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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0 ㅣ 소설 보다
김혜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평점 :
몇달 전에는 ‘소설 보다’ 가을(2019)을 만났는데, 다음에 겨울이 아닌 봄이 나와서 이상했다. 이 책이 나오는 때는 같아도 철도 그때를 쓰기로 했는가 보다. 소설 보다 겨울을 내가 못 본 건 아니겠지. 소설 보다에는 소설이 세편 담겨서 보기 편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소설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어쩌면 이 말 전에도 했을지도. 지지난해에 나온 여름은 끝내 못 만났다(이것도 나온 지 한해가 지나다니). 그것보다 더 먼저 나온 것도 못 봤으면서 이런 말을 했구나. 언젠가 거기 실린 소설을 다른 데서 만날지도 모르겠다. 문학과지성사에서는 문지문학상 후보로 철마다 세편(처음에는 네편이었구나) 뽑는다 했는데, 문지문학상 후보만 되는 건 아닌 듯하다. 여기서 본 소설이 다른 문학상 받은 걸 보기도 했다. 다른 문학상을 먼저 받으면 문지문학상 후보는 안 되겠구나. 문학상은 꼭 하나만 줄까. 아주 괜찮은 소설이면 여러 개 주어도 되지 않을지. 그러면 상 못 받은 다른 소설이 아쉬워할지도. 소설이 아닌 소설가인가.
앞에는 소설과 별 상관없는 말을 했다. 소설은 사람 이야기인데 어떤 때는 그걸 알기 참 어렵다. 사람이 단순하지 않기는 하겠지만, 소설은 단순하지 않은 사람을 좀 더 잘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한국 소설을 보다보면 더 모호한 느낌이 든다. 소설이라고 투명하게 보여주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이해를 잘 못하는 거겠지. 그게 한두번도 아닌데. 세번째에 실린 한정현 소설 <오늘의 일기예보>에서 고모가 좋아한 사람은 누구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만 이해 못하는 건가. 예전에 옆집에 살던 제인인지. 제인은 트렌스젠더였다고 한다. 고모가 좋아한 사람은 다른 여성이었는지. 제인은 마음이 잘 맞는 친구고. 트렌스젠더였다 해도 좋아한 건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닐 텐데 난 그걸 더 알고 싶어하다니. 트렌스젠더를 한번 만나는 사람은 또 만나기도 하는 걸까. 보나가 그렇게 보인다. 여기에서는 1990년대 학생운동, 성소수자 같은 걸 말하는 듯하다. 여학생이 겪은 일도 있다. 제2차 세계전쟁 때는 동성애자가 죽임 당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도 그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까. 이걸 보다 보니 황정은 소설 《디디의 우산》이 생각났다.
장류진은 2019년에 이름을 알았다. 일하는 사람 이야기를 잘 썼다고 들었다. <펀펀 페스티벌>도 어느 큰 회사 3차 면접 이야기다. 그것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요즘 회사는 신입사원 뽑을 때 예능도 보는 걸까. 그런 게 일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일터라고 해서 일만 하는 건 아니구나. 나중에 회식 같은 거 할 때 뭔가 장기가 있는 사람은 그때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줘야 할지도. 그런 건 꼭 신입사원한테 시키지 않나. 회식 같은 건 왜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는 안 나왔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걸 보고 협동심이 있는지 보려는 걸지도. 일자리 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구나. 어느 곳이나 그런 면접을 보는 건 아니겠지만. 그걸 꽤 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뭐든 잘한다. 아니 잘한다기보다 뻔뻔하다고 해야할까. 자신은 뭘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지.
사람한테는 여러 가지 면이 있다. 그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기도 하다. 돈 많고 잘생긴 사람이 여성한테는 친절해도 청소하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그건 그 사람 인격에 문제가 있는 건가. 드라마 같은 데서 그런 모습을 봐서 그런 보기를 들었다. 남한테는 아주 잘하면서 집에서는 식구들한테 못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 그 반대도 있구나. 길고양이를 구조하는 사람이어도 재개발이 되기를 바라고 돈을 벌려고 한다. 김혜진 소설 <3구역, 1구역>에서는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가진 여러 면을 말한다. ‘나’가 그 사람을 바라보고 생각하는구나. 처음에는 착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3구역 1구역이라고 차별하는 말을 해서 ‘나’는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런데도 ‘나’는 ‘너’와 가끔 만난다.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걸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지. 시간이 가면 ‘나’는 ‘너’한테 더 실망한다. 그게 실망일까. 자기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 색깔은 봄을 느끼게 하지만, 소설은 따스한 봄이 아니다. 그렇다고 겨울이다 말하기도 어렵다. 세상에는 없는 철. 소설이 어둡다는 말 같구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아질 조짐은 보인다. 마지막 소설 <오늘의 일기예보>에서 고모는 예전에 하지 못한 말을 이제는 하려고 한다. 그건 좋은 거겠지. <3구역, 1구역>에서 ‘나’는 ‘너’처럼 살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럴 것 같다.
희선
☆―
그때는 다만 네가 따뜻한 사람이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길고양이에게 기꺼이 시간과 돈을 내줄 수 있을 만큰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다 여겼고 그 순간엔 내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3구역, 1구역>에서, 12쪽)
너는 길고양이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고 요령 있게 집을 사고 팔고 차익을 남길 줄 아는 사람이고 내게 아무런 경계심 없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고, 누구나 관심 있어하고 알고 싶어할 정보를 대가 없이 공유하는 사람이고, 낡고 오래된 것들은 말끔히 부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몇 날 며칠씩 오지 않는 고양이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3구역, 1구역>에서, 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