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아이와 미디어아트 전시회에 갔다. 카메라가 설치된 원형 아치, 비디오 화면으로 둘러싸인 터널, 피아노 연주자가 없이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등. 전자기술에 기반한 예술작품들이 전시회장을 채웠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이었다. 300대의 텔레비전 화면마다 제각기 변하는 영상과 화려한 조명은 이것이 바로 "미디어아트의 출발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백남준은 불협화음을 작곡했던 쇤베르크 음악에 매료된다. 현대음악을 깊게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그는 미학, 음악, 선사상 등 폭넓은 공부를 한다. 아내인 시케코를 만나고 예술적 동지인 엔지니어 아베 유야와 함께 영상으로 여러 실험을 시작한다. 저렴하고 복잡하지 않은 기술로도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장난감 가게에서 무선 조종기를 구입해 <로봇 K456>을 완성한다. 흥미롭게도 백남준은 로봇이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여 부서지게 한다. 그는 “로봇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인간적 고뇌와 감성을 지닌 것은 물론 죽음까지도 경험하는 인간화된 기계”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백남준은 독일에서 케이지와 보이스 같은 전위 예술가들은 만나 기존 예술에 반기를 드는 ‘플럭서스’ 예술운동에 참여한다. 전위음악에 심취한 백남준은 기존의 클라리넷, 오보에, 바이올린이 중심이 된 클래식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고 연주하고자 한다.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에서 백남준은 유리를 치거나 긁으면서 공포감을 만들고 객석에 앉아 있는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른다. 공연장 밖으로 나간 백남준은 객석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공연이 끝났”음을 알렸다.



연주자들은 악보 대신 명령어를 받기도 한다. “관객쪽으로 완두콩을 던져라, 몸에 면도 크림을 발라라...다시 나와서 아기용 고무젖꼭지를 입에 물고 피아노를 연주하라.”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고, 검은색 잉크에 머리를 담아 흰 종이 위에 머리카락으로 그림 그리기, 막 도살한 황소의 머리를 전시장 입구 천장에 걸어 놓는 등. 백남준은 재미있고 때론 기괴한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개인적인 유희에만 머물렀던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새로운 예술의 소재로 보았다. 귀로만 듣던 음악을 눈으로 보는 시각예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11대의 텔레비전을 한 방에 설치하여 관람객의 목소리와 행동에 따라 텔레비전 화면이 변하도록 했다.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예술은 독재 혹은 혼자만의 예술이다” 이후로 인공위성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면서 여러 국가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 그리고 지구 반대편 나라의 사람들간의 연결을 예술의 주된 주제로 삼았다.


 

이 책의 저자는 뉴욕 특파원으로 있을때 백남준의 아내인 시케코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나의 사랑, 백남준>을 펴냈다. 이번 책에서 그는 동,서양의 유목민으로 살았던 백남준의 발자취를 따라 4개국 8개의 도시를 방문한다. 백남준이 작업했던 스튜디오, 공연장, 음악 학교, 그의 자료가 보관된 박물관 등. 촘촘한 이동 경로가 사진과 함께 전개된다. 예술가 친구, 아내 시케코와의 인터뷰도 싣고 있어 비디오 아티스트 뿐 아니라 전위예술가로 살았던 백남준의 소소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책 중간에 몇몇 작품에 관한 QR코드가 있어 작품 설명과 연결된 공연 영상을 보는 편리함도 있다. 하지만 백남준의 모든 작품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에 유튜브에 검색을 하면서 책읽기를 권한다.

 

 



조상들이 뛰놀던 몽골 벌판을 가보라. 피라미드도 에펠탑도 아크로폴리스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곳에는 아무런 문명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우리 조상들이 살던 초원의 미학이다. 내 작품도 마찬가지다. 낡은 진공관은 10년도 못 간다. 나는 세상에 나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예술을 한 것이다. 왜 무엇을 남기려 하느냐.-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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