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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캡틴.

 학교 및 도서관을 비롯한 각 기관 곳곳에 

 초청 강연을 다니곤 하시는 캡틴, 오 마이 캡틴. 



 오늘은 친구를 만났던 소식을 전해드리려고요.

 근 1년간 서로 안부만 전하다가,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지라 

 혹여 대화거리가 떨어져 서먹해질까 좀 준비를 해 갔습니다.

  

 《도망가자 Run with me》선우정아 지음, 곽수진 그림, 2021

 《산책 Promenade》 이정호 지음, 2016


 너무 좋은 그림책들이라 사실 어제 만나고 또 보는 거였더라도

 챙겨갔을 겁니다. 캡틴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좋은 책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녀석이니까요. 


 그런데 저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할 얘기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특히 서로의 '친구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여행을 가는데 휴대폰은 두고 왔으면서 스파이더맨 인형은 챙기는 친구,

 자취를 하는데 냉장고에 편의점 봉투째 넣어서 보관해버리는 친구, 

 덕분에 여행 단체사진마다 인형이 찍혀서 볼때마다 킹받게 되는 친구,

 덕분에 냉장고를 열어보면 봉지째 유통기한이 지나 있어 매우 킹받는...  


 누가 누가 더 굉장한 친구인가 대결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이 있으며, 둘 다 '나 아니면 누가 얠 챙기나'

 라는 마음으로 지내는 덕에 친구는 '우렁각시'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더군요.

 친구도 저의 근황을 듣더니 저 역시 우렁각시가 아니냐고 웃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캡틴도 저를 '우렁집사' 내지 '작은집사'라고 부르셨는데

 역시 사람은 좀체 바뀌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도 뒤늦게 드는군요.)


 그렇게 정신없이 웃긴 친구들 이야기, 재밌게 본 영화 등을 이야기하다보니

 챙겨온 그림책들이 뒤늦게야 생각이 났습니다. 부랴부랴 꺼내보이자

 친구도 기대 이상으로 반가워하더군요. 


 "아, 그림책이 이렇게 큰 거였지."

 "아니, 이 책이 유독 큰 거야..."  


《산책》을 보고서 한 말이었습니다. (좀 크긴 하죠)

 그리고 선우정아 님의 책을 보고 놀라워하더라고요. 


 "내가 아는 그 선우정아?!"

 "와 이거 내 친구 애창곡인데."라며 역시 반가워하고요.

 찬찬히 넘겨보는 모습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달까요.

  

 (그리고 전공수업과 전공책의 무게에 어지간히 시달린 탓인지

 "그래, 책의 질감이란 본디 이런 한 것이었지...! 종이...!"

 라던가 하는 반응에서는 말 그대로 '웃플' 수밖에 없더군요.)

   

 선우정아 님의 노래〈도망가자〉의 가사에 곽수진 님이 그림을 그린

《도망가자》는 참 인상적인 책이었습니다. 이미 독자적으로 완성된 가사에

 그림을 더한다면 단지 보조적인 장치로만 그치지 않을까-라는 기우는 정말

 괜한 것이었어요. 그림만 따로 보더라도 독자적인 스토리가 완성되는,

 기존의 '그림책'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그림책이라고나 할까요.


 "그림책에서- 그림은 글을 보조하지 않고, 글은 그림을 보조하지 않는다. 

 서로는 '보조'하는 관계가 아니라, '둘 다 있음'으로써 온전히 완성되는 것이다.

 즉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유리 슐레비츠의 정의를, 저는 나름대로 저렇게 이해하고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발전이란 멈추지 않는 거라서, 이렇게 '각자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붙여놓아도 온전히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한다'는 사례를 보게 되어 놀랍기만 했습니다.  


 선우정아 님의 〈도망가자〉는 아픈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우리를 위로하는 내용이죠.

 곽수진 님의 《도망가자》는 어느덧 나이를 많이 먹은 반려견과의 애틋함을 그려낸 것이었습니다.

 그 둘을 함께 보았을 때, 힘든 나(독자)에게 어떤 형태(반려동물, 친구, 연인 등)로든 

 '도망가도 돼. 너무 힘들다면'라고 말해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는 게 너무나 좋았습니다.


 《산책 Promenade》은 이정호 님께서 글과 그림을 모두 함께 완성한 것이라

  또 그만의 특색이 있었지요. 위 책과 반대로 그림의 내용이 앞뒤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마치 미술관의 액자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오래오래 들여다보게 되고,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게 된답니다.


 "이 그림 속에 있는 거, 다 '책'인 거 알았어?"


  친구의 눈이 접시처럼 커졌습니다. 

  산, 케이크, 호수, 눈밭… 이 모든 것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이거든요. 


  서둘러 다시 책장을 넘겨보는 모습이 어찌나 뿌듯하던지.

  그리고 앞서 마음에 드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습니다.


  "멋지다… 마치 거대한 전공책의 산앞에 무력한 나 자신 같아."

  "이것도… 겹겹이 쌓인 책 속에 내려치는 벼락같은 전공책…."

  "오, 이것도. 저 광활한 하늘이 마치 나의 전공과 같군."

  "저 별도, 저 우주도…."


  (그, 그만해 美친자야…!)

  -아무쪼록, 학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언제나 참으로 고된 일이구나 싶었습니다.


 *

 

 이 친구는 열여섯 살 때부터 알아온 녀석입니다.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되었지요. 그제나 저제나

 언제나 학업에 짓눌려(?) 있다는 게 참 안쓰럽기 하고

 애잔하기도 합니다. (저라고 그와 다를 바는 없습니다만)


 오랜만에 보니 키가 좀더 자라고 

 얼굴 윤곽이 좀더 또렷해졌을 뿐 (10키로 빠졌대요)

 사려깊은 성품과 현명한 면모는 그대로인지라

 언제봐도 반갑고 소중한 친구입니다.


 캡틴, 당신께선 꼭 한번 이 친구를 보신 적 있었죠.

 고등학교 강연 때 말입니다. 강연을 들은 친구가 제게

 '이런 강연을 들었는데 혹시 전부터 말하던 그 분이 아니냐'

 라고 물었고, 이름을 들은 저는 깜짝 놀라 맞다고 했었죠.


 단순히 강연만 들은 게 아니라 간단한 문답도 나누었고,

 이 얘길 전해들은 캡틴은 '그래, 기억이 난다'며 웃으셨죠.

 바로 그 친구였어요.



 오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쉬운지 어려운 일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 친구는 언제보아도 열여섯살 그 모습 그대로인거 같거든요.

 캡틴을 떠올릴 때도 처음 만난 그 해 그 모습으로만 기억되고요.


 그래서 햇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셀 필요도 필요하단 생각도 들지 않아요.

 그냥 그대로 소중한 거 같아요. 그래서 그냥 문득 또 떠오르고

 문득 또 연락하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P.S.

 그리고 막상 만나고보니 할 얘기가 어찌나 많은지,

 장장 카페에서 4시간을 이야기했더라고요. (기록입니다, 기록)

 책 얘기 뿐만 아니라 근황 얘기 (지난달 한라산 오르며 초코바 10개 먹은 얘기, 

 너도 가다면 꼭 초코바, 아니 '쫀득한 초코칩' 필수라는 얘기-그맛을 잊을 수 없다며),

 즐겨보는 유튜버 채널 이야기 (너도 그거 봐? 너도? 야 나도…), 영화 이야기…. 

                                                                 정말 정말 많았습니다.



          ―이렇게, 저의 근황과, 책 이야기와, 잡다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참, 이토록 잘 놀고 왔으면서 편지 제목은 왜 이렇냐고요? 사진을 보세요.

오늘 첨부한 사진은 편지 본문과 좀 관계가 있습니다.


실은 저도 여행 때 인형을 챙기는 타입이거든요. (스파이더맨은 아니고,

애니메이션 영화 〈몬스터 대학교〉의 마이클 와조스키 인형입니다.) 

그래서 친구의 친구, 휴대폰은 두고와도 '가장 아끼는 인형'을 챙고오고픈

마음을 백분 공감할 수 있었거든요. (친구야, 보고 있니…?)


아무튼 싱글벙글, 유쾌한 하루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기록해두고 싶은 하루요.

(사실 이것도 많이 생략된 것이지만)


그럼 캡틴, 근래에 일교차가 너무 심하더라고요.

햇빛이 닿는 곳은 뜨겁고 바람을 세차게 불어서 순간 

나그네가 된 것인가 착각이 들만큼 놀라운 날씨더라고요. 


모쪼록 건강 조심하시며 지내시길 바랍니다.



                                 -바람이 미친듯이 불던 봄날, 사무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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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캡틴, 마이 캡틴.

올해의 벚꽃도 잘 보셨나요. 이번에도 변함없이

교정 가득히 흰 벚꽃이 만발 했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어째서인지 올해의 봄날이 무척 기다려졌습니다.

아무 것도 약속된 것이 없는데,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데

왜 그렇게 기다려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음 편히 봄날을 만끽한지가 무척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어처구니 없어 할 정도로 

올해의 저는 많은 벚꽃 명소를 돌아다녔습니다.

당연히 혼자 온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있다면 십중팔구 

커다란 카메라를 목에 걸고 출사를 나온 사람들이었죠.)

그래도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벚꽃은 당연하지만 눈이 부시게 예뻤고, 예뻤습니다.



어느날은 늦장을 부리다가 그만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한 적이 있었습니다. 초행길이라 헤맨 탓도

조금은 있을 겁니다. 다행히 어느덧 해가 많이 길어져 

노을이 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고요.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방향을 짐작하여 천천히 걸어올랐습니다.

'○○동 벚꽃길'이라고 불리는 명소는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더군요.

정확히는 등산로 입구와 동네 사이에 자리한 짧은 나무계단길이었습니다.


사진 속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몇번이나 지도를 확인해보았습니다. 

드디어 이 길이 맞다고 확신한 뒤 고개를 들었습니다. 좌우로 늘어선

낮은 가옥들… 그들이 조용히 내려다보는 고요한 골목길과 한낮의 빛.

분명히 처음 오는 장소인데, 어째서인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물지 않은 하늘, 소란하지 않은 공기. 

분명히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인가(人街), 동네.



아주 예전에, 당신의 뒤를 쫒던 소년시절에 거닐어본 기억이 났습니다.


지금과 비슷한 늦봄, 평일, 대낮, 비슷한 장소.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일을 하러 떠난 조용한 동네.

벽화로 유명하여 주말에는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는 곳.  


그곳으로 저는 여행을 떠난 적이 있죠. 정확히 당신의 수업과제 때문이었는지,

당신이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한 〈골목길 여행〉이란 주제의 책 때문이었는지,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말입니다. (아마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캡틴, 당신 때문에 떠난 여행이었고,

당신 덕분에 떠났던 저의 첫 여행이기도 합니다.


그 시절 저의 고향은 '내 방'이었죠. 

(내방동이 아니라 진짜 제 방, My Room말입니다.)

극도의 내향인인 제게 제 방은 완벽한 세계였으니까요.

곁에 책이 있다면 어느 곳에도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믿었는데, 아니 그렇게 생각했는데-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무턱대고 그렇게 떠났던 것 같습니다. 


숨이 찼고, 더웠습니다. 무작정 걷는다는 건 

좀 무모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낯선 골목의 흰벽에 반사되던 빛은 아직도 기억 속에서 

눈이 아리도록 부십니다. 그렇게 시작한 첫 여행.



그 길을 걸으며 줄곧 당신 생각을 했습니다. 

과제 구상…이라기보다 내가 본 것들을 어떻게 

당신에게 전해줄 것인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같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오늘은 제출해야할 과제도 없는데 

어째서 줄곧 캡틴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우연히, 계절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가끔은 거의 똑같은 결과값을 내기도 하는 거니까….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걷는 내내 이 이야기를 

당신께 편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도 그리운 봄날이었습니다.


화살과 같던 햇살이 사실 누군가가 

돌려놓은 시계바늘이었던 것처럼.



*


캡틴, 올해도 따뜻한 봄날 되시길 바랍니다.



-봄날의 새벽, 사무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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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캡틴, 오랜만입니다.

두번 다시 편지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웬걸요,

저는 파블로브의 개 마냥 , 새학기를 시작하는 봄날

당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네요.


당신의 수업게시판을 몰래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쉽게 접근하긴 힘든 것 같더군요.

여러 이유를 짐작하고 모두 납득되는 이유였기에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이름으로 찾아본 탓인지 뜻하지 않게 다른 것이

눈에 띄더군요. 예, 당신이 쓴 칼럼이요. 이건 누구나에게

공개된 글이니 마음 편히 읽어도 되겠지요. 언제나 성실하게

쓰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여태 생각이 닿지 않았는지.


오랜만에 읽은 당신의 칼럼은 참 당신다운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당연한 말이겠지만, 제가 기억하는 '당신다운 모습'에

너무도 가까운 모습 말이지요. 캡틴, 그리고 캡틴의 '장미'에 대한 글이라.


여기서 '장미'는 제가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붙여둔 '그분'에 대한 별명입니다.

당신은 물론- 아무도 모르는- 오직 저만이 알고, 부르는 별명이지요.

바늘과 실처럼, 캡틴을 부르는 별명(이 별명은 공식별명이죠)에 자연스럽게

따라오기에 저는 그분을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었답니다.  

   

칼럼의 주제와는 별개로, 잔잔히 미소가 번지는 글이었습니다. 

'일상'을 유지해가는 캡틴과 장미의 모습이 너무도 예뻐서, 보기 좋아서,

꼭잡은 두 손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캡틴이 보여주는 모습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닮지 않고 싶은 모습이 없었지만

그중에 다섯 개정도 꼽아보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없이 이 모습을 꼽을 거예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랑하는 나만의 '장미'의 손을 꼭 쥐고 변함없이

걷는 뒷모습 말이에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는 제가 음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캡틴. 저는 캡틴을 볼 수 있는데 캡틴은 저를 보지 못한다는 게

정말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비겁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지만요.


저는 생떽쥐페리의 동화에는 등장조차 하지 못했던 늑대 또는

사막 쥐... 혹은 살쾡이 같은 포지션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럼 캡틴,

오늘 밤도 저는 그림자에 녹아듭니다. 평안한 저녁 되시길 바랄게요. 모쪼록.



-푸른 밤, 사무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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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캡틴, 마이 캡틴.

 그간 평안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꼬박 반년만에 당신께 다시 편지를 띄웁니다.

 저는 당신으로부터 도망쳤고, 당신의 별에서 떠나왔는데

 이토록 가슴 아픈 밤에는 별다른 수 없이 또 편지를 쓰고야 맙니다.


 또다른 이별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는 건 이별의 연속이라고, 누가 그랬던가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른이 되면서 저절로 알 수밖에 없는 걸까요.


 아니 이제껏 수많은 이별을 해왔을텐데, 이제서야 이토록 아픈 것은

 제가 비로소 사람이 되어간다는 증거일까요. 양철 나무꾼과 다름없던 제가,

 마법사가 넣어준 가짜 심장을 가지고 사람인 척 살아가던 제가, 이제서야.


 -

 

 캡틴, 저는 당신이 야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수년전, 당신께서 오랫동안 진행하시던 책 방송의 '마지막 방송'일이 정해졌을 때,

 청취자들에게 미리 이야기 하지 않겠다-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겠다- 라는 당신의 결정을

 제게 알려주셨을 때. 저는 청취자들이 아쉬워하지 않겠냐고, 그 청취자의 한 명으로서

 당신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왜, 어째서. 


 지금도 그 결정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 당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자, 당신과 같은 결정도 '고려'는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나만 훌쩍 사라지면 그만인 

 그런 작고 가벼운 일, 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듭니다.


 아쉬움, 슬픔, 미안함. 그런 것들을 모조리 내가 떠안고, 끌어안고, 떨어져버리겠다는 그런 마음.

 그러나 스승님. 저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담아낼 만큼 넓은 마음 주머니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고작 헝겊 몇 조각을 기워 톱밥을 채워넣은 낡디 낡은 가짜 심장, 그게 전부라서요.


 입안에 욱여넣지 않고 다 말해버리기로 했습니다. 아니, 이미 말해버렸습니다.

 나 이제 간다고. 다음 주가 마지막이라고. 너희들과 나, 다음 시간이 마지막 시간이라고.

 

 나의 제자들. 아, 적을 때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 단어... '제자'들.

 그 아이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당연히 놀라고, 아쉬워하고, 아쉽다 말해주었습니다.

 어쩌면 그날 밤은 좀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의식과잉이라 하실 수 있지만 제가 보아온

 그 아이들이 감수성이 좀 넘쳐서요. 십중팔구 울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두달이 지나면 금새 회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영원히 못 잊을 거거든요.

 평생 기억할 거거든요. 그래서, '서로 아쉬워하는' 교집합을 잠시나마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런 사악한…'이라며 어이없다는듯 웃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선.

 어쩌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사람이 되려면 멀었는 걸요. 그리고 이제 막 생각한건데

 딱히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딴 것도 심장이라고 이렇게나

 아픈데, '진짜 심장'이라는 걸 가지게 되면 얼마나 아플까요. 터져버리진 않을까요?


 너무 많은 것들을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견디는 삶인지요.

  


 -


사랑하는 스승님, 당신이 받을 리 없는 이 편지인데도 어찌 맺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매년 수많은 제자를 받으시고- 뜨겁게 온 맘 다해 가르치시고- 또 떠나보내는 당신은 

대체 어떤 모양의 심장을 하고 계신지요. 궁금하지만, 차마 들여다 볼 엄두는 나지 않습니다.


어떤 모양을 하고 있던 간에, 그 가운데 가장 깊숙히 박혀있는 강철가시는 제 것일 것이기에. 

오 캡틴 마이 캡틴. 모쪼록 저 같은 제자는 잊으시길 바랍니다. 한달내 저를 잊을 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게, 완벽하게 잊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모쪼록 평안한 밤 되시길 바라며.



언제나 스승님께서 평안한 저녁 보내시길 바라는, 사무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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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내가, 

 당신의 목소리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혼동하리라곤.


 오 캡틴 마이 캡틴. 

 오늘은 오랜만에 오래된 지역서점에 다녀왔습니다.

 위 사진은 자리를 이전하기 전의 그 서점에서 찍은 것입니다.

 이전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심정이 역력히 드러난 표정이군요.


 제가 오늘 당신의 목소리를 착각했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을까요.

 캡틴도 아시다시피 저는 안면인식장애가 좀 있습니다. 반면 음색을

 알아듣는 귀는 좀 발달한 편이라고 나름 자신하고 있단 말이지요.

 

 새로운 팝송 리스트를 틀어두고도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클래식의 넘버는 언제나 새로워도 어느 작곡가의 것인지는 대강 알아맞추며

 영화 사운드에서 배역의 목소리만으로 어느 작품에서 보았던 분인지 알아봅니다.


 그런 제가, 그랬던 제가, 그런 일을 겪게 되리라곤 아직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3번이나 치켜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인 줄 알고, 당신의 소리인 줄 알고.


 

 몇 년 전, 당신은 물으셨죠.


 "너는 내 어디가 좋니? 

 온화한 얼굴? 

 부드러운 목소리? 

 탁월한 수업능력?"

 

 "아뇨, 

  아뇨, 

  아뇨. 

  셋 다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곤란한데." 


 어째서 그것이 곤란한 일인지 아직도 납득할 수 않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부분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로 꼽기에는 너무도

 소소한 것들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아무래도 좋을 것'도 아니었단 말입니다.


 서점에서 저를 세 번이나 착각에 빠뜨렸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서점에서 일하시는 직원분이셨습니다. 문의하는 고객에게

 재차 답변하고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것인데, 그 톤이 무척 비슷했습니다.


 책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저렇게 변하게 되는 것일까.

 책을 소개하는 일을 오래도록 했던 당신의 목소리는 이렇게 완성됐던 것일까.

 나도 책과 꾸준히 함께 한다면 언젠가 저런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런 상상을 하며 잠시 설레였습니다.


 *


 캡틴, 당신의 제자들은 별의 향기가 납니다.

 얼마나 됐던간에-일정기간 이상- 당신의 별에 머물렀던 여행자들은 

 별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향기와 자기 고유의 향이 섞여서

 각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향을 만들어냈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별의 흔적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그 흔적이 분위기일지, 미소일지, 목소리일지조차 짐작해본 적 없습니다. 

 당신의 제자이길, 당신의 아들이길, 당신을 일부분을 닮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상상해봅니다.

 그런 온화한 표정이나 자연스러운 미소 같은 것은 아마 결코 닮을 수 없을 겁니다.

 상냥하면서도 때론 단단해지는 부드러운 조약돌 같은 목소리 역시 가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탁월한 수업능력도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지만 아무튼 그것만은 쫒아가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착각했던 그분처럼, 책이란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가 된다면,

 '당신의 목소리를 연상케 한다'는 착각 정도는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망상에 약간 들뜨고 있습니다.


 *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제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인 줄 착각했다는 오욕을 약간은 떨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누군가는 '그거 좀 착각한게 무슨 큰일이라고'라고 할 수도 있지만요.


 저는 당신의 목소리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도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 들으며

 스쳐지나가며 머금었던 미소 짓는 소리 또한 놓치지 않습니다.


 사냥꾼을 피해 사과나무 아래 

 동굴 속에 머물렀던 귀가 뾰족한 짐승처럼

 밀밭 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의 발자국 소리에 

 동굴 밖으로 올라오던 붉은여우처럼. 


 그러니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양이 장미를 먹어치우냐 마느냐 하는 것만큼. 


 캡틴, 언젠가 나의 목소리에서

 당신 목소리의 향기가 나는 날을 꿈꿔봅니다.



 그나저나, 오늘도 새벽 취침입니다.

 당신께서 보신다면 꾸지람을 놓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차차 개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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