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의 매력은 뭐지?"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 주문을 끝내고 종업원이 가져온 화이트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저기계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른다는 소리?"
그가 물었다.
"그걸 알면 더 유명해졌겠죠."
내가 대답했다.
"그러는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그러자 그는 코를 문지르면서 "가공의 이야기라는 게 매력이지 않나?" 라고 말했다.
"현실의 사건은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지. 선과 악의 경계가 애매하잖아. 그래서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지만 명확한 결론은불가능해. 항상 커다란 무언가의 일부분일 뿐이야. 그런 점에서 소설은 완성된 구조를 지니고 있잖아. 소설은 하나의 구조물이지. 그
리고 추리소설은 그 구조물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분야 아니야?" - P11

거기, 피곤에 찌든 얼굴이 있었다. 표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귀찮아 보였다.
거울 속 모습에서 시선을 피하고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한번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변화가 생겼다. 마침내 스스로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좋아했던 사람이 죽으면 슬픈 게 당연한 일이다. - P13

"아까부터 쭉 그에 대해 생각해봤어.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겠더라. 우린 둘 사이에 선을 그어놓고, 서로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사귀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번 사건은 그의 영역에서 일어난 거야." - P16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흰색 벤츠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러고 있으니 버스정류장이라는 게 꽤 편리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혼자 멍하니 앉아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말이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쳐 지나가는 버스 운전사뿐이다. - P78

나는 거의 진상에 가까운 사실을 알아냈다고 확신했다. 물론 모든 걸 해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었다. 나는 그게 추리로 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추리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나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
커피를 한 잔 더 청하고, 바깥 풍경을 잠깐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이슥해지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슬픔이 찾아왔다. - P270

"한참 뒤에 가와즈 씨가 또 사장님을 찾아왔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면서. 하지만 그냥 누군가의 목숨만 노린 게 아니었습니다.
살인이 이뤄진 다음에는 반드시 편지가 도착했거든요."
"편지?"
"예. 흰색 용지에 워드프로세서로 딱 11개 문자가 적힌 편지였죠. 편지에는 항상 ‘무인도로부터 살의를 담아‘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무인도로부터 살의를 담아…. - P2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릴 때, 히가시노 게이고 부터 시작해서 미야베 미유키, 요코미조 세이시 등등 한창 일본 추리 소설을 탐닉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의 패턴이 뻔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결국 재미가 없어졌고) 손을 대지 않게 되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유즈키 아사코의 버터를 읽고 나서, 묘하게 일본 추리 소설 특유의 ˝범인은 이 안에 있다!˝ ˝범인은 바로 너!˝ ˝아... 사건은 종결인데 찜찜하다...˝ 하는 그 느낌들이 그리워졌다.
이 책 또한 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달까. 그래서 앉은 그 자리에 앉아 끝까지 눈 한 번 안 떼고 읽었다.

마지막 한 줄로 엄청난 질문과 커다란 반전을 이끌어 낸 것도 재밌다. 상상도 못 했는데... 다시 찬찬히 읽으면 복선이 보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OM의 위력은 대단하죠. 예전에 ‘저 은행 위험하대‘라는 아무 근거도 없는누군가의 한마디에 예금 인출 소동이 벌어져 결국 파산한 은행도 있어요. 과거에벌어졌던 화장지나 쌀 사재기 소동도 근거 없는 소문 때문이었죠. 얼마 전에도인터넷에 올라온 단 한 건의 클레임이 대기업 가전제품 브랜드의 신용을 무너뜨린사건이 있었어요. WOM만으로도 회사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사람을죽일 수도 있습니다. 간토?東 대지진 때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희생당했던이유도 누군가 퍼뜨린 유언비어 때문이었습니다."
- P29

"예를 들면 다른 사람에 대한 뒷담화입니다. 사람들은 다들 칭찬보다 욕이나자극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또 듣고 싶어 하죠."
그리고 마이너스 이미지의 정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공포심을 자극하는방법이다.
"가장 유명한 WOM을 아세요? 아마 프랑스에서 시작된 모양인데 이제는 온세상에 퍼졌죠. 여자 혼자 외국 부티크 탈의실에 들어가면 위험하다, 거울이빙그르르 돌면서 사람이 사라진다. 거울 뒤에 인신매매 조직원이 숨어 있다가 매춘소굴로 끌고 간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패턴이 있어요. 예를 들면납치된 여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팔다리와 혀를 잘라낸다거나, 몇 해 뒤에 애인과다시 만났을 때는 마약에 찌들어 노파 모습이 되어 있었다거나. 정말 무서운이야기죠. WOM이 널리 퍼지는 가장 큰 심리적인 요인은 인간의 잠재적인 공포와불안이에요. 여자애들에게는 무서운 이야기, 기분 나쁜 이야기가 제일 효과적이죠."
- P31

"저 시체가 네 동생이라고 생각해봐. 네 애인이라고 생각해보라고, 그래도구역질이 나겠나? 일을 제대로 할 생각을 해. 조금 전까지는 살아 있던 사람이야.
살아 있다면 미인일지도 모르지. 토할 이유가 없어."
- P67

대부분 애매하고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다. 혼자 사는 남자, 실업자, 학교에 가지않는 학생, 밤에 일하는 사람, 이웃과 사이가 좋지 않은 집의 식구들....... 이웃들과어울리지 않거나 평소 평판이 좋지 않았던 주민은 바로 범인으로 취급된다. 행여경찰이 그런 주민을 방문하면 소문이 부풀어 곧 체포될 거라는 유언비어가퍼지기도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수사관이 소문에 휘둘리는 일도 적지 않다.
- P79

살인의 동기가 원한이나 돈뿐이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살인사건 발생 건수 자체가세상이 시끄러울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하지만이유 없는 살인,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어떤 살인이나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 이유를범인만 아는 살인사건이 많다.
- P241

출세 경쟁은 사실 아주 단순한 게임이다. 어리석은 순위 다툼. 자기보다 어린사람에게 고개 숙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직 안의 서열 따위는 조직을 떠나는순간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간단하게 때려치울 수 있는 레이스다.
- P245

"방은 정직하죠. 이렇게 보고 있으면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개는 어떤사람인지 짐작이 갑니다. 무엇을 방에 두고 무엇을 장식하고 무엇을 감춰두는지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도 알게 되죠."
- P247

심리학은 잘 모르지만, 고구레는 경험상 인간 심리가 권위나 다른 사람의 말과행동에 상당히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용의자 신상에 대한 정보가한번 흘러나가면 탐문수사는 엉망이 된다. 사람들이 이미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소문이 어느 틈엔가 확신으로 바뀌고, 검은까마귀가 흰 까마귀로 변하고 만다.
- P281

"무엇이든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예요."
- P319

"악마 소문을 내면 악마가 나타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 P4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은 가벼운데 주제는 참 무겁다.



미국에 산 지 꽤 시일이 지난 내게 인종과 관련한 담화는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다.



물론, 1920년대 넬라 라슨이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인종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이는 백인과 흑인 커뮤니티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니까.



작가의 성장 배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인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종 인식이 얼마나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정말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이야기 전반에 묻어난다.



라슨이 이 이야기를 집필하던 시기에는 흑인 브루주아 계층이 부상하고 재즈, 뮤지컬, 문학 등 흑인들의 문화가 주목받으면서 백인과 흑인 아티스트들 간에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피부색이나 혈통을 기준 삼아 ˝우리˝ 아니면 ˝너네˝로 구분 짓고 차별하던 기준이 얼마나 얼척없는 짓인지가 점점 시각화 됐다. 동시에, 흑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백인들이 누리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 백인인 ‘척‘ 살아가는 패싱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시기이기도 하다고 한다.



언뜻, ˝차별이 심한 옛날이니까 그럴 만 하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 쉬운데, 사실 현재 미국에 사는 나조차도 국적이나 인종에 관한 스테레오타입을 스리슬쩍 이용하려고 일부러 머리를 염색하거나 화장을 진하게 하는 걸 생각하면... (내 경우는 ‘외국인‘ 취급으로 인해 업무상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부러 확- 머리와 화장 스타일을 바꿨더니, 다들 ˝여기서 자란 애인 줄 알았다˝며 태도가 바뀌는 걸 경험한 케이스다.) ˝패싱˝같이 스스로의 인종적 정체성이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탓에 일부러 아닌 척 하는 경우가 현대에서도 덜 노골적이지만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작가가 작품 활동을 더 왕성히 하지 못 하고 세상을 떴다는 게 안타깝다. 인종 차별을 탐구하는 소설은 많지만, 보통 두 그룹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인데, 이 책은 같은 인종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면서 ˝인종을 구분하는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를 탐구해서 신선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벨루는 손을 앞으로 휘저으며 단호하고 확실하게 거부했다. "아니, 천만에, 검둥이." 그가 단언했다. "나한테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난 당신이 검둥이가 아닌 걸 알아. 그러니까 괜찮아. 당신이 원한다면 검은 고양이처럼까매져도 돼. 왜냐하면 난 당신이 검둥이가 아닌 걸 아니까. 거기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내 가족에 진짜 검둥이는안 돼.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거야."
- P78

아이린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모두 웃는 낯으로 농담을 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대단히 친밀한 티 파티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농담조로 말했다. "벨루씨, 그러니까 검둥이들을 싫어하는군요?" 그러나 그 말은그녀가 의도했던 만큼 유쾌하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존 벨루는 그렇지 않다는 듯 짧게 웃었다. "레드필드부인, 그 점에 관해서라면 저를 잘못 보신 겁니다. 전혀 그런 게 아니에요. 난 그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혐오해요.
- P79

그녀는클레어가 쉽게 이해되는 것만큼 그녀를 향한 연민과 경멸도 강하게 느꼈다. 클레어는 그렇게 대담하고 그렇게 사랑스럽고 그렇게 ‘자기 방식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 P85

아이린은 계속 자문했다. 클레어 켄드리는 무슨 권리로 그녀로 하여금, 심지어 거트루드까지 그런 굴욕을, 그런 노골적인 모욕을 당하도록 했단 말인가.
- P88

그녀가 앞니를 꽉 물었다. 그러고는 잇새로 내뱉은 말에 가벼운 조소의 어감이 깔려 있었다. "이봐요, 브라이언,
어떤 남자가 날 검둥이라고 부르면 처음에는 그 사람 잘못이지만 그 남자가 또 그 짓을 하게 두면 그건 내 잘못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내가 멍청하진 않을걸요?‘
- P106

그녀가 말했다.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 P110

그녀는 남편이 행복해지기를 원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웠고,
그가 행복해지기를 원하기는 해도, 오로지 그녀의 방식대로만, 그녀가 세워 놓은 계획대로만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은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또한아이린은 아이들과 어느 정도는 그녀 자신을 위해서 거주지와 생활이 일정하게 보장되기를 원했으며 여기에 어떤식으로든 위협이 되는 다른 모든 계획과 상황 들은 허용하지 않았다.
- P121

그러나 클레어는 조심성뿐만 아니라 이성까지 내던져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없어, 난 그럴 수 없어." 그리고 말했다. "그럴 수 있다면야그렇게 하겠어.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넌 몰라,
내가 얼마나 흑인을 보고 싶어 하는지, 다시 그들과 함께있고 싶은지,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고싶어 하는지, 넌 알 수가 없어."
- P142

한번은 그녀가 남편에게 물었다. 클레어가 눈부시게아름답지 않느냐고,
"아니." 그가 대답했었다. 특별하게 아름답지는 않아."
"브라이언, 당신 거짓말하는군요!"
"아니, 정말이야. 내가 까다로울 수도 있지. 백인 중에서는 대단히 예쁘게 생긴 편이겠지. 근데 난 더 새까만 피부가 좋아.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이상형과 비교하자면그녀는 한마디로 거리가 멀지."
- P147

"아니야, 맞아, 르네. 내가 너랑 완전히 다르다는 거 모르겠어? 그래,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일이든 하고 누구든지 상처 입히고 어떤 것도 던져 버릴 수 있어. 정말이야, 르네, 난 위험해." 그 여자의 표정은물론이고 목소리마저 간절하고 진지했으므로 아이린은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아이린이 말했다. "난 그 말을 믿지 않아. 첫째, 네가말하는 것은 완전히 틀려. 네가 내던져 버린 것들은……."
- P163

그녀가 클레어를 보호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그 남자, 클레어 켄드리의 백인 남편에게, 자기 아내가 흑인일 수 있다고 의심하게 만드는 어떤말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 사실을편지로 쓸 수도 없었고 전화로 할 수도 없었으며, 또는 그의 귀에 들어가게 다른 누군가를 통해 흘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다르지만 똑같은, 두 종류의 충성심 사이에서옴짝달싹 못 했다. 그녀 자신에 대한 것. 그리고 그녀가 속한 인종에 대한 것. 아, 인종이라니! 그것 때문에 아이린은 결박당한 채 질식하고 있었다.  - P195

"당신은 정말 잘못 알고 있소! 당신이 결정한 대로 우리 아이들이 이 저주받은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면, 애들입장에서는 누가 자기들에게 적대적인지 되도록 빨리 아는 게 좋아요. 일찍 알수록 잘 대처할 거요."
"난 동의하지 않아요. 어린 시절만큼은 될 수 있는 한행복하게, 그런 일들은 몰랐으면 좋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야 아주 좋겠소." 브라이언이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물론 그게 최선이오.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93 - P2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