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캡틴, 오랜만입니다.

두번 다시 편지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웬걸요,

저는 파블로브의 개 마냥 , 새학기를 시작하는 봄날

당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네요.


당신의 수업게시판을 몰래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쉽게 접근하긴 힘든 것 같더군요.

여러 이유를 짐작하고 모두 납득되는 이유였기에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이름으로 찾아본 탓인지 뜻하지 않게 다른 것이

눈에 띄더군요. 예, 당신이 쓴 칼럼이요. 이건 누구나에게

공개된 글이니 마음 편히 읽어도 되겠지요. 언제나 성실하게

쓰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여태 생각이 닿지 않았는지.


오랜만에 읽은 당신의 칼럼은 참 당신다운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당연한 말이겠지만, 제가 기억하는 '당신다운 모습'에

너무도 가까운 모습 말이지요. 캡틴, 그리고 캡틴의 '장미'에 대한 글이라.


여기서 '장미'는 제가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붙여둔 '그분'에 대한 별명입니다.

당신은 물론- 아무도 모르는- 오직 저만이 알고, 부르는 별명이지요.

바늘과 실처럼, 캡틴을 부르는 별명(이 별명은 공식별명이죠)에 자연스럽게

따라오기에 저는 그분을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었답니다.  

   

칼럼의 주제와는 별개로, 잔잔히 미소가 번지는 글이었습니다. 

'일상'을 유지해가는 캡틴과 장미의 모습이 너무도 예뻐서, 보기 좋아서,

꼭잡은 두 손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캡틴이 보여주는 모습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닮지 않고 싶은 모습이 없었지만

그중에 다섯 개정도 꼽아보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없이 이 모습을 꼽을 거예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랑하는 나만의 '장미'의 손을 꼭 쥐고 변함없이

걷는 뒷모습 말이에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는 제가 음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캡틴. 저는 캡틴을 볼 수 있는데 캡틴은 저를 보지 못한다는 게

정말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비겁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지만요.


저는 생떽쥐페리의 동화에는 등장조차 하지 못했던 늑대 또는

사막 쥐... 혹은 살쾡이 같은 포지션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럼 캡틴,

오늘 밤도 저는 그림자에 녹아듭니다. 평안한 저녁 되시길 바랄게요. 모쪼록.



-푸른 밤, 사무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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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캡틴, 마이 캡틴.

 그간 평안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꼬박 반년만에 당신께 다시 편지를 띄웁니다.

 저는 당신으로부터 도망쳤고, 당신의 별에서 떠나왔는데

 이토록 가슴 아픈 밤에는 별다른 수 없이 또 편지를 쓰고야 맙니다.


 또다른 이별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는 건 이별의 연속이라고, 누가 그랬던가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른이 되면서 저절로 알 수밖에 없는 걸까요.


 아니 이제껏 수많은 이별을 해왔을텐데, 이제서야 이토록 아픈 것은

 제가 비로소 사람이 되어간다는 증거일까요. 양철 나무꾼과 다름없던 제가,

 마법사가 넣어준 가짜 심장을 가지고 사람인 척 살아가던 제가, 이제서야.


 -

 

 캡틴, 저는 당신이 야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수년전, 당신께서 오랫동안 진행하시던 책 방송의 '마지막 방송'일이 정해졌을 때,

 청취자들에게 미리 이야기 하지 않겠다-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겠다- 라는 당신의 결정을

 제게 알려주셨을 때. 저는 청취자들이 아쉬워하지 않겠냐고, 그 청취자의 한 명으로서

 당신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왜, 어째서. 


 지금도 그 결정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 당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자, 당신과 같은 결정도 '고려'는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나만 훌쩍 사라지면 그만인 

 그런 작고 가벼운 일, 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듭니다.


 아쉬움, 슬픔, 미안함. 그런 것들을 모조리 내가 떠안고, 끌어안고, 떨어져버리겠다는 그런 마음.

 그러나 스승님. 저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담아낼 만큼 넓은 마음 주머니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고작 헝겊 몇 조각을 기워 톱밥을 채워넣은 낡디 낡은 가짜 심장, 그게 전부라서요.


 입안에 욱여넣지 않고 다 말해버리기로 했습니다. 아니, 이미 말해버렸습니다.

 나 이제 간다고. 다음 주가 마지막이라고. 너희들과 나, 다음 시간이 마지막 시간이라고.

 

 나의 제자들. 아, 적을 때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 단어... '제자'들.

 그 아이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당연히 놀라고, 아쉬워하고, 아쉽다 말해주었습니다.

 어쩌면 그날 밤은 좀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의식과잉이라 하실 수 있지만 제가 보아온

 그 아이들이 감수성이 좀 넘쳐서요. 십중팔구 울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두달이 지나면 금새 회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영원히 못 잊을 거거든요.

 평생 기억할 거거든요. 그래서, '서로 아쉬워하는' 교집합을 잠시나마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런 사악한…'이라며 어이없다는듯 웃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선.

 어쩌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사람이 되려면 멀었는 걸요. 그리고 이제 막 생각한건데

 딱히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딴 것도 심장이라고 이렇게나

 아픈데, '진짜 심장'이라는 걸 가지게 되면 얼마나 아플까요. 터져버리진 않을까요?


 너무 많은 것들을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견디는 삶인지요.

  


 -


사랑하는 스승님, 당신이 받을 리 없는 이 편지인데도 어찌 맺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매년 수많은 제자를 받으시고- 뜨겁게 온 맘 다해 가르치시고- 또 떠나보내는 당신은 

대체 어떤 모양의 심장을 하고 계신지요. 궁금하지만, 차마 들여다 볼 엄두는 나지 않습니다.


어떤 모양을 하고 있던 간에, 그 가운데 가장 깊숙히 박혀있는 강철가시는 제 것일 것이기에. 

오 캡틴 마이 캡틴. 모쪼록 저 같은 제자는 잊으시길 바랍니다. 한달내 저를 잊을 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게, 완벽하게 잊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모쪼록 평안한 밤 되시길 바라며.



언제나 스승님께서 평안한 저녁 보내시길 바라는, 사무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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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내가, 

 당신의 목소리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혼동하리라곤.


 오 캡틴 마이 캡틴. 

 오늘은 오랜만에 오래된 지역서점에 다녀왔습니다.

 위 사진은 자리를 이전하기 전의 그 서점에서 찍은 것입니다.

 이전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심정이 역력히 드러난 표정이군요.


 제가 오늘 당신의 목소리를 착각했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을까요.

 캡틴도 아시다시피 저는 안면인식장애가 좀 있습니다. 반면 음색을

 알아듣는 귀는 좀 발달한 편이라고 나름 자신하고 있단 말이지요.

 

 새로운 팝송 리스트를 틀어두고도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클래식의 넘버는 언제나 새로워도 어느 작곡가의 것인지는 대강 알아맞추며

 영화 사운드에서 배역의 목소리만으로 어느 작품에서 보았던 분인지 알아봅니다.


 그런 제가, 그랬던 제가, 그런 일을 겪게 되리라곤 아직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3번이나 치켜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인 줄 알고, 당신의 소리인 줄 알고.


 

 몇 년 전, 당신은 물으셨죠.


 "너는 내 어디가 좋니? 

 온화한 얼굴? 

 부드러운 목소리? 

 탁월한 수업능력?"

 

 "아뇨, 

  아뇨, 

  아뇨. 

  셋 다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곤란한데." 


 어째서 그것이 곤란한 일인지 아직도 납득할 수 않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부분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로 꼽기에는 너무도

 소소한 것들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아무래도 좋을 것'도 아니었단 말입니다.


 서점에서 저를 세 번이나 착각에 빠뜨렸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서점에서 일하시는 직원분이셨습니다. 문의하는 고객에게

 재차 답변하고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것인데, 그 톤이 무척 비슷했습니다.


 책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저렇게 변하게 되는 것일까.

 책을 소개하는 일을 오래도록 했던 당신의 목소리는 이렇게 완성됐던 것일까.

 나도 책과 꾸준히 함께 한다면 언젠가 저런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런 상상을 하며 잠시 설레였습니다.


 *


 캡틴, 당신의 제자들은 별의 향기가 납니다.

 얼마나 됐던간에-일정기간 이상- 당신의 별에 머물렀던 여행자들은 

 별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향기와 자기 고유의 향이 섞여서

 각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향을 만들어냈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별의 흔적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그 흔적이 분위기일지, 미소일지, 목소리일지조차 짐작해본 적 없습니다. 

 당신의 제자이길, 당신의 아들이길, 당신을 일부분을 닮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상상해봅니다.

 그런 온화한 표정이나 자연스러운 미소 같은 것은 아마 결코 닮을 수 없을 겁니다.

 상냥하면서도 때론 단단해지는 부드러운 조약돌 같은 목소리 역시 가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탁월한 수업능력도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지만 아무튼 그것만은 쫒아가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착각했던 그분처럼, 책이란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가 된다면,

 '당신의 목소리를 연상케 한다'는 착각 정도는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망상에 약간 들뜨고 있습니다.


 *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제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인 줄 착각했다는 오욕을 약간은 떨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누군가는 '그거 좀 착각한게 무슨 큰일이라고'라고 할 수도 있지만요.


 저는 당신의 목소리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도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 들으며

 스쳐지나가며 머금었던 미소 짓는 소리 또한 놓치지 않습니다.


 사냥꾼을 피해 사과나무 아래 

 동굴 속에 머물렀던 귀가 뾰족한 짐승처럼

 밀밭 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의 발자국 소리에 

 동굴 밖으로 올라오던 붉은여우처럼. 


 그러니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양이 장미를 먹어치우냐 마느냐 하는 것만큼. 


 캡틴, 언젠가 나의 목소리에서

 당신 목소리의 향기가 나는 날을 꿈꿔봅니다.



 그나저나, 오늘도 새벽 취침입니다.

 당신께서 보신다면 꾸지람을 놓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차차 개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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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캡틴. 오 마이 캡틴.

 이번에는 이정호의 『시간Tempus』이라는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이번 사진은 책표지 빛깔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골랐습니다. 굳이

 우기자면 컵과 책이 놓인 동그란 탁자가 시계를 연상시키지 않냐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시간은 대부분 그런 것들도 구성되니까요)

 

 전작 『산책Promenade』으로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AOL에서 주관한 

 2016년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에서 북카테고리 전문가상과 전 부분 최고상을 받은

 작가지요. 그의 후속작을 손꼽아 기다렸음에도 책을 읽을 기회란 어쩐지 잘 오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읽어보는 이 책 『시간』을, 전작 『산책』도 함께 언급하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전작 『산책』내에 적혀있는 문장 모두를 손수 편지지에 옮겨 적은 적이 있습니다.

 책과 함께 그것을 소중한 이에게 선물했지요. 그림책 속 그림(장면)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지만, 

 글은 한 사람이 말하듯 이어져 있기에, 받은이가 이 문장들을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길 바라며 

 그렇게 필사했던 것입니다. 한 장의 편지지로 충분했습니다. 저의 짧은 메모와 함께 총 두 장.

 미색의 편지봉투에 담아 건네었더랬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이 책의 전부를 옮겨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림책이란 글과 그림이 상호작용하는 것입니다. 

 글을 옮겼다고 그림책의 절반을 퍼담았다는 단순한 계산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저의 자질구레한 감상을 밤새 써내려가더라도 천분의 일은 옮겨질까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새벽에 저는 또 모니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기로 했습니다.

 처음 책을 읽은 그 순간의 감동은 소중합니다. 감동이란 영원할 수 있지만, 한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처음'이란 감정은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기에-휘발될 수 있기에- 기록해두려합니다.


 이번에도 전문을 필사했지만 공개된 공간에 게시할 경우 저작권에 저촉될 수 있으므로

 '출판사 제공 책소개'에 공개된 페이지와 더불의 인상 깊었던 몇 장면의 문장만을 옮겨보겠습니다.

 (성경처럼... 아니 시조처럼 알아보기 쉽도록 번호를 붙였습니다. 본문에는 가 없습니다)


 

 1  얼마나 많은 순간을 지나왔을까.

 2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을까.

 3  우리는 아주 조금 밖에 모르고 있는 거야.

 4  우리는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을지도 몰라.

 5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어.

 6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기도 하고

 7  잃어버린 만큼 채워지기도 해.

 8  더 많은 계절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9 네 마음속 깊고 낯선 어딘가에

 10  아주 오래전부터 잠들어 있던

 11 아무도 본 적 없는 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어.

 12 언젠가는 내일이 오지 않겠지만-두려워하지 마.

 13  지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14  모든 건 네 안에 있으니까.



1 "얼마나 많는 순간을 지나왔을까"

흡사 사과껍질처럼 시계가 흘러내리고, 우주(밤하늘)가 드러납니다.


물질 '시계'는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

더없이 구체적인 도구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이 '시간'이란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진짜 모습은 오히려 시계 뒤의 벽 뒤의 물질 뒤의

공기가 빛에 부딫혀 파란 게 빛나는 저것 뒤의- 아무것에도 가려지지 않은 날것의 우주

그 속의 '별들의 흐름'과 가장 닮아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찌기 관측했듯이.  


2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을까"

울루루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돌판에는 고대의 숫자가 새겨져있습니다.

오늘날의 시계를 연상시키지만 시계바늘은 없습니다. 돌아가는 바늘은

무용해질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의 옛날, '역사'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4 "우리는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을지도 몰라."

초현실주의의 미술과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의 면모가 정말 잘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같은 공간에 낮과 밤이 함께 있는 모습, 제가 정말 마음에 들어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체감하고 있습니다. 같은 방도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됩니다.

제가 줄곧 방에 머물면서도 주로 새벽에 이런 편지를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지구의 자전에 따라, 또 공전에 따라 진짜 '다른 장소'인 게 맞기도 하지만요.

(마치 같은 기차칸에 있지만 오전 10시의 위치와 오후 1시의 위치가 다르듯이 말이예요.)

사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는데, 작가님의 의도와는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3 "우리는 아주 조금 밖에 모르고 있는 거야."

연습장(스케치북)에 그린 하루일과표, 탁상달력으로 보는 한달의 일정. 

아, 이 장면과 함께 툭 던져진 작가의 한마디는 가슴을 '툭' 치기에 충분했습니다.

근래 스케줄러(다이어리)를 쓰며 줄곧 답답해하던 저의 뒤통수를 목격한 기분,


상상이 되시나요? 하루를 기록하며, 한달을 계획하며, 일년을 예상하며 '뭔가'

답답했습니다. 한눈에 다 보이지 않는 기분. 시야가 가리워 아주 일부만 보이는 기분.

그래요. '시간'은 아주 거대한데, 고작 스케줄러에- 탁상달력에- 코를 박고 그것만

들여다보는 기분. 나의 '인생'은 일년짜리 스케줄러로 다 계획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7 "잃어버린 만큼 채워지기도 해."

나란히 놓인 모래시계와 와인이 담긴 잔.

모래시계는 한칸이 비면 한칸이 채워지고

잔에 담긴 와인은 시간이 흐르면 공기와 섞여 향과 맛이 풍부해지지요.

혹은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되는 '와인' 그 자체를 비유하고 싶었을지도요. 


8 "더 많은 계절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이 장면은 전작 《산책》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반가우실 것 같았습니다.

인물과 인물의 그림자. 둘의 나이는 각자 달랐던 장면이 《산책》에도 있습니다.

그 장면을 가장 좋아하던 친구도 있었는데, 다음에 자세히 소개해보고 싶네요.


10 "아주 오래전부터 잠들어 있던"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입니다.

별빛 모빌은 나의 '오래전'인 어린시절을 연상시키고,

웅장하다 못해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험준한 산등성이는 까마득한 

역사조차 뛰어넘은 고대의 지구-아주 '오래전'의 시간을 연상케합니다.


내가 태어난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안에 잠들어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13 "지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불화살. 나에게로 번지는 불화살. 


마른 들에 번지는듯한 불, 화살.

누구든 단박에 알아챌 장면이에요. 


14 "모든 건 네 안에 있으니까."

 수많은 반짝이는 파도의 물결. 

 수많은 역사속의 위인들이 빚어놓은 위대한 업적 같죠.

 

외따로 걷는 한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생기는 반짝이는 물결. 

또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한 사람만의 역사죠. 그만의 시간이죠.  


*


그런 메시지들이 좋았어요. 작가님의 의도를 맞춘 것인지 알 수야 없지만

저는 그렇게 느꼈고, 그런 점들이 좋았습니다. 전작 『산책Promenade』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그 책의 감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내심 우려도 했어요.

마치 너무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의 후속편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심정이랄까요.


신간 소식을 확인하고, 표지에서 이것이 연작임을 확신했을 때

열람을 꽤 오래도록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산책》과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오프라인 서점에서 마딱들였다면 망설임 따윈 없었지 싶어요.

(아, 《산책》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하는데... 아무래도 다음 편지에서!)


이제, 지금 제 책상 위에 놓인《시간》의 표지 속에 담긴 '시계'안에-

무너진 숫자의 흰색 조각들이 아주 잘 보이거든요. "시간=시계"였던 고정적인 관념을

무너뜨리고, 작가의 독자적인 사유로 '시간'에 대해 새로이 조명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잘 드러나는 표지가, 저는 정말로 좋습니다.



저는 저의 시간을 온전히 보내고 있을까요.

일단 지금 새벽 4시에 다다르고 있긴한데.


근래 캡틴에게 보내는 편지는 언제나 잠에 취한 잉크로

마무리하는 것 같아 좀 멋쩍네요. 아니면 밤의 장막에서

취한 잉크만이 캡틴에게 보낼 편지를 쓰게 하는지도 모르죠.


아, 캡틴. 이만 편지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에필로그는 본문과 함께 동시에 끄적여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으로 끝맺어있어요. 오늘 밤도 수면송을 들으며,

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오늘 밤도 굿나잇.

혹은 오늘 아침도 굿모닝이시길 바랍니다. :)


   


에필로그.

다음 연작이 있다면 어떤 소재일지 상상해봤어요.

첫번째 '책', 두번째 '시계', 세번째는... '음악'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핸드폰, 컵, 스케치북 등등 떠올려봤지만)

생각이 '음악'에 다다르자 그 다음은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음악'은 소재라기보다 주제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어떤 소재를 써서 '음악'을 표현할까. 이미 저 마음대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생에서, 삶에서 노래와 음악을 빼놓을 수 있을까요. 이 새벽에 모니터 앞을

지키는 저도 이미 옆에 음악을 틀어놓고 있는데. (현재 곡: Ten sleep- Darkroom)    


인간의 삶에 있어 음악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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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캡틴. 마이 캡틴.

편지를 띄울 때마다 사진을 첨부하는 것은

'당신에게 나를 보낸다'라는 의미가 큽니다.

아니 그게 전부라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적절한 사진을 고르기 마땅치 않아져서

이번에는 정말 아무 접점없는 이미지를 고르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위 사진은 지구별에 막 착륙하여 우주열에 의해 대지가 

지글지글 타고 있던 순간에 찍힌 것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


오늘은 저의 소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당신의 소년이었듯, 저에게도 나의 소년이라고 부르고픈

그런 제자가 생겼습니다. 아니, 제가 그렇게 느낍니다.


'제자'라는 표현은 아직도 너무 어색하여(저는 그럴 깜냥이 안 된다고 생각되어)

친구라고 하기에는 멀고, 그저 소년이긴한데, 나에게는 의미있는 소년.

그래서 나의 소년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이런 18세기 낭만주의 같은 감성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 소년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저의 소년시절- 캡틴의 연구실을 방문할 때면 

캡틴은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이번에 주목할 도서에 대해서,

현재 쓰고 있는 학술논문에 대하서, 새로이 완성한 원고에 대해서-

알려주시고, 말씀해주시고, 가르쳐주셨죠.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이야기 가운데 흥미롭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는 한마디라도 더 듣고자 열심히 질문하고, 답변을 듣고 난 후 연구실 문을 나선 다음에는

조그만 수첩을 꺼내들어 까먹을 새라 열심히 메모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수첩은 보관중입니다.)

 

어떤 때 캡틴은 일반적으로 쉬이 구할 수 없는 책까지 기꺼이 빌려주시기도 했고

(*이것은 특혜임에 분명하나 이로인해 피해입는 이는 발생할 수 없는 여건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당신이 쓰고 있는 원고를 기꺼이 보여주시며 저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


...아아. 저의 소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여기까지 새어버렸군요.

그렇다고 제가 저의 소년에게 이렇게까지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해야하는' 수업 외에 조금 더, 제가 아는 것을 '전해주고'자하는 것 뿐입니다.


이 나이 때 읽었으면 좋을 책(저도 그와 같은 나이일 때 처음 읽어봤던 책-)

이 소년의 관심사에 흥미를 더해줄 지식 정보와 어우러진 소설-

그리고 최근 인상 깊게 보았던 전시와 예술가에 대한 약간의 자료- 와 같은 것들.


부담이 되지 않도록. 조금씩. 조금씩. 스포이드로 물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조그만 화분에 한꺼번에 물을 쏟아부어 흙과 뿌리가 상하는 일이 없길 바라듯.


그렇게 조심스럽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숙제니 선행학습이니 예습복습 학원 

영재원 포트폴리오 등등으로 가뜩이나 해야 하는 일이 많은 아이(들)에게

짐 하나 더 지우는 격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그렇게 조금씩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난 뒤에는 그 뒷모습을 보며 넌지시 기대해보는 것이죠.

훗날 성인이 되고 진정한 창작자-예술가-가 되었을 때는 진짜 '친구'가 되지 않을까하고요.

(언젠가 제가 난생 처음 캡틴에게 꽃다발을 내밀며 "이 꽃의 의미가'진정한 우정'"이라고

당돌하게 말씀드리자, '그래, 오래된 제자는 친구와 같지'라며 캡틴이 웃으셨던 것처럼요.)  


이따금 이 소년과 이젤을 나란히 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동료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예술의 테두리 안에서, 예술이라는 목표를 향해가는 동료라고 말이에요.


캡틴과 저를 감쌌던 것이 문학이라면, 그리고 옛날 

우리가 마주 앉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고귀한 가치가 

문학이라고 이름 부르는 것이었다면.


캡틴, 저는 번번히 되돌아봅니다. 당신이라는 뿌리를.

그래서 이따금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나를 아들이라 자칭하기도 하지만

당신이 내 영혼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이 별이 사라진 후에도 변함없는 사실이겠지만


이제 앞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띄울 때는 당신의 소년에 대한 추억보다도

나의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좀더 많아질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스치웁니다.

또한 더하여 짐작컨데, 캡틴은 그런 편지를 더 반가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어느덧 유월. 당신의 계절이 왔습니다. 당신의 생일은 온통 여름이라고. 

책 속의 구절을 당신의 첫 생일선물로 읽어드렸던 날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덕에 언제나 초여름의 연녹색 속에는 당신이 스며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새벽이 깊어서, 눈 좀 붙인 후 편지를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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