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파랑 빨강
볼펜심은 세 가지예요
다른 색깔도 있겠지만
세 가지만 써요
검정을 자주 쓰고
파랑과 빨강은 가끔 써요
검정 볼펜심은 빨리 닳고
파랑과 빨강 볼펜심은 천천히 닳아요
아니 파랑도 빨리 닳네요
검정으로 쓸 걸 파랑으로 써서
연필심이 짧아지는 것만큼
볼펜심이 닳는 것도 기분 좋아요
그건 뭔가 쓴다는 증거지요
희선
하루가 바뀌는 영시가 지나고도
잠 못 이루고, 아니 잠들지 않고
밤을 낮처럼 보내
늦은 밤에도 깨어 있는
많은 사람
어둠이 내려와도 불을 켜면 어둡지 않아
온전한 어둠을 느끼지 못해도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아도
밝은 밤은 좋아
영시가 지난 지금
당신은 뭐하세요
언젠가 끝이 찾아온다 해도
걸어가
걷다가 힘들면 잠깐 쉬고
둘레 한번 둘러봐
때론 꺾이거나
좁은 길로 가기도 할 거야
그 길엔 못 보던 꽃이 있을지도 모르지
누군가와 함께여도 괜찮고
혼자여도 괜찮아
즐겁게 걸어가
누군가와 함께 한 기억이 좋겠지만,
혼자 지낸 기억도 괜찮아
날마다 같은 걸 되풀이해도
시간이 흐르면
처음 그걸 했을 때가 떠오르기도 해
그때 있었던 일은 아니고
그때 느낌이랄까
그것도 나쁘지 않아
같은 걸 한다 해도
그때그때 다르겠지
봄이 오면 녹고 사라지는 눈사람,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그리고 겨울에도 함께 하고 싶었어
눈사람이지만
눈이 아닌 다른 걸로 눈사람을 만들었어
솜 털실 스티로폼……
눈사람은 봄이 와도 사라지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