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그릇된 오해는 단순한 관념의 놀이로만 끝나지 않고 현실의 고문기구가 된다. - P6

우리의 해석은 우리의 지평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순환론을 제시한 것이 바로 철학의 해석학(hermeneutic)이었다. - P23

비판이 불가능한 철학은 신학일지언정 철학은 아니다. 이것이 ‘해석의 철학’이다. - P24

계속된 수입에 철학의 자생력은 없다. - P59

사실상 공자에서 맹자로 정통이 이어진 것은 한유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로, 직하학파의 좨주였던 순자가 당시에는 오히려 권위가 있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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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만든 가장 큰 변화는 인류의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생물학적 한계를 가진 인간이 생각을 만드는 방법은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을 만드는지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대표적인 학습 이론이 바로 복제 이론Meme Theory입니다. 정보를 보고 그것을 뇌에 복제해서 생각을 만든다는 이론입니다. 카피가 학습의 기본이라는 거죠. 아기들은 태어나서부터 부모가 하는 모든 것을 보고 따라 하며 학습을 시작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보를 보고 뇌에 복제해 생각을 만들어갑니다. 따라서 보는 정보가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뒤 사람들이 보는 정보는 달라졌고, 그래서 36억 인구의 생각이 달라져 35 버렸습니다. 이 정보 전달의 변화가 개인과 사회가 바뀐 가장 큰 이유입니다.
 사회의 정보 전달 체계 역시 달라졌습니다. 지난 30년간 현대사회 정보 전달의 중심축을 담당하던 신문과 방송은 이제 그 힘이 현저히 줄어들었죠. 대한민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전체 가구 중 유료 종이신문 구독률은 무려 73퍼센트였습니다. 아침에 신문이 배달되면 73퍼센트의 국민이 같은 시간대에 모두 같은 걸 보고 복제하는 나라, 그래서 매일같이 유사한 생각을 함께 만들던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죠. 그래서 언론의 힘도 막강했고 사회 전체가 갖는 대중의식도 매우 견고한 사회였습니다. 길을 걷다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방송이 갖고 있는 계몽의 힘도 사회 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대중의식의 복제는 우리나라 사회 유지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 P34

일단, 매일같이 반복되던 대중의식의 형성 과정이 사라졌습니다. 아침에 신문이 배달되어도 생각의 동시 복제는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대중의식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정보를 보는 패턴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스마트폰을 손에 든 인류는 정보의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아버렸고, 그에 따라 정보를 보는 방식도 진화한 것입니다. 뇌는 자기에게 즐거움을 주는 정 37 보를 끊임없이 원합니다. 이것이 진화의 방향이죠. 그래서 스마트폰을 통해 자기가 좋아하는 정보만을 보고 복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생각은 모두 개인화되었습니다. 언론은 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과거와 같은 절대적 권력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정보 선택권을 가진 인류가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하면서 ‘선택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새로운 기준이 등장한 탓입니다. - P36

기성세대의 정치 성향은 다소 분명하게 대립되는 양측으로 갈려 있습니다. 제조업 중심의 기업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경영자와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자의 편을 드느냐, 아니면 경영자의 편을 드느냐로 양분화된 정당들이 서로 목소리 높여 싸우는 게 익숙합니다. 이것이 지난 50년간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대한민국의 문명입니다. 정치, 경제, 산업, 시장, 사회가 전부 이것을 기준으로 운영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도 계속될 우리의 발전 방향이라고 모두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새로운 혁명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 P48

시장 혁명의 시대에 깊이 벌어진 문명의 틈을 메우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옵니다. 혁명은 급속한 문명 교체를 의미합니다. 그만큼 기성세대에게는 신문명이 어렵습니다.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에 태어나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까지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기성세대는 더욱 그렇습니다. 인생은 축적된 시간의 역사입니다. 그 엄청난 격동의 시대를 겪어온 분들을 국민소득 1만 달러, 2만 달러 시대에 태어난 세대가 이해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서 더 값진 일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기성세대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청년이라면 세계 어디에 사는 사람들과도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P273

새 시대에도 진리는 매한가지
 
 소비자와의 공감 능력을 키워야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론이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걸로 귀결돼버렸네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디지털 문명의 본질이 요구하는 인재상은 ‘배려할 줄 알고, 세심하고, 무례하지 않으며, 친절하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또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가식이 아니라 본성이 그래서 언제나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무릇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디지털 문명 시대에도 새로운 기술이 접목되었을 뿐 사회를 이루는 중추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인재가 되는 근본은 275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니,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가릴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없는 가식은 언제나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고 디지털 시대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최근 많은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이 이런 시대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거듭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디지털 문명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아직 권력과 자본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구시대적 편견에 갇혀 있는 탓입니다.
 디지털 문명 시대를 위한 최고의 인재상은 ‘훌륭한 사람’, ‘인의예지’를 체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는 인의예지는 급변하는 디지털 문명사회에 걸맞은 인의예지입니다. 봉건사회부터 디지털 문명 시대까지 다양하게 분포한 세대 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인의예지입니다. 여기에 더해 디지털기술에 대한 이해력은 기본이고, 전문적인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인의예지를 체득하고 자기완성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라면 조금 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요? 전문기술도 그렇습니다. 굳이 값비싼 학원에 가지 않아도 높은 수준의 교육 콘텐츠를 SNS를 통해 할 수 있고, 지식에 대한 접근권이 평등해진다면 더 바람직한 사회 아닐까요? 또한 누구도 불만을 가질 수 없는 공정한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고객의 선택입니 276 다. 이것은 달라진 미디어 소비 문명의 기준입니다. 디지털 문명 시대는 새로운 사회, 과거보다는 좀 더 나은 사회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문명의 발전은 포노 사피엔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재가 되려면, 그런 인재를 키우고 싶다면, 개인·기업·사회 모두가 새로운 문명의 기준에 눈을 뜨고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달라진 시대로 즐거이 이동해야 합니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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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고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만족할 줄 알고 생활이 간소하며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삼가며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어떤 생명이든
강하거나 약하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태어났더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남을 속여도 안 되고
경멸해서도 안 되며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 바쳐 하나뿐인 자식을 지키듯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온 세계에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나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져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자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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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두 가지 원인 때문에, "사람들이 망령되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망령됨이 없다. 하늘에 본래 망령됨이 있지 않음으로 군자는 하늘에 순종하고 하늘의 시기를 받든다. 망령됨에 있어서는 그 망령됨 없음을 깊이 믿어 그것을 천리에 고유한 것으로 돌리고 시기가 소식함에 따라 나아가거나 물러나 감히 하늘을 희구하여 혹여 망령됨에 기만당하지 않는다." 천지간에 잘못되고 불합리한 일이 한 건도 없기 때문에, 이상적인 인격을 갖추려는 군자는 하늘에 "망령됨이 없을" 때에는 천리를 따르고 천시를 받들어 자기의 임무를 완성하고, 망령되이 보이는 경우에는 하늘에 망령됨이 181 없음을 마음속으로 깊이 확신하여 그 시기와 자리에 순종하고 그것을 자기 행위의 준칙으로 삼는다. 감히 자신의 견해를 고집해서 함부로 잘못되고 불합리한 처지에 스스로 빠지지 않는다. - P180

왕부지가 생각하기에, "땅을 벗어나면 곧 하늘이다. 그 사이는 지극히 빽빽하여 틈이 없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전체 범위를 표시한다. 그 사이는 태화인온의 기로 충만해서 절대적인 허공이 없다. 그러므로 우주에서 각종 현상이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전체 내부의 인온변화일 뿐이다. 전체의 양에서는 추호의 변화도 없다. 183 그래서 왕부지는 "하늘만이 크고" "기품은 작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품이란 각각의 사람과 사물을 가리킨다. 하늘(즉 우주)은 전체이기 때문에 크고, 각각의 사람과 사물은 "구분되는 양이 있고 기쁘게 모이기에 작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늘의 리를 리로 삼지만, 하늘은 사람의 리를 리로 삼지 않는다." 하늘은 크고 사람은 작다. 즉, 하늘은 전체이고 사람은 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치는 반드시 하늘의 이치에 복속되지만 하늘의 이치는 사람의 이치 이외에도 또 다른 이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천9도와 인도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 P182

우주의 전체대용인 ‘도’는 "건과 곤이 함께 세워짐"을 근본으로 하지만, 그 운용은 "반드시 사람에 의거해야 한다." 208 사람에 의거하지 않은 운용에는 사람이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과 그에 따른 효험을 사용할 곳 또한 없어지게 된다. 사람에 의거하지 않은 운용에 대해서도 비록 사람의 지혜로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미 사람과 무관하기 때문에 그런 자연현상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성인은 우리 인간을 준거로 해서 표준을 세운 것이다. 성인과 같이 "사람에 의거한다면", 단지 우리의 이상적인 표준을 건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을 분별하고 그 지위를 올바로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 의거한다면 사람의 표준이 세워지고 천지의 지위도 확정된다."
왕부지에 의하면, 사람은 본체의 가장 뛰어난 기를 품수받아 가장 영명한 존재이며 그 능력 또한 가장 뛰어나다. 더욱이 사람만이 천지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에, 도의 유행도 "사람에 의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천지의 마음’일 수 있을 것이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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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왕부지철학을 연구한 목적을 여기에 꼭 밝히고 싶다. 그 목적은, 좀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리 동양의 전통학문 내부에서 현대화를 추동시킬 수 있는 합리성과 이상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바 현대화란 비교적 서구화에 부합하는 성질에 경도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서구화란 구체적으로 말해서, 과학기술의 선진화요 민주적인 정치제도이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현대화는 이런 것이 아니다. 물론 현대화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선진화도 필요하고 민주적인 정치제도도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선진화는 그것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담당해야 할 것이요, 민주적인 정치제도는 정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범위에 속한다. 철학의 임무는 그들에게 필요한 이론 근거 혹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른바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민주적인 정치제도가 우리 인류에게 떠안기는 문제들과 그로 인한 위기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과학기술과 민주제도의 이론적인 기초를 검토해야 하고, 그 목적과 이상을 반성해야 한다. 필자가 현대화를 추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리성과 이상성은 바로 이런 검토와 반성의 기점 혹은 근거이다. 물론, 이런 합리성은 결코 이론이성에 치우친 서구의 합리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론이성과 도덕이성을 함께 중시하지만 도덕이성이 주도자가 되는 합리성이다. 동양의 문화전통에서 가장 특출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도덕성이다. 그러나 도덕이 비록 핵심이지만, 단지 도덕만으로는 인류가 이상에 도달하려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일련의 곤란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원칙 이외에, 또한 우리의 문화전통 안에서 도덕이성과 이론이성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둘을 회통할 수 있는 원칙을 발굴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발굴하려는 원칙은 일종의 ‘전체이성’에 관한 원칙이다. 이 원칙은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근거를 확립시켜 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곧 인문성·인문원칙이어야 한다. 물론, 자고이래로 인문정신은 동양문화전통의 주된 내용의 하나였으며, 이른바 유학이 표방하는 것 또한 이런 정신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인문정신은 오직 도덕원칙만을 강조하고 이론이성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서구처럼 근대화를 추동시키지 못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인문원칙은 하나의 전체이서의 원칙이다. 이런 이성은 왕부지 철학에서 비로소 발아하기 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점은 그의 「심론心論」을 살필 때 상세히 논의될 것이다. 왕부지의 최종적 포부는 바로 전체이성에 근거한 인문정신의 부단한 심화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일생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실천한 것 또한 학문이라는 영역에서 그 인문정신의 의의를 분명하게 밝히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말하는 합리성이 바로 인문성이다. 혹은 인문성은 적어도 합리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왕부지철학을 연구하여 동양문화전통 안의 합리성을 천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19세기 중엽이래로 서구문명의 타격으로 혼미함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동양문화로부터, 서구문명이 남겨놓은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합리성, 즉 인문성을 발견하여 인류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해보자는 것이다. - P8

앞 절에서 우리는 이미 도의 작용을 본체 차원에서 볼 경우와 천지만물의 입장에서 볼 경우로 구분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분명 천지만물의 입장에서 보는 도이다. 즉, 여기에서의 도란 특정 사물이 그런 사물이 되는 규율이자 법칙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사물이 없다면 그 사물의 규율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서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100 다만 사람들이 살피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결코 보편적 혹은 일종의 유적 공통 규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개별적 혹은 특정한 하나의 사물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그 특정한 개별 사물의 규율은 반드시 그 존재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규율은 존재의 규율이지만, 존재는 규율의 존재일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필자에게는 필자가 되는 개인적인 특성과 규칙이 있다. 만일 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특성과 규칙 또한 있을 수 없다. 종합하자면, 어떤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의 규율도 존재하고, 사물이 사라지면 그 규율 또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세상은 오직 기물일 뿐이다." 이런 관점은 동정이 음양의 동정이고 ‘신’ ‘도’가 기체의 그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존재의 각도에서 말한 것이다. 구체적 존재와 그 작용의 관계 문제에 대해 왕부지는 일관되게 존재의 우선성을 주장했다. - P99

그러나 또한 왕부지가 생각하기에,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설령 모두가 음양이 변화하여 그 형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음양의 덕성과 그 시기 및 자리가 적당한지 여부에 의해 그 사물이 온전한지가 결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전체 우주에는 마치 여전히 무언가 결핍된 사물이나 현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정체’는 "모두 지극히 풍족한 건곤으로부터 충분히 취하여 우주의 성대함을 극진하게 하며", "배합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천지 사이에 위대한 아름다움을 스스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른바 혹 결핍되어 보이는 것 같은 사물이나 현상은 단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만 그런 것일 뿐이다. 만일 전체 우주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그렇게 혹 결핍되어 보임 또한 완전하고 원만한 우주를 구성하는 일부분일 뿐이다. 혹 결핍되어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왕부지는 이른바 "열두 자리 음양"과 "반은 감춰지고 반은 드러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 P147

왕부지에 따르면, ‘무’를 주장하는 사람은 ‘유’를 주장하는 사람의 자극을 받아 그 주장을 타파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무’란 모두 특정한 ‘유’에 상대해서 그 특정한 ‘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북이에게 털이 없다는 것은 털이 있는 개에 상대해서 말한 것이고, 토끼에게 뿔이 없다는 것 또한 뿔이 있는 사슴에 상대해서 말한 것이다. 왕부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떤 주장도 그 근거가 있어야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를 근본으로 하는 주장은 여하한 시공, 즉 고금과 상하 사방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왕부지는 또 "세상에 어떻게 소위 무란 것이 있겠는가? 물건에 혹 있지 않다면, 사건에는 없지 않다. 사건에 혹 있지 않다면, 이치에는 없지 않다. 찾지만 얻지 못하니, 나태해져서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고서 무라고 말할 뿐이다." "노장의 무리는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에서 결단코 161 무라고 말한다. 비루하기가 심하구나!" "저들은 무명을 천지의 시작으로 여기고, 전부 소멸함을 진공의 창고라고 여긴다. (이는) 마치 소경이 사물 있음을 보지 못하여 사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어리석음은 나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왕부지는 또한 "무란 작용의 창고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이른바 무란 결코 절대 허공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지만 사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 P160

여기에서 말하는 괘는 건상진하의 ‘무망’괘이다. 왕부지가 생각하기에, 무망괘는 세 양이 위에 있는데 세 양은 하늘을 표시하므로 그 이치가 정확하고, 두 음이 그 아래 있는데 세 음이 아래 있어야 비로소 땅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성대함의 끝이 아니다." 그리고 첫 양효가 두 음 아래에서 "진동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기와 자리가 올바르지 않아서 이치적으로 있을 수 없고 다만 우연히 발생한 변화된 양태일 뿐이다. 그래서 매우 잘못되고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의 이해일 뿐이다. 사실상, 전체 우주는 늘 같은 형태로 그 순서를 규정하지만, 또한 몇몇 ‘변태’에 근거해서 "헤아리지 못하는 바뀜"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몇몇 ‘변태’ 또한 합리적 전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헤아리지 못하는 바뀜"도 결코 잘못되거나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왕부지는 또한 "열로 채워진 것은 하늘이고 아홉으로 부족한 것은 사람이다. 하늘의 수를 사람에게서 추구할 수 없고 사람의 수로 하늘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몹시 잘못되고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현상도 실제적으로는 모두가 진실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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