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라 문서
파울로 코엘료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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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할까? 전쟁이 바로 코앞에 닥쳐 왔다면 무엇을 해야할까? 해야 할 것은 많은것 같은데 아무것도 못 할듯도 하고 무엇을 해야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시간을 다 보낼듯 하다. 전쟁이야기나 무슨 큰 일이 나기만 해도 '사재기'를 하는 일이 뉴스를 장식하기도 하는가 하면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면 폭동이 일어나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만들기도 하는 일들이 가끔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래전 십자군 전쟁이 발발 하기 전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 앞에 닥친 전쟁은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흔들어 놓았을까?

 

'아크라 문서'는 1974년 영국의 고고학자 월터 윌킨슨이 이집트에서 고대 문서를 발견한다.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로 쓰인 이 ‘아크라 문서’에는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콥트인 현자와 예루살렘 사람들 사이에 오고간 대화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콥트인 현자에게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가지는 마음을 이야기 한다. 전쟁이 다가 온다는 것은 '삶의 끝에 이르렀다'라고 생각을 하고 모든 것이 파괴되리라 생각을 하고 모든 것을 놓아 버리듯 한다. 하지만 콥트인 현자는 '오늘이 삶의 첫 날인 것처럼' 그렇게 다시 시작하라고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는 말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고. 내일 당장 멸망한다고 한다고 오늘 할 일을 하지 않고 앉아서 멸망만 기다린다면 어떻게 될까.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없애 버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며 가족을 해채시키기도 하는가 하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전쟁 후는 으머것도 예견할 수 없는 것이다.자신이 살아 있을지 죽음에 이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랑이 열정이 생겨날까? 그런가하면 우아함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현자는 이야기 한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오늘도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도 오늘처럼 현재를 살아가라고 이야기를 한다.

 

싸움에 져본 적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인생에서 승자가 될 일도 없으니

 

패배자란? 어떤 일에 도전을 해서 승리를 하지 못한 자가 얻는 패배는 그야말로 도전을 해 보았기에 얻을 수 있는 값진 경험이다. 실패도 경험이라고 했다. 패배도 경험이다. 도전을 해 보았기에 누릴 수 있는 값진 경험인데 이 또한 도전을 하지 못했다면 다음 싸움에서도 승자나 패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도전을 한 자가 다음 기회에도 도전을 하는 것이다. 늘 망설이고 있는 사람은 도전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패배감도 느껴보지 못하고 승리감도 느껴보지 못한다. 도전이라는 실행에 옮길 때에 얻을 수 있는 자만이 느끼는 느낌을 그는 자연의 대순환을 예를 들어 말을 한다. 겨울에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은 패배일까? 자연의 대순환 속에는 승리나 패배감은 없다.'변화'를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전쟁이 일어난다면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자연의 대순환처럼 받아 들이는가 하면 아직 닥쳐오지 않은 것을 미리 패배감에 젖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고독이란, ' 고독이 없으면,사랑은 그대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인간이란 삶이 존재하는 한 시작부터 끝까지 고독이 함께 한다고 본다. 고독이 있어야 사랑도 오래 머문다는 말이 여운을 남긴다. 고독을 두려워 하고 사랑을 잃을 것을 두려워 한다면 사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신의 영역이고 고독은 인간의 영역이라고 한다. 인간이 감내해야할 부분이라면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져 내리듯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이다. 어느 소년은 아직 어려서 전쟁에 나가지 못한다고 분해한다. 자책에 빠진 소년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콥트인 현자는 말한다.자신을 사랑해야만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자존감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목숨줄을 놓아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언가 자신들도 존재감을 느끼고 싶은데 큰 전쟁을 앞두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소년은 어떤 마음을 가질까? 그런 소년에게 자신감을 주고 존재감을 가지며 사랑하라 말한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이다. 들판에 피어 있는 꽃 또한 꽃을 피지 않았을 때에는 그 존재감이 없지만 꽃이 피고 나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꽃과 함께 향기를 날린다면 그때서야 벌과 나비의 발길을 붙잡는 존재감이 드러나며 그냥 잡초가 아니라 비로소 '꽃'이 된다. 어느 시인의 싯귀처럼 누군가 이름을 불러줘서 꽃이라는 의미가 되듯 활짝 피어남으로 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나 꽃이나 때가 있는 것이다.아직 이르다면 기다리는 것이다.자신에게 맞는 기회가 오기까지 말이다.

 

포기하지 말기를, 사랑은 열쇠고리 맨 끝에 달린 마지막 열쇠다. 그 열쇠를 써야 비로소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전쟁이 닥쳐 온다고 하니 모든 것을 포기하듯 자포자기하여 좋은 이야기도 듣고 싶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듣고 싶어한다. 전쟁이라고 폐허만 있을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도 있고 그리움도 있고 우아함도 있다. 인간이 살아 남는다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고독이며 패배감이나 아름다움 등 모든 것을 다 느낄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다. 전쟁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 속에서 변화를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변화를 기꺼이 받아 들이는 사람도 있다. 전쟁이란 생이 있을 수도 있고 사死도 있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 한다고 죽음에 이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게 닥친다면 기꺼이 맞아 들이라는,인간은 생이란 것을 시작했다면 죽음 또한 반드시 한번은 가는 길이기에 각오를 하고 있다면,아니 전쟁이라는 것이 닥쳐 오기에 어쩌면 죽음이란 더 일찍 맞게 될지도 모른다. 피한다고 죽음이 피해가는 것도 아니고 닥친다면 기꺼이 받아 들여라.

 

삶에 대해 '모든 게 늘 똑같고 변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라고 불평하지 않으리라. 오늘이 내 생의 첫날인 것처럼,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리라.

 

지금처럼 정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풍부한 때도 아니었기에 전쟁이 가져 올 후폭풍에 사람들은 더 막연하고 막막했던 것 같다. 문명이 발달 했다고 죽음이란 것이 나를 피해가는 것도 아니고 누구 죽고 누가 살게 될지 모르는 것이 전쟁이다. 그런 상황에서 현자에게 사람들은 '희망'의 말을 듣고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지 않았을까? 현자가 전하는 말을 어느 일부분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한 것이 '아크라 문서'라고 할 수 있다.전쟁이란 삶보다 희망보다 죽음과 패배감을 더 안겨주는 발발직전에 그들은 희망이란 단단한 철갑으로 무장을 하고 오늘을 살고 내일도 맞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결과가 두렵다고 회피할 수 있는 전쟁도 아니고 삶을 두 동강 낼 것도 아니라면 하루를 살아도 삶의 방향과 과정을 올바르게 가지며 살아갈 일이다. 전쟁이 닥쳤다고 우왕좌왕하며 삶의 길을 잃고 헤매인다면 그 삶은 난파하고 말 것이다. 방향을 정하고 지금 바로 노를 힘차게 저어 나가야 전쟁이라는 폭풍속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삶을 노아 버리기 보다는 삶이라는 것을 꽉 움켜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라 한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말이다.그것이 전쟁을 앞 둔 이들에게 만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현자의 가르침인 듯 하다. 삶의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는 이렇게 또 한의 삶의 연금술과 같은 이야기를 쏟아 내며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다. 현자의 목소리를 등대 삼아 현재의 너울을 이겨내면 다음에 오는 너울은 좀더 단단하게 버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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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여행하다 - 공간을 통해 삶을 읽는 사람 여행 책
전연재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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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무엇일까? 집이란 있는 자에겐 여유지만 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장만하기 위하여 힘든 시간을 감내해야 하기도 하고 오랜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모두가 원하는 집은 다 다르고 사는 풍경 또한 다 다르다. 현대인들은 아파트에 많이 살아가지만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라고 해도 안으로 들어가보면 사는 사람에 따라 집은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요즘은 '집값대란' '전세대란' 등 정말 집에 대한 경제에 관한 말들도 많이 나오고 있고 돈이 없는 이들은 집을 담보로 하우스푸어가 되기도 한다. 집이란 가지고 있으면 안정이지만 없으면 큰 부담감으로 다가오는데 건축가가 보는 '집'이란 아니 그보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 친구의,친구의 친구의 집을 찾아 호스트 생활을 하는 저자는 그들의 집에 손님으로 머무르기 보다는 함께 음식을 만들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잠시 집의 일부가 되어 보는 경험자로 집이 주는 단순한 느낌 보다는 좀더 깊게 파고 들어가 집을 이야기 한다.

 

어느 날 저녁,리암이 강에서 주워온 사탕수수를 깎기 시작했다.그들은 대부분의 물건을 직접 만들어 썼는데,강에서 채집해오는 사탕수수는 그들이 가장 즐겨 쓰는 자연재료였다. 그는 나무 스푼을 즐겨 만들었는데, 집에서 쓰기도 하지만 오렌지 껍질에 담은 초콜릿 푸딩을 팔 때 주곤 한다고 했다. 덕분에 이 후식을 먹고 나면 오렌지 껍질 그릇은 땅으로 돌아가고, 사탕수수 스푼은 집으로 가져가 다시 쓸 수 있께 된다.작은 손칼로 한참 동안 나무를 깎고 곱게 사포질을 하더니,리암이 그것을 내게 건네며 특유의 나지막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위한 거야."

 

이 책을 읽다보니 책에 관한 편견 같은 것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 너무 다양한 집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이들의 삶을 잠깐 들여다보면서 좀더 자유로운 삶을, 집을 소유하기 보다는 편하고 자유롭게 머물기 위한 공간으로 놔두는 것은 어떨까? 아니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집은 '소유' 의 개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집이란 가족이 머무는 공간이기에 모두에게 편해야 하고 그 집에 사는 사람에 맞게 공간 구성을 해야겠지만 현대는 집이란 것이 투자의 목적으로도 이용되기도 하기 때문에 머루르기 보다는 잠시 머무르는 공간으로 이용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해 임대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면에서 저자가 보여 준 집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유와 그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만의 특징이 너무도 잘 드러나 여러 공간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의 다른 취향과 생활 방식을 살아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방식이다. 그저 살아보았다. 나는 옮고 그름,좋고 나쁨의 채에 거르지 않고 그 다름을 그저 살아보았다. 그러다 보면 한두 가지쯤은 내 삶에 적용하고 싶은 것을 만나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나는 삶의 지혜들을, 색채들을, 맛을 내 안에 담아나갔다.

 

집을 여행한다는 것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인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일까 역사적 문화적 여행지를 여행하는 것보다 더 살아 있는 이야기를 접하니 재밌고 잔잔하면서도 그 속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빠져 들게 되는 담백함이 있다. 나도 처음 타인의 집에서 자고 먹고 생활한 기억은 아마도 방학 때면 친척집에 간 일일듯 하다.외가댁이네 고모네 작은집등 친척집이었지만 우리집이 아닌 다른 집에서 먹고 자고 생활한다는 것은 거북하고 잠자리가 불편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못 먹고 머무는 동안 힘들게 생활하는 내 자리가 아니면 거북하여 여행하는 것을 어릴 때는 몹시 싫어했던 듯 하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어느 곳에서도 잘 견디며 그런대로 잘자고 먹고 여행을 즐기게 되었다. 대부분 잠자리는 '민박' 보다는 다른 숙박시설을 이용했으니 다른 이들의 삶의 공간을 구경하기 보다는 풍경여행을 많이 한 듯 하다.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이런 여행도 참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친구에서 다른 친구로 그 친구에서 또 다른 친구로 이어지며 다른 나라 다른 공간을 만나는 여행이 주는 재미,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면서도 집은 그사람에 대해 말해주기도 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루는 작업장으로 가는 데이비드를 따라나섰다...... 나중에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 일이 자기에게 왔다고 답했다. 생에서 대부분의 일들이 그랬노라고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평화로웠다. 우리는 생에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곤 하지만 사실 삶의 많은 부분들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다.가족이 그랬고, 삶과 죽음이 그랬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진정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취향이 다르고 생활 방식이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준다. 집에 구속되어 살아가기 보다는 자신에게 맞게 집이란 공간을 나누며 살아가는 다양성에 고정관념의 벽이 무너져 내린다. 집이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과 벽으로 나뉘고 문으로 공간을 마무리 해 놓는데 어느 집은 '문'이 없다. 멋지게 꾸며 놓은 집에 문이 없다니, 집을 다 짓고 마무리 단계에서 문을 달아야 할 시점에서 재정이 바닥난 것이 그들의 생활에 변화를 주었다.문이 없는 집이 그렇게 탄생했다는데 이상한 듯 하면서도 나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은 생각을 해 보았다. 가끔 살면서 필요 없는 문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분양을 받고 인테리어를 조금 더 했다.그러다보니 필요 없는 문이 있어 떼어내 버렸다. 그렇게 우리집에서 몇 개의 문이 사라졌고 다른 집도 마찬가지로 인테리어를 하며 불필요한 문을 떼어내게 되었고 아파트 밑에는 그런 문들이 수두룩하게 쌓이게 되기도 했다. 꼭 공간을 나누어 문을 달아야 할까? 방음이나 난방을 위해 필요한 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문도 분명 있다.문으로 인해 가족 구성원 간에 벽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사춘기 때 아이들은 방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자신들의 공간을 부모에게 오픈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부러 문을 조금 열어 놓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때에는 문이 없었더라면 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부터 방문을 달지 않는다면 가족간에 좀더 자유로운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어떤 집이 좋은 집이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그 속에 사는 '좋은 사람'을 만난 이야기에 더 다가가게 된다. 물론 좋은 집이 주는 느낌도 있지만 집만 좋고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 까칠하거나 욕망만 좇아가는 사람이라면 재미가 없을텐데 그들은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으며 생활 방식 또한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취향이 느껴지며 현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다. 'No dream, No Life.꿈이 없으면 삶도 없어.' 라는 말처럼 꿈과 삶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공간의 일부분처럼 그들의 이야기와 생활에 젖어 본 이야기는 우리하고는 아니 내가 많이 닫힌 생각과 닫힌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누구든 자유롭게 받아 주고 아무런 연고 없이 갑자기 누구의 친구라는 이유로 방문을 해도 반갑게 맞이하며 점심을 권하고 잠자리를 권하는 그런가하면 주인이라는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집이라는 그 속에서 함께 머무르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한 이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이에게 우린 너무 벽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대하며 살아 온 것 같은 기분.내것을 너무 중시하며 집이란 것을 소유물로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릴 적 부모님들은 '집에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야 그 집이 흥한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며 대문을 열어 놓고 사시듯 했다. 옆집에 누가 와서 연장을 빌려가도 밥 때에 와도 마다하지 않고 대했던 정은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의 변화로 인해 이웃에 벽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거리에 식탁을 펴고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사진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그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 들여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다양한 삶과 생활 방식 속에서 내것에 대한 문을 걸어 잠그기 보다는 타인과 나누는 삶,집으로 거듭나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저자의 독특한 삶만큼 글 또한 감성이 톡톡 발산3되면서도 이 한 권으로 저자의 집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느낌을 가졌다. 다른 책들에도 귀 기울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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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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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문학상 수상작 '홍도' 덕분에 다시금 최명희의 <혼불>을 읽고 싶어졌다. 오래전 최명희의 <혼불10권>을 어렵게 구해서 읽게 되었는데 미완성의 '혼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이야기 빠져 있었다. 그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쓰여졌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야기의 시작에서 멈추어 버린 소설이지만 10여권에 담긴 이야기의 힘은 대단하다. 그런 소설의 문학상 작품인 '홍도' 역시나 주인공은 여자인 '홍도'이다.그녀는 누군인가? 역사에 기록된 것은 정여립이란 사람에 대해서이다. 기축옥사, 역사는 그를 역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선구자였던 그는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을 함으로 생을 마감하고 그의 누나인 홍도의 할머니도 홍도의 아버지인 리진길도 모두 역적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지만 리진길의 딸인 홍도는 정여립을 따르던 '자치기'라는 인물 때문에 목숨을 구하게 된다. 자치기는 양인도 아닌 그야말로 천민과 같은 인물이지만 정여립의 곁에서 그의 수발을 들면서 정여립의 뜻을 함께 한 사람이다.그는 홍도의 오라비가 되어 그를 지켜 주게 되고 그녀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역사는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찾아내고 새롭게 쓰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동현이 알고 있는 역사는 그저 기록한 자가 쓴 역사일 뿐, 지나온 과거에 있었던 진실 그 자체는 아닐지도 모른다.

 

27살의 동현은 '정여립 사건' 과 관여한 영화를 만들려고 그에 대하여 조사를 한다. 그가 헬싱키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8시간 비행기 안, 그곳에서 우연하게 잠깐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를 비운 십 분 시간만에 '리 영' 이란 인물을 만나게 된다.정말 우연하게 만났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8시간 비행시간 동안 '리 영'아니 홍도라 불리는 여인과 동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숫자 '8'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모래시계와 같다고 느꼈다. 작가가 왜 숫자 '8'이라는 시간을 정해 놓았을까? 모래시계의 시간은 위 아래로 뒤집어도 똑같다. 홍도 또한 '영영'의 삶을 살고 있다. 그녀가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부여받고 지금까지 살아 온 사백서른세 살이라는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그녀는 이십대의 동현과 같은 탱탱함을 간직한 나이다. 나이를 믿을 수 없어 동현은 그녀의 나이를 믿지 못하고 이야기도 믿지 못하는데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여인 '홍도' 와 함께 정여립 사건부터 하여 사백여년이란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

 

소설에서 동현과 그의 이력은 저자의 이력이 이입된 것인 듯 하다. 그가 구상하는 인물은 '정여립' 이었지만 그를 파헤쳐 들어가다보니 그를 그리기 보다는 '홍도'라는 인물에 더 비중을 두게 되는데 그것이 소설에서도 똑같이 그려지며 정여립이 아닌 홍도의 이야기로 바뀐다. 그녀가 왜 홍도라고 불리게 되었는가? 정여립,죽도 할아버지는 그녀의 능력을 보고는 홍도라고 이름을 지어준다. 그녀는 어머니의 품을 느끼지 못하고 할머니 그늘 밑에서 살아 왔기에 아버지에 대한 정이 각별하다. 그런 그녀에게 죽도 할아버지 사건은 아버지는 물론이고 할머니까지 빼앗아 가게 만들었고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그녀가 관비나 그외 죽음에 몰리지 않은 것은 '자치기'라는 인물 때문이었는데 후에 그들은 각별한 부부의 정을 나누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짓밟히고 만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생을 가지게 되면서 현재의 날까지 살아오게 된다. 역사에 기록된 것은 '기축옥사' 정여립 사건에 휘말린 그 가족의 이야기다. 그녀는 어쩌면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빠져 버렸을지 모른다. 아니 그녀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 아무도 몰랐을지 모른다.

 

인간 수명은 유한했고 유한하고 앞으로도 또 유한할 것이다. 비록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백 년 이백 년 아니 천 년이라도 살듯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믿으려고 하지만 그 누구도 유한한 수명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했고 불과하고 또 불과할 것이다.그것은 단 한 건이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사실이며 만고불변하는 법칙이다. 

 

역사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지 못한 '삶'이 다시금 현대인들에 의해 부활하는 경우가 있다. 주목받지 못하던 이들의 삶이 소설로 드라마로 현대인들이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따라 그들의 삶은 아름답게 혹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김종서의 딸이 평민으로 살았을 것이라 하여 '공주의 남자'로 한참 드라마로 부활하여 주목을 받았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그 이야기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리진길의 딸인 리 영이 살았다면 이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하여 사벽여 년의 역사에서 굵직한 이야기들을 간추려 그 중심에 '홍도'를 놓아 본다. 임진왜란이나 천주교박해에 그녀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야기는 그녀가 영원한 삶을 선물 받으면서 그동안 누려보지 못한 '아버지'나 '자치기'의 환생을 찾 듯 그 시대의 사람들 눈빛 속에서 아버지나 자치기를 찾아 낸다.환생해다면 그런 인물이라고 보고 역사를 이야기 해 준다. 기구한 홍도의 삶은 역사 속에서 빛을 내는 듯 하면서도 그리움에 안주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삶을 이어가는 홍도의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슬픈 삶은 역사다.

 

역사란 그 시대 살아 있던 살았던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것인데 역사는 흔히 승자의 역사라고 해서 승자의 역사가 기록되지 패자의 역사가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승자의 시각에서 본 역사가 기록되기 때문에 역사란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여립,그 시대에는 역적이었지만 그는 지금 현재 어느 지역의 거리 이름으로 지정되듯 그는 '선구자' 였다.시대를 잘 못 타고났기에 그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다.역사로 보면 그는 패자이지만 그의 삶으로 보면 승자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그가 살아내지 못한 삶을 홍도라는 불멸의 생을 가진 여인이 대신 기록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그가 그려내지 못한 양인이나 평민이나 대동한 삶이 사백삼십삼년이 지난 날은 어떨까? 변했을까? 질곡의 역사를 살아내며 홍도가 살아내는 삶 속에서 모두가 평등한 삶이었을까? 임진왜란으로 왜로 끌려간 옹주와 그의 동생들은 역사에서 잊혀지듯 살아가야 했고 같은 동족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며 싸우기도 했다.역사란 무엇인가? 저자가 불멸의 삶을 주게 된 인물인 '홍도'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 기록된 삶이나 역사 보다는 기록되지 못한 삶과 역사에 귀 기울여 보라고 이야기 하는 듯 하다. 불멸의 삶으로 계속되는 이야기가 천명관의 <고래>라는 소설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8이라는 모래시계를 뒤집어 보와도 똑같은 시간 똑같은 그 무엇이지만 위와 아래는 결코 똑같지 않다.전의 역사와는 다르게 후의 역사는 어떻게 누가 해석하느냐에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홍도라는 인물도 어쩌면 저자는 비극보다는 좀더 해피엔딩으로 살려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역사를 부정적보다는 긍정적으로 해석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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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학교 푸른숲 어린이 문학 31
크리스티 조던 펜턴 외 지음, 김경희 옮김, 리즈 아미니 홈즈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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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이트의 슬픈 역사를 볼 수 있는 <두 개의 이름>을 읽고 나서인지 이 책은 그 와 같은 맥락의 글이고 같은 저자들이 쓴 책이다. 1940년대 서구인들이 캐나다 원주민 말살 정책으로 '원주민기숙학교'를 세워 이누이트 아이들을 강제로 학교로 데려가 강제적 교육을 시켰다. 원주민의 언어를 쓸 수 없고 원주민의 옷을 입을 수 없으며 그들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그야말로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당했던 것처럼 캐나다 원주민들도 그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외지인의 옷과 음식 언어를 사용하며 강제적으로 외지인이 되어야 했다. 기숙학교는 학생수에 따라 정보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와야 했고 원주민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만 생활 보조금이 지급되었으니 이런 악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모두가 희생양이나 마찬가지.

 

"외지 사람들은 너에게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

......

"너를 이용해서 자기들 배만 불릴 뿐이지. 너한테서 덫사냥 기술을 빼낸 다음, 덫에 걸린 짐승이나 집어 오라고 할걸. 게다가 외지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스스로 장만하는 법도 가르쳐 주지 않아.살코기 보관하는 법도, 생선 다듬는 법도! 파카나 카믹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지."

 

그 슬픈 시기를 견디며 살아 온 '올레마운'은 그녀의 며느리와 함께 자신의 지난 삶을 글로 쓴 것이 두 권의 책이다. <두 개의 이름>과 <나쁜 학교>.실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캐나다 원주민인 이누이트가 어떤 변화를 겪으며 살아 왔는지,외지 문명과 어떻게 싸우며 견디어 살아 왔는지 그의 생생한 경험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올레마운은 이누이트의 이름이 아닌 외지 이름인 '마거릿'으로 바뀌었는가 하면 더 나은 삶을 위해 글을 배우고 싶었고 책을 읽고 싶어 글을 배우고 싶어서 원주민기숙학교에 가길 원했다.아버지를 조르고 졸라서 기숙학교에 갔지만 글을 배우기 보다는 힘에 벅찬 노동을 해야만 했고 수녀들에게서 심한 굴육을 당하며 견디어 내야 했다. 교실 청소며 오물 비우기, 식당일에 방학 때에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해야만 했다.그녀가 견디어 낸 것은 이누이트의 강한 근성이 버티어 내게 했다.

 

"이 돌멩이 보이니? 이 돌멩이도 한때는 끝이 날카롭고 뾰족한 돌덩이였단다. 하지만 바닷물이 철썩철썩 때리고 또 때려서 모진 부분을 다 없애 버렸지. 이제는 그저 조그만 돌멩이에 지나지 않아. 이게 바로 외지 사람들이 학교에서 너에게 하려는 일이란다."

" 하지만 아빠, 바닷물이 돌멩이 자체를 바꾼 건 아니잖아요.게다가 전 돌멩이가 아니라 사람이에요.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요. 전 바닷가에 영원토록 처박혀 있지 않을거에요." 

 

 

그녀가 생각했던 학교가 아니라 이곳은 감옥과 같고 그들의 노동을 착취해가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누이트의 언어와 혼이 말살되는 곳이기도 했다. 뼈속까지 이누이트인 그들을 외지의 수녀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꺼칠한 교복과 스타킹에 운동화를 신겨서 외양은 서양인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들의 속까지는 바꿀 수 없었다. 그들의 언어가 아닌 영어를 쓰게 한 것은 어찌보면 강압에 의한 것이라 더 자신의 것을 그리워하고 뼈속까지 이누이트이고 야생에서 살아가는 법을 뱃속부터 익혀 온 그들에게 학교교육으로 이누이트에서 서양인으로 만든다는 것은 두 문화의 충돌로 인한 기형아만 만들어 낼 뿐인데 이누이트의 강인함으로 잘 버티어 낸 올레마운은 동생들까지 잘 거두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를 따라 간 것은 '호기심' 이었다면 올레마운이 원주민기숙학교에 가게 된 것도 새로운 언어와 문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수녀들에게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강압에 의한 교육및 '까마귀수녀'의 눈에 나서 늘 다른 친구들보다 놀림감처럼 당하게 되는 올레마운이 호기심에 새로운 문화를 배운 다는 것은 이누이트로 회귀하는 길을 더 빨리 깊게 가르친 격이 되었다. 회유보다는 강압이 어쩌면 반발을 불러오지 않았나 싶으면서 어떻게 뼈속까지 이누이트인 그들을 새로운 문화로 바꾸려 하고 그들의 터전을 빼앗으려 했는지.개발이란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고 그곳에 많은 천연자원이 있다고 자원에 욕심을 부려 원래 그곳의 주인을 내 쫓으려 한다는 것은 잘못된 개발이라고 본다. 외지인들이 이누이트 아이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교육을 했다면 부작용은 덜했을터인데 한 명 한 명이 돈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교육이라기 보다는 노동력착취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슬픈 역사.

 

그렇다고 그런 슬픈 역사가 그 시대에만 일어나고 현재는 일어나지 않을까?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은 더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점점 그들의 터전은 좁아지고 외지의 문명은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 그들의 생명줄을 옭아 매고 있다. 이누이트의 삶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북극곰이 사라질 시간도 얼마남지 않았다는데 이누이트의 삶은 그렇다면 얼마나 남은 것일까? 답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들의 문명과 역사가 그야말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시간 문제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환경파괴로 인해 이누이트의 삶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다큐에서 보았는데 강압적으로 우리가 그들의 삶을 빼앗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이누이트도 우리도 함께 공존하는 삶을 살려면 지금 있는 환경을 지키고 보존하며 살아야지 난개발로 지구가 몸살을 앓게 해서는 안된다. 아이들과 읽는다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이고 아이들보다도 어른들이 더 읽어봐야 할 책인 듯 하다. 비단 이런 문제는 아이들에게 읽힐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이다. 우리의 양심과 욕심에 한번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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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이름 푸른숲 어린이 문학 32
크리스티 조던 펜턴.마거릿 포키악 펜턴 지음, 김경희 옮김, 리즈 아미니 홈즈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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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만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 가는 사람들의 삶과 역사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누이트 뿐만이 아니라 아만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그외 오지에서 자신들만의 방식과 역사 문화 전통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점점 현대 문명이라는 침범아래 점점 그 터전을 잃어가기도 하지만 현대 문명에 물들어 가 더이상 그들만의 고유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다. 그렇다고 그들이 현대 문명에 발을 들여 놓고 잘 적응해 가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의 가진 고유한 삶의 방식과 현대 문명 사이에서 방황하듯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장면을 많이 보기도 했지만 이누이트족의 이중적인 삶을 다룬 다큐를 본 기억이 있는데 그 내용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누이트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켜 나가고 싶지만 환경이 또한 예전과 같지 않다. 점점 환경은 파괴되고 그들이 살아갈 터전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현대 문명인들이 그들의 삶으로 침범하여 두 문화가 충돌하기도 하는 현장의 아픔을 보고는 먹먹하던 순간이 '올레마운 포키악' 의 삶의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땅의 주인이며 그곳에 역사를 두고 있는 이들을 내쫓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원주민 기숙학교를 짓기도 하고 상점을 짓기도 하고 원주민의 삶을 흔들어 놓은 외지인들, 그곳에 올레마운은 2년여 동안 부모와 동생들과 떨어져 이누이트 언어가 아니고 생황방식이 아닌 영어와 수녀들에 노동을 강요당하고 완전히 원주민이 아닌 문명인처럼 바꾸어 나가기도 했지만 이년이란 세월동안 몸과 마음은 이누이트족이 아니라 외지인이 다 되어버렸고 적응을 해 버렸다. 그들의 언어를 쓰지 못하게 강요당하였기에 이누이트들의 말을 다 잊었고 음식 또한 그들의 부드러운 음식에 길들여졌는가 하면 옷과 신발 또한 거칠고 추위를 막아주는 옷과 신발이 아닌 스타킹과 캔버스화에 어느새 길들여져서 그녀가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 왔지만 엄마도 그녀의 동생들도 낯설어 하는가 하면 같은 동네 사람들도 낯설어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런 마음을 아빠만은 알아 주면서 그녀를 다독인다. 그들이 선택한 삶이 아니기도 하지만 아빠는 그들의 삶이 침범 당하는 가운데에 적응해 살면서도 자신들의 고유의 삶과 문화를 잊지 않게 올레마운에게 가르친다. 그들은 뼈 속 깊숙히 '이누이트' 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아무리 겉치레로 외지인의 언어와 음식 옷을 걸친다고 이누이트가 외지인으로 변하지는 않다는 것를 딸에게 가르친다.

 

올레마운에게 2년이란 기숙학교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친구도 빼앗아 갔지만 이누이트족에게도 섞이지 못하고 겉돌게 만드는 그야말로 이중적인 아픔을 가져다 준다. 그렇다고 깊숙히 자리하고 들어오는 외지인의 삶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 또한 능사가 아니란 것,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해야 상점에서도 피해를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니 그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살아 남기 위해서 선택이란 어쩔 수 없다. 이누이트는 천막을 치고 이동하는 삶을 하지만 올레마운의 아빠는 변화에 적응하듯 천막과 통나무로 통나무 집을 짓고 정착의 삶을 선택한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도와 옆에서 힘을 보태며 다시금 이누이트 삶을 다시금 불러 일으키고 언어를 다시 배우고 다시 이누이트로 돌아 온 올레마운,이제는 2여년전의 기숙학교에서 돌아 왔을 때의 나약한 올레마운이 아니다.아빠가 선물해 준 올레마운의 개인 개썰매도 자신 있게 끌고 아빠의 일을 돕기도 하는 그야말로 당당하고 강인한 이누이트로 우뚝 성장을 한 가운데 다시금 정부의 뜻에 따라 동생들과 함께 원주민 기숙학교에 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젠 강인해졌기에 동생들도 책임질 수 있는 여성이 된 것이다.

 

이누이트는 그야말로 거친 자연에서 살아가는 야생의 삶에서 현대 문명에 갇혀 부드러운 것에 하루아침에 익숙해지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나이가 어려도 그들은 뼈 속 깊이 이누이트다. 그들의 삶을 바꾸고 그들의 땅을 빼앗기 위한 기숙학교 생활은 부모도 힘들게 하지만 본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큐에서도 보았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 이었다. 야생에서의 그들의 삶이 도시의 각박한 삶에 깃들여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21세기및 그 이후의 삶을 고집한다는 것은 글쎄 언제까지 이어나갈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그들의 삶을 너무 침범하는 것 또한 문제라고 생각을 한다. 이 이야기는 거짓이 아닌 실제로 일어난 그들의 슬픈 역사를 조명한 이야기 이기에 더욱 맘이 아프다. 뒷이야기와 [올레마운의 사진첩] 에는 이야기의 맞는 사진들이 있다. 올레마운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외지의 문화가 그들의 삶 깊숙히 침투하여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여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 이야기들이 있어 참고로 본다면 더 이해가 빠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의 일제 강점기를 생각했다. 우리의 말과 글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시간,그 잔재는 아직도 우리 삶에 뿌리를 깊숙히 내리고 있다. 이누이트의 삶과 역사 또한 아픔을 겪고 있는데 현대인의 욕심만 내새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역사를 존중하고 지킬 것은 지켜 나가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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