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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조병준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리뷰]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Title: 아홉번 째 책의 주인에게
같은 책을 아홉 번 샀다고 하면, 믿을까.
시인 조병준의 여행 에세이,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는 인터넷 서점 구매기록에 근거했을 때 이번이 아홉 번째 구입이었다. 2011년에 처음 이 책을 알았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 책을 사 모으고 있다. 아니, ‘모으다’는 말은 틀렸다. 지금 내 방에는 아홉 번째 책만이 있을 뿐이다. 이전의 책들을 다 어디로 갔냐고? 어느 중고서점을 떠돌고 있지 않다면 대부분 그때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의 곁을 지키고 있을 거다.
“제 머리맡 책장에 또 한권의 책이 추가되겠네요.”
여덟 번째 책 주인은 현역 고등학생인 열여덟 살 남자아이였다. 평소 책을 많이 읽기도 하지만, 진짜 중요하고 소중한 책들은 자기 침대 머리맡에 있는 작은 책장에 보관한다고 알려주었다. 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곤 한다는 내 책 소개에 그 아이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책을 꼭 받아 쥐었다. 이전에 내가 생일선물로 주었던 『수레바퀴 아래서』를 아버지와 함께 읽고 진로를 결정했다는 이 소년은 언제나 신중했고 동시에 깨어있었다. 언제나 나에게 많은 배움을 알려주는 현명한 친구에게 꼭 이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두 번째 책 주인은 수년전 학교도서관 차원에서 간 독서토론여행에 참여한 99명의 학생 중 하나일 것이다. 행사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지원한 학생이 책 소개를 하면, 투표를 통해 1~3등을 가리는 것이었다. 실제 책을 가져와야하기에, 원하는 학우에게는 책을 선물로 줄 수 있었다. 내가 소개한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을 했다(1등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당시 나는 관중들에게 책 속의 작가가 만난 청년의 수수께끼를 던졌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는데, 천사가 묻기를 어떤 동물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차례로 세 번 대답해야하는 일종의 스무고개와 비슷했다. 지목 당한 학생은 맨 마지막에 ‘참새’라고 대답했고, 그것이 ‘진짜 나’라는 설명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다음에 내가 무언가 해설을 달자, 관중들을 일제히 박수를 쳤다. 아마 작은 몸으로도 하늘을 자유로이 날 수 있지 않겠냐, 그런 식의 해석이었을 것이다. 그 작은 친구의 모습은 아직도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다.
그래서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책 주인이 그 도서관행사의 주체였던 직원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나는 중앙도서관을 즐겨 이용하고 몇 번인가 근로장학생으로도 도서관을 들락거렸기에 그 선생님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결혼 소식을 듣고서는 독일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는 한국인 부부의 이야기 『고등어를 금하노라』를 선물하기도 하고, 아이가 태어나 웬만큼 컸을 때는 그림책 『도서관에 간 사자』를 선물하기도 했다(그 책을 읽은 후 아이는 출근할 때마다 “도서관에 사자 (기다리고) 있어?”라고 묻게 되었다고 한다). 그 두 책 사이즈음에 이 책을 선물했을 것이다. 아마 다른 캠퍼스 도서관으로 발령 났을 때였을 텐데. “내심 이 책 갖고 싶었는데.” 내 책 소개를 들었던 날, 선생님도 이 책을 내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웃어주셨다.
책을 받은 사람을 전부 기억한다고는 솔직히 말하지 못하겠다. 주려고 했으나 주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앞서 말한 행사와 비슷한 상황이 몇 번인가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책’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책으로서 소개되는 책’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친동생을 잃었던 경험을 들려준 공과대학 학우도 있었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선배도 있었다. 같은 수업에서 열정적인 학습태도로 영감을 주는 학우에게도 이 책을 선물했다. 아마 그가 첫 번째 책의 주인일 텐데, 그가 답례로 준 크리스 오르위그의 『소울 포토』라는 책은 여지껏 잘 보관하고 있다. 한편, ‘몇 번째 책 주인’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존재도 있다. 그는 여덟 권의 책 주인에 속하지도 않는다. 책을 받지 않았으나 받은 사람, 다시 말해 이 책을 내게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다.
‘선녀의 날개옷 같은 책’이라고 그 사람은 말했다. 앞서 나는 이 책을 ‘여행 에세이’라고 짧게 언급했다. 좀더 길게 말한다면 시인 조병준이 캘커타를 비롯한 세계 각 나라, 도시, 장소를 다니며 만난 친구들과 나눈 사랑의 이야기이다. 사랑, 그 사랑은 너무나도 선명한 하늘의 푸른색이라서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열기구처럼 두둥실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그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며, ‘이 책을 읽으면 훌쩍 (여행을, 혹은 아주 먼 여행을) 떠나가 가버릴 것 같아 불안하다’하다고 말한 것이겠지.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날개옷이 필요해보였던 건 당신 본인이었다. 책임져야 할 가족들과 의무 때문에, 바람의 기질을 가지고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 나는 그 사람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의 두 손에 나의 두 손을 올리고 “이 책을 드리고 싶은데, 이미 가지고 계시니, 이것으로 받은 셈 쳐주세요.”라고 말했는데,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손 모양을 바꾸지 않고 나의 손을 돌려보냈다. 그는 떠났는가? 그가 아주 먼 나라로 일 년간 다녀온 일이 있는데, 그게 책을 (가짜로) 전한 날 후의 일인지 전의 일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그에게 선녀의 날개옷을 주고 싶었다. 가끔이라도 훌쩍 날아갔다가 또 돌아오고, 또 떠날 수 있기를 빌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책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함께 수업을 들은 사람들을 물론이고, 같이 책 얘기를 잠시라도 나눈 사람이라면 필경 이 책에 대한 나의 애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이 정도로 책을 샀으면 저자가 뭐 해줘야하는 거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했고. 나는 한번쯤은 이 책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써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을 선물하려다 좌절된 적도 있었다. 그때 쓰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는데 그 계획 또한 좌절되었는데. 아홉 번째 책은 과연 제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나는 또한번 좌절될 지도 모르는 상황을 앞두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보다 좀더 기념비적인 이유가 있을 텐데.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의 부제는 ‘서른 청춘들에게 부치는 여행 편지’이다. 조병준은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첫 국외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짐작되었으나, 결국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홉 번째 책 주인 역시 이제 막 만 나이 서른을 넘겼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둔 지 3개월,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여행을 하고 있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그와 알게 된지는 햇수로 9년이 넘었을 것이다. (숫자 계산에 약하니 대충 그즈음 되었다고 치자.) 그 역시 나에게 있어 이 책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잊어먹었을 수도 있지만.) 전해질 수 있을까.
사람을 만난다는 건, 거기에 사람을 만나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것은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는 것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일이 아니다. 자칫 어긋나면 다시 겹치기까지 억겁의 시간이 필요한 우주의 궤도와 같은 형국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사소한 요인으로 헝클어지는 일은 부지기수다. 그래서 설령 이 책을 직접 전달하지 못 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인 마음이 또 없어지기 전에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너의 앞날에 희망이 가득하길.
너는 아주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고, 그것을 시험해볼 장소를 고민하고 있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잘못된 선택’을 했다며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해보고 싶은 일은 해보길 바란다. 망설일 시간에 해버리라고. 하고 싶었는데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당신은 나보다 현명한 사람이니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내가 허튼 고민을 끌어안고 허둥거릴 때 간단하고 심플한 해답을 짚어주곤 했던 당신이니까. 그래서 내가 감히 당신에게 조언하거나 충고할 수는 없지만, 이 책에 당신에 대한 ‘응원’이 되기를. 부디, 내가 그것을 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