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캡틴. 오 마이 캡틴.
이번에는 이정호의 『시간Tempus』이라는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이번 사진은 책표지 빛깔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골랐습니다. 굳이
우기자면 컵과 책이 놓인 동그란 탁자가 시계를 연상시키지 않냐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시간은 대부분 그런 것들도 구성되니까요)
전작 『산책Promenade』으로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AOL에서 주관한
2016년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에서 북카테고리 전문가상과 전 부분 최고상을 받은
작가지요. 그의 후속작을 손꼽아 기다렸음에도 책을 읽을 기회란 어쩐지 잘 오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읽어보는 이 책 『시간』을, 전작 『산책』도 함께 언급하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전작 『산책』내에 적혀있는 문장 모두를 손수 편지지에 옮겨 적은 적이 있습니다.
책과 함께 그것을 소중한 이에게 선물했지요. 그림책 속 그림(장면)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지만,
글은 한 사람이 말하듯 이어져 있기에, 받은이가 이 문장들을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길 바라며
그렇게 필사했던 것입니다. 한 장의 편지지로 충분했습니다. 저의 짧은 메모와 함께 총 두 장.
미색의 편지봉투에 담아 건네었더랬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이 책의 전부를 옮겨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림책이란 글과 그림이 상호작용하는 것입니다.
글을 옮겼다고 그림책의 절반을 퍼담았다는 단순한 계산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저의 자질구레한 감상을 밤새 써내려가더라도 천분의 일은 옮겨질까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새벽에 저는 또 모니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기로 했습니다.
처음 책을 읽은 그 순간의 감동은 소중합니다. 감동이란 영원할 수 있지만, 한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처음'이란 감정은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기에-휘발될 수 있기에- 기록해두려합니다.
이번에도 전문을 필사했지만 공개된 공간에 게시할 경우 저작권에 저촉될 수 있으므로
'출판사 제공 책소개'에 공개된 페이지와 더불의 인상 깊었던 몇 장면의 문장만을 옮겨보겠습니다.
(성경처럼... 아니 시조처럼 알아보기 쉽도록 번호를 붙였습니다. 본문에는 가 없습니다)
1 얼마나 많은 순간을 지나왔을까.
2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을까.
3 우리는 아주 조금 밖에 모르고 있는 거야.
4 우리는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을지도 몰라.
5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어.
6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기도 하고
7 잃어버린 만큼 채워지기도 해.
8 더 많은 계절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9 네 마음속 깊고 낯선 어딘가에
10 아주 오래전부터 잠들어 있던
11 아무도 본 적 없는 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어.
12 언젠가는 내일이 오지 않겠지만-두려워하지 마.
13 지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14 모든 건 네 안에 있으니까.
1 "얼마나 많는 순간을 지나왔을까"
흡사 사과껍질처럼 시계가 흘러내리고, 우주(밤하늘)가 드러납니다.
물질 '시계'는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
더없이 구체적인 도구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이 '시간'이란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진짜 모습은 오히려 시계 뒤의 벽 뒤의 물질 뒤의
공기가 빛에 부딫혀 파란 게 빛나는 저것 뒤의- 아무것에도 가려지지 않은 날것의 우주
그 속의 '별들의 흐름'과 가장 닮아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찌기 관측했듯이.
2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을까"
울루루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돌판에는 고대의 숫자가 새겨져있습니다.
오늘날의 시계를 연상시키지만 시계바늘은 없습니다. 돌아가는 바늘은
무용해질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의 옛날, '역사'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4 "우리는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을지도 몰라."
초현실주의의 미술과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의 면모가 정말 잘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같은 공간에 낮과 밤이 함께 있는 모습, 제가 정말 마음에 들어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체감하고 있습니다. 같은 방도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됩니다.
제가 줄곧 방에 머물면서도 주로 새벽에 이런 편지를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지구의 자전에 따라, 또 공전에 따라 진짜 '다른 장소'인 게 맞기도 하지만요.
(마치 같은 기차칸에 있지만 오전 10시의 위치와 오후 1시의 위치가 다르듯이 말이예요.)
사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는데, 작가님의 의도와는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3 "우리는 아주 조금 밖에 모르고 있는 거야."
연습장(스케치북)에 그린 하루일과표, 탁상달력으로 보는 한달의 일정.
아, 이 장면과 함께 툭 던져진 작가의 한마디는 가슴을 '툭' 치기에 충분했습니다.
근래 스케줄러(다이어리)를 쓰며 줄곧 답답해하던 저의 뒤통수를 목격한 기분,
상상이 되시나요? 하루를 기록하며, 한달을 계획하며, 일년을 예상하며 '뭔가'
답답했습니다. 한눈에 다 보이지 않는 기분. 시야가 가리워 아주 일부만 보이는 기분.
그래요. '시간'은 아주 거대한데, 고작 스케줄러에- 탁상달력에- 코를 박고 그것만
들여다보는 기분. 나의 '인생'은 일년짜리 스케줄러로 다 계획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7 "잃어버린 만큼 채워지기도 해."
나란히 놓인 모래시계와 와인이 담긴 잔.
모래시계는 한칸이 비면 한칸이 채워지고
잔에 담긴 와인은 시간이 흐르면 공기와 섞여 향과 맛이 풍부해지지요.
혹은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되는 '와인' 그 자체를 비유하고 싶었을지도요.
8 "더 많은 계절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이 장면은 전작 《산책》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반가우실 것 같았습니다.
인물과 인물의 그림자. 둘의 나이는 각자 달랐던 장면이 《산책》에도 있습니다.
그 장면을 가장 좋아하던 친구도 있었는데, 다음에 자세히 소개해보고 싶네요.
10 "아주 오래전부터 잠들어 있던"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입니다.
별빛 모빌은 나의 '오래전'인 어린시절을 연상시키고,
웅장하다 못해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험준한 산등성이는 까마득한
역사조차 뛰어넘은 고대의 지구-아주 '오래전'의 시간을 연상케합니다.
내가 태어난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안에 잠들어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13 "지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불화살. 나에게로 번지는 불화살.
마른 들에 번지는듯한 불, 화살.
누구든 단박에 알아챌 장면이에요.
14 "모든 건 네 안에 있으니까."
수많은 반짝이는 파도의 물결.
수많은 역사속의 위인들이 빚어놓은 위대한 업적 같죠.
외따로 걷는 한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생기는 반짝이는 물결.
또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한 사람만의 역사죠. 그만의 시간이죠.
*
그런 메시지들이 좋았어요. 작가님의 의도를 맞춘 것인지 알 수야 없지만
저는 그렇게 느꼈고, 그런 점들이 좋았습니다. 전작 『산책Promenade』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그 책의 감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내심 우려도 했어요.
마치 너무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의 후속편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심정이랄까요.
신간 소식을 확인하고, 표지에서 이것이 연작임을 확신했을 때
열람을 꽤 오래도록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산책》과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오프라인 서점에서 마딱들였다면 망설임 따윈 없었지 싶어요.
(아, 《산책》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하는데... 아무래도 다음 편지에서!)
이제, 지금 제 책상 위에 놓인《시간》의 표지 속에 담긴 '시계'안에-
무너진 숫자의 흰색 조각들이 아주 잘 보이거든요. "시간=시계"였던 고정적인 관념을
무너뜨리고, 작가의 독자적인 사유로 '시간'에 대해 새로이 조명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잘 드러나는 표지가, 저는 정말로 좋습니다.
저는 저의 시간을 온전히 보내고 있을까요.
일단 지금 새벽 4시에 다다르고 있긴한데.
근래 캡틴에게 보내는 편지는 언제나 잠에 취한 잉크로
마무리하는 것 같아 좀 멋쩍네요. 아니면 밤의 장막에서
취한 잉크만이 캡틴에게 보낼 편지를 쓰게 하는지도 모르죠.
아, 캡틴. 이만 편지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에필로그는 본문과 함께 동시에 끄적여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으로 끝맺어있어요. 오늘 밤도 수면송을 들으며,
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오늘 밤도 굿나잇.
혹은 오늘 아침도 굿모닝이시길 바랍니다. :)
에필로그.
다음 연작이 있다면 어떤 소재일지 상상해봤어요.
첫번째 '책', 두번째 '시계', 세번째는... '음악'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핸드폰, 컵, 스케치북 등등 떠올려봤지만)
생각이 '음악'에 다다르자 그 다음은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음악'은 소재라기보다 주제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어떤 소재를 써서 '음악'을 표현할까. 이미 저 마음대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생에서, 삶에서 노래와 음악을 빼놓을 수 있을까요. 이 새벽에 모니터 앞을
지키는 저도 이미 옆에 음악을 틀어놓고 있는데. (현재 곡: Ten sleep- Darkroom)
인간의 삶에 있어 음악은 어떻게 작용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