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
소재원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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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나들이를 갔다가 영화 [소원] 카달로그를 보고는 이 영화는 꼭 봐야할 것 같아 찜해 두었던 영화였는데 원작이 눈에 띄어 읽고 싶은 차에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보니 극장에 못 갈 듯 하다. 책을 읽으면서도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려 눈물을 닦으며 읽고 목울대가 컥 막힌 듯 하여 몇 번이나 울컥 울컥 했는데 극장에서 과연 이겨내며 끝까지 잘 볼 수 있을까 의문이다. 저자의 소설은 처음인데 사회성 있는 목소리를 잘 담아내는 작가인 듯 해서 다른 작품들을 더 눈여겨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 소설 또한 실제 사건을 바탕에 두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나 또한 두 딸의 엄마이고 객지에 나가 있는 두 딸의 귀가길이 늘 걱정되고 연락하여 연락이 안되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안절부절하는 정말 웃지못할 사건이 몇 번 있었기에 더욱 감정이입이 되어 불끈불끈 하기도 했다.

 

" 저 자식......알고 있을까? 판사는 알고 있을까? 세상의 모든 행복이 지윤이에게서 나오는 우리를. 지금 저들이 세상 모든 정말을 우리에게 선물했다는 것을."

 

아동성폭력,성폭력은 정말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갈수록 더 극성인듯 해서 무섭기도 하고 딸들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하루 한시도 맘을 놓지 못하는 세상이 한스럽기도 하다.어젯밤에도 큰딸의 전화에 마지막 마무리는 '일찍 귀가하고 늘 조심해라.'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맘 놓고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에서 자식들을 키우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맘일 듯 하다. 다 큰 자식도 걱정이 되는데 아직 자라나는 '아동성폭력'은 정말 피의자들에게는 험한 말이 막 나오기도 하고 인권이 아니라 인권을 무시하고 싶어진다. 그들도 가족,부모 라는 단어에 언젠가는 해당사항이 될 확률이 있을터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자신들의 원죄보다 빠져나갈 구멍으로 그럴 때에만 '술' 을 거들먹 거린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런 소리에 힘을 실어 주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법이다.그렇다면 술을 마시고 하는 범죄는 인정해 준다는 소리밖에 더 되는가? 술의 힘까지 빌렸으니 더 엄중하게 처벌되어야 하는 것이 성폭력이고 아동성폭력이다.

 

삶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도망가거나 방관하거나 부딪히거나.

 

어린 나이게 그런 아픔을 겪으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짐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피의자의 욕망 때문에 짓밟힌 어린 꿈나무의 싹이 완전히 짓밟힌 것은 물론이고 소설처럼 한 가족이 와해되었는데 어떻게 가벼운 형량으로 재범의 소지를 줄 수 있는가. 아동성폭력은 피해자 본인의 아픔 뿐만이 아니라 소설에서처럼 엄마인 지윤엄마도 지윤아빠 그리고 당사자인 지윤에게도 모두 큰 아픔으로 작용하여 가족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만다. 당사자의 고통이 제일 크겠지만 옆에서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부모의 고통도 크다. 부모의 흔들림으로 가족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만 무엇보다 제일 힘든 것은 사회적이목을 이겨낸다는 것일 것이다. 무슨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취급을 하는 편견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아이도 부모도 버티며 견디어 낸다는 것은 대단한 의지가 필요하다.그럴 때 곁에서 누군가 큰 힘이 되어 주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는 민조라는 의사가 함께 해 준다.그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의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런 상황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일 듯 하다.

 

"<메멘토> 기억나? 우리가 함께 봤던 영화야. 거기에 이런 대사가 나오지. '눈은 감도 있어도 세상은 존재한다. 기억은 기록이 아닌 해석이다. 기억은 방의 구조를 바꿀 수 있고 차의 색깔을 바꿀 수 있다."

 

8살 지윤이 사라지고 남편은 아내가 아이와 함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내를 받아 들이고 이해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만 보면 그날의 일로 인해 폭력적이고 극단적이게 된다. 이미 일어난 일을 힘을 합하여 이겨내기 보다는 회피하려는 사람처럼 아니 지윤이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더 겉돌게 되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지 못하고 점점 무너져 내린다. 이 가족이 헤쳐나가야 할 길은 정말 멀게만 보인다. 8살 여아인 지윤이가 성폭력 피해자가 되면서 한가정은 그야말로 위기에 놓이게 되고 아내는 아내 대로 이겨내 보려고 하지만 엄마의 우울증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옮겨가게 되고 아빠 또한 딸아이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존재라 모녀 사이에 낄 수 없기도 하지만 고통을 서로 나누지 못하고 아내탓으로 돌려 버리듯 자신도 압박감에 시달린다. '그날' 이전에는 행복하고 이쁘고 희망이 가득하던 가정이 한순간에 난파된 가정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는 나서서 돛을 잡아야 하는데 아무도 잡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개개인의 아픔에 허덕이며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런 그들 사이에 그들이 행복하던 순간에 함께 했던 '영화' 와 딸 지윤과 아빠가 공감할 수 있는 '도라에몽' 이라는 것이 흘러 들면서 그들의 고통은 서서히 희망의 순풍을 만나게 된다.

 

남편이 선택했던 '죽음' 은 그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애착을 가져다 주고 그것이 하나의 계기처럼 딸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게 되면서 남자,키가 큰 남자를 무서워 하던 지윤이 도라에몽을 좋아하고 도라에몽의 탈을 쓰고 있는 아빠를 좋아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아빠, 집에 가자' 라는 지윤의 한마디에 그동안 망망대해와 같던 곳에서 육지를 발견한듯 폭풍 눈물을 흘리며 가족의 다시 살아갈 '희망'이라는 힘을 울타리를 세우게 되고 그 안에서 다시금 '가족'으로 뭉치게 된다. 고통이란 서로 나누어야 하고 더구나 가족의 고통이라 개인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한다. 무관심 속에 내 일이 아니라고 팽개쳐 놓을 것이 아니라 발 벗고 나서서 함께 이겨내고 견디어 내고 극복하도록 서로 함께 노력해야 폭풍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지 혼자 벗어난다고 될 일이 아니다. 8살 지윤이가 큰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도 힘들겠지만 비단 그것은 혼자서 스스로 일어나게 할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이란 것을 말해주면서 가족이 서로의 손을 놓치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꼭 잡고 희망의 발걸음을 옮겼다는 것이 중요한 듯 하다.

 

"그래요,가족. 그 울타리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아직 행복한 거라 생각해요. 비록 처참하게 짓밟히고 망가졌지만 아직 그 누구도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어요.나, 깨달았어요. 갇혀 있지 않아도 우린 절대 서로를 놓치 않는다는 걸.지윤아빠도 그랬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놓아버릴수 없었기에,그렇다고 자신의 이성을 잠재울 수도 없었기에,스스로가 놓아버맂 않는 길을 선택했다고. 파도가 잠잠해지면 배는 다시 출항해요.

 

저자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지윤이네 가족이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을 눈물나게 그려낸 것은 가족이 끈을 놓지 않고 이겨내는 감동 이야기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피의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에 대한 한목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술에 의해서 무심코 벌인 욕망이라고 내려진 형량이 아니라 그로 인해 가족이 어떻게 와해되어가고 변질될 수 있는지 그런가하면 그런 피해자가 늘어나지 않게 해야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다. 누군가는 나서서 법이 잘못되었다면 현실에 맞게 고쳐나가야 한다. 21세기를 살면서 19세기 법의 잣대로 피해자만 그 고통을 감내하라고 한다면 국가의 밑바탕이 되는 '가족' 이라는 최소단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수신제가라고 했던가 밑바탕부터 든든하게 바로 서야 하는데 법의 잣대가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지 가끔 의심이 드는 판결에 의아해 사건을 읽어 보는 경우도 있는데 21세기 코미도 그런 코미디가 없는 듯 할 때가 있다.뻔히 보이는 결말에 왜 난해한 해석이 등장하는 것일까.소설의 시작 천 '추천사'도 소설 끝의 '작가의 말'도 모두 뼈가 있는 이야기로 자식을 가진 부모라며 깊이 느낄 것이다. 아니 내 아이에게만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상흔이 되었고 그 상흔에 합당한 법이 정당하게 해석되었다면 고통의 무게는 덜할텐데 희망의 날개를 왜 꺾어 놓는지.지윤이네 가족이 고통에 갇혀 몸부림치기 보다는 희망으로 한 발 한 발 옮겨 놓고 있어 더 눈물나는 소설이었고 소설로만 존재한다면 하는 씁쓸함이 남는 소설이었다.아이는 범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어떤 이유 목적으로라도.영화를 보러 가는 길은 용기가 필요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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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지우고 남은 것들 - 몽골에서 보낸 어제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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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드' 두 권의 책은 몽골 초원의 매서운 바람과 함께 거친 초원에서 살아 남기 위한 유목민의 거친 호흡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흡입력 있게 읽어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는데 이 책은 소설 '조드'가 나오기까지 몽골을 열 한 번이나 다녀 온 저자의 몽골에 대한 이야기와 소설로 다시 잉태되는 그 과정을 '좌담'식으로 풀어 놓은 이야기다.초록의 지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곳, 그곳에서 삶의 기원을 찾듯 바람 속을 헤치고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 듯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원시적이면서 짙은 자연의 냄새가 풍긴다.

 

어떤 형태의 삶에서나 작은 허물들이 조금씩 쌓이다 보면 큰 재앙이 온다.자본주의에서도 인플레이션,디플레이션 같은 것이 대공항을 낳듯이 유목민도 '조드'라 하는 대재앙을 만났다. 초원에서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단위 면적당 양의 분포가 적절한 개체로 유지돼왔다.

 

※조드란 초원 건조 지대에서 발생되는 추위로 인한 재앙.조드가 닥치면 동물 수천만 마리가 한꺼번에 죽는다.

 

영화 <투야의 결혼>에서 보면 내몽골의 척박한 삶이 모래 바람과 넓는 초원에서 견디며 자연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여인내의 강인한 삶이 잘 그려졌는데 에세이를 읽는 동안 그 영화가 오버랩되면서 좀더 가까이 느껴진다. 에세이에도 어느 가정의 '결혼식'에 참여를 하여 몽골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써 노았기 때문일까. 순박한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지으며 수수한 차림으로 결혼식을 치르는 결혼식 장면 사진이  영화 '투야의 결혼'과는 그들의 풍습을 알게 된 듯 하다. 영화 '투야의 결혼' 에서는 남편이 다리를 다쳤던가 해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그야말로 살기 위하여 일꾼과 같은 남편이 필요해 결혼을 하는 '투야의 결혼'에 대하여 몽골 풍습과 함께 척박함을 보여준다.'투야의 결혼'이 어쩌면 더 서민적인 몽골인들의 결혼식을 더 잘 보여주긴 했겠지만 광활한 자연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이야기는 같다.

 

누가 한 번 다녀가고 나면 언제 또 사람을 만날지 기약이 없기 때문에 어느 곳의 풀이 좋고 물이 많으며 다른 소식은 더 없는지 묻고는 정성껏 숙식을 제공한다. 그 가난 속에서 아직도 칭기즈칸 시대의 주식이었다는 야생 타르박을 사냥해 13세기식 삶을 연명하면서도 자기 구역에 들어온 사람의 안녕은 반드시 지켜낸다.

 

정착이 아닌 게르에서 유목민 생활을 하는 그들은 광활한 자연을 욕심 부리기 보다는 모두가 나누고 공유한다. 그렇기에 만나는 사람이 반갑고 이웃이고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런 삶 속에서도 자신들의 몸에 베인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내며 지금까지 오래전 삶의 방식대로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조드'는 분명 자연 재앙이다. 초원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축은 전재산인데 조드가 닥친다면 전부를 잃는 것인데 그 속에서도 살아내는 단단함을 읽어낸다.

 

글로 초원의 거친 바람을 어찌 다 읽어내고 그들의 여유로움을 어찌 다 느낄까마는 차가 웅덩이에 빠졌을 때 서두르기 보다는 넘어진김에 쉬어가듯 웅덩이에 빠진 길에 흙탕물로 뒤덮힌 차를 세차하는 여유로움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런 여유로움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내는 그들의 자연친화력이 아닐까 삶은 서두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거스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삶의 발자취를 찾아 다니는 길에서 걸음마를 떼면 제일먼저 말잔등에 오른다는 것처럼 '세살' 에 말을 타는 기마민족으로 평원을 평정한 유목민의 질긴 삶을 엿보는 시간이 아직 몽골의 바람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잠시나마 마음이 여유롭다. 이 책을 읽고 소설 <조드>를 읽으면 더욱 실감적으로 와 닿을 것 같다. <조드>를 먼저 읽어서 다시금 소설을 생각해내는 시간이 되었지만 말이다.

가을이라 그런가 '몽골에서 보낸 어제'라는 글이 기분 좋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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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달리는 스파이들 바다로 간 달팽이 8
사카키 쓰카사 지음, 김미영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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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에게도 실망을 많이 하기도 하고 친구에게도 실망을 하기도 한다.그런 아이들이 서로 의지하듯 '별빛'이 되어 서로에게 힘을 주며 힘든 전쟁터(고등학교시절)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고군부투 하는 이야기,그것도 천문반이라는 동아리 활동으로 정말 서로 어울리지 않는 아이들이 점차적으로 하나가 되어 은하수처럼 세상을 어우러져 흘러가는 법을 터득해 나가는 따사로운 이야기는 자신들의 일이 '스파이' 라도 생각을 해서인지 더 재밌고 이쁘게 다가온다.

 

거봐, 인생은 스페셜하고 특별하다니까.

그렇지 않아?

 

천문부 부장이라고 해서 '붓치' 그리고 '기' '조' '게이지'는 천문부에 좋아서 들어 온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천문부를 택하게 되었고 이곳은 다른 동아리와는 다르게 신입생이 들어오질 않는다. 그래도 천문부를 맡은 다시로는 불평 한마디 없이 아이들과 잘 이끌어 나간다.아니 아이들에게 이끌려 간다고 봐야하나.암튼 다시로가 당직을 하는 날엔 그들은 옥상에서 별을 관측하며 캠핑을 하듯 서로 각자 가져올 수 있는 재료를 가져와 먹거리도 해결하고 커피도 내려서 마신다. 음식을 해서 천문부 동아리 선생인 다시로에게도 나누어 주고 맛난 커피는 커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기가 내려주어 전문가가 내려 준 커피와 같은 맛을 나누며 별을 관측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대신 '코드명'을 정해서 부르며 자신들을 '스파이'라고 한다.그러다 그들의 눈에 처음 들어 온 것은 학교 뒤뜰에 있는 연못에서 때 아닌 반딧불이가 나타난 것,왜 반딧불이가 갑자기 나타나고 체육부 담당 선생은 그곳을 출입금지를 시켰을까? 그들은 별을 관측하러 올라갔다가 반딧불이가 반짝여서 내려가 확인을 하며 그것이 반딧불이가 아닌 '핸드폰'의 진동이란 것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건져낸다.

 

사건 하나를 해결하고 나니 더욱 천문부는 의문에 쌓인 것처럼 겉으로는 평온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그들 내부는 점점 서로를 알아가며 학교생활에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된다. 학교생활과 더불어 개개인의 현재 속사정이 드러나면서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전부는 아니고 그들 나름 속사정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있음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그들은 서로를 '별빛' 삼아 서로에게 빛을 주면서 어려움도 이겨내고 쓰러지지 않고 현실을 잘 버티고 나간다.아니 견디어 나간다. 짙은 화장과 연앤인 같은 옷을 입는 '기' 그러나 그녀에게도 현재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던,평범하고 잘 나가던 아버지가 쓰러짐으로 해서 집안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아버지는 알콜중독이 되었고 엄마는 아버지가 무서워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언니는 집을 나갔다.그녀도 독립을 꿈 꾸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부모님은 그녀가 놀다가 늦게 들어 오는 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커피점에서 일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며 '아버지'곁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한다. 짙은 화장밑에 숨겨져 있던 푸른 멍은 아버지에게 맞은 자국이었던 것.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이고 싶다. 게이지는 게이지대로, 조는 조대로, 기 또한 기대로 받아 들이고 싶다. 자유를 얻는 열쇠는 분명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을 터이니.

 

그저 별 볼일 없이 들어 온 천문부였지만 그들은 한번 두번 야외관측을 하면서 점점 두터운 우정을 쌓아가며 서로의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자신들에 닥친 문제를 '스파이'가 되어 파헤쳐 해결하면서 힘든 시간을 이겨 나간다. 기나 조에게 유머를 발휘하는 게이지도 그 속사정을 보면 그리 좋지만은 않지만 친구들이 있어 잘 버티고 나가는가 하면 붓치 또한 그의 길을 계획하고 조도 자신의 길을 계획하며 열심히 공부한다. 그들이 학교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일과 성인으로 이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계획하며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리는 모습이 스파이생활처럼 재밌게 잘 그려졌는가 하면 부모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며 독립을 하는 모습이 더 대견하게 그려져 읽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진다.

 

우리와는 다른 학교 풍경이 그려져 학교 수업이 끝나고 야간자습과 학원에 시달리며 꼬박 '공부'를 위해 하루를 모두 쓰는 우리 아이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뜻에 맞게 자신을 설계하며 꿈을 꾸고 꿈을 향해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이라 그런가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씁쓸하기도 했다. 천문부 활동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더 준 네 명의 천문부원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길에서 꿋꿋하게 꿈을 향해서 나아간다. 삶은 고등학교 때분만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 다 전쟁터와 같다. 상처도 입을 수 있고 실패도 할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고 모든 경험이 어우러져서 인생이라는 그림을 그려 나간다는 것을 그들은 배우고 있으며 가정 환경이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해도 삶을 포기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꿈을 그리는 아이들이 대견하다.부모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 설계를 하며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하여 힘차게 달리는 네 명의 스파이들을 서로의 위치에서 밝게 빛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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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지구의 과거 3부작 1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고호관 감수 / 단숨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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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SF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소설' 이라고 해서 기대도 되고 생각해보니 중국 SF는 처음인 듯 해서 더 긴장하며 읽게 된 듯 하다. 내가 요즘 찾았던 [삼체] 는 부추와 비슷한 채소로 항암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것이라 그런 것일지도? 라는 생각을 가져 보았지만 '삼체' 는 '태양이 세 개가 존재하는' 그런 세계를 '삼체 세계'라 하고 '삼체 문제는 질량이 같거나 비슷한 물제 세 개가 상호 인력의 작용 아래 어떤 운동을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전 물리학의 중요 문제이고,천체 운동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어 16세기 이후 계속 관심을 받았다. 오일러,라그랑주 및 근대 이후 학자들이 삼체 문제에 관한 특수해를 찾아냈다.' 라는 소설에서 나오는 '삼체 문제' 각주를 옮겨 보았는데 이 소설은 과학이 등장하여 과학자와 이론도 많이 등장을 한다.

 

소설에서 '삼체' 는 '삼체 세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삼체'라는 컴퓨터 게임에 들어가 중국역사와 과학이 접목이 된 게임 속에서 희귀한 체험을 하며 레벨업을 해 나가는 상황이 펼쳐진다. 왕먀오 박사가 '삼체'라는 게임에 로그인을 하게 된 것은 '과학 경계' 회원들이 자살이나 그외 계속적으로 죽음으로 치닫는 일들이 발생하고 얼마전 그도 보았던 '양둥'이라는 과학자가 자살을 하게 되면서 그도 이 사건에 어쩔 수 없이 끼어 들게 되고 양둥과 함께 어울렸던 인물을 만났다가 그 자리에서 '삼체'라는 게임을 알게 되고 자신도 그 게임을 체험하며 중국과거역사와 과학이 접목된 희한한 세계에 빠져 들게 되면서 고난도에서 살아 남아 과학 경계 회원들,삼체 회원들과 만나게 된다. 한편 양둥의 남편은 양둥의 엄마 예원제를 만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중국 문화 대혁명 당시에 자신의 눈 앞에서 잔인하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편에 어머니도 앞장섰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은 그녀가 '홍안' 이라는 기지에서 일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남편사이에 양둥을 가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홍안이라 곳은 무엇을 했던 기지일까?

 

"우선, 삼체인의 탈수 기능은 진짜입니다. 변화무쌍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들은 언제든 자기 몸 체내의 수분을 완전히 배출해 마른 상태로 변함으로써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열악한 기후를 피합니다."

 

우리의 역사에도 해가 두 개가 나타나 역사가 바뀌는 이야기를 들었다.개기일식인가를 놓고 두 개의 해로 보았던 조상들은 그것을 '불운'으로 풀이를 했다. 좋은 일보다 나라안팍으로 나쁜 일들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왕이 곧 해, 나라에 해는 하나여야 했는데 두 개가 되니 불운일 수 밖에.그렇다면 태양이 세 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삼체라는 게임에서는 항세기와 난세기 항세기가 이어진다고 보았다. ' 태양 운행이 불규칙한 것은 우리의 세계에 태양이 세 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상호 인력 작용 아래 예측할 수 없는 삼체 운동을 합니다. 우리의 행성이 그중 한개의 태양을 따라 안정적으로 운행할 때가 바로 항세기입니다. 다른 한 개 또는 두개의 태양이 일정한 거리로 들어오면 그 인력 때문에 행성은 기존 운행에서 벗어나 세개 태양의 인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불안정하게 움직입니다. 이때가 난세입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의 행성은 다시 한 개의 태양에 잡혀 잠시 안정적인 궤도를 돕니다. 다시 항세기가 오는 것이죠.' 게임 '삼체' 속에서 항세기와 난세기는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사람들은 그외 맞게 '탈수'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하지만 잘못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예원제와 추종자들은 왜 삼체 세계를 접하려 할까?

 

"지금 여루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게임 삼체는 인류를 배경으로 삼체 세계의 발전사를 시물레이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플레이어들에게 익숙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진짜 삼체 세게와 게임은 차이가 큽니다. 하지만 세 개의 태양은 진짜입니다. 이것이 삼체 세계의 기본 자연 구조입니다.

 

이것은 예원제의 복수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홍안기지에서 나라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이세상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우주의 생명체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홍안기지에서 우주 생명체에게 그녀의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돌아 온 답은 “경고한다. 대답하지 마라. 대답하는 순간 그곳의 위치가 파악되어 당신들의 세계는 점령당할 것이다.” 홍안기지가 비밀기지였던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곳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린 줄 알았는데 그녀의 복수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이어졌던 것이다. 과거 문화 대혁명시대에 있었던 일을 오랜 시간이 흐르고 계속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무언가 더 큰 힘을 얻으려고 했던 예원제, 그녀는 결국 모든 것을 잃듯 그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듯 한다.소설에서 '삼체'라는 게임이 보여 주었던 가상의 세계가 더욱 매력적으로 작용을 한 듯 하다. 그 속에서 작가가 표현하려는 SF를 표현해 낸 듯 하다. 그것이 과거역사와 과학이 접목되어 더욱 매력적으로 작용을 하면서 예원제 그녀의 복수가 더 설득력 있게 표현된 듯 하다.

 

내가 약한 부분은 다른 것도 많지만 '과학'이라 읽기에 힘들줄 알았는데 오히려 재밌게 읽었다. 가상 게임세계인 '삼체'가 재밌게 다가왔다. '탈수' 하면 바닥에 누워 자신의 몸에서 수분을 모두 뽑아내 스펀지와 같은 몸이 되어 돌돌 말아 둘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온다면. 그런 탈수된 자들이 다시금 '입수' 하면 입수하여 다시 몸에 수분을 공급받아 다시금 원상태로 돌아 오는 시대로 가려면 과학이 얼마나 발전해야 할까? 예원제의 복수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그들이 '삼체 세계'를 원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그녀의 복수이기 때문에 중국 문화 대혁명도 등장하고 역사와 과학이 교묘하게 씨실과 날실로 엮이면서 한벌의 옷을 만들어 냈따. 결말은 조금 섭섭하게 마무리 된 듯 해서 아쉬웠지만 읽는 재미가 있다.거기에 중국 SF를 맛보았다는 것에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다. 역시나 그들의 역사는 이렇게 맞물려도 재밌다. 공자 맹자 갈릴레이 뉴턴이 함께 등장하는 게임도 재밌을 듯 하다. 처음 맛 본 중국 SF 재밌게 읽었다. 조금 두꺼웠지만 약간은 추리적인 것도 있어 재밌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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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기야마라는 간수이며 검열관이 사체로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던 이야기는 폭력간수로 알려진 그가 누구에 의해서 처참하게 살해 되었는가를 어린간수병인 유이치가 조선인 죄수중에 최치수라는 인물을 지목하면서 일단락 되는 듯 하였다가 스기야마의 기록을 살펴보던 유이치는 그가 확실히 아니라는 무언가 스기야마의 죽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전쟁중이고 이곳은 후쿠오카 형무소며 그는 일개 간수병이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말단이기에 '먹잇감'에 불과한 위치이다. 그래도 이 사건에 자꾸만 호기심이 생기는 유이치,정말 스기야마는 소문처럼 폭력간수였을까?

 

모든 활자는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영혼은 바이러스처럼 읽는 사람을 감염시킨다. 독서는 치명적인 중독이고 문장의 세례를 받은 자는 평생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책과 글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중독자이고 의존자다. 읽지 않을 책을 끼고 다니고, 책을 잡지 않은 손을 공허해하며 오래전에 읽은 구절을 되새김질하듯 중얼거린다. 나는 그런 병증을 겪었고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독은 아마도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죄수들에게 폭력을 늘상 휘두른다고 알고 있던 간수이며 검열관이었던 스기야마의 행적을 좇다보니 그는 활자중독증에 간서치다. 그런가 하면 그는 한방중에 별을 보며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정말 폭력을 휘둘르고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을까? 소설은 글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영향에 대하여 전쟁,형무소,죄수 들의 이야기를 통해 펼쳐 나간다.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살아야 했던 스기야마는 배우지를 못했지만 누구보다 글에 대한 냉철함과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어 '검열관'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윤동주라는 감성이 풍부한 시인을 만나게 되면서 시의 마력에 훔뻑 빠져 들기도 하고 윤동주라는 인물을 통해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섭렵하면서 자책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동주를 보호하고 감시하게 된다.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무언가 정말 철저히 잘못되었다.그는 감성 풍부한 시인인데 왜 그가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밖에 나가 그의 울림 가득한 시가 시집으로 나와야 하고 많은 이들이 읽기를 바라지만 그는 갇혀 있어 시작도 맘대로 못하지만 그나마 그의 처녀시는 형무소 담장 밖으로 나가질 못한다. 그저 불쏘시개로 쓰일 뿐이다. 그런 그가 그의 시를 형무소 담장 밖으로 보내기 위한 묘안을 생각해 낸다.연날리기. 교묘하게 연에 그의 시를 써서 담장 밖으로 날려 보내고 그의 연을 소녀에게 꼭 보관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런가 하면 간호사 미도리는 스기야마가 조율해준 피아노를 연주하여 죄수들과 합창을 무대를 준비하는데 합창곡은 베르디의 <나부코> 중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곡>이다. 피아노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조율하고 감성 풍부한 시와 문학작품을 몰래 몰래 읽으며 책을 사랑하는 스기야마가 정말 밖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폭력간수일까? 그가 왜 폭력간수가 되어야 하는지 의문은 풀린다. 소장은 제3수용동 조선인을 생체실험을 한 것이다. 전쟁중이라도 그렇지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다니.하지만 그런 인간도 있고 스기야마처럼 휴머니티가 흐르는 간수도 있다. 그가 죄수를 폭력적으로 다룬 것은 생체실험에서 그들을 살려내기 위한 살아남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그렇다면 그를 도대체 누가 죽였단 말인가. 범인으로 지목된 최치수마져 교수형을 당했다고 하는데. 유이치는 자신이 지목한 최치수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범인은 색출하지 못했지만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럼으로 인해 스기야마처럼 윤동주라는 인물을 잘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면 자신의 말로도 스기야마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가장 아름다운 건 살아 있는 거야. 더럽고,참혹하고, 지옥 같은 이세상에 살아남는 거지. 천사처럼 순수하고, 영웅처럼 용감하게 죽기보다는 악마처럼 악하고 야수처럼 비열하게라도 살아남아야 해. 악마처럼 간악하게 살아남아야 천사처럼 착하게 죽을 수 있으니까. 살아남아야 더러운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고,악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상처 입은 사람들이 위안받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1편에서 밝혀졌던 이야기를 2권에서는 왜 그랬는지 반전과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면서 그야말로 스기야마나 유이치와 같은 휴머니티가 그려진다. 전쟁이란 것이 누가 일으키고 누가 피해자인지 그들은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살아남는 자로 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간수건 죄수건 모두가 살아 남기 위하여 이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 형무소에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동주 또한 날마다 출소할 날만을 고대하며 하루하루를 견디어 나가지만 그의 몸속에 침투하기 시작한 식염수는 그를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그가 기억했던 아름다운 문장들을 지워 나간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하늘 별 바람 시' . 아니 잊지 않고 그의 뇌가 마지막까지 간직하는 단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그의 청춘과 시를 앗아가고 만다. 스기야마와 동주는 어느 별에서 만나 시를 논하고 있을까. 동주에게서 희망을 얻었던 이들도 동주의 기력이 쇠하면서 형무소는 그야말로 암흑처럼 변해가고 유이치는 후쿠오카 형무소의 잔혹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스기야마부터 윤동주까지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한다.

 

살아 남는자가 아름다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남아 남았다는 부끄럽다.

스기야마를 폭력간수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겉모습일뿐 그는 그야말로 속은 부드럽고 누구보다 글을 사랑하고 활자를 사랑한 사람이며 휴머니스트였다. 너무 강직한 휴머니스트였기에 그의 생은 꺾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토록 자신의 생을 다하여 지켜주고 싶었던 동주마져 싸늘한 죽음으로 형무소를 나가게 되고 그들이 건설했던 지하 도서관은 곰팡내가 나지만 아름다운 공간이었는데 돈과 욕망에 불타는 이들에 의해 짓밟히고 만다.글고 서로를 조율했던 스기야마와 동주, 소설은 동주보다는 '스기야마'라는 인물을 통해 글이 가진 위대함에 대하여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 힘의 원천이 된 것이 천재적인 시인 동주가 있는 것이다. 소설은 어떻게 보면 그들의 참회록이며 그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자화상이다. 이야기 중간 중간 나오는 윤동주의 시와 그외 시는 좀더 교묘하게 이야기에 빠져 들수 있는 안전장치처럼 쓰여 더욱 재미를 더했는가 하면 소설을 읽으며 시집을 읽는 느낌도 주었다.'시는 글의 사원이다' 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참회록> <자화상> 등등 윤동주에 시가 더욱 느낌을 업 시켜주었다.시를 사랑하고 글을 사랑했던 활자중독자였던 살아 남으려 했던 이들은 갔지만 유이치는 살아 남았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부끄럽다. 글로서 저장된 기록에서 그들의 시간을 읽었던 자신이 살아 남았다는 것이 부끄럽다.

 

저자의 책을 읽다보면 아름다운 문장들이,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너무도 많다. 몇 번을 곱씹으며 읽어도 좋을 듯한 문장에 취하고 책벌레이며 활자중독자이며 시인인 그들이 나누었던 인간적인 나눔이 윤동주의 시가 겹쳐지며 더 아름답게 조율이 되었다. 거기에 형무소에서 펼친 합창에서 조선인 죄수들이 부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곡' 과 어우러져 더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그 내면에 인간의 더럽고 추한 욕망이 밑바탕에 깔리며 더욱 전쟁의 잔혹함을 그려낸 듯 하다. 겉모습은 나약하고 비쩍 말라 눈길을 끌지 못하는 동주지만 형무소에서 그가 일으킨 파장은 크고 멀리 갔다. 그를 내세우기 보다는 폭력간수 스기야마를 내세웠기에 그가 더 영롱하게 그려진 듯 하다. 윤동주 뿐만이 아니라 '별'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 하고 어머니를 생각한 이들은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한 장의 엽서는 '희망'이고 기대고 비빌 수 있는 언덕이었다. 전쟁도 아름다운 문장 앞에서는 나약한 문장의 힘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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