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몸의 모든 느낌들 가운데 고통만이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과 같다. 인간이 쾌감을 좇으려고 애쓰는 곳 어디서나 쾌감은 막다른 길임이 밝혀진다. _발터 벤야민 - P7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에른스트 융어의 이 구절은 사회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고통은 암호다. 고통에는 각각의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비판은 고통을 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에만 맡길 때, 우리는 고통이 기호로서 갖는 성질을 놓치게 된다. - P9
고통공포는 정치까지 장악한다. 일치강제와 동의 압박이 심해진다. 정치는 일종의 진통지대에 자리를 잡고 활력을 모조리 상실한다. "대안의 부재"라는 주장은 정치적 진통제Analgetikum로 작용한다. 막연한 "중도"가 진통작용을 한다. 논쟁하고 더 나은 논거를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우리는 체제의 강제에 투항한다. 탈민주주의가 확산된다. 탈민주주의는 진통적인 민주주의다. 그래서 샹탈 무페는 고통스러운 대결을 피하지 않는 "경합적 정치agonistische Politik"를 요구한다. 진통적인 정치는 고통을 줄 수 있는 비전이나 날카로운 개혁을 추구하는 능력이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체제의 기능장애나 불화를 그저 은폐할 뿐인, 단기 효과만 지니는 진통제를 움켜쥘 뿐이다. 진통적인 정치는 고통을 감수할 용기가 없다. 그 결과, 동일한 것이 지속된다. - P10
생산은 창의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 전략으로서의 창의성은 동일한 것의 변주만 허락한다. 완전한 타자에는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창의성에는 고통을 주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고통과 상업은 서로를 배제한다. - P15
예술영역이 소비영역과는 철저히 분리된 채 그 자신의 논리를 좇던 때, 사람들은 예술이 만족을 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상업을 멀리했다. 예술은 "세상에 대한 낯섦‘이라는 아도르노의 격언은 아직 유효했다. 아도르노의 말이 맞다면 쾌적한 예술이란 모순이다. 예술은 낯설게 하고, 교란하고, 당황하게 하고, 고통을 줄 수도 있어야 한다. 예술은 어딘가 다른 곳에 머무른다. 예술의 집은 낯선 곳에 있다. 다름 아닌 낯섦이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고통은 완전한 타자가 들어오는 균열이다. 완전한 타자의 부정성이야말로 예술로 하여금 지배적 질서에 대한 반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만족을 주는 것은 동일한 것을 지속시킨다. - P15
영웅적 세계상에는 고통도 반드시 포함된다. 《반反고통》이라는 제목의 미래파적인 선언에서 알도 팔라체스키(1885~1974, 이탈리아의 작가, 시인-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 속에서 더 많은 양의 웃음을 발견해낼 수 있는 사람일수록 더 깊이가 있다. 이전에 인간의 고통 속에 깊이 파묻힌 적이 없는 사람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웃을 수 없다." 영웅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언제든 고통과 만날 수 있도록 "무장"되어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 고통의 장소로서의 몸은 더 높은 차원에 예속된다. "물론 이 절차는 하나의 사령탑이 있을 것을 전제한다. 이 사령탑으로부터 몸은 인간이 원거리에서 투쟁에 투입하고 희생시킬 수 있는 하나의 전초로서 관찰된다." - P19
스마트한 권력은 유혹적이고 관대하게 작업한다. 자유의 모습으로나타나기 때문에 억압적 규율권력보다 더 잘 보이지 않는다. 감시도 스마트한 형식을 취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소망과 취향을 알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받는다. 전면적 소통과 전면적 감시, 포르노그래피적 노출과 파놉티콘적 감시가 서로 같아진다. 자유와 감시는 구별할 수 없게 된다. - P21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의 피로는 나의 피로로 간주되고, 이런 점에서 비정치적이다. 이 피로는 혹사된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피로는 사람들을 하나의 우리로 결합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화한다. 그러므로 이 피로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피로와 구별되어야 한다. 나의 피로는 혁명을 막는 최상의 예방약이다. - P24
행복은 최적화 논리를 거부한다. 행복의 특징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통이야말로 행복이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고통은 행복에 지속성을 부여해준다.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고통스러운 행복이란 말은 형용 모순이 아니다. 모든 강렬함은 고통스럽다. 걱정은 고통과 행복을결합한다. 깊은 행복은 괴로움의 계기를 지니고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과 행복은 "서로 결합하여 크게 자라거나 [・・・] 서로 결합하여 작게 남아 있는 형제이며 쌍둥이다." 고통이 저지되면 행복은 흐릿한 편안함으로 쪼그라든다.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깊은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괴로움이 무한한 눈보라처럼 쏟아지고, 고통의 가장 강력한 번개 또한 그에게 떨어진다. 모든 방향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고통에 항상 열려 있을 때만 그는 가장 섬세하고 드높은 종류의 행복에도 열려 있을 수 있다." - P25
오늘날 고통은 오로지 육체적이기만 한 고통으로 사물화되었다. 고통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예컨대 고통을 신학적 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적 행위로 일면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통의 의미 상실은 생물학적 과정으로 축소된 우리의 삶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음을 암시한다. 고통이 의미를 지니려면 삶을 의미 지평 안으로 편입시키는 서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 의미를 상실한 벌거벗은 삶 속에서만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다. - P38
고통은 처음에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이다. 하지만 이 둑은 "이야기의 물살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행복한 망각의 바다로 휩쓸어간다면" "무너진다." 아픈 아이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은 이야기가 흘러갈 강바닥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고통은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 자체가 이야기의 강물을 불어나게 하여 이 강물이 고통을 휩쓸어가게 만든다. 고통이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만 고통은 실제로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이 된다. - P39
융어가 주장하는 고통의 간지는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다. 분명 삶에서 고통을 몰아낼 수는 없는 것 같다. 고통은 삶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온갖 방법으로 관철시키는 듯하다. 통증의학이 매우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종류의 진통제가 있지만 고통은 정복될 수 없다. 융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통의 선명한 그림자는 지워졌지만, 그 대신 산란하는 빛이 공간을 채운다. 고통은 희석된 형태로 넓게 살포된다. 오늘날 만성 통증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것은 융어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해주는 것 같다. 가장자리로 밀려난 무언의 고통이, 의미도 언어도 형상도 없이 지속되는 고통이 고통 적대적인 진통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다. - P46
빅토르 폰 바이츠제커는 에세이 <고통들>에서 고통을 "살이 된 진실", "진실의 육화"라고 부른다. 결별이 고통을 줄 때, 그 이전에 맺어졌던 결속이 진실했음이 입증된다. 진실만이 고통을 준다. 모든 진실은 고통스럽다. 진통사회는 진실 없는 사회이며 같은 것의 지옥이다. "삶의 질서의 짜임새"는 "고통이라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삶의 질서는 "고통의 질서"다. 고통은 진실을 가늠하는 믿을 만한 기준이며, "살아 있는 것들의 현상 속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도구"다. 고통은 참된 결속이 위협받을 때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눈이 멀고, 진실을 분간할 수도 없고, 인식할 능력도 잃는다. "이런 결별이 고통을 준다면 그 결속은 참된 것이었고 육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겪을 수 있을 때만 진실로 현존하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랑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짜임새에 대한 눈이 뜨인다. 고통을 겪을능력이 있을 때, 존재자는 그저 기계적이고 공간적인 병존Nebeneinander을 넘어서서 진실한,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공존Miteinander을 진실로 실행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도 살지도 않은 것이다. 삶은 편안한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오직 살아 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공존만이 고통을 줄 수 있다. 반면 생명 없는 기능적인 병존은 심지어 그것이 파괴될 때도 고통을 주지 않는다. 살아 있는 공존을 죽은 병존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고통이다. - P50
고통은 결속이다. 모든 고통스러운 상태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속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을 줄 수 있는 깊은 관계를 피한다. 모든 일이 고통이 억제된 안락구역 안에서 일어난다. 《사랑 예찬》에서 알랭바디우는 어떤 데이트 포털의 광고 문구를 인용한다. "아픔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타자를 성적 대상으로 사물화하는 소비로서의 사랑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이런 사랑은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에로스와 대립한다. - P51
나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그 각각의 것들이 내게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게되고, 고통의 이런 법칙이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 및 세상 만물이 내게 지닌 가치를 온전히 결정한다." 고통이 없다면 구별에 근거하는 가치평가가 불가능해진다. 고통 없는 세상은 같은 것의 지옥이다. 이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차별성이다. 이런 세상은 독특함을 소멸시킨다. - P52
고통은 자기 지각을 강화한다. 고통은 자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통은 자아의 윤곽을 표시한다. 증가하는 자상행위는 나르시시즘적이고 우울에 빠진 자아가 자신을 확인하고 느끼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실존감 또한 고통이있어야 가능하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면 고통을 대체할 다른 것을 찾게 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고통이 구제책이 된다. 익스트림 스포츠와 모험적 태도는 자신의 비실존을 확인하려는 시도들이다. 이렇게 진통사회는 역설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을 만들어낸다. 고통의 문화가 없으면야만이 생겨난다. "무감각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생동감을 주려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 여전히 자기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극들로는 이제 마약, 폭력테러만 남아 있다." - P54
아름다움은 고통의 반대색이다. 고통 앞에서 정신은 아름다움을 상상한다. 정신은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진 사람 앞에 온전한 것을 제시한다. 아름다운 가상은 그 사람을 진정시킨다. 고통은 정신으로 하여금 현존하는 세계에 맞서는,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치유하는 반反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한다. "고통에 맞서고자 하는 지성의 어마어마한 긴장은 지성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빛을 받아 반짝이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새로운 조명들이 낳는 말로 할 수 없는 매력은 흔히 너무나 강력하여 고통받는 자가 모든 자살의 유혹을 이겨내고 삶을 연장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도록 만든다." 고통은 상상력을 활성화한다. 니체는 예술이 현존의 견딜 수 없고 끔찍한 면들을 마술로 사라지게 해주는 "구원하는 마술사, 능숙하게 치료해주는 마술사"라고 했다. - P57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만날 때, 소통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좋아요가 소통을 가속화한다. 고통의 작용은 이와 반대다. 고통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경향이야말로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해준다. - P60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서 출발한다. 존재 덕분에 존재자는 명백함을 갖게 되고, 이해될 수 있다. 존재가 먼저 파악되어야 존재자에 대해 이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의 관심을 어떤 대상으로 돌리기 전에, 나는 이미 성찰 이전에vorreflexiv 파악된 세계 안에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기분Stimmung이 세계를 파악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성찰 이전에 기분을 통해 파악된, 그러나 따로 의식되지는 않는 세계는 대상을 향하는 지향성에 선행한다. "기분은 이전에 이미 전체로서의 세계 내 존재를 파악했고, ... 을 향하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기분과 같은 현상들은 이미 하이데거의 사유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das Unverfügbare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찰 이전에 파악된 세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세계 안으로 내던져졌고, 내맡겨졌고, 이 세계에 의해 기분으로규정되어 있다be-stimmt. 실로 기분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우리를 덮치는 어떤 것이다. - P68
오늘날에는 정신적 태도로서의 인내와 기다림 또한 침식되고 있다. 인내와 기다림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강제로 인해 사라지고 있는 하나의 현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길고 느린 것 안에서 인내하는 기다림은 특별한 의도성을 갖는다.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태도다. 이 기다림은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안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안에 서 있음In-Ständigkeit이 이 기다림의 특징이다. 이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자신을밀착시킨다. 포기가 의도 없는 기다림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포기는 준다gibt. 포기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소비와 반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포기해야 함과 내어줌을 슬픔 속에서 견디는 것"이 "잉태"다. 고통은 어떤 결핍을 가리키는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잉태, 나아가 존재의 잉태다. 고통은 주어지는 것Gabe이다. - P76
반면 지금 우리는 내밀한 개인적 데이터들까지 자발적으로 내놓고 있다. 강제가 아니라 내적 욕구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 우리를 구석구석 철저히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한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여기서 자유의 변증법이 일어난다. 자유의 표현인 무한한 소통이 총체적 감시로 변한다. - P89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철폐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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