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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평점 :
이 시집이 나온 날을 보니 2019년 1월 1일이었다. 2019년 첫날 나오다니. 1월 1일은 쉬는 날인데. 쉬는 날이라고 책이 나오지 못할 건 없을까. 출판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출판사도 1월 1일에는 쉴 것 같은데. 택배도 1월 2일부터 배달하지 않던가. 책이 나오는 날이 1월 1일이라 해도 그전에 다 만들어두기는 했을 거다. 책방에 놓는 게 1월 1일부터가 아닐까 싶다. 이제 책방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책방도 1월 1일에는 쉬고 1월 2일부터 문 열었겠지. 책 나오는 날이 1월 1일이라 찍혀서 여기 담긴 시를 쓴 이제니는 기분 좋았을 것 같다. 그걸 보고 2019년은 좀 괜찮은 해가 될지도 몰라 생각했을지도. 이런 생각 좀 단순한가. 이제니한테 2019년은 어떤 해였을지. 나한테 2019년은 별로였다.
이제니 시는 처음 만났다. 이번이 세번째 시집이다. 시집은 거의 두번 보는데 이번에는 한번밖에 못 봤다. 한번 더 봐야 조금이라도 나을 텐데. 시가 몇편 빼고 길다. 행갈이 하는 시가 별로 없다. 행갈이 없는 시만 보다가 행갈이 하는 시를 보니 마음이 조금 편했다. 행갈이가 없다 해도 마침표가 있으니 천천히 봤다면 좋았을걸. 한번 더 보면 되잖아 하는 생각을 하고 보다가 무척 숨이 찼다. 한번 보고 힘들어서 다시 못 봤다. 아쉽다. 언제가 다시 만날 날이 있기를 바란다. 그때는 조금 천천히 쉬엄쉬엄 봐야겠다. 이런 생각하고 내가 지킨 적이 있던가. 바로는 아닐지라도 다시 한번 보고 싶기도 하다. 정말 그러기를.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소리로 다가왔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내고 어제의 귓속말을 데려왔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때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언젠가 네가 주었던 검은 조약돌. 바다는 오늘도 자리에 없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의 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돌과 물 사이에 있었다. 돌의 마음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결은 왔다가 갔다. 울음은 갔다가 왔다. 고양이는 노래를 훔쳤다. 바람은 붙잡히지 않았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희망이 그들을 멀어지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이름뿐이다. 나의 이름 위에 너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너의 이름 위에 돌의 마음을 올려두었다. 발소리는 침묵 뒤에 다가왔다. 빛은 어둠을 물들이며 언덕으로 달려갔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언젠가 내게 주었던 검은 조약돌. 나는 나의 이름을 문질러 지웠다. 너는 너의 이름을 감추어 묻었다. 우리의 이름 위로 우리의 그림자가 흘러갔다. 구름이 나를 나무랐다. 나무가 바람을 두드렸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물결 뒤에는 조약돌만 남았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영원을 보았다고 믿었다.
-<구름에서 영원까지>, 14쪽~15쪽
처음 봤을 때 이 시가 좋았다기보다 시집을 한번 보고 다시 넘겨보다가 이걸 옮겨 써야겠다 했다. 왜 그랬을까.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때문일지도. 이 시를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이 시에 나오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것은 조용히 나아가는 구름이었다. 찬바람 불어오는 골목골목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라지는 그림자였다. 구름에도 바닥이 있다는 듯이. 골목에도 숨결이 있다는 듯이. 흔적이 도드라지는 길 위에서. 눈물이 두드러지는 마음으로.
흰 꽃을 접어 들고 걸어가는 길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봄밤은 저물어가고. 숲과 숲 사이에는 오솔길이 있고. 오솔길과 오솔길 사이에는 소릿길이 있고. 소릿길과 소릿길 사이에는 사이시옷이 있었다. 어머니 흰 꽃처럼 나와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고양이의 길. 누구도 다른 길을 갈 수 없다는 듯이. 잡을 수 없는 것을 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다가갈 수 없는 것을 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향
그리고 날아가는
어제처럼 오늘도 고양이가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고양이의 길. 얼룩무늬 검은 흰. 얼룩무늬 검고 흰. 누군가의 글씨 위에 겹쳐 쓰는 나의 글씨가 있었다. 늙은 눈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길이 있었다. 그것은 늙은 등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늙은 등은 느리고 흐릿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 발 내딛고 다시 돌아보는 길이었다.
-<고양이의 길>, 76쪽~77쪽
앞에 옮긴 시는 제목이 ‘고양이의 길’이어서다. 이 시가 나오기 전까지 숨차게 읽고, 여기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바쁜 일도 없는데 왜 그렇게 빨리 보려 했을까. 이 시 다음에 행갈이 없는 시가 몇편 나오고 행갈이 하는 시가 나온다(행갈이보다 연을 나누었다고 해야 할까). 진짜 고양이가 다니는 길을 생각한 건지. 고양이가 구름처럼 보였을까. 고양이는 몸놀림이 가볍다. 그건 새끼 고양이던가. 새끼 고양이는 바람이 불면 멀리 날아갈지도.
여러 시가 담긴 시집을 보고 쓰기는 하는데 여전히 내 마음대로구나. 이 시집 보기 전에 책 읽기 싫었다. 어떤 때는 이것저것 다 보고 싶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기 싫기도 하다. 책 읽기 싫어도 읽는다. 책을 보면 그걸 하기 싫었던 마음이 사라진다. 신기한 일이다. 제대로 못 써도 앞으로도 시 만나고 싶다. 잘 모르면 어떤까. 이 말 언제쯤 안 할지. 어떤 말로 시작하고 이런저런 말로 이어지는 시 재미있기도 하다. 이제니 시에도 그런 게 있다. 행갈이를 하지 않아서 그게 두드러진다. 이런 시는 어떻게 쓸까. 한번에 쓸지, 몇번 나누어서 쓸지.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