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硝子戶の中 (新潮文庫) (改版, 文庫)
나쓰메 소세키 / 新潮社 / 1952년 7월
평점 :
유리문 안에서
나쓰메 소세키
예전에 나쓰메 소세키를 일본 국민작가라 말하기도 했는데,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을까. 몇 해 전에 그런 말 본 것 같기도 한데. 아직도 소세키 소설 몇 권밖에 못 봤다. 이 책 《유리문 안에서》는 소설이 아닌 산문(수필)이다. 예전에 소세키가 쓴 편지글을 봤는데 거의 잊어버렸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소세키가 쓴 편지를 봤을까. 책이 보여서 봤겠지. 예전에 본 소설도 잘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고 소세키를 보거나 몇 해 전에 소세키 책이 새로 나오기도 해서 다시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책을 겨우 몇권 그것도 띄엄띄엄 본다고 그 사람을 알기 어렵겠지. 소세키 잘 몰라도 괜찮지만. 이런 말을 하다니. 난 지금까지 작가보다 그저 소설만 봤다. 소설을 알려면 작가도 조금 알아야겠지. 그림도 마찬가지던가.
이 책 꽤 얇다. 얇아서 바로 보겠지 했는데 다 보는 데 며칠이나 걸렸다. 여전히 책을 조금만 봐서 그랬다. 이 책을 볼 때는 기분도 아주 안 좋고 어두운 생각에 빠져서 더 못 본 듯하다. 어떻게든 끝까지 보기는 했다. 대충. 산문보다 소설 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어느 정도 상상하면 되고 그게 맞기도 하다. 잘 모르는 글. 이 책 한국말로 보면 책을 천천히 보는 나도 아마 하루에 다 봤을 거다. 한국말은 지금 한국 사람이 쓰는 글로 썼을 테니 더 편하게 봤을 텐데. 왜 이 책을 이걸로 보기로 했을까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책값이 싸서 다른 책 사면서 이 책도 샀구나. 창피하군. 일본말 공부 더 하고 봐야지 아직도 멀었구나. 소세키 소설 볼 때도 내가 아는 게 얼마 없구나 하는 했는데.
나쓰메 소세키는 1916년 12월에 병으로 죽었다. 웨궤양과 당뇨였나 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1915년 1월부터 2월까지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다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부모가 나이를 아주 많이 먹고 낳은 막내로 집안이 어려워서 어릴 때 고물상 부부한테 양자로 보냈나 보다. 고물상 부부도 그렇게 부자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나가 광주리에 든 소세키가 불쌍해서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 뒤에 다시 다른 집에 양자로 간다. 그때는 친척집이었던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소세키는 아주 기뻐했다. 그러면서 자기 부모를 할아버지 할머니라 했다. 자기 부모인지 몰랐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엔 집에 돌아왔다는 마음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소세키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소세키한테 살짝 알려준다. 소세키가 할아버지 할머니라 하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라고. 어린 소세키는 그걸 고맙게 생각했다. 어릴 때는 그랬다 해도 자라면서 그런 일들이 떠오르고 마음에 상처가 됐을지도.
여기 실린 글에서 기억에 남는 건 어떤 여자가 소세키를 찾아와서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고 한 거다. 여자는 소세키한테 자기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다시 소설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여자가 힘들게 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해설을 보니 사랑 때문에 안 좋았나 보다. 여자는 소설을 쓴다면 여자를 살게 할지 죽게 할지 물어봤다. 소세키는 여자한테 살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 아픔은 가시겠지만 빼앗기는 것도 있다고 했구나. 그건 목숨일까. 사람은 누구나 죽음으로 간다. 언젠가 죽는데 스스로 죽어야 할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가끔 죽고 싶다 생각한다.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런 나한테도 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죽을 텐데 하고. 내가 살아야 한다고 쓰는 건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글을 보다보니 어떤 사람 이야기를 하고는 죽었다는 말을 여러 번이나 했다. 형과 친구 게이샤. 자신이 아플 때는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오지 않는데, 자신이 나으면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는 말도 봤다. 다른 사람은 죽는데 자신은 살아 남았다 여긴 듯하다. 개와 고양이가 죽은 이야기도 있구나. 이런 게 기억에 남다니. 소세키가 안 좋은 꿈을 꿨을 때 어머니가 와서 소세키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소세키 기억에 어머니는 자신을 막내로 귀여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자신한테 가장 잘해줬다고 기억했다. 어머니는 그런 거겠지. 자식을 생각하지 않는 어머니가 아주 없지 않겠지만. 어머니는 못난 자식도 받아들여준다. 그게 슬프다. 이건 소세키 어머니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세키는 이 글을 연재한 다음에 소설을 썼다. 《한눈팔기》와 《명암》이다. 하지만 《명암》은 끝까지 쓰지 못하고 죽었다. 죽기 전에 자전 소설인 《한눈팔기》를 써서 자기 마음이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좀 더 건강을 챙겼다면 좋았을 텐데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일본말로 잘 못 읽고 다 이해 못해도 몇 권 더 볼까 한다. 그걸 본다고 소세키를 알지, 그때도 잘 모르겠다. 모르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책 읽고 싶어하니 아직 죽지는 않겠다. 가끔 어둠에 빠지지만.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