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지난 여름, 혼자 제주를 찾았을 때 제법 과감해지기로 했다. 빼곡한 계획표를 버리고 자유롭게 방황했다. 무섭게 짓누르는 폭양 아래서 오래도록 걸었다. 손선풍기의 미약한 바람에 의지해 한참 걷다 한 책방을 발견했다. 아늑하고 깔끔한 그곳은 뼈가 시큰거릴 정도로 시원했다. 여유롭게 책장을 구경하고 고른 책을 계산하려고 하자 사장님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매대 옆에 놓인 브로슈어를 힐긋거리고 있을 때였다.


“4·3 때 사람들이 제일 많이 묻힌 곳이 어딘 줄 알아요?”

 

나는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공항 활주로 아래요.”

 

온몸이 세차게 얼어붙었다. 에어컨의 냉기 때문은 아니었다. 대답하거나 고갯짓을 하지도 못했다. 설렘을 가득 싣고 비행기가 가뿐하게 미끄러졌던 어제의 그곳이 떠올라서였다. 솜처럼 가벼웠던 마음 위로 무거운 돌들이 굴러떨어졌다. 나는 배낭에 꽂고 다니던 동백꽃 모양의 배지가 생각났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숙연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밤, 인적이 드문 마을과 도로, 거칠 것 없는 들판과 그 너머를 감싸고 있는 산등성이가 전혀 생경했다. 검은 파도를 한참 바라보다 속절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4·3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건 한강 작가의 신간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여름의 냉기가 기억을 휘감았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그 무게의 감각이 남아있었다. 4·3에 대한 마음의 무게가 짧은 탄식에서 끝나지 않도록, 마모되기 쉬운 기억들에 둔감해지지 않도록, 책은 가장 정확한 순간에-올해가 가기 전에-나를 찾아왔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내내 꿈을 꾸는 듯했다. 주인공 경하의 서사는 환상적인 악몽을 통과하는 것 같다. 경하가 오랜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아 제주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죽음과 삶을 오간다.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하얀 고난을 몸부림치는 장면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스스로 잘 호흡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감각을 요동치게 하는 문장들이 얇고 날선 바늘로 온 신경에 세밀화를 그려냈다. 허기와 어둠과 고독 속에서 죽어갈지 모르는 인선의 새 아마를 위해 경하와 나란히 눈보라를 헤치듯 이야기--를 통과했다.

 

2부에서 경하는 삶과 죽음 그 어딘가에 놓이게 된다. 먼 서울의 병원에서 위독한 상태로 짐작되는 인선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뜻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둘은 초연하다. 누가 삶에 남아있는지, 혹은 죽음의 빗금 너머에 있는지 밝히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선은 자신의 방에 모아둔 기사 스크랩과 사진, 자료들을 보여준다. 점차 쇠약해지다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린 채 푹 꺼져버린 불씨처럼 곁을 떠난 어머니, 그의 유산. 인선은 정심의 삶으로 제주에서 벌어진 절멸의 역사에 불빛을 비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다중의 화자에게로 이야기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소설이다. 경하에게서 인선으로, 그리고 정심으로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본질을 묻는다. 책을 읽으며 경하가 되어보려고 했다. 정심의 사진들을 묵묵히 바라볼 수 있을까? 목격한다는 것은 기억의 책임을 나눠 갖는 일이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이가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움에 책을 떨쳐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내 몫을 다해보고 싶었다.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다시 길을 잃은 기분이 되었다. 이건 내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빛 한 점 없는 눈보라 속에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경하처럼, 나는 오래전 책방에서 느낀 냉기의 한가운데로 되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꺼져버릴 것을 알면서도 촛불을 들고 어둠으로 나아갔던 인선과 경하를 목격해버린, 존엄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통곡 속에서도 숨죽여 삶으로 손짓했던 정심의 얼굴을 알아버린 지금, 무거운 질문 앞에 겸허해지기로 했다.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진 몫은 삶과 죽음 그 어디에서든 너머로 손을 뻗는 것, 다름 아닌 사랑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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