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청소년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인문학 연구자인 당신이 관심을 가지던 대상 중 하나가 청소년이었죠.


 아마 당신의 자녀를 양육하며 자연스런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그러고보니 당신의 서재에 놓여있던 사진이 떠오르네요.)

 그 영향을 받아 저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와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멘토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기획하여 진행해보기도 하고

 추후에도 여러가지 우연이 겹쳐 그들과 이야기해 볼 기회도 많았죠.

 친척 동생들이 아니라 정말 다양한 학교 안, 학교 밖 청소년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하고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죠.

 여기서 '성공적'이라는 건 참여한 청소년들의 만족도를 말합니다. 굉장히 좋아했고

 저는 이를 분석하여 하나의 사례로 기록하여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방향을

 한때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청소년 활동가 분들도 관심을 가지셨구요.


 하지만 저는 결국 그러지 못했습니다. 현재 저의 감상적이고 좁은 소견으로는,

 그들을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상세히 기록하는 일이 전혀 내키지가 않습니다.


 기숙사 퇴출 당한 사유가 자살기도였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상세히 쓰고 싶지 않아요.

 (학생을 그딴식으로 취급하는 학교 방침에 대해 저는 친구와 함께 격노했습니다.)

 누군가에 고백을 받아았는데 '저 어떻게 저 같은 아이를'이라며 납득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거듭 '네가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있으니까'라고 이해시켰던 이야기도 굳이 쓰고 싶지 않아요.

 

 농담 속에 섞인 혐오발언에 대해 짚어주고 정정했던 에피소드도

 한때 불거졌던 악습과 관념과 이념에 대해 뜨겁게 나누었던 토론도.

 그들의 생각에 대해 낱낱이 기록하고, 그들의 마음에 대해서 속속히 비추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제 친구들이라서 그러고 싶지 않아요.  

 때로-아니 대부분- 저보다 현명하고, 사려 깊고, 진중한 친구들.


 함께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에 대해, 

 '투슬리스'의 귀여움에 대해 서로 맞장구를 치다가도 


 인간(바이킹)과 드래곤의 공존, 그리고 (인간을 제외한) 

 지구 상의 모든 생명과 인간과의 공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나의 친구들, 저의 친구들입니다.


 하필 제가 만난 친구들만 그런 것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당분간은 청소년 연구에 손을 떼려고 합니다.

 당분간은 아래 대화처럼 서로 장난치고 노는 것이 좋습니다.


 *


 "'교수님 사랑해요'를 제출하고 턴을 마칩니다."


 "훌륭하군. 여기 A+일세."


 "이정도면 유착의혹이 불거지겠군요. 흠."


 "나는 지식만 머리에 쑤셔박고 

  복사기처럼 외우는 제자를 키우고 싶지 않네. 


  학문이란 결국 사람을 위한 것 아닌가. 

  따뜻한 심장을 가진 학생이 장차 스승으로 

  성장하고 또 그런 제자를 거두길 바라네."


 "ㅇ앟. 참교수.. 강의평가 전부 5점 드립니다."

  

 *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올 법한 교수님 말투가 저,

 유착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친구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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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팁, 가을이에요.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다음 완전한 가을이 왔네요.


 창문은 꼭 닫고 잔 덕분에 눅눅해진 방안을 환기하다가

 내친김에 바닥도 닦고 책장도 닦았어요. 손바닥만한 방이야 슥 닦으면 그만이죠.

 그래도 책장을 닦을 때면 언제나 당신 서재에 쌓였던 책장 먼지도 함께 생각나요.


 봄이었던가요? 꽃가루인지 송화가루인지 모를 것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가을이었던가요? 거대한 책장이 빼곡한 서재를 그리 자주 청소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무튼 책구경을 하던 저는 참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서 냅다 닦기 시작했죠.

 순식간에 까매진 손수건은 몇 번이고 빨아야했지만, 보송보송한 먼지로 덮였던 책장은

 맑은 황갈색 빛깔을 비로소 되찾아 드러낼 수 있었죠. (대체 얼마나 청소를 안 했던 겁니까)


 누굴 시킬 생각이야 당연히 못했을 당신,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시작한 나.


 그렇게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실 제가 먼저 시작하긴 했는데) 

 서재 곳곳을 쓸고 닦기 시작했습니다. 문이란 문을 활짝 열고, 

 어디선가 빗자루와 대걸레도 빌려오고. 여기저기 쌓인 먼지를 몰아냈죠. 


 쭈구려앉아 책장 맨 아랫칸을 닦고 있을 때 등뒤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지쳤을 법도한데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가 의아했습니다.

 (제멋대로인 제자를 인내심 있게 온화한 태도로 일관해주시는 캡틴.)



 그날 저녁, 이메일 한통이 도착해있었습니다.

 첨부된 파일과 함께요. 오늘 서재 청소에 대한 보답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같이 청소했잖아요...?) 무튼 파일을 열어보았습니다. 음악파일이었습니다.  

 곡명은 앙드레 가뇽의 <바다 위의 피아노>.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연주였습니다.

 한참이나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곡을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곡이

 되었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차마 자주 듣지도 못할 지경의 곡이.



 그래서 나의 책장을 닦고 있노라면 

 당신의 (먼지 가득한) 책장이 생각나고


 당신의 책장이 생각나면 자동적으로 

 '바다 위의 피아노'가 떠오르는......

 가끔은 그런 나날, 오전, 아침입니다. 



 기관지 약하시잖아요. 먼지 잘 닦으시고, 

 가을이니 더더욱 신경쓰시고.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변함없이 건방진 제자라 잔소리 좀 하겠습니다.

 되려 한소리 들어야 할 사람은 저이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청명하다'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가을에, 안부 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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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틴! 기억해요? 

 당신 서재에 제가 드나들도록 허락한 날을?

 그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버릇없는 저 녀석이 당신의 서재에서 하는 짓을 보라구요.

 정신없이 흩어진 책과 자료에서 당신 연구의 흔적을 읽었죠.

 밑줄 쳐진 종이와 낱장에서 당신의 연필이 지난 자국을 봤고요.

 그득히 쌓인 신간 도서를 보며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봤어요.


 깨끗한 책면에 흑연으로 줄을 그을 용기는 그때 생긴 것이죠.

 철학책과 만화책과 정치학 서적과 무협소설이 뒤섞인 책장에서

 모든 책을 사랑하는, 동등하게 여기는 정신을 배우게 되었고요. 


 넘칠 것 같은 책들, 책장은 물론이고 거대한 수업용 탁자마저 점령하고

 그것도 모자라 세로로 바닥에 쌓아올린 책을 보며 처음으로 부러움을 느꼈죠.

 (그리고 저도 훗날 그렇게 새 책을 실컷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저는 서재에서 당신이 책을 읽고 있는 걸 지켜본 적이 없어요.

 (제가 오면 언제나 하던 일을 멈추고 먼저 인사를 건네셨죠)

 그러나 저는 홀로 서재에 머물 때, 책을 보는 당신을 보았어요.

 


 어느새 왜곡된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당신이 연구하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아이에요.

 연구가이자 학자인 아버지를 책상 너머로 올려다보는 조그맣고 어린 아이.

 오후의 빛으로 가득찬 서재 속에서 책상 앞에 주저앉아 장난을 치기도 하는 아이.


 아마 당신이 나를 낳았기 때문이겠죠. 그래요, 당신의 서재이자 연구실은

 나의 요람이었으니. 어처구니 없겠지만, 그래요. 내가 태어나버렸어요.

 당신의 지식을 이어받고 싶어하고, 당신의 순수함을 닮고 싶어하는 내가.

 어이없으시겠지만, 그래서 당신은 내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거예요. 


 캡틴, 어떤가요?  

 멋대로 서재에 들락이도록 내버려두었다가

 멋대로 자라버린 포도덩굴 같은 녀석이


 감히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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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는 모르겠어요.



16살이었죠. 그애가. 갓 자라기 시작한 소년의 수염은 무척이나 보드라웠습니다. (테메레르의 수염처럼요.)


어느 날에는 숨이 턱에 닿도록 내게 달려왔기에 무슨 일이가 싶었죠. 그런데 아무 일도 아니래요.

그리고 곧 학원을 가야한다며 도로 가버렸요. 갓 학교 마치고 도중에 잠깐 들렀던 모양이에요.


캡틴의 연구실 앞을 달려가던 어느 멍청이가 생각났어요. 연구실'로' 달려온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연구실 '앞'을 달려갔던 멍청이. 차마 열려있던 문에 들어올 용기가 없어서 그앞을 어정거렸던 멍청이.


아마 그애도 그때의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걸테죠. 내가 보고 싶었다고, 내가 보고 싶었다고.

용기 내 말은 하지 못했지만 용기내서 힘껏 달음박질했던 멍청이가 그때의 저와 꼭 겹쳐보였습니다.



숨을 몰아쉬던 소년이 저를 바라봤을 때는, 몰랐어요. 정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죠. 이전의 제 모습과 겹쳐진다는 것을. 



그때 당신은 제 이름을 불러주셨는데. 쑥쓰럼타는 소년의 이름을.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아시다시피 눈치는 갖고 태어나지 못한 녀석이잖아요.

영문을 모르더라도 그저 그애가 반갑기만 했던 멍청이였을 뿐이죠.


멍청이가, 그런 멍청이가 유난히도 생각나는 밤이라 끄적여보았습니다.

어느 멋진 8월에 잠시 잠깐 만났던 멍청이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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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숙박권도 있던데, 가족들과 가면 좋지 않겠니?" 

"딱히요?"


당시 진행하시던 책소개 프로그램에서, 나는 열렬한 애독자였다.

매주 꼬박꼬박 방송국 게시판에 독후감상문을 올렸으며, 보조MC조차

'이 책 감상문이 올라올 줄은 몰랐다'는 보기 드문 그래픽노블까지

모조리 읽고 써서 올렸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쓴 감상문을 캡틴이 읽는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 같다. 추측할 수 없는 불특정 독자보다도 한명의 분명한

독자-읽어주는 이-가 있는 글을 쓰는 기쁨을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요방송사가 보유한 화려한 경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방송국 게시판에 거의 유일하게 독후감을 올리는 독자에게 캡틴은 독자선물

받았냐고 물어보셨다. 아직 받은 바 없다고 말하자 캡틴은 종류를 열거하셨다.

씨푸드 뷔페 식사권, 아쿠아리움 초대권, 까지는 그렇다치고 '호텔숙박권'이

어떤 장점이 있는지는 전혀 짐작가지 없었다. 어디론가 여행을 간 것도 아닌데

'잠은 집에서 자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굳이?'라는 게 꼬꼬마 시절 내 생각이었다.


이런 내 생각이 반영되었는지 방송사에서 몇달이나 밀린 경품을 한꺼번에 보내주었을 때

다행이 호텔숙박권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실 좀 헷갈리지만.


좀더 시간이 흐른 후, 내 버킷리스트 가운데에는 '한달동안 호텔에서 살아보기'가 추가되었으며

헛된 꿈 리스트 가운데에는 '전국 5성급 호텔을 순회하며 책 읽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는 것'

추가 되었다. 호텔에서 책읽기... 최고다. 1박 2일이라도 호텔에 갈 때면 최소 책 2권은 챙겨가야 한다.     


그때 캡틴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호텔에 가족들과 같이 놀러가면 좋지 않겠니?"가 아니라

"호텔에서 책 읽으면 얼마나 근사한지 아니?"라고 말이다. 



추신1. 딱히 원망하는 게 아니에요. 꼬꼬마가 이렇게 컸다고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추신2. 조식 예약이 잘못 되어서 추가하려니 '청소년 한 명인가요?'라는 회답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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