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캡틴, 바람처럼 다녀왔습니다.


<논픽션> 수업을 마친 후 출석 게시판에 "또 떠나겠습니다"라고 

남기채 훌쩍 떠났던 날이 문득 떠오르네요. (그때 학우들이 대체 또 

어딜 간 거냐고 궁금해했었죠. 이제 털어놓자면 '용소호'라는 호수였습니다.)


위 사진은 작년 가을 호수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요즘 마스크는 필수지요.

가급적 외출은 자제해야하는 때에, 정말 '어쩔 수 없이' 가야할 곳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김에 냅다 여행을 떠나버렸습니다. 오후 4시에서 7시까지의 여행.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망미동 책방거리를 향해 버스 안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날 총 책방 세 곳을 방문하였는데도 메모한 양이 제법 됩니다.

각자 독립책방으로서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고 또

비치된 책들 하나하나가 시선을 붙들고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방문한 책방 모두를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설명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간단하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 두 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시간 육성으로 감탄사를 터트리며 넘겨보았던 책 한 권,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못 박힌듯 굳어져 말을 잃어버리게 했던 책 한 권입니다.


*


첫장부터 "우와!"라고 저도 모르게 소리냈었던 첫번째 책.

『이야기를 그려드립니다』(김은미 지음, 온다프레스, 2018)


             (이미지 출처: 알라딘)



부제목은 '시장과 그 너머의 삶에 관한 인터뷰'입니다. 


<논픽션> 수업을 들었을 때, 다큐멘터리란 것이 영상 뿐만이 아니라

책으로도, 문학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이때 조지 오웰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썼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림책으로까지 가능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나봅니다.

다큐멘터리. 이 책은 그림책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다큐보다도-'시장'을 주제 삼아 담아낸- 

가깝고 깊숙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제가 비록 모든 시장 다큐를 찾아 

본 것은 아니지만요. 누구나 펼쳐본다면 이해할 겁니다. 

첫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벽에 집을 나와 짐을 실고 

장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천막을 치는 거야. 



미색이 감도는 너른 페이지.

왼쪽에는 글귀가, 오른쪽에는 상인이 있습니다.

눌러쓴 모자와 큼지막한 파라솔이 펼쳐지면서 

시장의 아침을, '책의 시작'을 열고 잇습니다.  


한 장씩 넘기면 시장 상인들의 한 마디가 드문드문 펼쳐집니다.

빼곡한 인터뷰 전문, 빼곡한 물건과 사람과 풍경으로 가득찬 화면 따윈 없습니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들었을텐데 자료의 전부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전부를 옮겨왔습니다. 우물 깊숙이서 퍼올린 것 같은 정수를.



캡틴, 어린시절 당신의 뛰놀던 보수동 책방골목 바로 곁 

부평깡통시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저는 여기가 거긴 줄 알았습니다.

책을 보는 누구나가 눈에 익은 가장 익숙한 시장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워하겠지요. 



언니 없으면 난 지금도 암것도 못 해.

언니랑 있으면 나는 아직도 어린애야, 어린애.



한 몸처럼 30년동안 함께 일했다는 자매의 이야기를, 그리고

연세있으신 분들의 옷은 왜 그렇게 꽃분홍이 많은지 누가 들어보았을까요.


엄마들은 연세가 있으셔서 화사한 게 잘 어울려. 



누가 들었을까요. 대체 누가.

대체 저자는 이곳에 얼마나 있었던 것일까요. 얼마나 찾아왔던 걸까요.

얼마나 오랜시간 듣고 또 들었을까요. 얼마나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걸까요.



        오늘은 또 뭘 물어보려고 왔어.

           날도 더운데 뭐러 자꾸와.

     담주에 뭐하러 또 와. 할 얘기도 없는데.

           근데, 지난 번에도 왔었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죠. 그림책의 특성상, 그리고 저작권의 문제 때문에

극히 일부분만을 소개해드릴 수 있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서 어마마한 자료를 모은 다음 압축해서

단정한 그림과 담백한 글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책입니다.


'만 송이의 꽃을 모아 한줌의 향수로 만든 것 같은 책'이라고

이날의 제가 메모해두었네요. 비루한 비유지만 정말이지 한방울만 떨어뜨려도

천지사방에 향기를 풍길 것만 같은 책입니다. 화면에 오로지 시장풍경만이 아닌 


사람들의 대화 속에 스치는 광경(등산을 즐기시는 분, 낚시를 좋아하는 분,

아들 욕심에 다섯 딸을 두게 되었지만 살아보니 딸이 최고라는 분 등...)을

붙잡아 놓치지 않고 담아둔 것 역시 놀라웠습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으면.


이 분들의 삶 속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보았'으면. 심해 스쿠버 마냥.

작가로써이 태도, 마음가짐, 작가 자신만의 시선... 주목할 점이 너무나 많지만

지금 제가 가장 감탄스럽게 여기는 것은 '편집의 힘', 바로 연출입니다.


렌즈가 시장 상인 볼따구에 달라붙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카메라의 움직임을 떠올리면......

정말이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두번째 책은 독립출판물로 

동네책방에서만 구할 수 있는 화집(畵集)입니다.


『My Place』 (이영채 지음, 2020)  

     이미지 출처: @ynchlee (이영채님 인스타)



이미지 하단에 표시한 출처를 통해 들어가보면 

이 화잡에 수록된 작품의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10*292mm 사이즈로 출력된 인쇄물과 손바닥만한

혹은 모니터로 보는 화면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요...)


작가가 본래의 의도와 최대한 가깝게 표현하기 위해 

신중하게 고안하고 섬세하게 조율하여 뽑아낸 화집은

그만한 아우라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공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사실 나만 아는 풍경들.

경기도에 거주 중이라는 작가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을

자신만의 것으로 특별하게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과 공간이지만

감히 뒷주머니에서 대충 꺼낸 폰카로 갈길 수 없는 광경.


이날 저는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별노래'같은 그림들이라고 

메모해두었네요. 유튜브에서 이별에 관한 노래를 검색하면,

영상 아래 사람들이 달아놓은 댓글들이 가득합니다. 내용은

전부 저마다의 이별 이야기,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흥미롭지요. 작사가는 그 사람들을 만난 적도 없을 땐데

사람들은 전부 '내 얘기야', '내 이야기 옮겨놓은 것 같다'고 합니다.


이 화집도 그러합니다. 작가님만의 'My Place', 하지만 보는 이마다

'그들만의 Place'가 됩니다. 먹먹해지도록, 무려 울고 싶을 정도로.   



어느 날의 저녁 산책길. 유난히 가로등이 많은 곳.

빛과 함께 걷다가 든든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작품명:〈Night Walk〉


제가 구입을 결심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작품이

위와 같은 글귀와 함께 작가의 인스타그램에 게시되어있습니다.

(저작권에 폐가 될까 이미지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양해부탁드려요.) 


밤, 가로등, 번지는 빛, 잠시 후 눈에 들어오는 달.
365일 중 어느 하루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풍경 중 하나인데 강제로 소환되는 겁니다.


특별했던 하루가. 보통의 세상이 특별하게 보이도록 했던

소중했던 순간이. 눈에 새기듯 기억하고 싶었던 '그' 하루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붙잡아 지면에 담아두었는데

어떻게 가져오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곁에 두지 않을 수 있나요.


집착 같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나간 순간들은 모두 과거이고

과거는 저의 뿌리이기에 감히 쳐내거나 잘라낼 수 없습니다.



쓰다보니 광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네요.

아파트 단지, 공원, 육교 다리와 같이 언제라도 보게 되는 것들을

정겹게, 아름답게, 따뜻하게 그려낸 화집을 소개하려던 것이 어느새.



각설하고, 이제 그만 이번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할 타이밍인가 봅니다.

길게 쓰지 않으려고 '이번에 책 두 권만 소개하겠다'라고 했는데 이런.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책방 세 곳의 이야기는 나누어서 올리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모두 다 캡틴에게 보여주고 싶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장소였습니다.



캡틴, 와중에 재밌는 것을 하나 발견했는데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한 책방에서 어떤 강연이 안내된 포스터가 부착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분을 통해 당신의 가르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질 것을 생각하니 기뻤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끄적여보았습니다. 



누가 

당신의 입이 된다면


나는 

당신의 눈·발이 되지



'발'이라고만 쓸까 '눈'이라고 바꿀까 고민하다가 

아직 현재 저 상태로 남겨두었습니다. 눈발이라니,

"휘몰아쳐라 폭풍아" 설산에서 노래하는 엘사도 아니고.


무튼 그러고 싶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너무도 바쁜 캡틴.

<논픽션> 수업 때도 그러했듯이, 당신의 발이 되어 세상 곳곳을 가고

당신의 눈이 되어 세상 아름다운 곳을 다 비쳐주고 싶다고 바래봅니다.



그럼 캡틴,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마지막에

꼭 한마디씩 더하는 녀석이잖아요.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평안한 오후, 또는 평안한 오전 되시길.




-사무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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