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편 그 순간부터 덮는 그 순간까지 버터 향이 진하게 풍기는 책이다.
오죽했으면 몇 페이지 읽지도 않고 버터간장밥을 해먹었을까.
우리 집은 약사인 어머니께서 동물성 지방이 몸에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하셔서 계란간장밥은 몰라도 버터간장밥은 절대 해먹이지 않던 집이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운 맛도 아니었는데.....
이 책은 결국 내가 책 읽다 말고, 베이킹에나 쓰던 버터를 냉장고에서 꺼내 밥에 올려먹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책 속 살인 사건 피고인인 가지이 마나코의 집념어린 버터 찬양은 생생하다.
요리도 요리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일본 사회에서 들이대는 ˝여자다움/남자다움˝의 잣대다. 그래, ‘성‘에 관해서는, 일본은 ‘참 여러 의미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싶은 인식을 가진 나라다. 적어도 내가 겪은 일본은 그랬다.
그리고 이 책 속 모든 인물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틀에 스스로를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눌려산다.
화자인 리카도 어떤 의미로는 ˝여기자˝라며 스스로에게 특정 이미지를 요구하고, 리카의 연인도,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도, 친구 레이코도, 레이코의 남편도, 후배, 직장상사, 취재 소스... 어느 한 명 그 기준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 초반, 잠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살인 사건 피고인, 여러 남자를 속여 죽게 한 꽃뱀이라는 혐의를 받는 가자이만이 그 기준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묘사한다. (물론,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데, 후반에 가면 그녀도 결국 일본의 성역할이라는 잣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 했다는 게 보인다.)
원래 타자가 되어 멀리서 보면 이래저래 말하기 쉽지만, 그 사회에 속한 일원으로서는 사회적 압력에 ˝NO˝를 외치기 힘든 법이다.
일본어, 영어 모두를 구사하는 나는 2010년대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생활한 적이 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도 그런 부분이 있지만, 일본도 묘하게 ‘외국인‘에게 너그러운 잣대를 들이대는 분야가 있는데, 외모를 평가하는 기준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나는 참 애매한 존재였다. 출근 첫 날 대놓고 ˝진짜 한국인? 일본인 아니고?˝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본어 구사가 자연스러운 편이라 지인과 일본어로 얘기를 하며 거리를 걷고 있으면 대부분이 내가 외국인이라 생각을 못 했다. 그래서 재미있는게, 처음에는 일본인인 줄 알고 아주 신랄하게 외모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어떻다 저떻다 말을 하다가, 내가 외국인인 걸 알면 말을 줄이는 걸 볼 수 있고는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농담이 아니고, 출근 첫 날 힐을 신고 (별로 높지도 않은 4cm 힐이었다.) 지하철을 탔다가 엄청난 시선 집중을 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거기서는 굽 있는 신을 신지 않았다. 그런 시선에 꽤 둔감한 나도 ˝뭐 어쩌라고?˝ 라며 무시 못 할 시선이었다. 그 동네 살지 않는 지금이야 ˝에이, 왜 그랬을까, 내가 무슨 죽을 죄 지은 것도 아니고...˝ 싶은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럴 만 했지˝ 싶기도 하다.
처음에는 내 얼굴에 뭐가 묻은 줄 알았다. 아님 내 이마에 무슨 밥풀이라도 붙었거나. 거의 공개수배 당한 용의자가 된 심정이었다. 그 정도로 무언의 시선이 따갑고 뜨거웠다.
일본인 동료에게 슬쩍 물었다. 묘하게 시선을 느끼는데, 내가 특이하게 보이는 점이라도 있냐고.
묘한 미소와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씨, 일본인 여성이라기에는 키도 크고 볼륨감이 있으니까요.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할까?˝
열심히 돌려 말했지만, 결국 이 말이다. ˝**씨, (일본인 여성처럼 보이는데) 너무 크고 뚱뚱하니까요.˝
(그나저나, 저 말도 지금 생각하니 재밌다. 지금 내 주변의 미국 여성들에게 저 말을 들려주면 뭐라고 할까...?)
와우. 물론, 10여 년 전이니, 한국도 여성의 외모에 대해 공공연히 평가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았고, 특히 택시 아저씨들에게 ‘살 빼라‘ 던가 이것저것 쓸데없는 참견을 들어본 기억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지하철 한 칸 안의 모든 사람에게서 집중포화로 시선을 받을 일이라고? 일본에서 겪은 첫 충격이었다.
최근에는 일본을 가 본 지는 꽤 오래 되었으니 잘 모르겠고, 한국은 일단 택시 내에서 아저씨들의 사담이 없어진 걸로 보아 서서히 변하는 중이라는 걸 올해 취재 갔다가 느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하다 싶은 점도 많다. 밖에서 보면 참 신기한 게, 일본도 우리나라도 상당히 외모에 대한 기준이 가혹하다. 특히, ‘뚱뚱한 여자‘를 가르는 기준과 편견은 무시무시할 정도다.
내가 현재 사는 곳은 미국이니 아예 미의 기준이 상당히 달라서 내 외모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살지만 (물론 뉴욕에서도 패션위크에 모델들 취재하러 가면 어마어마한 압력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에 내가 느꼈던 압력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화자인 기자 리카의 키는 나와 같다. 166cm.
그런데 평생 50kg 을 넘은 적이 없다가 가자이의 취재를 진행하면서 그녀의 레시피대로... ˝먹고 싶은 걸 먹다 보니˝ 55kg 이 되고, 59kg이 된다. 참고로 키가 166cm 쯤 되면 권장 체중은 60kg 이다.
그런데도 ˝자기 관리가 안 되어 보인다, 뚱뚱하다, 둔해 보인다˝ 별의 별 소리를 다 듣는다.
문제는, 저런 소리를 우리 사회도 이제는 겉으로 대놓고 얘기는 못 할 뿐이지 여전히 속으로는 한다는 점이다. 리카의 남자친구 마코토가 했듯이 ˝널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라는 예쁜 말로 포장해서 던지기도 하고. 한국 기성복 사이즈로 66사이즈인 내가 매번 엄마와 함께 쇼핑할 때 ˝살 빼라˝ 소리를 듣다가, 미국에 와서 S 사이즈를 사면서 (바지 길이나 소매 길이도 이 동네가 더 잘 맞았다) 느꼈던 해방감을 기억한다.
화자인 리카도, 그 친구인 레이코도, 가지이라는 어떻게 봐도 타인을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기 좋아하고, 가스라이팅의 달인인 살인 재판 피고인에게 잠깐이나마 경도되다시피 한 것은 아마 가지이가 자신의 몸에 초긍정적이라 그럴 것이다. 먹는 욕망에 솔직하고, ‘도대체 왜 버터의 참맛을 모르고 다이어트 노래를 부르며 맛없는 요리를 먹는지 모르겠다‘는 가지이의 논조는 순간 너무나도 당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잣대의 바깥에 안착한 시간이 긴 나에게는, ‘집에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요리,‘ ‘여성성,‘ ‘진짜 재력도 마음도 여유가 있는 남자‘ 같은 걸 찬양하는 가지이도 가히 자유로운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긴 연말 휴가 동안 여러 책을 읽으려고 속도를 올리다 보니, 리뷰가 두서없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쁘다.
적어도 일본에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써내려가는 작가가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