창의성에는 고통을 주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고통과 상업은 서로를 배제한다. - P15

예술영역이 소비영역과는 철저히 분리된 채 그 자신의 논리를 좇던 때, 사람들은 예술이 만족을 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상업을 멀리했다. 예술은 "세상에 대한 낯섦‘이라는 아도르노의 격언은 아직 유효했다. 아도르노의 말이 맞다면 쾌적한 예술이란 모순이다. 예술은 낯설게 하고, 교란하고, 당황하게 하고, 고통을 줄 수도 있어야 한다. 예술은 어딘가 다른 곳에 머무른다. 예술의 집은 낯선 곳에 있다. 다름 아닌 낯섦이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고통은 완전한 타자가 들어오는 균열이다. 완전한 타자의 부정성이야말로 예술로 하여금 지배적 질서에 대한 반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만족을 주는 것은 동일한 것을 지속시킨다. - P15

영웅적 세계상에는 고통도 반드시 포함된다. 《반反고통》이라는 제목의 미래파적인 선언에서 알도 팔라체스키(1885~1974, 이탈리아의 작가, 시인-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 속에서 더 많은 양의 웃음을 발견해낼 수 있는 사람일수록 더 깊이가 있다. 이전에 인간의 고통 속에 깊이 파묻힌 적이 없는 사람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웃을 수 없다." 영웅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언제든 고통과 만날 수 있도록 "무장"되어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 고통의 장소로서의 몸은 더 높은 차원에 예속된다.
"물론 이 절차는 하나의 사령탑이 있을 것을 전제한다.
이 사령탑으로부터 몸은 인간이 원거리에서 투쟁에 투입하고 희생시킬 수 있는 하나의 전초로서 관찰된다." - P19

스마트한 권력은 유혹적이고 관대하게 작업한다. 자유의 모습으로나타나기 때문에 억압적 규율권력보다 더 잘 보이지 않는다. 감시도 스마트한 형식을 취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소망과 취향을 알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받는다. 전면적 소통과 전면적 감시, 포르노그래피적 노출과 파놉티콘적 감시가 서로 같아진다. 자유와 감시는 구별할 수 없게 된다. - P21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의 피로는 나의 피로로 간주되고, 이런 점에서 비정치적이다.
이 피로는 혹사된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피로는 사람들을 하나의 우리로 결합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화한다. 그러므로 이 피로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피로와 구별되어야 한다. 나의 피로는 혁명을 막는 최상의 예방약이다. - P24

행복은 최적화 논리를 거부한다. 행복의 특징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통이야말로 행복이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고통은 행복에 지속성을 부여해준다.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고통스러운 행복이란 말은 형용 모순이 아니다. 모든 강렬함은 고통스럽다. 걱정은 고통과 행복을결합한다. 깊은 행복은 괴로움의 계기를 지니고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과 행복은 "서로 결합하여 크게 자라거나 [・・・] 서로 결합하여 작게 남아 있는 형제이며 쌍둥이다." 고통이 저지되면 행복은 흐릿한 편안함으로 쪼그라든다.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깊은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괴로움이 무한한 눈보라처럼 쏟아지고, 고통의 가장 강력한 번개 또한 그에게 떨어진다. 모든 방향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고통에 항상 열려 있을 때만 그는 가장 섬세하고 드높은 종류의 행복에도 열려 있을 수 있다." - P25

 오늘날 고통은 오로지 육체적이기만 한 고통으로 사물화되었다. 고통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예컨대 고통을 신학적 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적 행위로 일면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통의 의미 상실은 생물학적 과정으로 축소된 우리의 삶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음을 암시한다. 고통이 의미를 지니려면 삶을 의미 지평 안으로 편입시키는 서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 의미를 상실한 벌거벗은 삶 속에서만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다. - P38

고통은 처음에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이다. 하지만 이 둑은 "이야기의 물살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행복한 망각의 바다로 휩쓸어간다면" "무너진다." 아픈 아이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은 이야기가 흘러갈 강바닥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고통은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 자체가 이야기의 강물을 불어나게 하여 이 강물이 고통을 휩쓸어가게 만든다. 고통이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만 고통은 실제로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이 된다. - P39

융어가 주장하는 고통의 간지는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다. 분명 삶에서 고통을 몰아낼 수는 없는 것 같다. 고통은 삶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온갖 방법으로 관철시키는 듯하다. 통증의학이 매우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종류의 진통제가 있지만 고통은 정복될 수 없다. 융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통의 선명한 그림자는 지워졌지만, 그 대신 산란하는 빛이 공간을 채운다. 고통은 희석된 형태로 넓게 살포된다. 오늘날 만성 통증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것은 융어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해주는 것 같다. 가장자리로 밀려난 무언의 고통이, 의미도 언어도 형상도 없이 지속되는 고통이 고통 적대적인 진통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다. - P46

빅토르 폰 바이츠제커는 에세이 <고통들>에서 고통을
"살이 된 진실", "진실의 육화"라고 부른다. 결별이 고통을 줄 때, 그 이전에 맺어졌던 결속이 진실했음이 입증된다. 진실만이 고통을 준다. 모든 진실은 고통스럽다. 진통사회는 진실 없는 사회이며 같은 것의 지옥이다. "삶의 질서의 짜임새"는 "고통이라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삶의 질서는 "고통의 질서"다. 고통은 진실을 가늠하는 믿을 만한 기준이며, "살아 있는 것들의 현상 속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도구"다. 고통은 참된 결속이 위협받을 때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눈이 멀고, 진실을 분간할 수도 없고, 인식할 능력도 잃는다. "이런 결별이 고통을 준다면 그 결속은 참된 것이었고 육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겪을 수 있을 때만 진실로 현존하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랑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짜임새에 대한 눈이 뜨인다. 고통을 겪을능력이 있을 때, 존재자는 그저 기계적이고 공간적인 병존Nebeneinander을 넘어서서 진실한,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공존Miteinander을 진실로 실행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도 살지도 않은 것이다. 삶은 편안한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오직 살아 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공존만이 고통을 줄 수 있다. 반면 생명 없는 기능적인 병존은 심지어 그것이 파괴될 때도 고통을 주지 않는다. 살아 있는 공존을 죽은 병존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고통이다. - P50

 고통은 결속이다. 모든 고통스러운 상태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속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을 줄 수 있는 깊은 관계를 피한다. 모든 일이 고통이 억제된 안락구역 안에서 일어난다. 《사랑 예찬》에서 알랭바디우는 어떤 데이트 포털의 광고 문구를 인용한다. "아픔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타자를 성적 대상으로 사물화하는 소비로서의 사랑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이런 사랑은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에로스와 대립한다. - P51

나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그 각각의 것들이 내게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게되고, 고통의 이런 법칙이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 및 세상 만물이 내게 지닌 가치를 온전히 결정한다." 고통이 없다면 구별에 근거하는 가치평가가 불가능해진다. 고통 없는 세상은 같은 것의 지옥이다. 이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차별성이다. 이런 세상은 독특함을 소멸시킨다. - P52

고통은 자기 지각을 강화한다. 고통은 자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통은 자아의 윤곽을 표시한다. 증가하는 자상행위는 나르시시즘적이고 우울에 빠진 자아가 자신을 확인하고 느끼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실존감 또한 고통이있어야 가능하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면 고통을 대체할 다른 것을 찾게 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고통이 구제책이 된다. 익스트림 스포츠와 모험적 태도는 자신의 비실존을 확인하려는 시도들이다. 이렇게 진통사회는 역설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을 만들어낸다. 고통의 문화가 없으면야만이 생겨난다. "무감각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생동감을 주려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 여전히 자기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극들로는 이제 마약, 폭력테러만 남아 있다." - P54

아름다움은 고통의 반대색이다. 고통 앞에서 정신은 아름다움을 상상한다. 정신은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진 사람 앞에 온전한 것을 제시한다. 아름다운 가상은 그 사람을 진정시킨다. 고통은 정신으로 하여금 현존하는 세계에 맞서는,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치유하는 반反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한다. "고통에 맞서고자 하는 지성의 어마어마한 긴장은 지성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빛을 받아 반짝이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새로운 조명들이 낳는 말로 할 수 없는 매력은 흔히 너무나 강력하여 고통받는 자가 모든 자살의 유혹을 이겨내고 삶을 연장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도록 만든다." 고통은 상상력을 활성화한다. 니체는 예술이 현존의 견딜 수 없고 끔찍한 면들을 마술로 사라지게 해주는 "구원하는 마술사, 능숙하게 치료해주는 마술사"라고 했다. - P57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만날 때, 소통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좋아요가 소통을 가속화한다. 고통의 작용은 이와 반대다. 고통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경향이야말로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해준다. - P60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서 출발한다. 존재 덕분에 존재자는 명백함을 갖게 되고, 이해될 수 있다. 존재가 먼저 파악되어야 존재자에 대해 이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의 관심을 어떤 대상으로 돌리기 전에, 나는 이미 성찰 이전에vorreflexiv 파악된 세계 안에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기분Stimmung이 세계를 파악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성찰 이전에 기분을 통해 파악된, 그러나 따로 의식되지는 않는 세계는 대상을 향하는 지향성에 선행한다. "기분은 이전에 이미 전체로서의 세계 내 존재를 파악했고, ...
을 향하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기분과 같은 현상들은 이미 하이데거의 사유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das Unverfügbare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찰 이전에 파악된 세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세계 안으로 내던져졌고, 내맡겨졌고, 이 세계에 의해 기분으로규정되어 있다be-stimmt. 실로 기분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우리를 덮치는 어떤 것이다. - P68

오늘날에는 정신적 태도로서의 인내와 기다림 또한 침식되고 있다. 인내와 기다림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강제로 인해 사라지고 있는 하나의 현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길고 느린 것 안에서 인내하는 기다림은 특별한 의도성을 갖는다.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태도다. 이 기다림은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안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안에 서 있음In-Ständigkeit이 이 기다림의 특징이다. 이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자신을밀착시킨다. 포기가 의도 없는 기다림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포기는 준다gibt. 포기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소비와 반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포기해야 함과 내어줌을 슬픔 속에서 견디는 것"이 "잉태"다. 고통은 어떤 결핍을 가리키는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잉태, 나아가 존재의 잉태다. 고통은 주어지는 것Gabe이다. - P76

반면 지금 우리는 내밀한 개인적 데이터들까지 자발적으로 내놓고 있다. 강제가 아니라 내적 욕구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 우리를 구석구석 철저히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한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여기서 자유의 변증법이 일어난다. 자유의 표현인 무한한 소통이 총체적 감시로 변한다. - P89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철폐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 P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2. 風雷益풍뢰익 九五구오

九五구오는 有李惠心유부혜심이라 勿問물문하여도 元吉원길21하니 有学유부하여 惠我德혜아덕22하리라.

구오는 진실함을 가지고 마음을 은혜롭게 하려고 한다. 묻지 않더라도 크게 길하니, (천하의 사람들 역시) 진실함을 가지고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길 것이다.


주21 "혜심(惠心)"은 천하에 은혜를 베풀려는 마음을 말한다. 또 "물문(勿問)"은 조금도 의문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최경(崔憬)은 『주역집해』에서 "문(問)"을 "언(言)" 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은 구오가 양강(陽剛), 중정(中正)의 덕으로 군주의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육이와 상응하여 아래에 은혜를 베풀려고 하는 진실한 마음, 즉 자기가 가진 것을 덜어서 다른 것에 더해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어볼 필요도 없이 "크게 길하다" 라고 말한다. 손괘와 익괘의 오효에는 모두 "크게 길하다"는 말이 있다. 두 효의 차이에 대해 정유악(鄭維岳)은 『주역절중』에서 "손괘의 육오는 아래의 보탬을 받지만, 익패의 구오는 아래를 보태주고 있다. 손괘의 육오가 보탬을 받기 때문에 크게 길함을 얻고, 익괘의 구오는 백성은 마땅히 보탬을 받아야 한다는 것만을 알 뿐이기 때문에 "묻지 않더라도 크게 길하다"고 하는 것이다(損之六五, 受下之益者也, 益之九五, 益下者也, 損六五受益而獲元吉, 益九五但知民之當益而已, 勿問元吉也)"라고 하였다. 이처럼 두 효가 이야기하는 각도는 조금 다르다. 다시 말하면 손괘의 육오는 아래의더함을 받는 위치이고, 익괘의 구오는 아래를 더해주는 경우이다.

주22 "아(我)"는 구오를 가리키고,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길 것이다(惠我德)"는 말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은덕에 대해 진심으로 보답하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앞의 문장에서 말하는 "원길(元吉)"의 의미를 이어서 설명하는 내용에 해당한다. 구오의 길(吉)이라는 것은 천하가 크게 이익 받는 것 이외에 또한 천하의 사람들이 위로부터의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낀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상하가 서로 믿음을 주고받고 마음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 길함이 매우 크다. 이에 대해 주자는 『주역본의』에서 "윗사람이 진실함을 두어 아랫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아랫사람 또한 믿음을 두어 윗사람을 은혜롭게 여길 것이니 묻지 않아도 크게 길함을 알 수 있다(上有信以惠於下, 則下亦有信以惠於上矣, 不問而元吉可知)" 라고 하였다. - P179

象日상왈 有李惠心유부혜심이라 勿問之矣물문지의며 惠我德혜아덕이 大得志也대득지야23라.

상전에 말하기를 진실함을 가지고 마음을 은혜롭게 함이 있으니 물을 필요도 없으며,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기는 것은 크게 뜻을 얻는 것이다.


주23 명령이 진실함에서 나오고 실제 정치를 시행할 때 민심을 따라 하는 정부는 분명히 크게 길하고 크게 이로울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진실함을 가지고 마음을 은혜롭게 함이 있으니 물을 필요도 없으며(有孚惠心, 勿問)"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을 필요도 없다(勿問)"는 말에 "원길(元吉)"이라는 두 글자가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혜(惠)"자는 여기에서 감격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기는 것" 이라는 말은 바로 정부의 은혜에 감격한다는 의미로 백성들이 모두 정부의 큰 덕에 감사함을 느끼고 마음이 정부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에서 군주가 어찌 그 마음속에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기는 것은 크게 뜻을 얻는 것이다(惠我德, 大得志也)"라고 하는 것이다. - P1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 그러니 당장 집을 나가라

자식은 언젠가는 부모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22 그러지 않으면 나이를 먹어 육체가 어른이 된다 한들, 정신은 미숙한 그대로다. 정신이 성숙하지 않은 자를 어른이라 할 수 없으니, 그런 상태로 이 가혹하고 험난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정이 유복하다 해도, 대인관계나 연애 같은 금전 이외의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탓에 두 번 다시 헤어날 수 없는 전락을 맛보게 된다.
가정환경이 어떻든지, 부모가 착실한 사람이든 다소 병약한 몸이거나 소극적인 성격이든, 자식은 아무튼 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집을 나가야 한다.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죽음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 것인가.
또는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정한 삶을 살 것인가.

(중략)

학생 신분이 끝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더라도 부모에 의존하는 생활을 과감하게 떨치고 미련없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가족회의도 필요 없다.
23 어디까지나 스스로 결심하고, 스스로 길을 결정하고, 자신의 의지로 집을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식의 의무이며,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
아직 구체적인 인생 설계가 세워지지 않았어도,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구실을 둘러대며 단 하루일망정 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 목표를 정하지 못한 자는, 어찌되었든 집을 나선 후에 앞일을 생각한다. 가출이나 다름없어도 전혀 상관없다. 이 경우의 망설임은 목숨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결심이 굳세지 않으면 평생 부모에게 묶여 살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하게 빼앗기고, 사는 참맛을 모르고 죽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부모란 울고 매달리는 데 명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모는 자기밖에 염두에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집에 묶어 두기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하고 그 어떤 수치스러운 짓도 태연하게 한다.사회로 나가 봐야 고생만 할 뿐이다, 집에서 살면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밥값도 들지 않고 청소나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집만큼 마음 편한 곳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그런 달콤한 말에 넘어가면 애써 다진 결의가 흐지부지되고, 24 그 다음에는 편하게 사는 것만 지향하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인종으로 전락해 끝내는 부모와 집에 혼마저 압살당하는 신세가 된다.
집을 떠난다는, 인생 최대의 전환이며 필연적이고 숭고한 행위에 대해서는 이성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을 잠든 채 사는 꼴이 되고, 그 결과는 굶어 죽는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 이런 형태의 정신적인 죽음이다.
정신적인 죽음이란 살아 있는 주검을 뜻하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 봐야 살아가는 충만감은 얻을 수 없다. 오래 살아 봐야, 그 눈이 기쁨으로 빛나는 일은 없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무의미한 사건들로 가득하고, 놀고먹다 보면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의 정체가 부모와 자식 간의 비정상적인 연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다 늙어 꼬부라진 후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제2의 탄생을 뜻한다.
제1의 탄생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부모 의지에 따른 것이 25 지만, 제2의 탄생은 그 전권을 자식이 쥔다.
이 때문에 인생 최대의 사건이며 한없이 위대한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삶을 쟁취하느냐 마느냐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었다는 표식은 집을 나가는 것이다.
요컨대 집을 떠나는 것이 성인식인 셈이다.
그러니, 부모를 버리는 것이냐, 기댈 사람은 너밖에 없는데, 하는 유의 비난과 애원과 정에 이끌려 판단해서는 안 된다. 행여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양심에서 우러나왔다 볼 수 없으며, 부모나 국가에 유리한 형태로 조작된 도덕 등의 독을 먹어 발생한 경련에 불과하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때다. 자식은 집을 떠남으로써 진정한 인생을 만끽하는 데 꼭 필요한 자립과 자율의 정신을 키울 수 있고, 부모 또한 늦게나마 부모의 진정한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양쪽이 진정한 부모 자식 관계가 무엇인지를 꺠우치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안이한 근성을 버려야 타인이 아닌 오직 자신을 의지해 사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러한 전략은 직접적 공격이라기보다는 상황, 즉 객관적 조건을 유리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은 쉬움을 추구한다. 이 점에서 59 도 동양적 사유는 어려움을 칭송하는 서구적 사유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훌륭한 장수의 전략은 병사들이 승리의 이유를 모를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칭찬받지도 않으며 승전식과 같은 이벤트도 없다. "적의 형세에 적절히 다른 조치를 취하여 백성들 앞에서 이겼더라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승리의 요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백성들은 아군이 승리하는 형세이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라고만 알 뿐, 그와 같이 승리하도록 제어하는 형세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야말로 가장 큰 공적이다. 효율적인 전략은 승리를 쉽게 만들고, 사람들이 칭찬할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점진적인 방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승리의 방향으로 상황이 진화하도록 이끌어가는 데 있다. - P58

 전쟁의 법칙에 따르면, 적국을 온전히 두고서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며, 전쟁을 일으켜 적국을 깨부수고 굴복시키는 것은 차선책이다. 적의 전군을 온전히 두고서 항복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며, 전투를 벌여서 전군을 깨부수고 항복시키는 것은 차선책이다. ...... 그러므로 싸울 때마다 이기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도 적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전술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손무, 앞의 책 3편 84~85쪽. - P62

 도덕
상황의 흐름에 의거하는 전쟁 전략, 그리고 인간의 성향을 간파하는 외교 전략의 논리는 역설적으로 유가의 도덕에서 가장 깊은 의미로 드러난다. 물론 맹자는 인을 따르는 도덕을 이익[利]을 추구하는 행위와 견주지 말라고 일갈했다. 그래서 전쟁에 이기는 방법을 제시하는 병법가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의 논의 구조를 보면 전략의 구조와 공통점이 있다. 나아가 그는 도덕을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보았다. 상황을 읽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흐름을 형성해가는 것이 중국적 효율성의 핵심이라면, 맹자는 "절차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가장 뒤로, 혹은 가장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언급한 바 있는 대담집 《바깥(중국)으로부터 사유하기》에서 중국적 전략 개념은 유가의 도덕성과 연결된다.

전략가들은 말한다. 적을 파괴하는 것은 무용하니, 적을 온전하게 두어라. 그러나 너의 쪽으로 그가 기울도록 하라. 혹은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거칠게 적과 맞대면하기보다는 부드럽게, 심지어 그가 자각하지 못한 채 방향을 바꾸도록 만들어라. 이 점에서 가장 앞서 결정짓는 것, 즉 가장 효율적인 것은 가장 은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여 보자. 맹자는 이렇게 답 70 할 것이다. "가장 미묘한 방향 변화, 결과적으로 그 영향이 가장 폭넓게 전개될 방향 변화는 바로 도덕성에 의한 변화이다."*

* 《Penser d’un dehors (la Chine)바깥(중국)으로부터 사유하기》, Paris: Seuil, 2000, 389쪽.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仁者無敵"라는 맹자의 말은 도덕의 효율성을 보여준다. 어진 마음과 행동은 모두가 환영하는 태도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성은 관습이 되어 확산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배어들면서 세계 전체에 영향력을 미친다. 모든 사람들의 선과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군주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다른 민족들에게 환영받을 뿐이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계속 커질 것이다. 맹자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어진 군주의 국가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다. 폭압적 국가의 백성은 어진 군주의 병사들을 환영할 것이며 그의 국가로 와서 살고 싶어할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모든 백성이 폭군만 남겨두고 어진 군주가 다스리는 이웃나라로 이주하면 폭군의 국가는 망하게 된다. 실제로 고대 중국에는 이러한 식으로 망하는 국가들이 있었다고 한다.

즉 선하고 어진 군주의 통치는 경쟁자들의 "자연적 71 경향성"에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도덕성은 만인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그 효율성은 근원적인 것이며 전략가들의 그것보다 포괄적으로 발휘된다. 전략가들은 특정 부분에서의 ‘세’를 통해 효율성을 획득하지만 도덕성을 가진 군자는 세계의 운행 전체와 결합한다.
전략가가 한 국가의 이익[利]을 추구한다면, 현자는 세계 전체[天下]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러한 현자의 덕성은 공자에게서 완벽하게 구현된다. 공자의 효율성 역시 직접적이기보다는 줄리앙이 《운행과 창조》에서 언급한 "자발적 감화"를 유도하는 간접적 영향력이다. 이러한 점은 논쟁을 통해 타인의 견해를 비판하고 직접적으로 설득하는 서양의 방식이 아니다. "항상 설득을 염두에 두는 변론과는 달리, 말없이 이행되는 현자의 가르침은 하늘이 그러하듯 자발적 감화를 가능하게 한다."* 다음의 대화는 유가 도덕의 간접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자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자공 선생님께서 말씀을 안 하시면 저희들은 무엇을 72 기술하겠습니까?

* 프랑수아 줄리앙, 《운행과 창조》, 유병태 옮김, 케이시, 2003, 48쪽.

공자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네 계절이 돌아가고 만물이 생장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공자는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거나 규범을 제시하기보다는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제자들이 스스로 실행할 때까지 기다려줄 뿐이다. 지극히 도덕적인 행동을 몸소 실천하고 일상적으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점진적이고 자연스럽게 교화시킨다. 타인들은 부담을 갖지 않은 채 서서히 그를 따르게 되며 자연스럽게 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미묘하고 점진적인 효율성을 지닌 영향력이 타인에게 간접적이면서도 끝없는 자극으로 작용하니, 타인은 내처 스스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고쳐 나아가는 것이다.**

* 《논어論語》, 17편 19장.
** 프랑수아 줄리앙, 앞의 책 129쪽.

공자의 도덕적 가르침은 중국적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에서 세계 또는 자연은 서양의 신과 같은

73 《주역周易》의 ‘팔괘八卦‘
주역은 동아시아 문명의 원형이다. 주역의 괘卦와 효爻는 만물의 점진적인 변화를 상징한다. 음과 양의 끊임없는 교대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운행은 천지만물의 원리이자 도덕의 근거로서 작용한다.

74 단일한 원리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자연은 음양의 조화를 구현한다. 음과 양은 대립과 상보, 상관성, 상호작용, 교대 등을 나타낸다. 중국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실재는 운행이다"라는 명제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하늘[天]과 땅[地]은 낮과 밤, 온기와 냉기의 교대며 사물들의 조정 원리다. 천지는 실재가 유래하는 원리이면서 실재를 발전시키고 상승시키는 원리다. 천지는 세계의 흐름이고 과정이다. 천지는 말없이 행할 뿐이다. 천지는 한결같으며 이탈하지 않는다.
하늘이 이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덕적 차원이 부각되며 이는 중국 사상의 본질적인 실마리다. 즉 실재를 쇄신하는 원리가 또한 선의 원천이다. 천덕天德은 인성人性의 원천이며 이러한 점이 성선설의 근원이다. 이 점에서도 중국 사상은 서양 사상과 갈라진다. 중국은 자연만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개념이 따로 없었다. 중국에서 자연은 ‘객관화’ 또는 ‘대상화’되지 않는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자연의 문제에서 도덕과 인성의 문제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분리가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위적 측면(기술)과 자연을 분리한다. 기독교도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한다. 칸트도 도덕의 세계와 자연세계를 구분한다. 데카르트도 역시 정신과 자연을 분리시킨다. 간신히 스피노자 정도가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했을 뿐이다. - P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상하는 기억들은 그립고 달콤하다. 고통과 방황의 시간마저 아름답게 채색된다. 어디 그뿐이랴,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하고 선택한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아, 그때 그래서 헤어지게 된 거구나. 그 선택은 오히려 잘 된 것이었구나.
오직 시간이 지나서야 문제가 풀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우리는 신의 큰 뜻은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된다고 말한다. 신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 P167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세상과 나를 연결한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나를 세상의 노예로 만들기 쉽다.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세상의 주인으로 사는 길은 안다는 확신을 버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즉 감정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감정의 날개는 이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감정적‘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이럴 때 감정적이란 말은 이성 중심주의에서 말하는 감정의 몰입이다. 최근 심리학이나 뇌과학에서 말하는 감정의 날개란 의식과 감각의 적절한 조화를 의미한다. 의식이 전부라고 믿으면 세상의 노예가 되기 쉽고 감각이 전부라고 믿으면 몸의 노예가 된다. 자기 정체성을 세상의 기준에 맡긴 이는 과거 어느 시점에 고착되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밝고 낙천적이면서 평화롭게 사는 사람은 마음을 자연의 변화에 맡긴다. 여행하듯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런 삶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도 그 일에 매달리지 않는 것은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계절의 순환이 그렇기 때문이다. - P178

철학자 스피노자가 감정을 이성보다 열등하게 봤던 당대의 주류 사상과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감정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은 대단히 뇌과학적이다. 감각 혹은 감정이 의식보다 먼저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결코 접근할 수 없고 오직 의식에 의해 느낄 뿐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 심리학이나 뇌과학이다. 아, 철학자 칸트도 이미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물자체에 접근할 수 없고 오직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라고! 그렇다면 그런 과학적 사실을 감정의 경험을 통해 연습하게 하는 길은 없는가. 칸트의 사상이 가장 성숙했을 때 나온 저서 『판단력 비판』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자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 세 가지 자유를 프로이트의 심리학으로 풀어보자.
입맛에 맞는 것을 먹을 자유The Agreeable는 모든 동물이 누리는 자유다. 소는 풀을 먹고 사자는 고기를 먹고 인간은 이것저것 다 먹는다. 몸이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이며, 이드에 속한다. 그다음은 옳은 것을 주장할 자유로, 개념이 작동하는 선The Good의 영역이다. 슈퍼에고에 속한다. 사회적 구속력이 있지만 사적인 이익이 공적인 것과 혼돈될 위험이 있다. 이 둘의 중간, 동물과 인간의 양면을 포함한 중간 영역은 무엇일까. 바로 미The Beautiful가 주는 자유다. - P181

세 번째 항목인 미는 우리에게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한다. 왜 그럴까. 예술작품의 감상은 사적인 것이지만 이익과 상관없이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그 사적인 경험은 타인에 대한 공감을 통해 보편성에 이른다. 작품의 형식Form을 통해 감정을 연습하고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사적이면서도 제한을 받고 모호하면서도 타인과 공유하는 경험이 된다. 안다는 확신에서 벗어나는 연습이다. 가장 공정한 주관적 보편성에 이르는 길이 예술 감상이고 그래서 예술의 ‘형식적 완결성‘이 중요하다고 칸트는 말한다. 이것이 감각과 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에고의 역할이다.
정지용의 「호수」는 감정 연습이라는 무한한 상상력에 관한 사이고 「대미지」는 의식이 시간의 형식이요 느낌의 형식이자 감수성의 형식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다. 물론 이 모든 것보다 더 절실하게 감정을 경험케 하는 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다. 그러나 단 한 번이고,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고, 한번 실패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게 삶이기에 우리는 예술작품을 통해 미리 감정을 연습하고 판단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예술작품은 언제나 안다는 확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한다.
안다는 확신은 의식의 속임수다. 감각에 접근하는 길이 이미지를 만드는 길 외에 달리 없음에도 우리가 현실에 즉각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의식은 모든 것을 아는 척, 이미지가 실체인 척한다. 믿기에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에 믿는다고 속인다. 마치 울기에 슬픈데 슬퍼서 우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과 같다. - P182

마침내 강요에 의해 마일즈의 자백을 받아내는 순간 그 아이는 숨이 막혀 그녀의 품 안에서 죽고 만다. - P184

"믿음은 없는 것을 보게 한다"는 제임스의 심리학을 따른다면 그녀의 단순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확신은 위험한 것이다. 그녀의 지나친 확신에서 오는 추궁은 마일즈의 숨을 멈추게 했기 때문이다. 185 무엇보다 그녀에게 부족했던 것은 다양한 세상과 예술작품들을 경험하면서 감정을 풍부하게 할 기회였다. 마음을 열고 세상을 호기심으로 보는 대신 그녀는 단순한 믿음을 앎으로 착각했다. 자신이나 타인의 실수를 통해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단순한 경험에서 얻은 신념은 안다는 확신으로 이어져 어린아이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 P184

안다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의식의 속임수에 그대로 노출되고 그 너머에 있는 감정을 연습할 기회를 잃는다. 호기심을 가지고 그저 모호함을 차근차근 경험하는 것이 감정을 풍요롭게 경험하는 길이다. 그러는 사이에 판단의 오류를 저지르고 실수하며 깨닫는다. 미궁에 빠지고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판단의 오차를 줄인다. 감정을 미리 실습해보는 것이 실제 삶에서 부딪히는 판단의 오차를 줄이는 길이다. - P185

감정과 의식 어느 한편에 치우치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감각보다 이미지의 편이고 의식의 편이다. 그쪽이 사회가 요구하는 견고한 질서와 법을 지키고 문화를 키우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국력을 키우고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의식의 편에 서야 한다. 효율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감각을 지키며 산다는 것, 이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효율성의 노예가 되는 만큼 반대로 감각의 노예가 되기도 쉽다. - P187

매케이와 머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아니 그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거친 말을 타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리치와 결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진짜 용기는 자신에게 증명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개인의 감정이 집단의 것으로 바뀌는 것은 그 개인이 힘을 과시하는 데서 온다. 보안관 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P231

모든 동물에게 내장된 원초적 감정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생명을 지키는 강력한 감정이다. 모든 동물은 먹이를 찾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간다. 원시적인 포식자가 드문 현대 산업 사회에서 이는 경쟁자로 바뀐다. 먹고 먹히는 생존의 싸움은 ‘불안‘으로 내재하고 생명의 동반자가 된다. 두려움은 적을 발견하는 순간 방어하라는 의미에서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문제는 그 빈도가 지나치면 건강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몸의 요구와 의식의 방어가 균형을 잃으면 공황장애와 같은 질병이 생긴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감정이 용기다.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용기다. 그래서 용기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남에게 보이는 용기는 허세가 되고 남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사람들은 그 힘을 빌려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기 때문에 겁쟁이들의 거짓 용기가 되고 집단폭력의 근원이 되기 쉽다. 두려움이 ‘나의 것‘이듯이 용기도 ‘나의 것‘이고 자신에게 증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존감 혹은 자긍심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 길이 개인과 사회를 개선하는 올바른 길이다. - P231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돌봄이나 놀이를 통해 기쁨이라는 긍정적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혐오감, 허영, 질투, 부러움, 죄의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더 강렬하다. 앞의 감정들은 의식적인 시도와 노력이 요구되지만 뒤의 감정은 소리없이 잦아들어 몸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앞의 감정은 사회가 장려하고 뒤의 감정은 사회가 억압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억압하면 더 강해진다. 인정하고 살살 달래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화두가 태어난다. 비록 감정은 하부에서 상부로 진화되었고 하부가 더 강하지만 소통과 적절한 균형을 위해 상부에서 하부로 이행하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키워야 한다. - P236

몇 번이나 포기하고 돌아갈까, 전과를 할까 생각할 때 나에게 용기를 준 두 작품이 있었다. 에머슨의 「자긍Self-Reliance」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Walden』이었다. "네가 밖에 나가기 싫으면 문 앞에 ‘고독‘이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몇 날이라도 안에 있어라"라는 에머슨의 말을 나는 "네가 영어를 못한다 해도 무슨 상관이냐, 문학을 좋아하면 되는 거야"라는 말로 이해했다. 또 한 사람이 소로다. - P245

우리는 때로 그를 돕고 싶어도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를 완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P251

마음의 근심은 뼈를 녹인다. 왜? 영어로 E-motion은 ‘생각이 몸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다. 계속 두렵다는 생각을 하면 실제로 두려운 반응이 일어나고 계속 근심하면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 의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는 그가 처방한 약이 가짜이더라도 때로 효력을 본다. 이것을 의학에서 ‘위약 효과‘ 혹은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부른다. 생각이 실제로 몸의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계속 생각하면 없는 것이 보인다. 어떤 감정의 증상들을 의식적으로 일으키면 그 감정이 일어난다. 즐거운 추억은 행복감을 증진시키고, 긍정적인 생각은 몸을 건강하게 바꾼다. 좋은 글을 읽고 노트에 적어놓는다든지 혹은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친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유머를 즐긴다.
그렇다면 나는 의도적인 몸의 훈련으로 감정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배럿이 조언하듯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산책하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등 의도적인 몸의 활동과 운동을 통해 불쾌한 기분을 동요와 즐거움의 기질로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다. 제임스는 말한다. 나는 흐느낄수록 슬픔을 더 강하게 느낀다. 마치 도망칠수록 공포를 더 느끼듯이. 분명히 우리는 몸의 움직임으로 느낌을 바꿀 수 있다. 계속 웃으면 행복감을 느끼고 쌓인 슬픔을 울어서 풀어버리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분노의 표정을 계속 지으면 분노가 커진다. 이것이 몸의 반응을 통해 감정을 훈련하는 방법이다. 운동으로, 얼굴 표정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연습한다. 반대로 부정적인 감정은 발산하여 풀어버린다. 그러면 그런 감정들은 시들해져서 슬며시 사그라든다. 우울증은 절대 사절이다. - P254

우울하면 몸이 느려지고 기분도 가라앉는다. 이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더 가라앉고 더 우울해진다. 숲길을 걷고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운동하고 소통하면 우울함이 한결 나아진다. 걷기와 크게 숨쉬기, 팔다리 흔들기 등 몸의 훈련은 낙담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생각이 몸을 움직이게 할 뿐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운동을 하면 좋은 호르몬이 배출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외부와 소통을 거부하고 낙담에 계속 빠지면 얼굴 표정만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얼굴, 목, 목구멍은 감정 표현과 친근하게 연결되어 있다. 근심은 뼈를 녹인다는 말처럼 감정은 뼈와 근육에도 영향을 미친다. 등뼈와 신경중추는 몸과 뇌를 소통시키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몸이 감정의 영향을 받으며 뇌는 이 감정들을 호르몬의 분비 등 몸의 반응으로 표현한다. 제임스의 감정에 대한 연구는 감정이 건강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배럿의 말처럼 마음의 건강이 곧 몸의 건강인 것이다. - P256

많은 학자는 항상성을 유지하거나 회복하는 데 예술이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감각과 인지 판단의 다리를 놓아 두 영역이 소통하고 감정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돕는 데 예술, 특히 서사 예술은 가장 이상적이다. 몸과 의식, 혹은 느낌과 인지 판단을 융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회상이라는 기억의 진화와 함께 동굴벽화가 시작된 이유다. 인간이 되는 순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술은 뇌의 진화과정을 가장 유사하게 모방한다. - P259

사랑이 보이십니까? 희망이 보이십니까?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나요? 절망해도 힘들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뭔가 곧 밝혀질 것 같은데 밝혀지지 않고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데 주먹은 늘 텅 비어 있다. 그래도 인간은 계속 간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이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아, 결국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숭고한 유혹의 정체는 죽음이었단 말인가. 예술작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기에 나는 계속 그 영화에 몰입하고 그 소설을 읽는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그 동력은 감정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 P262

고독과 공감은 일상을 누리기 위한 생존의 조건이다. 모든 정상인은 어느 정도 불안과 우울을 느낀다. 이때 나와 세상의 균형이 깨지면 공황장애나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이 생긴다. 세상이 나를 본다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자의식이 결핍된 것이다. 양심이나 타자의식이 없는 경우다. 반대로 세상이 나를 본다는 것을 지나치게 느끼는 사람은 자의식이 과잉된 것이다. 양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유행에 민감하고 과시하며 자신을 부풀린다. 그리고 정도가 심하면 폭력이나 광기, 우울증 등 정신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독과 공감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병이 되듯이 나와 세상도 치우치면 병이 된다. 앞서 반복했듯이 감정이라는 뇌의 하부와 전두엽이라는 상부가 연결되어 느낀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인지요 판단이다. 소통과 균형이 중요하며, 똑같은 맥락에서 공감이 일어난다. 공감은 고독한 인간에게 신이 내린 축복이다. 우리가 그림이나 음악, 이야기 등을 창조하고 감상하는 상상력은 바로 감정과 인지의 균형 및 소통을 돕는 공감능력에 다름아니다. - P322

칸트의 법을 믿었던 독일인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법을 밀어붙일 때 잉여인 사도마조히즘의 쾌락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법과 쾌락, 현실원칙과 쾌감원칙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기에 어느 한쪽을 밀어붙이면 다른 쪽으로 빨리 옮겨간다. 선배 프로이트를 다시 읽은 라캉의 독창성이다.​ - P3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